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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曰 世人不知本源 在何開口 說尊華攘夷之道 胡元滅宋爲不祥於道 云 良可悲也 大道盛衰 都不在世局姑舍
왈 세인부지본원 재하개구 설존화양이지도 호원멸송위불상어도 운 양가비야 대도성쇠 도부재세국고사
所謂正統云者 只以大有彊域 定之而秦始皇 滅六國 漢高帝勝强楚殺英雄 唐太宗挾夷力而得 因胡亂而失
소위정통운자 지이대유강역 정지이진시황 멸육국 한고제승강초살영웅 당태종협이력이득 인호란이실
宋人不費一箭 奪人國 且況所事之乎 天下猶謂之英武 猶謂之正統 然則 五季諸帝有何惡毛 謂之僭名乎
송인불비일전 탈인국 차황소사지호 천하유위지영무 유위지정통 연즉 오계제제유하악모 위지참명호
編支那史者 吾不知其可也 況乎吾震檀 口頭如是乎
편지나사자 오부지기가야 황호오진단 구두여시호
세상 사람들은 본원(本源)을 알지 못하니 입이 있어도 어찌 말을 하며 중국을 높이고 우리나라를 낮추는 것은 道가 아니며 오랑캐 원이 송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니 상서롭지 못한 道이며 어진이는 가히 슬프다. 道의 성쇠는 시절이나 어느 정권이나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니며 소위 正統을 말하는 사람은 강하고 큰 나라에 속해있는 것일 뿐이며 정하기는 진시황이 여섯 나라(초,연,제,한,위,조)를 멸하였고 한고제는 강한 초(楚)를 죽여 이긴 영웅이며 당태종은 東夷를 힘껏 돕다 호(胡)의 난으로 인하여 나라를 잃었다. 송은 하나의 화살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과 나라를 빼앗었으니 또 다시 이런 일이 있을까, 천하가 오히려 영걸하고 매우 용맹스러운 것으로 말하고 도리어 정통이라고 일컫는다. 그러한즉 중국의 후오대(後五代)의 모든 임금들이 어찌 악모(惡毛)가 있겠으며 중국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명호를 기록하는 것이 어긋나니 나는 그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하물며 우리 진단(震檀=우리나라 칭하는 다른 말로 신지비사에 나옴)을 이와 같이 말로 이를것인가
※ 진시황(秦始皇)∶중국 진(秦)나라의 제 36대 황제. 이름은 정(政). 통일 왕조로 진나라의 시조이다. B.C.221년 전국(戰國) 제국을 평정하여 통일을 완성하고 「황제」라 칭하였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도량형‧문자‧화폐 등을 통일하였다. 법치주의‧분서갱유(焚書坑儒)로 사상통일을 기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했으며 만리장성‧교통로‧아방궁 등의 큰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 급격한 개혁을 시도했다.
※ 한고제(漢高帝)∶유방(劉邦)이 초(楚)의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세운 나라(B.C.206∼A.D.220)
※ 당태종(唐太宗)∶626∼649. 진(陳)나라 말기 북량(北凉)의 무소왕(武昭王) 고 (暠)의 자손이라 하나 한족(漢族)이 아니고 선비족(鮮卑族)이라는 설(說)도 있다. 수(隋)나라 말기에 태원(太原)의 군벌(軍閥)로서 돌궐졸(突厥族)의 남침을 막고 지방의 치안을 장악하여 차차 세력을 넓히던 이연(李淵∶당고조)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와 더불어 617년 5월에 군사를 일으켜 동년 9월에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 618년 수(隋)의 양제(煬帝)가 반란군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그 손자 공제(恭帝) 유(侑)를 세웠는데 그 이듬해 공제를 협박하여 선위(禪位) 받아 아버지를 즉위케 하고 국호를 당(唐)이라 하였다.
