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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양오씨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오대댁(병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황남대총전(정식명칭: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이 9월 7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사진: 포스터
신문에 나는 전시회 관련기사는 으레 주례사 내지 맛집소개 수준이다.
뭐든지 다 좋고, 다 맛있다고 한다.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해설에
약간의 발림을 토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번 황남대총전에 대한 한겨레 신문기사는 조금 달랐다.
…발굴 뒤 첫 종합전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시의 실체는 평범한 신라 황금유물전에 더 가깝다…. 중략…
… 고분의 ‘스토리텔링’에 충실하지 않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중략
….무덤 구조를 한눈에 보여주는 축소 미니어처 모형도 없고
핵심 출토품인 금관과 가슴 장식 등도 거대 구조물 뒤편에 전시되어
한눈에 유적의 독특한 얼개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중략
… 다른 지역 연관 유물 등의 소개·전시가 빈약한 모습도 눈에 걸린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의 한 관계자는,
“올 하반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의 큰 국제 행사를 앞두고
한정된 인력으로 급하게 전시를 기획하다 보니, 학계 전문가들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털어놨다….
(한겨레신문 9월 7일자에서. 해당기사 전문은 아래 사이트 참조)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38783.html
오랜만에 해설 같은 해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이런 까칠한 견해가 있다 해서
에이 하고 관람을 지레 포기할 것까지는 없다.
경주사람들은 이런 건 꼭 서울에서 먼저 열린다고 부러워하며
KTX 타고 올라오기도 하는 모양인데, 서울’특별시’ 사는 끝발로,
전철 타고 잠깐 가면,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을 왜 마다할 것인가?
비판의 눈으로 보면 한정 없지만, 후진국 예컨대 내가 가 본
방글라데시나 베트남에 비하면, 우리나라 박물관 전시는 수준급이다.
어떻게 그런 나라하고 비교하느냐 할 테지만, 우리가 올챙이 벗어난 것이
몇 해 되나? 사람이 가끔 아래를 보고 살 필요도 있다.
돈도 내지 않고 늠름하게 박물관 로비에 걸어 들어가니
사진전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황남대총도 있어 디카 꺼내 찍었다.
사진: 황남동 고분군. 가운데 큰 쌍분이 황남대총(皇南大塚)이다.
이런 수준의 작품은 프로 작가가 장소를 골라 공들여 찍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신문에 실린 황남대총 사진은 아마도 국박에서 제공했을 텐데 너무 작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로비 사진전에는 다른 경주 왕릉 사진도 있는데 다 볼 만하다.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 영상자료실에서 발굴 당시를 찍은 영화부터 보았다.
1975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것인데, 국립영화제작소라니 대한늬우스가
생각나서 (서로 다른 기관인지는 잘 모름) 이미지가 별로지만,
영화는 볼만하다. (꼭 먼저 보기를 권한다)
발굴이 1974년이니 그때 찍은 영화인데, 발굴과정을 일일이 담았다.
그게 뭐 대수냐 할 지 모르지만, 황남대총과 거의 같은 시기인
중국 장사 마왕퇴 대후묘 발굴이나, 60년대 초반 명십삼릉(明十三陵) 중
정릉(靖陵-명 신종(神宗)의 능) 발굴에 얽힌 이야기를 르포 식으로 쓴
웨이난(岳南)의 책을 읽은 적 있다.
당시 중국이 가난하고 또 문화대혁명 와중이라, 작업은 발굴이 아니라
거의 도굴 수준이었다. 기껏 발굴한 귀중한 신종(神宗)의 시신과 관을
불 태워 버리고, 대후묘 발굴에 필요하다고 기껏 삽 몇 자루 청구하면
그걸 또 깎아 버린다. 발굴 전 과정을 촬영하겠다고 필름을 요청하면
뭐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며 사정없이 삭감해 버린다.
당시 중국 형편에 필름 값이 만만치 않았겠지만, 대후묘의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생각하면 그걸 어떻게 아까워 할 수 있었는지?
사람이 무식하면 별 일을 다 저지르는 것이다.
1974년 황남대총 발굴 당시 우리가 중국에 비해 썩 나을 것이 뭐 있었겠나?
이번 우리 국립영화제작소 영화를 보니 필름 아끼지 않고 찍은 모양으로,
현장에 큰 덧집을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일년 간 작업하는 장면이 다 나온다.
우리가 당시에도 개념이 있던 축이었던 모양이다.
