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우리에게는 다만 중국 당ㆍ송 시대 8대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소식(蘇軾. 1036-1102년, 거사호는 東坡)의 삶을 세밀히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어려운 이웃[백성]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일생을 보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이런 그의 삶의 모습은 종교와 종파를 떠나 부정부패가 만연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판단되어 몇 가지 일화들을 통해 통보선(洞布禪)의 달인으로서의 그의 면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한 부록으로 그의 중요한 이력도 함께 소개를 드립니다.
고아(孤兒)들을 입양(入養)보내다
밀주(密州) 태수(太守)로 부임해 기근이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느날 성 밖으로 시찰 나갔다가 길옆 풀밭에서 버려진 아기를 발견하고 크게 가슴 아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더 자주 성 밖을 시찰하며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관아에서 키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관아에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그 수가 불어나자 부유하지만 자식이 적은 집에 고아들을 입양 보내면서 관가의 곡식창고에서 일정양의 쌀을 부양비로 보조하는 지혜로운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천하태평 소동파
<거사전(居士傳)>에 따르면, ‘오대시안(烏臺詩案)’의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신종 황제가 사람을 시켜 몰래 그를 엿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당시) “소동파[자담(子瞻)]는 태평하게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코고는 소리가 옥사 밖에까지 들렸습니다.” 하니 신종 황제 가로되, “짐은 (이미) 소동파[蘇軾]가 가슴속에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음을 알고 있느니라.” 그리고는 그를 황주(黃州)에 단련부사(團練副使)로 보냈는데,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는 출옥(出獄) 후 크게 느낀바 있어 죽는 날까지 불살계(不殺戒)를 지켰다고 합니다.
백성을 위한 병원을 세우다
소동파가 항주에 부임했을 때, 중국 최초로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안락방(安樂坊)’이란 사설 병원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는 직접 약을 조제해 백성들을 치료하기도 했는데, 이 약 값은 한 첩당 거의 거저나 마찬가지인 1문(文)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설 병원이라 병원 운영을 위해 기금 마련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한 지역 유지가 축의금 명목으로 뇌물성이 짙은 150냥의 은자를 주었는데,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난 소동파가 이 돈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자 오히려 돈 준 유지가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소동파로부터 이 돈의 용도에 대한 편지가 왔습니다. 거기에는, ‘자네의 이름으로 안락방을 확장하는데 잘 썼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군더더기 : 아직 기부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경우 뇌물성이 짙은 선물을 받았을 때 유혹당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소동파의 사례처럼 준 사람의 이름으로 공익법인 등에 기부하는 것도 조기 기부문화 정착을 위한, 지혜로운 한 방안이라 판단됩니다.
범진(范鎭)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내 집으로부터 겨우 팔십여 보 떨어진 곳에 바로 큰 강이 흐릅니다. 그 강물의 반은 아미산(峨眉山)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므로 바로 내 고향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강과 산, 달과 구름에는[江山風月]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을 즐길 여유가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니 공의 새로 꾸민 정원과 나의 이 대자연의 정원과 어찌 비교가 되겠소! 여름과 가을마다 정원 꾸미는데 드는 비용이며, 그밖의 용역비 등을 절약할 수 있으니 공께도 이런 정원을 권하고 싶구려!
군더더기 : 한가로이 감상할 여유도 없다면 굳이 비싼 관리 비용이 드는 큰 정원을 소유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돈으로 어려운 이웃 돕는데 기부하면 어떻겠소? 하는 권고의 시라고 판단됩니다. 사실 요즈음 국립공원이나 정비된 둘레길들을 포함해 도처에 널려 있는 ‘강산풍월’은 본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언제든지 즐기고자 하면 즐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민들을 위해 개발한 동파육(東坡肉)
소동파가 그의 나이 44세 때 황주(黃州)로 6년간 유배되면서 그곳에서 황무지를 일구며 가난하게 살던 시절, 그는 적은 돈으로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떠오른 생각이 바로 ‘동파육’이란 돼지고기 찜 요리였습니다. 참고로 송나라 주자지(周紫芝)가 쓴 <죽파시화(竹坡詩話)>라는 책에 소동파가 돼지고기를 즐겨 먹다가 지은, ‘식저육(食猪肉)’이란 제목의 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황주黃州의 맛좋은 돼지고기, 값은 진흙처럼 싸지만
부자는 거들떠보지 않고, 가난한 이는 어찌 요리할 줄 모르네.