건국 초에는 각지에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있었으나 차례로 이들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건국과 통일대업은 총명과 지략이 출중한 세민(世民)의 힘이 컸는데 형이며 태자(太子)인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이 시기하자 이들 형제를 죽이고 626년 제2대 황제에 올랐다. 이를 ‘현무문(玄武門)의 난’이라 하며 이세민이 곧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의 외적(外敵)이던 돌궐(突厥)을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종족도 조공(朝貢)하게 되어 국위(國威)를 크게 떨쳐서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우리 고구려에 봉역도(封域圖)를 보내왔으며 629년엔 현장(玄 )이 인도여행을 떠났으며(627년도 출발설도 있음) 630년엔 동돌궐(東突厥)을 멸하고 왜(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왜(일본)도 사신을 당나라 파견(제1회 遣唐使) 635년엔 부병제도(府兵制度)를 완성하여 내치(內治)에도 힘써 637년엔 정관율령(貞觀律令)을 제정하여 치세 20여 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638년엔 <<씨족지(氏族志)>>를 반포(頒布)하였고 640년엔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두었고 641년엔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토번(吐蕃)으로 출가시켰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에서 유학(留學)을 청해 왔으며 고구려 원정(遠征)(제1차 645 제2차 647 제3차 648)하여 안시성(安始城) 공략에 실패 634년엔 왕현책(王玄策)을 인도에 파견 646년엔 현장(玄 )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완성했고 철륵부(鐵勒部)에 속하는 설연타(薛延陀)를 토벌하였고 647년엔 연연(燕然∶뒤의 安北)에 도호부(都護府)를 설치 649년엔 태종이 죽고 아홉째 아들인 고종(高宗)이 즉위하였다.
※ 악모(惡毛)∶붓 속에 섞인 뭉툭한 털. 좋은 것을 추려 내고 남은 찌끼. 악(惡)치.
※ 진단(震檀)∶우리 나라를 예스럽게 일컫는 말의 하나. 진단(震壇).
(12)
曰 自古簡丹之嚴 帝王不能奪 將相不能奪 故 齊崔抒敎其兄而舍其弟 晋董獨書以趙 遁弑君 今此編諸史則
왈 자고간단지엄 제왕불능탈 장상불능탈 고 제최서교기형이사기제 진동독서이조 둔시군 금차편제사즉
指纂謂正 以正謂僭 比比 秦漢僞史而尤爲 甚焉 噫 人品之降衰 史筆之無力 實由於秦漢以來 失眞食希假之故也
지찬위정 이정위참 비비 진한위사이우위 심언 희 인품지강쇠 사필지무력 실유어진한이래 실진식희가지고야
元世祖滅宋 而幷有四夷 其雄威武力 彊場宏闊 猶勝秦漢 以正統大統 爲史家分別則 此四帝外實無可居於正統
원세조멸송 이병유사이 기웅위무력 강장굉활 유승진한 이정통대통 위사가분별즉 차사제외실무가거어정통
天統之名者乎
천통지명자호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이 엄해서 제왕이나 장수나 재상의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제나라 최서(崔抒, 기원전 548년, 제(齊)나라의 대부 최서(崔서)와 경봉(慶封)은 공모하여 제나라 장공(莊公)을 죽이고, 장공의 이복동생인 저구(杵臼)를 왕으로 세웠으니, 바로 제나라 경공(景公)이었다. 경공은 최저를 우상(右相)에, 경봉은 좌상(左相)에 앉혔다.)가 장공(莊公)을 죽이고 그 아우(저구,杵臼)를 머무르게 하고 가르치었으며 진나라 동독서(董獨書)는 잉어 속에 칼을 숨기고 조나라의 임금을 죽이고 달아났으며, 이제 모든 역사가 이것을 가리키기를 정(正)이라고 하며 정(正)을 범하고 있으며 진(秦)과 한(漢)이 거짓 역사라고 하니 심히 한탄스러우며 인품(人品)이 땅에 떨어지고 언론이 힘이 없어 실제로 진한(秦漢) 부터 참[眞]을 잃었다고 거짓을 꾸미는 까닭이다. 원나라 세조(世祖;쿠빌라이 忽必烈)가 단기 3612(1279년)년 남송을 멸하고 북적,남만,동이,서융을 합함이 있었고 그 무력이 웅장하고 위엄과 큼직하고 시원스럽게 넓은 영토를 가졌으니 오히려 진이나 한보다 나았었고 이것이 정통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계통이니 사가를 분별하면 진시황 한무제 송태조 원세조이 네 황제 밖에 없으며 실지로 하늘에 명을 받은 정통의 이름이다.
