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북의 주커버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이 둘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천재? 학교를 때려치우고 일구어낸 인간승리? 아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언가가 확실하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걸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커버그나 빌게이츠는 창업 전에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 즉, 자신의 본질은 남겨두고 자신이 커버 가능한 모험을 했다는 거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언가를 하고 실패하면 그게 실패한 삶일까? 보다 영리해져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거나 혹은 확실하지 못한다면 둘을 병행하는 것이다. 주커버그나 빌게이츠도 회사가 잘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면 혹은 그만큼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평범한 공대생,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살았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절대 쫓기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하고 있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의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그러면 어떠한 것에 도전해야 할까? 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을 하며 믿고 있다. 하지만 행동으로 보이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노력과 함께 힘든 과정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노력까지도 할 수 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좀더 일찍 일어나 여유롭게 아침밥을 먹고 갈까 그냥 갈까,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사실 우리는 이런 선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모든 선택에 큰 의미를 둔다면 아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했을 때, 내가 선택한 업종을 잘 선택 했나 여부가 아니라 직장에 대한 향수병으로 6개월 동안 헤매었다. 그렇게 헤매면서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앞서서 이 업이 천직이라 믿고 앞만 보고 나아갔다.
첫 번째 자영업을 15년 쯤 했을 무렵 내가 하던 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시기였다. 마침 그 당시 고시원이 성행하고 괜찮다는 지인의 말을 귀담아 듣고 고시원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고시원을 운영하면서 고시원의 분위기가 거의 공무원 시험공부, 교사임용고시 공부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졌다. 사람은 그 환경에 변화에 따라서 변하는 가 보다. 나 역시 공무원 수험생들과 함께 어우러져 지내다보니 새롭게 무언가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내 나이 50, 이제 겨우 지천명에 이르지 않았는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우선 자영업을 운영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선택하고 싶었다. 추운 1월 가족들이 마침 용평스키장에 놀러가고 없어서인지 혼자서 고민하다가 다시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20여 년 전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 시대의 대학공부는 아날로그였다면 지금의 시대는 디지털로그 시대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학에 입학지원서를 냈다. 나이 많은 사람의 입학은 젊은 사람들보다 쉬웠다. 특별입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젊은 학생들과 영어, 인터넷활용법, 컴퓨터 등을 배우는데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젊은 학생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공부를 했고 젊은 학생들과의 수업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대학원까지 가고 싶어졌다. 나 스스로 선택한 공부였기에 일단 선택했다면 더한 책임이 함께해야했다. 어느 정도 나 자신이 디지털화 되었다고 생각하니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대학원을 입학하였고 복지행정전공을 선택했다. 주간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자영업(고시원)을 잘 운영하여야 했고, 일과 후에는 책에 파묻혀 사는 삶을 즐겼다. 누가 등 떠밀며 하라고 한 공부가 아니었기에 내가 선택한 전공에 최선을 다했다.
석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고민이 생겼다. 이왕 내친김에 박사과정까지 해보라는 지도교수의 권유가 나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사랑을 할 때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이상의 묘한 감정이 나 자신을 유혹하였다. 처음에는 이 나이에 박사과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아내에게도 전혀 상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에는 주사위가 던져졌다. 이렇게 해서 뛰어든 박사과정이 내 인생의 시간표를 바꾸어 놓았다. 나는 고시원을 운영하면서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꼭 젊은 학생들이 고시공부 하듯 파고들었던 결과 50대 후반에 행정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학부 겸임교수로 임용되었다.
젊은 날 꿈 못지않게 뒤 늦게 취득한 박사학위는 지금까지도 학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이왕이면 젊은 날의 나보다 더 까칠하게 인생의 쓴 맛을 느끼게 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다.
102세 세계 최고령 마라토너 파우자 싱, 99세에 장례비로 모아둔 돈으로 첫 시집을 낸 시바타 동, 가난했지만 꿈을 버리지 않고 노력해 47세에 작가가 된 마쓰모토 세이초, 20세기 주요 발명품으로 선정된 면도기를 48세에 만든 킹 질레트, 38세에 할인점 직원애서 성악가가 된 폴 포츠 등은 자신의 꿈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다.
흔히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 무서운 것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 무서운 것들 때문에 꿈을 하나씩 포기하고 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꿈을 이루는 데 두려움이 있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는 망설여지고 확신이 없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노력하는 만큼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빨라진다는 것일 것이다. 꿈을 ‘나이’ 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 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어떤 일에도 도전은 그 자체로서 희망이다. 그 결과는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잃은 것이 많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도 많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자. 불만족스럽고 불행한 마음이 든다면 과도한 기대와 욕심을 버리고 어떻게 든 희망의 실마리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비가 그치고 나면 밝은 태양이 떠오리라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진리를 믿어보자.
이렇게 삶에 대한 탄력성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삶이란 시간과 운명의 무거운 짐을 견디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감기가 앓을 만큼 낫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별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은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견뎌야 한다. 앓을 만큼 앓아야 한다. 그래서 고통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최선의 방법은 함께 아파해주는 것뿐이다.
행복은 단지 불행하지 않은 것 그 이상을 요구한다. 단지 아픈 곳이 없다고 해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단지 고통스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 생각하는 삶의 의미 혹은 존재의 의미에 충실하게 다가섬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꿈은 내가 스스로 내딛는 발걸음만큼만 가까워진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도움이 우리를 구원해주 것이란 환상은 버려라. 변화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겠다는 용기와 의지를 가져라. 나는 60대 후반에 접어들었음에도 대학의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람을 가지면서 많은 친구들을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게 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최선을 선택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결국 덜 후회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그 결과가 어떻든 후회나 미련이 없다. 공부란 ‘학’과 ‘습’이 한데 모여 이뤄지는 것이다. ‘학습(學習)’한자어에서 익힌다는 뜻의 ‘습(習)’ 이라는 글자는 새가 두 개의 날개로 날아가는 모양이다. 아기 새는 어미 새가 날갯짓하는 모습을 보고 날개를 파닥거리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실제로 아기 새가 날개 짓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날개를 파닥거려야 한다. 어미 새가 아무리 우아하게 비행하는 법을 가르쳐줘도 직접 파닥거리지 않고서는 영원히 날 수 없다. 공부는 결국 배움을 넘어서 스스로 익히는 것이다. 배우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익혀야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게아니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넓은 세상을 하나하나 익혀가는 것. 그것이 진짜공부이고 학습의 과정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어렴풋이 찾더라도 도전을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혼자서만 다른 길을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는 대로 힘들게 스펙을 쌓아왔는데, 이제 와서 다른 길을 택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왔건만 자신이 속한 길에서 아무런 흥미도 재능도 찾을 수 없다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괴롭겠는가. 사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꿈과 이상 따위는 체념한 채 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