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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특강 6강-1 (전통불교문화원)
13-3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
13-4 通貫十方(통관시방).
13-5 本來無事(본래무사).
임제스님의 가르침 37쪽
13-3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
問(문), 如何是佛魔(여하시불마)오?
師云(사운), 儞一念心疑處(이일념심의처)가 是箇魔(시개마)니
儞若達得萬法無生(이약달득만법무생)하면
心如幻化(심여환화)하야 更無一塵一法(갱무일진일법)하야
處處淸淨是佛(처처청청시불)이니라
然佛與魔(연불여마)는 是染淨二境(시염정이경)이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하며
無古無今(무고무금)하야 得者便得(득자변득)하야
不歷時節(불역시절)이요. 無修無證(무수무증)하며
無得無失(무득무실)하야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하니 設有一法過此者(설유일법과차자)라도
我說如夢如化(아설여몽여화)하노니 山僧所說(산승소설)이
皆是(개시)니라
問(문), 如何是佛魔(여하시불마)오? 무엇이 부처인 마군이인가?
그대로 정직하게 해석하면 “부처 마군이” 이런 뜻입니다.
“부처와 마군이” 이렇게도 볼 수가 있는데요.
師云(사운), 儞一念心疑處(이일념심의처)가, 그대의 한 생각 그 마음 의심하는 곳. 是箇魔(시개마)니, 이것이 곧 마군이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서ㆍ당신의 사상에 대해서, 한 생각이라도 의심을 내는 것. 이것이 마군이다.
儞若達得萬法無生(이약달득만법무생)하면,
그대가 만약 萬法無生이라고 하는 이치를 통달할 것 같으면
心如幻化(심여환화)하야 마음이 환화와 같아서
更無一塵一法(갱무일진일법)하야, 다시는 먼지하나ㆍ법하나 없어서
處處淸淨是佛(처처청청시불)이니라.
곳곳에서 淸淨. 텅~ 빈 것이 이것이 부처다.
然佛與魔(연불여마)는, 그러나 부처와 마군이는
是染淨二境(시염정이경)이라. 부처 = 淨. 마군이 = 染. 染淨. 두 가지 경계다.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산승의 見處에 의지하자면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하야,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어서, 임제스님의 견해 에는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無古無今(무고무금)이야, 옛도 없고 이제도 없어,
得者便得(득자변득)하야, 이 得者便得은 말하자면 見聞覺知(견문각지).
그것이 곧 이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사실. 그것을 얻은즉 곧 얻어서, 이렇게 표현했는데요. 보면 보는 대로ㆍ들으면 듣는 대로, 이런 말이지요.
不歷時節(불역시절)이요, 시절을 지나지 아니함이요. 그러니까 세월이 지나서 어떤 경지에 오른다. 이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절을 지내지 아니한다.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이 無修無證(무수무증)하며, 수행도 없고ㆍ수행을 한 결과로써 증득함도 없다. 無得無失(무득무실)하야, 얻음도 없고ㆍ잃음도 없다. 본래 이미 갖추어진 그 본래 불. 본래부처라고 하는 그 자리를 우리가 이해하자고 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아무리 어떤 많은 세월을 경과 하면서 피나는 고행을 설사 하고ㆍ참선을 하고 뭘 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본래 그 자리, 닦을 것도 없고ㆍ증득할 것도 없고ㆍ얻을 것도 없고ㆍ잃을 것도 없는 본래 갖추어진 그 자리 이해하자고 하는 것이지, 그것 이외에는 달리 다른 것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行行本處요 至至發處(행행본처지지발처)라.
수행하고ㆍ수행한다 하더라도 본래 그 자리요, 이르고ㆍ이른다 하더라도 본래 그 자리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행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본래 그 자리에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행한 것은 따지고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궁극에 가서는 ‘아! 이것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했구나!’ 이것 알자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 어떻게 보면 상당히 모순이지요.