※ 한무제(漢武帝)∶후한(後漢)의 시조(始祖)인 유수(劉秀). 한고조(漢高祖)의 9세손(世孫). 왕망(王莽)의 대군(大軍)을 파(破)하고 즉위(卽位)하여 낙양(洛陽)에 도읍을 세우고 한(漢)을 다시 일으켰음.
※ 송태조(宋太祖)∶송(宋)의 태조(太祖). 개국(開國)의 임금. 본 이름은 조광윤(趙光胤) 탁군(琢郡)사람. 성격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와 용감하고 슬기로웠고 후주(後周)의 양위(讓位)를 받아서 제위(帝位)에 오름. 탐관오리(貪官汚吏)를 물리치고 법(法)을 존중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교학(敎學)을 진흥하며 형벌을 가혹히 하지 않고 수렴(收斂)을 적게 하여 통일(統一) 왕업(王業)의 기초를 튼튼히 함.
※ 원세조(元世祖)∶1215∼1294. 이름은 쿠빌라이(忽必烈). 송(宋)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국호(國號)를 원(元)이라 하고 연경(燕京)에 도읍(都邑)함. 뒤에 왜(倭)를 친 일이 있고 또 면전(緬甸)‧안남(安南)‧조와(爪蛙) 등을 정벌(征伐)하여 영토(領土)가 아주(亞洲) 및 구라파(歐羅巴) 동부(東部)까지 뻗쳐 강토(彊土)의 넓이는 전고(前古)에 비할 바 없이 컸음.
(13)
曰 惟我 神祖裔之入支那主天下 始于舜 而中于元 終于淸也 朱元璋之謂大震之人 似也非也 其所行所說
왈 유아 신조예지입지나주천하 시우순 이중우원 종우청야 주원장지위대진지인 사야비야 기소행소설
近似吾曾聞之 南海眞人 朱氏之本 始於高朱蒙云云 疑去上取中苦矣
근사오증문지 남해진인 주씨지본 시어고주몽운운 의거상취중고의
나는 신조(神祖)의 후예가 지나(본래 수·당나라 시대에 인도의 승려가 산스크리트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산스크리트의 ‘중국’을 음역(音譯)한 것이 시초로, 支那 외에 至那·脂那로도 썼다. 이후, 한문 불경이 9세기경 일본에 전해지면서, 지나라는 호칭도 일본에 전해졌다. 18세기 일본의 난학자들이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면서 영어의 China(차이나) 및 서양어의 동계 명칭이 支那와 같은 어원(진나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에 들어가 천하의 주인이 된 것은 순임금으로 부터 시작하여 중간에는 원나라였고 청나라로 끝마쳤다.
명의 주원장은 우리 동방사람(大震之人)이다 아니다 하나 그의 행동과 말을 살펴보면 내가 듣기로는 남쪽바다의 眞人이며 주(朱)씨의 시조(始祖)가 고주몽(高朱蒙)이다 라는 말이 분분하니 의심을 버리고 맞는 것을 찾으려니 괴롭도다.
※ 주원장(朱元璋)∶(1328∼1398) 중국 명(明)의 태조. 자(字)는 국서(國瑞). 안휘성(安徽省) 출생. 미천한 빈농(貧農)의 집에 태어나 원말(元末)의 혼란기에 홍건적(紅巾賊)의 1병졸에서 몸을 일으켜 장강(長江) 일대를 평정하고 남경(南京)을 점령 한(漢)민족을 재통일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했다. 관제(官制)를 개혁하고 재위 31년간에 안으로 다스리고 밖으로 쳐서 많은 치적(治績)을 올렸다.