적은 물에 돼지고기를 넣고, 약한 불로 충분히 삶으니
그 맛 비길 데 없어 아침마다 배불리 먹네.
그 누가 어찌 이 맛 알리오?
군더더기 : 사실 소동파는 당시 호수 공사에 동원된 일꾼들이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되게 일하는 모습을 측은하게 여겨, 이들을 위해 값싼 돼지고기를 재료로 ‘동파육’이란 요리를 만들어 냈는데, 이 요리가 바로 오늘날 항주의 대표적인 요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찬불게와 헛소리
소동파가 황주(黃州)에 머물 때 강 건너 남쪽에 있는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계시던 불인요원(佛印了元, 1032-1098) 선사와 자주 시문을 주고받으며 교류했었는데, 한 번은 문득 다음과 같이 ‘팔풍취부동(八風吹不動)’이란 찬불게(讚佛偈)를 짓고는 불인 스님께 칭찬을 받을 목적으로 서동(書童)을 통해 전달해 드렸습니다.
(자비의) 백호광명(白毫光明)으로 온 우주를 비추고 계신
석가세존께 (무심無心히) 고개 숙여 절하게 되네.
팔풍(八風)이 불어도 추호도 흔들림 없이
황금빛 누런 방석 위에 단정히 앉아 계시는구나.
稽首天中天 계수천중천 毫光照大千 호광조대천
八風吹不動 팔풍취부동 端坐紫金臺 단좌자금대
그런데 불인 스님께서 찬불게를 받자마자 게송 아래 ‘헛소리[방비(放屁), 방귀소리]’라고 쓴 뒤에 바로 돌려보냈습니다. 소동파가 이에 크게 분노해 즉시 강을 건너 불인 선사께 가서, “석가세존을 찬양한 것에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불인 스님 가로되, “팔풍이 불어도 흔들림 없다고 하더니, ‘헛소리’라는 말 한마디에 바로 강을 건너 오셨군요!” 소동파 이 말을 듣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으며, 내 수양이 불인 선사께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군더더기 : 참고로 남송 시대에 임제종과 함께 번창 했던 운문종 계열의 불인 스님은 종파를 초월해 임제종의 동림상총 선사와 교류하였으며, 특히 여산(廬山)에 주석하시면서 소동파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여산결사운동을 전개하며 서민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고 합니다.
나의 성은 ‘칭秤’이요
소동파가 아직 크게 깨닫기 전, 어떤 선사보다도 더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만심에 차 있었는데, 한 번은 호북성(湖北省) 형남(荊南)에서 태수를 할 때 시골 선비 차림으로 당시 명성이 자자하던 옥천사라는 절의 승호 선사를 찾아가 실력을 검증하려다가 제대로 임자를 만난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승호(承皓) 선사께서 (먼저) 물었습니다.
“대인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
소동파[蘇軾] 가로되,
“나의 성姓은 ‘칭秤’이요.”
라고 하고는 곧 이어,
“천하에 내노라 하는 선지식들을 달아보는 사람이란 말이외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호 선사께서 ‘악!’하고 벽력같이 할喝을 하고 나서 가로되,
“악! 하는 이 소리는 그 무게가 얼마나 나가겠습니까?”
(여기에 이르자) 소동파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고 합니다.
동림상총 선사의 인가(印可)
그후 소동파는 임제종의 동림상총(東林常總. 1025-1091) 선사를 만나게 되는데, 상총 선사께서 “그대는 어찌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有情說法)만 들으려고 하느냐?” 하고 그를 꾸짖는 대목에 이르러 크게 깨치고는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한 수 지었다고 합니다.
계곡 물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고,
산의 모습이 어찌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이 아니겠는가!
溪聲便是長廣舌 계성변시장광설
山色豈非淸淨身 산색기비청정신
군더더기 : 그는 상총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의 세계에서 방온 거사와 함께 중국 2대 거사로 명성을 드날려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온(龐蘊) 거사에 관한 일화는 주로 통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선의 세계에 한정되어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반면, 동파 거사는 단지 그의 문장 때문이 아니라 통찰 체험을 바탕으로 나눔 실천을 죽는 날까지 지속했기 때문에 중국 백성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이 1000년이나 이어져 오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검은 대나무와 붉은 대나무
소동파가 어느 날은 집에서 좌선을 하던 중에 갑자기 (대나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 곧 탁자 위를 살피니 먹은 떨어졌고 주사(朱砂)로 만든 붉은 염료만 있었는데, 즉시 손으로 붓을 쥐고 먹 대신 주사로 붉은 대나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사람이 묻기를, "다만 지금껏 대나무는 푸르다고 여겨왔는데, 어찌 붉은 대나무를 그리셨습니까?" 소동파가 반문하기를, "세상에 역시 검은 대나무는 없지만, 이미 검은 먹으로 대나무를 그려왔으니, 이렇게 따지고 보면 어찌 붉은 색으로는 대나무를 그리지 못한단 말이요!"