行行本處요 至至發處라. 그런 말이지요. 아무리 행하고 행해도 본래의 곳이고, 어디까지 이르러 가고 이르러갔다손 치더라도 역시 그것은 출발한 그 장소더라. 수많은 세월 닦고 쌓고 해서 어디까지 이르러 갔는데, 바로 출발한 그 장소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行行本處 至至發處.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주, 그 말 한 마디면 뭔가 안목을 열어줄 수 있는 그런 말이 됩니다.
여기 와서 不歷時節ㆍ無修無證ㆍ無得無失.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이라. 一切時中에 다시는 별다른 법이 없음이라.
그래서 이런 법문을 듣고 가만히 곰곰이 따져보면 사실 그래요.
누가 어디 가서 얼마나 어떻게 했다ㆍ얻었다ㆍ수행을 했다 하는 것, 결과적으로 사실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대로입니다. 그대로인 것이지요.
設有一法過此者(설유일법과차자)라도, 설사 어떤 한 법이 있어서 이것을 지나간다 하더라도, 見聞覺知 하는 것. 본래 그 자리를 지나가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我說如夢ㆍ如化(아설여몽여화)하노라. 나는 그것을 말하기를 꿈과 같은 것이고ㆍ환화와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하겠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고 하는 이 사실을 지나가는 것이 있다고 누가 말하더라도 그것은 꿈과 같은 것이고, 헛된 것이다. 내가 당당하게 이렇게 말 할 수가 있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山僧所說(산승소설)이 皆是(개시)니라.
山僧이 말 할 것은ㆍ산승이 말 할 것은 모두 이것이다. 바로 이 주장이다. 이것이 임제록의 종지이기도 하고ㆍ임제스님의 근본 사상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여기 아주 확연히 명확하게 잘 드러나 있지요? 이런 것이 기존의 불교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요. 이해가 잘 안 되고, 그러면 불교가 뭘 하자는 것이냐? 그래서 어디 의지 처도 없고, 붕~ 떠버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대개 받습니다. 뭔가 닦을 것이 있고ㆍ참회할 것이 있고ㆍ잘못 된 것을 지적해서 그것을 고쳐야 되고, 수정하고ㆍ보완하고ㆍ아주 피나는 노력을 하고ㆍ그래서 일종식도 하고ㆍ3천배도 하고ㆍ참회도 그저 끊임없이 하고, 뭘 이렇게 하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뭔가 되는 것 같고, 뭔가 수행하는 것 같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우리는 다 갖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많이 가르치고 있고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서부터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우리도 은근히 그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섭섭할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은 해도 그만이고ㆍ아니해도 그만인 겁니다. 궁극적 입장에서입니다. 이것은 하근기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선불교의 안목이란 하근기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정말 궁극적 차원에서 볼 때ㆍ불교의 최 궁극적 차원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은 하나마나한 일이고요. 정말 우리가 눈을 떠야할 그 자리는 본래로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 하나도 건들 것도 없고요. 또 손상 될 것도 없고요. 그래서 不垢不淨(불구부정). 더러울 것도 없고 깨끗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결국은 以無所得(이무소득). 얻을 것이 없는 그 자리. 본래로 따로 달리 얻을 것이 없는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以無所得이라는 것이요. 이미 있는 것 이외에 달리 얻을 것이 있는 것 아니다.
밖에서 만약에 무엇을, 수행을 통해서 큰 것을 얻었다 하면 그것은, 결국은 또 나가게 됩니다. 올라간 것은 내려오게 되어 있고, 얻은 것은 내 손에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상 이치가 그렇듯이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본래 있는 것이라야 돼요. 본래 있는 것이라야 그것이 완전한 것이고, 그것이 영원한 것이지, 없던 것을 어디서 얻어왔다 그러면 이것은 언젠가 나갑니다. 언젠가 나간다고요. 그래서 이 선불교의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그것이 가장 존귀한 것이고, 가장 보물이고요.
그것은 정말 不生不滅(불생불멸)이고 그렇지, 그 외의 어떤 것도 얻은 것은 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닦은 것은 그 다음에 더 닦지 아니하면 없어집니다. 쇠퇴해져 버립니다.
