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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
봉군(封君) |
휘(諱) |
시호(諡號) |
세(世) 파(派) |
1 |
순평군(順平君) |
우기(于器) |
문순공 |
5세 1파 |
2 |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
문개(文凱) |
문의공 |
5세 2파 |
3 |
순흥군(順興君) |
목(牧) |
6세 1파 | |
4 |
순성군(順城君) |
천선(千善) |
양정공 |
6세 2파 |
5 |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
축(軸) |
문정군 |
6세 3파 |
6 |
순흥군(順興君) |
집(輯) |
6세 3파 | |
7 |
순성군(順城君) |
원숭(元崇) |
문혜공 |
7세 1파 |
8 |
죽성군(竹城君) |
원형(元衡) |
문혜공 |
7세 1파 |
9 |
탐진군(耽津君) |
원린(元璘) |
문렬공 |
7세 1파 |
10 |
순성군(順城君) |
손주(孫柱) |
경혜공 |
7세 2파 |
11 |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
종원(宗源) |
문간공 |
7세 3파 |
12 |
오성군(鰲城君) |
우(祐) |
문충공 |
8세 1파 |
13 |
흥녕군(興寧君) |
면(勉) |
문정공 |
8세 1파 |
14 |
안원군(安原君) |
처(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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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2파 |
15 |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
경공(景恭) |
양도공 |
8세 3파 |
16 |
영원군(寧原君) |
숭직(崇直) |
10세 3파 | |
17 |
안천군(安川君) |
숭효(崇孝) |
10세 3파 | |
18 |
순계군(順溪君) |
세복(世復) |
16세 1파 | |
19 |
순양군(順陽君) |
몽윤(夢尹) |
17세 1파 | |
20 |
순원군(順原君) |
응창(應昌) |
18세 1파 |
1. 순평군 안우기(安于器)
문성공 안향(安向)의 아드님으로서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01년(충렬왕 27)에 국학좨주(國學祭酒)로 최응(崔凝)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고, 1304년 우부승지, 이듬해 밀직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지밀직(知密直)으로 박사 유연(柳衍) 등이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1만800권을 검열하였다.
1316년 밀직부사 겸 대사헌을 거쳐 1329년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상호군(上護軍)에 오르고 1329년 65세로 돌아 가셨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2. 흥녕부원군 안문개(安文凱)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로 원나라에 불리어 가 4년동안 억류되어 있었을 때 함께 있으면서 왕을 위한 경비를 국내에서 염출하여 조달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에서 종정부(宗正府)에 가두었다. 왕을 따라 귀국한 뒤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고, 1327년(충숙왕 14)에는 왕이 원나라에 있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의 호를 받았다.
3. 순흥군 안목(安牧)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1330년(충숙왕 즉위년) 대언(代言) 이군해(李君侅)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그뒤 밀직제학·밀직부사를 거쳐 1348년(충목왕 4)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가 되고, 1352년(공민왕 1)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다.
뒤에 순흥군(順興君)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4. 순성군 안천선(安千善)
고려 숙종때 문과에 급제하셨으며 정당문학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셨고 순성군에 봉해졌다.
5. 흥녕부원군 안축(安軸)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년)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그곳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학정(成均學正)·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관동와주 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전법판서·감찰대부(監察大夫),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를 지내고,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차례로 지내고 1347년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행정에 참여하였다.
그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개찬하였고, 또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한편,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關東別曲〉과 〈죽계별곡 竹溪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6. 순흥군 안집(安輯)
흥녕부원군 안축(安軸)의 동생으로 고려수충보리공신(高麗輸忠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과 보문관대제학을 지내셨으며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를 하시다.
7. 순성군 안원숭(安元崇)
문숙공 안목(安牧)의 장남으로 광정대부 정당문학(匡靖大夫 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을 지내셨다.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여 문교정책에 공헌함으로써 순성군에 봉해졌다.
8. 죽성군 안원형(安元衡)
문숙공 안목(安牧)의 차남으로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을 지내신 공신이며 신 죽산안씨의 시조(始祖)가 되셨다.
◈ 시조인 안원형(安元衡)은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 가공인물이란 논란이 있다.
9. 탐진군 안원린(安元璘)
문숙공 안목(安牧)의 삼남으로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檢校中樞府事)로 탐진안씨의 시조가 되셨다.
◈ 시조인 안원린(安元璘)은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 가공인물이란 논란이 있다.
10. 순성군 안손주(安孫柱)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중랑장(中郞將)을 거쳐 찬성(贊成)을 지내고 순성군에 봉해졌다.
11. 흥녕부원군 안종원(安宗源)
문정공 안축(安軸)의 아들로서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흥녕부원군, 대사헌,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補國崇錄大夫), 영삼사사(領三司事), 진현관태학사(進賢舘太學士) 등을 하셨다.
12. 오성군 안우(安祐)
문렬공 안원린(安元璘)의 장남으로 홍건적과 싸워 평정하였고 문무겸전의 구국충신(救國忠臣)이다.
◈ 탐진안씨의 시조인 안원린(安元璘)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부자지간의 출생 년대가 맞지 않는다.)