그 직전 있었던 무령왕릉 발굴이 실은 도굴(盜掘)수준이었다는 점에서
교훈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중국 정릉과 대후묘 때도 기막힌 일이 많았지만,
무령왕릉 때도 피스톨 박(박종규)인지 경호원인지가, 발굴단장 또는 누구에게
권총을 빼들며 금관 빨리 대통령한테 들고 가자고 소리소리 질렀다던가?
사진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구슬 가슴꾸미개다. 일일이 기록해 가며
찍어 두지 않고, 주어 담기만 했다면 재현(再現)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런 상태를 봐야 원래 가슴꾸미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관 모형
전시실에 들어가니 중앙에 큰 널을 놔 두었다.
여기에 관해서 한겨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시장 들머리에서 관객을 맞는, 황남대총 내부의 거대한 묘실 얼개를
재현한 대형 구조물은 실패작에 가깝다. 대형 나무 뼈대 안에 덧널 속
부장품 창고와 주검을 안치했던 주곽을 원형 크기로 재현했지만,
그 내용물은 무덤 내부를 찍은 흐릿한 패널 사진으로 대부분 채워져
현장감이 떨어진다….
맞는 말씀이다. 맞고요… 그런데 거대한 묘실 얼개 모형은 아니고,
관(널)을 둘러 싼 곽(槨)도 아니고, 널 모형만 만들어 놓았다.
내부 묘실과 그 조성과정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동영상을 돌리고 있다.
중국도 요즘 저런 것은 아주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는데 너무 약(弱)하다.
사진: 리플렛에 나온 무덤 조성도. 어린이용이라 설명이 아주 친절하다.
다만 이 전시가 연말이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가는데
지금보다 훨씬 많은 출토품을 추가해 황남대총의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제대로 보여주겠 노라고 벼룬다니 경주 사람들은 (서울에서 먼저 한다고
섭섭해 하지 말고) 한 번 기대해 봄직하다.
황금(黃金)
머니 머니 해도 머니(money)라는 노래방 메들리 가락처럼
우리 같은 잡배(雜輩)는 누렇게 번쩍이는 황금에 그저 정신이 팔린다.
나 같은 자가 제법 있는지 포스터에도 황금의 나라라고 써 놓았고,
신라의 투탄카멘이니 하는 표현도 보인다.
신라의 투탄카멘 같은 소리 대신 이집트의 황남대총이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황금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금관(金冠)이다.
사진: 황남대총 북분(왕비묘로 추정)에서 나온 금관
가운데 출(出)자 형 금판과 양 옆 사슴 뿔 모양 금판에
곡옥(曲玉: 일본말 망아다마)과 금조각이 주렁주렁하고
테두리에 돌아가며 금 귀거리 모양을 달아 놓았고
아래로 역시 금줄을 늘어 뜨려 놓았다.
왕비묘로 추정하는 북분에 비해, 왕의 묘-남분에서 나온 관은
금이 아니라 금동관이고, 볼품도 떨어진다.
사진: 금동관-황남대총 남분(왕의 묘)
왜 왕의 관이 왕비관보다 훨씬 못할까?
이점이 바로 학자들로 하여금 골머리를 싸매게 하는 부분이다.
금신발과 금등자와 금안장등 온통 금투성이다.
사진: 금동신발(복원품)
사진: 금안장
안장 가운데 채워 넣은 것은 비단벌레다.
비단벌레만 평생 연구한 일본인이 없었다면 복원품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인들 파고 드는 데는 못 당한다.
서역에서 온 팔찌도 있다.
굳이 해설을 듣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산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하다.
사진: 반지 황남대총 출토. 참 많이도 꼈다.
사진: 금목걸이
고깔
내가 또 흥미있게 본 것은 고깔 모양 모자에 들어가는 관식(冠飾)이다.
사진: 남분(南墳-왕의 묘)에서 관식(冠飾)
모자의 장식인데 천으로 만든 모자는 사라졌는지, 장식만 나왔다.
사진: 고깔 관 부위명칭
위 그림에서 보듯 우리 조상들은 좀 별나게 생긴 모자를 썼던 듯 하다.
사진: (측천무후의 아들) 장회태자묘 벽화.
가운데 빨간 모자를 쓴 인물을 신라 사신으로 추정한다.
사진: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압 출토 벽화. 흐릿한 원본에 가필한 것이다.
아랫 줄 오른 쪽 끝-새털을 꽂은 모자 쓴 인물을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한다.
나이 먹으면 모자에 관심이 생긴다.
쓰면 겨울에 따뜻해 좋고, 성기거나 센 머리를 가릴 수 있다.
싸구려 몇 천원 짜리도 좋다고 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돈 좀 들이게 된다.