퇴석 된다고요. 그런 수행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이 선불교에서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아주 고준한 안목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이것이 우리 조계종의, 선종을 표방한 조계종에 있어서는 말하자면 가장 높은 안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山僧所說은 皆是다 그랬어요. 다 이것이다. 아주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無修無證이라고 하는 것. 닦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다. 사실 그렇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쓰지만 닳지도 아니하고ㆍ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고ㆍ뺏어갈 수도 없고요.
13-4 通貫十方(통관시방)
道流(도류)야,
卽今目前孤明歷歷地聽者(즉금목전고명역역지청자)가
此人處處不滯(차인처처불체)하고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三界自在(삼계자재)하야 入一切境差別(입일체경차별)호되
不能回換(불능회환)하나니 一刹那間(일찰라간)에
透入法界(투입법계)하야 逢佛說佛(봉불설불)하며
逢祖說祖(봉조설조)하며 逢羅漢說羅漢(봉나한설나한)하며
逢餓鬼說餓鬼(봉아귀설아귀)하야 向一切處(향일체처)하야
游履國土(유리국토)하야 敎化衆生(교화중생)호되
未曾離一念(미증리일념)하고 隨處淸淨(수처청정)하야
光透十方(광투시방)하야 萬法一如(만법일여)니라
道流(도류)야, 卽今目前에서 孤明한 歷歷地聽者(즉금목전고명역역지청자). 孤明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많이 설명 했지요? 孤明 = 이것만이 밝다. 이것만이 우주에 꽉 찼다 이겁니다. 우리가 보고ㆍ듣고ㆍ느끼고ㆍ알고하는 이 사실ㆍ이 능력이 이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孤明이고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目前이라고 했고요. 歷歷해.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입니다ㆍ너무나도 분명한 사실. 그 너무나도 분명하게 지금 이야기소리를 듣고 있는 것 = 聽者 = 듣고 있는 그 주인공 = 그 당사자.
이것은 此人處處不滯(차인처처불체)하고, 이사람은,
이사람 = 결국 無位眞人(무위진인)이지요. 그것은 處處에 不滯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막히지 아니해요.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온 시방에 펑 뚫렸어요. 예를 들어서 아무리 죄를 지어서 어디 갇혀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가둘 수가 없습니다. 몸은 가둘 수가 있지만, 그것은 가둘 수가 없습니다. 온 시방을 다 돌아다닙니다. 三界自在(삼계자재)하야, 욕계ㆍ색계ㆍ무색계를 자유자재합니다. 入一切境差別(입일체경차별)호되, 일체 경계의 차별에 들어가되
不能回換(불능회환)이라. 우리는 어떤 경계의 차별을 사실은 일상에서 다 접하고 삽니다. 만나고 살지만 그것과 궁극적으로 교환이 안 됩니다.
回換이라는 것은 교환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그것과 교환이 안 된다고요.
바꾸어지지 않아요. 나는 오로지 나로써 있을 뿐입니다. 不能回換하나니,
一刹那間(일찰라간)에 透入法界(투입법계)하야, 법계에 들어가서
逢佛說佛(봉불설불)하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이야기하고
逢祖說祖(봉조설조)하며,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이야기하고
逢羅漢說羅漢(봉나한설나한)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이야기하며
逢餓鬼說餓鬼(봉아귀설아귀)하야,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이야기해서
向一切處(향일체처)하야, 일체 처를 향해서
游履國土(유리국토)하야, 국토에 흘러 다녀,
이것을 逢佛說佛ㆍ逢祖說祖ㆍ逢羅漢說羅漢.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그렇지 우리의 하루의 삶도 사실은 그렇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삽니다.
식사할 때 식사하고ㆍ강의 들을 때 강의 듣고ㆍ낮잠 잘 때 낮잠 자고ㆍ산책할 때 산책하고ㆍ잡담하면 잡담하고, 그것이지요. 逢佛說佛이 꼭 어떤 특이한 어떤 부처의 형상이 나타나야 부처를 이야기한다는 그런 뜻은 아니지요. 그런 식으로 임제스님께서 말할 까닭이 없지요.