※ 고주몽(高朱蒙)∶동명왕(東明王) B.C.58∼B.C.19(유리왕 1) 고구려의 시조. 재위 B.C.37∼B.C.19. 성은 고(高) 휘(諱)는 주몽‧추모(鄒牟)‧상해(象解)‧도모(都慕)‧동명성왕(東明聖王). 아버지는 동부여왕(東夫餘王) 김와(金蛙)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 류화(柳花).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죽고 김와가 즉위하여 류화를 부인으로 삼았으나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해모수(解慕漱)와 가까이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류화를 궁실에 유폐하였다. 류화는 햇볕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와 성장하니 주몽(부여의 속어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 불렀다. 김와의 아들 7형제의 재주가 모두 주몽만 못하였고 왕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남 대소(帶素)는 여러 형제와 신하들과 같이 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난(亂)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구려 성(姓)을 고(高)라 하였다. B.C.34(유리왕 4)에 성곽궁실(城郭宮室)을 짓고 B.C.32 행인국(荇人國)을 멸망시켰으며 B.C.27 북옥저(北沃沮)를 합쳤다. 죽은 뒤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14)
曰 人當以神聖之道 爲師一節之士 不足學也
왈 인당이신성지도 위사일절지사 부족학야
사람은 마땅히 道로써 신성(神聖)에 이르며 스승이 하나의 절개 있는 선비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배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15)
曰 凡治國治家 處會之法 不可君子小人勢同 氷炭同處必爭 一爭之後 小人必勝 君子必敗 何者小人
왈 범치국치가 처회지법 불가군자소인세동 빙탄동처필쟁 일쟁지후 소인필승 군자필패 하자소인
貪利忍恥擊之難去 君子 潔白重義 阻之則 引去
탐리인치격지난거 군자 결백중의 조지즉 인거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다스리는 법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형세가 같지 않다. 얼음과 숯[氷炭]이 같은 곳에 있으면 반드시 싸우니 한 번 싸운 뒤에 소인이 반드시 이기고 군자는 반드시 패한다. 어떠한 사람이 소인(小人)인가? 이익을 탐하고 치욕을 참으며 쳐서 어려우면 도망을 가나 군자는 큰 뜻을 지니고 깨끗하고 행실이 바르며 어렵더라도 의로써 이끌어 간다.
(16)
曰 天之度數之循環正理 詳載在於神祖命祭天之時 藏于大太 白岩石間 後天必有索用之神人
왈 천지도수지순환정리 상재재어신조명제천지시 장우대태 백암석간 후천필유색용지신인
宋之世所謂觀天曆法 芽於天書 然未得縱詳也
송지세소위관천역법 아어천서 연미득종상야
하늘의 도수(度數)는 바른 순환의 이치이며 神祖명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큰 태백, 백석간에 감추어 두었으니 후천에 신인(神人)이 반드시 찾아 사용할 것이다. 송나라 때 이른바 관천역법(觀天曆法)도 天書에서 처음 생겼으나 아직 얻지 못하여 자세히 모른다.
(17)
曰 人之禽氣修精 在淸直勇 淸而不耀 直而不激 勇而能溫 是人 正大心法
왈 인지금기수정 재청직용 청이불요 직이불격 용이능온 시인 정대심법
사람이 氣를 사로잡아 정(精)을 닦음은 맑고 곧은 용맹함에 있으며, 맑게 빛나는 것이 아니며 과격하지 않고 용맹하니 능히 온화한 사람이며 이것이 올바르고 큰 심법(心法)이다.
(18)
曰 世人以官爵爲榮 乃知道者之所笑然 贈諡追奪之醜行 始于趙宋氏而鄙陋莫甚 作史者往往以宋爲中原
왈 세인이관작위영 내지도자지소소연 증시추탈지추행 시우조송씨이비누막심 작사자왕왕이송위중원
主大不經矣 我國之人 多稱趙宋 然趙氏之殺弟戮侄 而家法稱美可乎 眞不思之甚也.
주대불경의 아국지인 다칭조송 연조씨지살제착질 이가법칭미가호 진불사지심야.