저런 삼국시대 고깔을 누가 만들면, 사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텐데.
음식
해가 갈수록 먹는 게 결국 남는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이번 전시회에서도 음식과 수저에 관심이 갔다.
사진은 황남대총에서 나온 뼈다. 저승 길 밥상으로 추정한다.
항아리 3개에서 소, 말, 바다사자, 닭, 꿩, 오리, 참돔, 졸복, 다랑어,
농어, 상어, 조기, 전복, 오분자기, 소라, 눈알고둥, 밤고둥, 논우렁이,
홍합, 재첩, 백합, 거북이 뼈 등의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다행히 사람 뼈는 그 항아리에는 없었다. (관(棺)에서야 나왔고)
거 뭐 그런 말을 다 하느냐 할 테지만, 중국 광주 남월왕 묘에서
아무래도 식인(食人)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벽화의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순장(殉葬)의 흔적은 나왔다.
산 채가 아니라 죽은(죽인) 다음 묻었기를 바란다.
개와 돼지가 없는 것은 먹지 않았다기 보다 제사에 쓰지 않은 것 아닐까?
그럼 사람은? 사람을 먹었다면 제사에 반드시 썼을 테니 그건 아닐 것이다.
떡 종류는 흔적이 남을 수가 없었을 테고.
그릇과 수저
사진은 황남대총 출토 금은 그릇이다.
그런데 정말 금그릇에 담아 먹었을까?
위세품(威勢品-prestige good)일 수도 있겠다.
사진은 황남대총 출토 은국자와 은숟가락이다.
숟가락이라고 라벨 붙여 놓은 것도 실은 떠 먹는 용도가 아닌 것 같다.
동양 아니 전 세계적으로 숟가락이 발달한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할 것이다.
중국집에서 국물 떠 먹으라고 나오는 도자기 숟가락은 사실 국자에 가깝다.
신라 때는 어땠을까?
황남대총 유물로 보면 오늘 날 같이 숟가락을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젓가락이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산상왕 (재위 197-227) 이야기에 밤에 형수-고국천왕비 우씨
(나중에 자신의 비 즉 산상왕비가 되는 여자)가 집으로 찾아 오자,
고기를 손수 칼로 저며가며 시중 들다가 손가락을 베자,
그걸 형수가 치료해 주는 대목이 나온다.
고구려 때는 고기를 요즘 서양 식으로 칼로 베서 먹은 모양이다.
그럼 자른 고기는?
포크 아니면 젓가락이 있어야 할 텐데, 출토 유물에는 없다.
대체 뭘로 집어 먹었을까?
이상이고,
황남대총에 관한 개괄적 설명은 검색하기 무섭게 많이 나오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보탤 일은 없는 것 같고, 몇 마디만 더 쓰고 마친다.
누가 봐도 왕릉인데 능(陵) 대신 총(塚)이라고 하는 것은
묻힌 사람이 누군인지 특정(特定-specify)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 능인지 모르지만 무덤은 확실하니 일단 무덤-총(塚)이라고 할 수 밖에.
삼국시대 왕릉 중 피장자(被葬者)가 확실한 것은 백제 사마왕(百濟斯麻王)
이라고 새겨진 묘지명이 나온 무령왕릉 하나 뿐이다.
경주 일대에 왕릉 내지 왕릉급 고분이 많지만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무열왕릉, 선덕여왕릉, 흥덕왕릉 이 셋은 그래도 믿어도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정도다.
황남대총 피장자를 둘러싸고 설이 셋이 있으니, 내물(奈勿 356-402),
실성(實聖 402-417),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17-458) 설(說)이다.
신라 왕호는 처음 거서간(居西干: 혁거세), 차차웅(次次雄 :남해왕)이었다.
3대 유리왕 때부터 이사금(尼師今)으로 불러 그후 죽 내려간다.
(거서간은 박혁거세 단 하나, 차차웅은 남해왕뿐이다.)
17대 내물왕 때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어, 21대 소지마립간까지 가다가
22대 지도로 마립간(智證王)때 중국식 왕호를 채택한다.
따라서 마립간은 내물, 실성, 눌지, 자비, 소지, 지증의 여섯 임금인데
황남대총 주인은 그 중 처음 셋-내물, 실성, 눌지 마립간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전시회 도록 말미에 세가지 학설 각각에 대하여 논문이 실려 있다.
논문이 있으나, 이말 들어보면 이말, 저 말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실성왕 설이 기중 마음에 들지만, 아니라면 또 어쩌겠는가?
첫댓글 황남대총에 대해서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와~ 정말 신기하네요~ 직접 가서 본듯한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