그래서 일체 처를 향해서 游履國土(유리국토)하야, 敎化衆生(교화중생)호되, 중생을 교화하되 未曾離一念(미증리일념)하고, 일찍이 한 생각도 떠나지 아니하고 隨處淸淨(수처청정)하야, 곳을 따라서 淸淨해서, 시원하게 툭~ 터져서 光透十方(광투시방)하야, 그 빛은 시방을 꿰뚫고 있어요.
그래서 萬法一如(만법일여)다. 오직 그 한 물건. 그야말로 滿目靑山(만목청산). 온 눈에 가득한, 滿目靑山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마음, 말하자면 나의 마음이 온 우주에 확대된 그런 상태. 여기서 말하는 游履國土하고 일체 처를 향해서 흘러다니는 그런 마음의 자유자재한 그 작용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3-5 本來無事(본래무사)
道流(도류)야 大丈夫兒(대장부아)가
今日方知本來無事(금일방지본래무사)로다
祇爲儞信不及(지위이신불급)일새 念念馳求(염념치구)하야
捨頭覓頭(사두멱두)하야 自不能歇(자불능헐)하나니라
如圓頓菩薩(여원돈보살)이 入法界現身(입법계현신)하야
向淨土中(향정토중)하야 厭凡忻聖(염범흔성)이라
如此之流(여차지류)는 取捨未忘(취사미망)하고
染淨心在(염정심재)니 如禪宗見解(여선종견해)는
又且不然(우차불연)하야 直是現今(직시현금)이요
更無時節(갱무시절)이니라
山僧說處(산승설처)는 皆是一期藥病相治(개시일기약병상치)요
總無實法(총무실법)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是眞出家(시진출가)라 日消萬兩黃金(일소만양황금)하나니라
道流(도류)야 大丈夫兒(대장부아)가 今日方知本來無事(금일방지본래무사)로다. 오늘에야 바야흐로 본래 일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이 無修無證이니까요. 닦을 것도 없고ㆍ증득할 것도 없다고 했기 때문에 本來無事입니다. 사실은 본래 일이 없는 겁니다ㆍ본래 일이 없는 것이라요. 그런데 선가에서 他避不得處(타피부득처)라.
우리가 일상사를 살면서 부득이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일. 이것은 누구나, 수행자든ㆍ수행자가 아니든ㆍ무슨 도둑놈이든 할 것 없이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요. 자는 일ㆍ먹는 일ㆍ옷 입는 일ㆍ屙屎放尿(아시방뇨), 예를 들어서 소변보고 대변보고 하는 그런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그것은 다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그렇게 하지요. 그것은 일로 생각을 안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本來無事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무슨 부처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것을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方知本來無事.
본래 無事하다고 하는 사실을 바야흐로 알았도다. 그런데
祇爲儞信不及(지위이신불급)일세, 다만 그대들이 믿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무결하고, 이미 다 되어 있는데 다만 그대들이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일세. 그래서 念念馳求(염념치구)하야, 순간, 순간 쫓아다니면서
捨頭覓頭(사두멱두)라. 이미 자기 머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머리는 제쳐두고, 새로운 머리를 찾는다. 捨頭覓頭라. 머리를 버려놓고 머리를 찾는다. 앞에서 있었던 능엄경의 연야달다 라고 하는 사람.(4강-2) 자기 머리 제쳐놓고 따로 머리 찾는 겁니다. 공연히 잃어버렸다고 하고...