세상 사람들은 벼슬로 영화(榮華)를 판단하나 道를 아는 사람은 웃으며 ‘그렇다’ 하는 바이며 거칠고 경솔히 행동하여 죽은 사람의 시호를 주기도하고 빼앗기도 한다. 처음 시작은 조씨이니 행동이 천하고 맘이 인색한 것이 극히 심했으며 역사가들은 왕왕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으로서 중원(中原)의 주인이 된다고 하나 이치에 맞지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많이 조광윤 송태조를 일컫는다. 그러나 조씨는 아우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어리석은 일을 했으며 이런 가법(家法)이 아름답다 할 수가 있는가? 참으로 생각 없는 것이 심하다
(19)
曰 余於壬辰之亂 隱居九月山 淸修菴 經過其亂之有世 癸巳二月 移居伽倻山 而經三年 其間詳聞諸道 有兵亂之極
왈 여어임진지난 은거구월산 청수암 경과기난지유세 계사이월 이거가야산 이경삼년 기간상문제도 유병난지극
欲一次出世 救衆生則 先生曰 此乃天運 非知道者所關 余問曰 此亂將何如乎 先生曰 余思之 有神通謀略者
욕일차출세 구중생즉 선생왈 차내천운 비지도자소관 여문왈 차난장하여호 선생왈 여사지 유신통모략자
無幾人而 只有郭再祐 李舜臣 趙憲 權慄 金德齡諸輩 舜臣憲慄 略通天文地理 兵機之學 別無神妙之術 德齡
무기인이 지유곽재우 이순신 조헌 권율 김덕령제배 순신헌율 약통천문지리 병기지학 별무신묘지술 덕령
小有神術 薄福之人 必不成功 且性情偏狹 難終命 趙李輩 亦運蹇 不得其命 但再祐承其母之神術
소유신술 박복지인 필불성공 차성정편협 난종명 조이배 역운건 부득기명 단재우승기모지신술
必見太平而終其命矣 今番之亂 國終無事 五六之後 必更有事於四八之間 此亂躡跡 則兵不血忍權歸其手矣
필견태평이종기명의 금번지난 국종무사 오륙지후 필경유사어사팔지간 차난섭적 즉병불혈인권귀기수의
大震古彊之盡 入其圖籍 後運回于神人之邦矣
대진고강지진 입기도적 후운회우신인지방의
나는 임진(1592년)왜란의 난리에 구월산 청수암(淸修菴)에 살았다. 그 난리에 세상에 있어 사건이 지나가는 모양을 보고 들었으며 계사(단기 3926, 1593년)년 2월에 가야산으로 옮겨 3년을 지내며 그사이 모든 길로
상세히 들으니 병난의 극함이 있어 한 차례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구하려고 하였다. 자하진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하늘의 運이니 道를 아는 사람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고 하셨다. 내가 물어 말하기를 “이 난리는 앞으로 어떻겠습니까?”
스승(자하진인)께서 말씀하옵기를 내 생각으로는 신통모략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만 곽재우 이순신 조헌 권률 김덕령 등 여러 무리가 있다. 순신 헌 률은 천문 지리를 약간 통했고 병기(兵機)의 학문은 다른 신묘(神妙)의 술(術)은 없도다. 덕령이 조금 신술이 있으나 복이 엷은 사람이라 반드시 공을 이루지 못하며 또한 성정이 편협해서 천명(天命)을 마치기 어렵다. 조헌과 이순신 무리는 또한 운이 험하여 그 목숨을 얻기 어렵다. 다만 곽재우는 그 어머니의 신술(神術)을 이어 받아 반드시 태평을 보고 그 천명(天命)을 마친다.
이번의 난리에 나라는 마침내 아무 탈 없으며 30년 뒤에 반드시 사변(事變)이나 큰 사건이 다시 동쪽과 서쪽 사이에 있을 것이며 병사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참으니 권리(權利)가 다시 수중으로 들어오는 자취를 밟게 된다. 우리나라 옛 강토가 다하여 그 지도(地圖)와 호적(戶籍)이 들어오니 뒤에 운이 돌아와 신인(神人)의 나라가 된다.