13. 흥녕군 안면(安勉)
사간원정언(사간원정언)으로 관직에 나아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 대승상(大丞相)을 하셨고 , 흥녕군으로 피봉되셨다.
◈ 신 죽산안씨 2세로 순흥안씨와 관련이 없으며 관직이 역사적 사실이 없다는 논란이 있다.
14. 안원군 안처(安處)
이조판서 청백리(淸白吏)
15. 흥녕부원군 안경공(安景恭)
할아버지는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안축(安軸)이고, 아버지는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오른 안종원(安宗源)이다.
1365년(공민왕 14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산원(散員)·낭장 겸 사헌규정(郎將兼司憲糾正)을 거친 뒤 1376년(우왕 2년)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속해서 전리좌랑(典理佐郎)·전법좌랑(典法佐郎)·사헌지평(司憲持平)·예의정랑(禮儀正郎)을 역임하였으며, 1382년에는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있으면서 합주 (陜州)에서 사노(私奴)들이 검대장군(劍大將軍)·초군장군(抄軍將軍)·산군장군(散軍將軍) 등을 칭하고 일으킨 난을 진압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판통례문사 진현관제학(判通禮門事進賢館提學)·판전교시사 지제교 예의판서 (判典校寺事知制敎禮儀判書)를 거쳐 전법판서가 되었고, 1392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좌대언에 올랐다. 이해에 조선건국에 참여하였으며, 곧 중추원도승지에 제수되고 개국공신이 책봉될 때 3등공신이 되었다.
1393년(태조 2년)에는 사헌부대사헌 겸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 (司憲府大司憲兼都評議使司寶文閣學士)에 올랐고, 같은 해에 전라도관찰출척사 (全羅道觀察黜陟使)로 나아갔으며, 이듬해에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1406년(태종 6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임명되었다가 곧 판한성부사 (判漢城府事)로 옮겼으며, 1410년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다.
1416년 보국숭록대부 집현전대제학(輔國崇祿大夫集賢殿大提學)에 특수(特授)되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진작(進爵)되었다.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16. 영원군 안숭직(安崇直)
정숙공 안순의 장남으로 판내자사의 벼슬을 지내셨다.
17. 안천군 안숭효(安崇孝)
정숙공 안순의 4째 아들로 대사헌, 경기, 충청, 전라 삼도의 관찰사 엮임하셨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호조참의를 지내고, 1454년(단종 2년)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덕녕부윤(德寧府尹)을 역임하면서 세조의 집권에 협조하여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대사헌에 제수되어 관기의 확립에 힘쓰고, 이어서 공조참판·호조참판 등을 지내면서 행정실무를 주관하였다.
그뒤 중추원부사로서 한직에 머물러 있었는데, 충청도지역에 재변이 심각하여 재덕을 겸비한 인물이 요청되자 이에 선발되어 1459년(세조 5년)동지중추원사 겸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유망민에 대한 진휼사업을 폄으로써 그 효과가 컸다. 성실하여 행정실무에 빈틈이 없었고, 민정에 관심이 많았다.
18. 순계군 안세복(安世復)
풍저창직장을 지내셨으며 보조공신 좌찬성에 추중되셨다.
19. 순양군 안몽윤(安夢尹)
순계군 안세복의 2째 아들로 음보(조선 후기에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제로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등용됨)로 군직에 나가 1592년(선조 25년)임진왜란 때 왜군을 토벌하고, 선조가 8도에 내린 명에 의하여 부적행위(附敵行爲)를 하며 구날(構捏)을 일삼던 왜역관 김덕회(金德澮)·김응관(金應灌)을 목베어 행재소에 보냈다. 전주 분조(分朝)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9년에 부장(部長)으로 창덕궁을 지켰으며 그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남포현감·옥구현감·안동판관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일을 잘 처리하여 함안군수에 승진하고, 1612년(광해군 4)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이듬해에 우림장(羽林將), 1618년 첨지중추부사, 1622년 자산군수가 되어 조방장(助防將)을 겸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수령들이 거의 쫓겨났으나 그만은 홀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전부우협장(前部右協將)으로 군량보급에 힘쓰고 서울 안현(鞍峴)싸움에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3등으로 순양군(順陽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숙천부사, 1626년 부총관에 이어 김해부사·중화부사·전라수사 등을 거쳐 1643년 경상우병사가 되고, 1646년 자헌계(資憲階)에 올라 도총관을 겸하였다.
1648년 포도대장, 이듬해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사후에 우의정으로 증직되고 순양부원군으로 추봉되셨다.
20. 순원군 안응창(安應昌)
선산부사를 역임했고 봉림대군의 사부였으며 우리 순흥안문의 종사(宗事)에 크게 공헌하신 선조로 350여년전에 순흥 관향지의 향려단, 추원재의 창건, 영모암의 개수, 추밀공묘소 정화, 사현정비 건립, 참판공 묘 표석 찬지(撰誌), 서파공행장 편찬, 순흥안씨 기해보(己亥譜) 편찬 등의 순흥안씨 고양사업(高揚事業)에 공헌(貢獻)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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