그래서 自不能歇(자불능헐)하나니, 스스로 능히 쉬지를 못하나니, 그 찾는 일ㆍ찾는 일, 참~~ 열심히 수행한다고 하는 사람들. 이런 데서 한 생각 돌이켜야 되는 것이지요. 그 전에 제가 송광사 선방에 있을 때 같이 수행하던 스님이 한분 있었는데, 하~~ 열심히 화두 들고, 도량을 거닐면서 잠도 안자고 화두 들고 하는데, 망상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관음전에 와가지고 쿵ㆍ쿵 머리를 찧는 겁니다. 문수전에 있는 사람들은 관음전을 맡아서 죽비 삼배정도는 해야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끔 관음전을 한 번씩 돌아보는데, 한 낮에 제가 졸음을 쫓기 위해서 관음전 쪽으로 가서 한 바퀴 도는데 법당에서 쿵ㆍ쿵 소리가 나는 겁니다. 제가 가만히 문을 열고 보니까 그 수좌가 머리를 법당 마루에다 쾅ㆍ쾅 찧고 있어요. 그 사람 지금도 가끔 만납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하~~ 도대체 망상이 안 떠나서ㆍ망상이 안 떠나서” 화두일념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하고 싶은 의욕은 있는데 도대체가 잡념이 들어 와가지고 일념이 안 되니까 자신도 너무 답답한 겁니다. 그래서 막 그냥 피가 흥건할 정도로 그냥 이마를 관음전에 절을 하면서 쾅ㆍ쾅 찧더라고요. 그래도 아픈 줄도 몰라요. 워낙 話頭一念(화두일념), 화두하고 싶은 그런 열정. 화두일념이 되는 것은 아닌데 그저 열정만 넘치는 것이지요. 그것이 결국은 뭡니까? 자기 있는 머리 제쳐놓고 새로운 머리를 찾겠다고 하는 일이지요. 사실은 고마운 일이지요.
만약에 인생을 그렇게만 사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이것은 대단한 겁니다. 우리가 오늘 날 그런, 예를 들어서 이 임제스님이 말씀하신 이런 차원에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말 찾을 것이 있다. 나 외에 따로 찾을 것이 있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해서 법당에다 머리를 찧으면서 피를 흘릴 정도로 수행에 대한 이런 열정이 있다면 이것은 대단한 겁니다. 모든 우리 스님들이 그런 열정으로, 법에 대한ㆍ또는 깨달음에 대한 그런, 설사 그것이 착각이고 誤想(오상)이라손 치더라도 그런 열정만 모두 가지고 산다면 아주 정말 자랑스럽지요. 한국불교 참으로 자랑스러운 그런 불교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데요. 여기서는 열정은 있으나 눈을 바로 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그런 말씀이라고 보면 됩니다.
自不能歇하나니, 스스로 능히 쉬지를 못하나니
如圓頓菩薩(여원돈보살)이, 예컨대 圓頓菩薩이, 보살지위가 가장 충만한ㆍ완전한 그런 보살이
入法界現身(입법계현신)하야, 법계에 들어가서, 진리의 세계에서 몸을 나타내서 向淨土中(향정토중)하야, 向淨土中을 향해서 厭凡忻聖(염범흔성).
범부의 위치는 싫어하고 성인의 경지를 기뻐하고 좋아해요.
그것이 敎學(교학)에서 圓頓菩薩하면 “원교보살ㆍ돈교보살” 이라는 그렇게 나눠서 교리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보살로서 완전한 보살. 완전한 보살은 뭡니까? 厭凡ㆍ忻聖.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것에 차별이 있다. 범부는 싫어하고 성인은 좋아 하는 분별심을 낸다 이겁니다. 이런 마음이 아직도 떨어지지 아니했다 이것이지요.
如此之流(여차지류)는 取捨未忘(취사미망)하고, 이와 같은 流들은 취하고 버리는 생각을 아직도 잊어버리지 못해. 간택하는 마음이 있다 이겁니다.
至道無難(지도무난)이나 唯嫌揀擇(유혐간택)이라.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지만, 오직 간택하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라고 했잖아요.
취사심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染淨心在(염정심재). 물들었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그런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예컨대,
如禪宗見解(여선종견해)는 又且不然(우차불연)하야,
禪宗見解는 또한 그렇지 않다 이 말입니다.
直是現今(직시현금)이요, 바로 현재 이 자리. 直是現今이라고 하는, 바로 현재 이 자리 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보고ㆍ듣고ㆍ울고ㆍ웃고ㆍ때로는 욕심도 내고ㆍ때로는 모함도 하고 하는 그 능력, 그 자체. 모함 하는 그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고, 모함할 줄 아는 그 능력. ←이것을 뜻하는 겁니다.