※ 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1617(광해군 9) 조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字)는 계수(季綏) 호(號)는 망우(忘憂)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현풍(玄風). 황해도 관찰사 월(越)의 아들.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여러 고을이 연이어 함락되고 임금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의령(宜寧)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싸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서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다. 정유재란(1597) 때도 각군(各郡)이 모조리 함락되었지만 곽재우는 끝까지 의령을 지켰으며 그 뒤 찰리사(察理使)‧절도사(節度使)를 지냈고 1609(광해군 1)에 영남절도사‧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12(광해군 4)에 서울로 불려가서 부총관(副摠管) 좌윤(左尹)을 거쳐 함경감사(咸鏡監司)를 지냈다. 문헌∶『지장집략(誌狀輯略)』.
※ 이순신(李舜臣)∶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때의 명장(名將) 자(字)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변(邊)의 후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 1576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으며 발포만호(鉢浦萬戶)를 거쳐 1586년(선조 19)에 사복시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어 그해 가을 적은 병력으로 호인(胡人)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순신은 홀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명을 탈환하였고 그 일로 해임되었다. 그뒤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珖)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류성룡(柳成龍)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滿浦)첨사‧진도군수(珍島郡守)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함대를 이끌고 적의 수군과 싸워 도처에서 격파했으니 제1차는 옥포(玉浦)‧적진포(赤珍浦)에서 제2차는 사천(泗川)‧당포(唐浦)‧율포(栗浦)에서 제3차는 한산도(閑山島)‧안골포(安骨浦)에서 제4차는 부산포(釜山浦)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두며 완전히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조정에서는 위의 공으로 그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주고 최초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임명 그러나 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1595년(선조 29) 2월 서울에 압송 고문 끝에 사형을 받게 된 것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반대로 사형이 면제되어 4월 1일 권률(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12척의 배로써 8월 15일 적의 대부대를 명량(鳴梁)에서 대파하고 11월 18일 노량(露粱)에서 적을 섬멸하였으나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순신은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위대한 인물이니 명(明)나라 진인(陳璘)도 그를 평하여 <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그를 칭찬하였다. 선조는 특사를 보내어 이를 조문 시호를 내리고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의 호를 주어 덕풍군(德豊君)에 봉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고향에는 충신문(忠臣門)을 세우고 정조(正祖) 때에는 영의정을 추증 임금이 친히 지은 비문을 하사하였다.
※ 조헌(趙憲)∶서기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의병장. 자(字)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 본관은 백천(白川). 응지(應祉)의 아들. 1567년(명종 22) 식년 문과에 급제 교서관(校書館)에 속했다가 정주교수(定州敎授)와 파주(坡州)교수 1572년(선조 5) 홍문관정자(正字)로 왕의 불공(佛供)이 옳지 않음을 극간(極諫)하다 파면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의 따를만한 것을 조목조목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뒤에 박사(博士) 호‧예 이조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통진(通津)현감으로 잘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내노(內奴)를 취조중 장살(杖殺)하고 부평(富平)에 귀양갔다. 1581년(선조 14)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全羅都事)로 나가 소(疏)를 올려 연산군 때 공안(貢案)으로 민폐가 되는 점을 개혁할 것을 청하고 율곡(栗谷)등 어진 선비들과 깊이 사귀었다. 1582년 보은(報恩)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충(表忠)할 것을 청하고 1586년 공주제독(公州提督)이 되어 선비들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원근(遠近)에서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는 등 공이 있었으나 순찰사(巡察使) 윤선각(尹先覺)의 시기를 받고 홍성(洪城) 지방에 옮겨가서 의병을 모아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금산(錦山)에서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적과 싸우다 700 의병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율곡의 문인(門人)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으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율곡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행조(行朝)에서는 봉상첨정(奉常僉正)에 임명 이에 또 이조참판동지경연 의금부춘추관사(吏曹參判同知經筵 義禁府春秋館事)에 추증 1604년(선조 37) 이조판서를 가증(加贈)하고 그 사당이 설립 1609년(광해군 1) 표충(表忠)이라는 액(額)이 하사 1663년(현종 4) 고경명(高敬命)‧류팽로(柳彭老)와 함께 모신 금산 순의단(殉義壇)에 액(額)을 하사 1734년(영조 10) 일찌기 그가 질정관(質正官)으로 있던 1574년(선조 7)에 수사(手寫)한 「조천록(朝天錄)」이 왕명으로 간행 1754년(영조 30) 영의정이 추증 뒤에 공자묘(孔子廟)에 함께 모셨다. 그는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사충신(壬辰四忠臣)의 하나다.
