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지씨이기 때문에 지씨부터 밝히고자 한다. 충주 지씨는 원래 중국의 송나라에서 왔다라고 듣기만 하였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중원대륙에서 온 것은 사실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족보가 모두 중원대륙에서 정리되어 한반도에 구한말에 넘어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올바른 족보의 대가 최찬동선생님의 저서에서 진실을 담아보았다.
근세조선에서 지(池)씨는 본관이 충주이었는데, 그곳은 고려의 지명도 같다고 한다.
고조선(단군조선)시대에 진나라 왕족중에 공자 지가 대사마의 관직을 가져 가족이 창설하였으니 후대에 이름자 지(池)를 성으로 한 것이 최초라 한다.
고대에는 성곽주위를 못으로 둘러쌓이게 하였으니, 그곳에는 물고기가 살게 되었고, 주위에 살고 있는 자들이 지(池)씨 또는 어(魚)씨로 하였다고 한다.
지(池)씨후손들은 희안하게 중원대륙 하남성 서평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송나라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池씨를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헌원씨가 나오고, 황제가 조상임이 드러난다.
황제헌원씨
창의
고양
O
여수
대업
대비
대렴
진나라
공자 지(池)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홍농 7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황명만성통보(皇明萬姓統譜)와 운부군옥(韻府群玉)에 『지씨(池氏)는 서하(西河:중국의 지명) 땅에서 나서 그 산 곳(居住地)의 이름으로 성(姓)을 삼으니 치음(徵音:五音의 하나)에 속(屬)한다』하였고 또 성씨 비고(姓氏備考:책이름)에는「서하(西河)는 경치 좋은 곳으로 계속하여 물이 맑게 흐르는데 진(秦)과 송(宋)나라에서 으뜸인 고장으로 지자화(池子華)는 지(秦)나라 승상(丞相)이었고, 지몽리(池夢鯉)는 송(宋)나라 함순(咸淳:南宋-1265~1574)년간에 특별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으며, 한(漢)나라 지원(池瑗)은 중모령(中牟令)으로 어진이(賢人)로 이름이 낫고, 송(宋)나라 지광정(池光庭)은 진사(進士)로 문학(文學:글과 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쳤는바 모두 『장계(長溪) 사람이다』하였다.
【시조】시조 선의공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8성씨[곽씨,])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지의 5세손 되는 지종해(池宗海)께서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란 높은 벼슬을 지내시고 식읍(공이 많은 신하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 군(君)으로 봉하였기로 이로부터 충주가 본관(本貫)이 된 것이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주요파】충주지씨의 세계는 크게 8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30여 파로 분파된다.
시조 지경은 중국 송나라 사람이다. 고려 광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귀화했다. 그의 5세손 지종해가 평장사를 역임하고 충원백에 봉해진 이후 본관을 충주로 했다. 한편 지중익의 후손은 ▲충주어씨(忠州魚氏)로 갈려 나간다.
충주지씨는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16세까지 모두 11대 36평장사를 내었다.
그중 충의군파(忠義君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전체인구가 특히 충의군파(忠義君派)가 전체 충주지씨의 80%를 차지한다. 고려에 36명이 정승에 버금가는 평자사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조선에 문과급제자 12명, 진사 75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다. 고려말 지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지용기, 지윤 등이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숙청된 이후 가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조선조말과 일제하의 민족항쟁기의 인물로 이름이 높은 이는 지석영과 지청천이 있다.
지석영은 박영선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보고 느낀바 있어 1879년 부산의 일본 병원 제생의원에 가서 종두법을 배웠다. 다음해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종두약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참의, 동래부사를 지낸 다음 1899년부터 10년간 경성의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그는 국문연구에도 공헌하였다. 1905년에는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왕에게 상소하여 공포케 하고 학부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케 하였다. "우두신설(牛痘新說)" "자전석요(字典釋要)"가 전한다.