그 근본 자리를 말하는 것이지, 그 지엽적인 것, 선한 행동을 한다ㆍ악한 행동을 한다 하는 그런 지엽적인 말이 아니라, 선한 행동을 하든지ㆍ악한 행동을 하든지 행동 하는 그 근원. 그 자체를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잘못 이해하면 악을 조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바로 현재 우리가 보고ㆍ듣고 하는 이 사실이지, 그 외에 다시 更無時節(갱무시절)이라. 어느 다른 날, 다른 때에 뭐 어떤 경지에 올랐어, 그것 없다 이겁니다. 更無時節이라. 다시는 더 이상 다른 시절이 없다. 이런 안목을 우리가 사실은 완전히 구축해야 됩니다.
이런 안목을 구축 한다고 하는 사실은 뭔가 하면, 우리 本來佛(본래불).
본래 가지고 있는 本覺(본각)자리. 그 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한 확신이 서져요. 이해가 깊어지면 확신이 생긴다고요. 그럼 거기에 대한 상당한 어떤 애착이 있게 돼요. 이해가 있으면 신념이 생기고, 신념이 있으면 그것을 애착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여타는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 가치관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실은 자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있다고 사실도 함께 알게 되니까 자기 자신의 그러한 내면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할 줄 알면 다른 사람도 역시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배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다 같이 부처님으로 받들 수 있는 것이지요. 받들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人佛思想(인불사상). 사람이 그대로ㆍ현재 그대로ㆍ그 모습이 어떻든, 무슨 그것이 도둑놈이 됐든ㆍ아주 착한 사람이 됐든, 그것 상관없이 그 모습 그대로 그 근본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살면, 그리고 또 서로 부처님으로 받들어 주게 되고요. 그러면 그도 행복하고ㆍ나도 행복해요. 부처님으로 대접받고 행복 아니 할 사람 없어요ㆍ기분 안 좋을 사람이 없어요. 내가 남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받들어 주면, 내가 더 기분 좋아요ㆍ내가 더 행복해요. 그 받들어 주는 사람도 말할 것 없이 좋은 겁니다. 그런 내용 전혀, 그런 사실 전혀 몰라도 그렇게 대접받으면 기분 좋지요.
예를 들어서 세존께서, 그~ 뭐, 달라이라마스님이 가까운 나라 일본에 왔다고, 그 돈을 써가면서 일본까지 가가지고 그 얼굴 한번 쳐다보려고 하는데, 만약에 석가세존이 우리 곁에 있다. 그랬을 때 그 감동이 오죽 하겠습니까? 오죽 하겠냐고요?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 얼굴만 한 번 쳐다봐도 막 그냥 정신없이 날뛰고, 그냥 막 울고 야단법석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석가세존이 옆에 계신다ㆍ또 그분을 위해서 내가 온갖 배려를 다 한다ㆍ온갖 대접을 다 한다. 라고 했을 때, 그 분은 고사하고 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 시시한 스타에게도 감동이고 야단법석인데...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소득이라고 할까? 또 현실로 잘 나타나는 그런 내용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山僧說處(산승설처)는 皆是一期藥病相治(개시일기약병상치)요.
산승이 말하는 것은 다, 이것이 “한 때 병을 다스리는 약이다.” 이런 말입니다. 뭐 그것은 8만4천 법문이 다 번뇌를 다스리기 위한 약 방문이다 하는 말이 있듯이 그와 같습니다.
總無實法(총무실법)이니, 총히 실법이 없다.
이렇게 정말, 진짜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는, 정곡을 찌르는 이런 법문을 해놓고도, 山僧說處는, 내가 말한 것은 다 一期藥病相治. 그랬습니다. 병을 다스리는 하나의 약 역할을 하는 정도다. 總無實法이다. 모두 실다운 법이 없다. 이렇게 했습니다. 철저히 쓸어버리는 겁니다. 이런 자세가 좋지요. 금강경도 그 자취를 쓸어버리는 그런 내용은 좋습니다만...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是眞出家(시진출가)라.
