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적 이념에 의한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개국 직후부터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실시하였다. 불교는 억불정책 아래 놓이면서 표면적으로 사회적인 의미를 점차 잃어가기 시작했다. 조선왕조가 초기부터 유교적 지배질서를 확립키 위해 불교를 억압하였으므로, 중기 이후에는 불교의 공인된 종파가 거의 소멸되었다. 일부 군주의 호불정책과 왕실의 신불(信佛)이 있기는 했지만, 이 같은 왕실 중심의 불교신앙만으로는 사회 전반에 걸쳐 불교의 지위를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통일신라나 고려와 같이 상류층을 통한 불교의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민중에게 전래되어오던 불교신앙은 여전히 민중의 가슴속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사실 불교의 민중화는 조선시대에 와서 오히려 그 폭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 민중화된 불교신앙은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은 오히려 미륵신앙과 민중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조선시대의 미륵신앙은 민간화되면서 비합리적인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변질되는 모습도 함께 나타났다. 미륵불에게 득남(得男)이나 기복(祈福), 치병(治病), 수호(守護) 등의 발원을 하면서, 사찰뿐만 아니라 조형미를 갖추지 않은 산 위의 입석이나 바위조차도 미륵으로 인식하고 신앙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와 같은 거대한 불상의 조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대체로 크기가 작은 불상에 조각 수법 또한 매우 조잡해졌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들어 다소 쇠퇴 기미를 보이던 미륵신앙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병자호란과 정치적·사회적 불안 등으로 인해 미륵하생에 대한 갈망이 다시 확산되면서, 민중 속에 그 뿌리를 더욱 굳건히 내리게 된다. 왜란과 호란이 한바탕 나라를 휩쓸고 간 후, 조선 숙종 14년(1688년)에 여환이라는 승려가 미륵세상을 구현코자 반란을 도모하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숙종 편」에 남아 있다.
숙종 10년, 대기근(大饑饉)이 발생하자 여환은 무녀들과 아전들을 규합하여 ‘석가불이 그 운을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는 이론을 내세우며 경기도 양주군 청송면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널리 퍼뜨렸다. 그리고 당시 해서(海西) 지방의 구월산(九月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하던 ‘장길산(張吉山)의 활빈도(活貧徒)’와 규합하여 부패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고 하였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 말법(末法)에 이르러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살아남고 탐욕스런 권세가와 왕조는 망한다는 괴서(怪書)가 나돌고, 또한 미륵(彌勒)이 도래하여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이룩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자, 조정에서는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하였다. 결국 이들의 역모는 사전에 저지되어 여환 등 주모자 여러 사람이 처형되고 장길산은 잠적함으로써 이들의 미륵세상에 대한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의 봉기는 한때나마 민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이는 주모자인 여환 등이 민간신앙인 용신앙(龍信仰)과 당시의 미륵신앙을 교묘히 결부시켰고, 거기에다 무녀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테마로 하여, 소설가 황석영은 그의 대표작 『장길산』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거듭되는 전쟁과 흉년, 그리고 이름 모를 괴질병에 시달리며 불안하고 어두운 사회를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있어 ‘지옥 같은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미륵하생신앙’은 그들의 소박하고 막연한 기대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의 미륵하생신앙은, 말법의 상황에 처한 민중들을 구제해주실 부처로서 ‘미륵’의 하생이 더욱더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국가의 공식적 신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전쟁, 기근·계급차별·권력의 탄압과 같은 현실적 고난에 처한 민중들에 있어서 ‘미륵’은 가장 절실한 신앙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대상으로서, 때로는 그들의 소박한 소원을 이루어주는 대상으로서 민중들의 생활 가운데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의 미륵신앙은 바로 민중의 생활 속에 밀착된 생활신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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