지청천은 본명이 지대형이고 일명 이청천(李靑天)이라고도 한다. 구한말 정부파견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망국 후 졸업, 일군 소위가 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을 탈출하여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敎成隊長)을 지냈다. 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대를 이끌고 대한독립군단에 편입, 여단장이 되었다. 1921년 흑하사변이 일어나자 한때 적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1940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군과 협력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필자가 지씨이기 때문에 지씨부터 밝히고자 한다. 충주 지씨는 원래 중국의 송나라에서 왔다라고 듣기만 하였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중원대륙에서 온 것은 사실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족보가 모두 중원대륙에서 정리되어 한반도에 구한말에 넘어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올바른 족보의 대가 최찬동선생님의 저서에서 진실을 담아보았다.
근세조선에서 지(池)씨는 본관이 충주이었는데, 그곳은 고려의 지명도 같다고 한다.
고조선(단군조선)시대에 진나라 왕족중에 공자 지가 대사마의 관직을 가져 가족이 창설하였으니 후대에 이름자 지(池)를 성으로 한 것이 최초라 한다.
고대에는 성곽주위를 못으로 둘러쌓이게 하였으니, 그곳에는 물고기가 살게 되었고, 주위에 살고 있는 자들이 지(池)씨 또는 어(魚)씨로 하였다고 한다.
지(池)씨후손들은 희안하게 중원대륙 하남성 서평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송나라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池씨를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헌원씨가 나오고, 황제가 조상임이 드러난다.
황제헌원씨
창의
고양
O
여수
대업
대비
대렴
진나라
공자 지(池)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홍농 7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황명만성통보(皇明萬姓統譜)와 운부군옥(韻府群玉)에 『지씨(池氏)는 서하(西河:중국의 지명) 땅에서 나서 그 산 곳(居住地)의 이름으로 성(姓)을 삼으니 치음(徵音:五音의 하나)에 속(屬)한다』하였고 또 성씨 비고(姓氏備考:책이름)에는「서하(西河)는 경치 좋은 곳으로 계속하여 물이 맑게 흐르는데 진(秦)과 송(宋)나라에서 으뜸인 고장으로 지자화(池子華)는 지(秦)나라 승상(丞相)이었고, 지몽리(池夢鯉)는 송(宋)나라 함순(咸淳:南宋-1265~1574)년간에 특별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으며, 한(漢)나라 지원(池瑗)은 중모령(中牟令)으로 어진이(賢人)로 이름이 낫고, 송(宋)나라 지광정(池光庭)은 진사(進士)로 문학(文學:글과 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쳤는바 모두 『장계(長溪) 사람이다』하였다.
【시조】시조 선의공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8성씨[곽씨,])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지의 5세손 되는 지종해(池宗海)께서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란 높은 벼슬을 지내시고 식읍(공이 많은 신하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 군(君)으로 봉하였기로 이로부터 충주가 본관(本貫)이 된 것이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주요파】충주지씨의 세계는 크게 8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30여 파로 분파된다.
시조 지경은 중국 송나라 사람이다. 고려 광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귀화했다. 그의 5세손 지종해가 평장사를 역임하고 충원백에 봉해진 이후 본관을 충주로 했다. 한편 지중익의 후손은 ▲충주어씨(忠州魚氏)로 갈려 나간다.
충주지씨는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16세까지 모두 11대 36평장사를 내었다.
그중 충의군파(忠義君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전체인구가 특히 충의군파(忠義君派)가 전체 충주지씨의 80%를 차지한다. 고려에 36명이 정승에 버금가는 평자사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조선에 문과급제자 12명, 진사 75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다. 고려말 지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지용기, 지윤 등이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숙청된 이후 가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조선조말과 일제하의 민족항쟁기의 인물로 이름이 높은 이는 지석영과 지청천이 있다.
지석영은 박영선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보고 느낀바 있어 1879년 부산의 일본 병원 제생의원에 가서 종두법을 배웠다. 다음해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종두약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참의, 동래부사를 지낸 다음 1899년부터 10년간 경성의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그는 국문연구에도 공헌하였다. 1905년에는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왕에게 상소하여 공포케 하고 학부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케 하였다. "우두신설(牛痘新說)" "자전석요(字典釋要)"가 전한다.
지청천은 본명이 지대형이고 일명 이청천(李靑天)이라고도 한다. 구한말 정부파견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망국 후 졸업, 일군 소위가 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을 탈출하여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敎成隊長)을 지냈다. 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대를 이끌고 대한독립군단에 편입, 여단장이 되었다. 1921년 흑하사변이 일어나자 한때 적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1940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군과 협력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