※ 권률(權慄)∶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선조 때의 도원수.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본관은 안동(安東). 철(轍)의 아들. 1582년(선조 15) 식년(式年) 병과(丙科)에 급제 예조좌랑‧호조정랑의 벼슬을 지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광주(光州)목사로 군병을 모집하여 방어사 곽영(郭嶸)에 예속되었다. 용인(龍仁)싸움에서 패했으므로 다시 광주(光州)에 가서 천여 명의 군병을 모집하여 남원(南原)싸움에서 적을 대파하고 나주(羅州)목사가 되어 부임전에 전라도순찰사가 되었다. 전주에서 병사 만 여명을 인솔하고 수원 독산(禿山)에 진치고 적의 서진(西進)을 막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어검을 하사하여 군율을 엄정하게 하였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의 싸움에서는 2천 3백명의 관군과 오백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왜병 2만 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첩(大捷)의 공으로 6월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전군(全軍)을 지휘 1596년 충청도관찰사에 취임하였고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의 하사(下賜)를 받았다.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을 추증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의 추봉(追封)을 받았다.
※ 김덕령(金德齡)∶1567(명종 22)∼1596(선조 2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字)는 경수(景樹)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본관은 광산(光山). 붕섭(鵬燮)의 아들. 어려서 글을 배워 장성하면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1593년(선조 26)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돈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가서 왜병의 호남 진출을 막고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걸쳐 대군을 무찔렀다. 호익장군(虎翼將軍)이라고 사호(賜號)를 받았으나 1595년(선조 28)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 적의 책략으로 적장과 통한다는 말이 나와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에 지쳐 옥중에서 죽었다. 1681년(숙종 7) 그 억울함이 알려져 병조판서로 추증(追贈)되고 광주(光州) 의열사(義烈祠)에 배향(配享)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20)
曰 戊子之歲 余侍坐先生 先生偶然歎曰 余觀天象 東洋不過五六年 大有兵火 五十年間 人不得安靜之志 然
왈 무자지세 여시좌선생 선생우연탄왈 여관천상 동양불과오륙년 대유병화 오십년간 인부득안정지지 연
西洋不過三十年 一大革命 人畜多傷 其時東洋 別無大損 年當赤鼠 天下大一動之象 而繼此五年
서양불과삼십년 일대혁명 인축다상 기시동양 별무대손 년당적서 천하대일동지상 이계차오년
선人鬼同路矣 生者幾何 汝亦知之乎 余起而問救人之道
선인귀동로의 생자기하 여역지지호 여기이문구인지도
무자(戊子)년에 나는 스승(자하진인)을 모시고 앉았는데 스승께서 뜻밖에 탄식하여 말씀하시옵기를 내가 하늘의 상을 관찰하니 동양은 300년을 지나지 않아 큰 병화가 있으며 50년간 사람들이 편안하고 조용한 뜻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서양은 30년을 지나지 못하여 하나의 큰 혁명으로 사람과 가축이 많이 다치며 그 때 동양은 큰 손해는 별로 없고 병자(丙子)년에 이르면 온 누리가 큰 하나로 움직이는 상이며 이어서 50년은 되면 사람과 귀(鬼)가 같은 길을 구하도다. 살아있는 사람은 어떠한가? 너는 또한 알겠느냐?’ 하셨다.
나는 일어나 사람을 구하는 길(道)을 여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