만약에 이와 같이 본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출가인이고,
日消萬兩黃金(일소만냥황금)하니니라. 그렇게 이해한다면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소비하고도 남는다. 참~ 아주 근사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 마음에 한 점도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요. 이 정도로 이해한다면...
總無實法이다. 도대체 실다운 법은 없다. 라고 해서 자기 자체를 깡그리 싹 쓸어버리는 겁니다.
우리 사찰에서, 큰 절에 마당 쓸 때, 어떻게요? 속인들은 앞으로 쓸어갑니다. 그런데 절에서는 전통적으로 뒤로 쓸어갑니다. 쓸면서 나갑니다.
그러면 큰 마당에서, 예를 들어서 스님들이 빗자루 하나 거리 정도 씩 쭉~ 간격을 벌려서 저쪽에서 쫙~ 쓸어 나오면 빗자루 자국만 있지, 사람 발자국은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그렇게 안 쓸어요. 쓸면서 앞으로 지나갑니다. 그러면서 발자국 자욱을 남겨지는 겁니다. 이것도 우리 불법의 이치에 맞는 겁니다. 사찰에서는 계단 하나도 전부 그런 상징성이 있습니다.
계단을 다섯 개하면 5계요, 무슨 48계단하면 사십팔대원이요. 전부 그런 상징성이 있잖아요. 그것이 불교에서는 좀 뛰어난 부분이지요.
뒤로 가면서 자기 발자국까지 쓸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이런 도리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주옥같은 말씀을 해놓고, “아~ 이것이 최고야, 부디 잘 기억해.”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정곡을 찌르는 소리 아닙니까? 방편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山僧說處는, 이것이 병이 있어서 내가 약으로써 병을 다스리는 것이다. 總無實法이다. 실다운 법은 없다. 라고 딱 쓸어버리는 겁니다. 뒤로 가면서 발자국마저도 쓸어버리는 그런, 우리 사찰에서 마당을 청소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 꼭 뒤로 쓸어야 됩니다. 그래서 발자국마저도 쓸어야 됩니다.
바로 누가 밟아서 발자국 남길 때 남기더라도 쓰는 법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허리 딱 구부려가지고 빗자루 끝이 땅에 닿게 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뒤에 와서 사정없이 후려쳐버립니다. 빗자루를 눕혀서 빗자루의 몸통이 땅에 닿도록 쓸라는 것이지요. 저는 어릴 때 하도 교육 잘 받아가지고 눈에 아주 선합니다. 빗자루 몸통이 땅에 딱 닿도록, 딱 허리 구부려가지고 쓸라는 것이지요. 절대... 끝이 땅에 닿도록 쓸면 혼이 나지요. 요즘 그런 풍속이 많이 조금 퇴색이 됐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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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今日方知本來無事...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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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是現今이요 更無時節이니라...지금 현재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지 다시는 더 이상 다른 시절이 없다. 고맙습니다. _()()()_
無修無證(무수무증)하며 無得無失(무득무실)하야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하니...닦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본래 갖추어진 그 자리)그것 이외에는 모든 시간 속에 더 이상 달리 특별한 법이 없다. 고맙습니다._()()()_
祇爲儞信不及이라 念念馳求하야 捨頭覓頭하야 自不能歇하나니라...다만 그대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생각생각 내달려 구하면서 자기 머리는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느라 스스로 쉬지를 못하나니라..釋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皆是一期藥病相治(개시일기약병상치)요... “한 때 병을 다스리는 약이다.” 總無實法(총무실법)이니,..모두실다운 법이 없다.고맙습니다. _()()()_
直是現今이요 更無時節이니라..._()()()_
此人處處不滯. 通貫十方.._()()()_
直是現今이요 更無時節이니라.....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좋은 법문 고맙습니다... _ ()()() _ 건강하세요! 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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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是一期藥病相治 總無實法 ...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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