군더더기 : 이제 이 일화 하나만 보더라도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재가 선사로서의 풍모를 잘 엿볼 수 있다고 판단이 됩니다.
소동파의 마지막 한마디
‘동파선생묘지명(東坡先生墓誌銘)’에 의하면, 소동파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1102년 7월 18일 세 아들을 불러, "나는 일생동안 추호도 악행(惡行)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다음 절대로 지옥(地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부디 울며불며 통곡(痛哭)하지 말라![오생무악(吾生無惡) 사필불타(死必不墮) 신무곡읍(慎無哭泣)]"는 최후의 한마디를 남겼다고 합니다.
군더더기 : 이 구절을 대하노라면 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리에 마무리하며 인류 평화에 크게 기여했던 윈스턴 처칠 경의 “나는 다시 태어나도 내가 살아온 인생길을 그대로 다시 살고 싶다!”라는 유언이 떠오릅니다. 본질적으로 똑같은, 이 얼마나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당당한 외침입니까! 제 견해로는 간화선이란 틀까지 다 넘어선 사람들만이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일전어(一轉語)입니다. 사실 이 분들은 자식들에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물질적인 유산(遺産)의 탈법적인 증여가 아니라, ‘너희들도 나와 같이 당당한 삶을 치열하게 살아라!’라는 값진 유훈(遺訓)을 남긴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무리하는 글
임제종 양기방회-백운수단의 법맥을 이어받은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 선사는 오늘날 전 세계인들을 깊은 통찰체험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간화선(看話禪) 수행법의 원류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한편 임제종 황룡혜남-동림상총의 법맥을 이어받았으며, 법연 선사와 같은 항렬로 동시대를 호흡했던, 소동파(1036-1102) 거사의 치열했던 나눔 실천적 삶은 10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뜻 있는 후학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이 두 분들의 삶의 태도를 효율적으로 융합한다면, 함께 더불어 21세기를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동파선생묘지명(東坡先生墓誌銘)’ (1102)
팽제정(彭際靖) 지음, <거사전(居士傳)> (1775)
안영욱 역편, <소동파시선, 적벽부> (태학당, 1993)
곽노봉 편저, <소동파의 서예세계> (다운샘, 2005)
스야후이 지음/장연 옮김, <소동파, 선을 말하다>(김영사, 2006)
박영재 지음, <석가도 없고 미륵도 없네> (본북, 2011)
부록: 이력(履歷)
8세 때 소학(小學)에 입학. 22세 때 성시(省試)에 응시해 진사에 급제했는데, 이때 과거 시험답지에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하여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글을 제시해,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였던 구양수(歐陽脩)로부터 칭찬을 받음. 26세 때 봉상부판관(鳳翔府判官)에 임명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
29세 때 황실이 수장하고 있는 진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는 직사관(直史館)의 직책을 담당하며 불서(佛書)를 즐겨 읽기 시작. 36세 때 항주(杭州) 통판(通判) 부임.
39세 때 밀주(密州) 태수(太守)로 부임하면서 항주와 다르게 빈곤과 기근을 도처에서 목격한 그는, 이때 비애를 느낌과 동시에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야겠다고 다짐함.
42세 때 서주(徐州)의 지주로 임명되고 황하가 범람하여 서주 이북 100리까지 수해를 당하자, 군대와 백성을 이끌고 운하를 정비하여 백성들을 안전하게 함.
44세 때 호주(湖州) 태수로 부임한지 3개월 만에 반대파의 무고로 유배의 길을 떠남.
46세 때 황주(黃州)에 도착해 지인의 도움으로 성 동쪽에 있는 작은 산비탈에 수십 무(畝)의 황무지를 개간해 생계를 겨우 꾸려감.
47세 때 황주(黃州)에 개간해 농사짓는 땅 옆에 동파설당(東坡雪堂)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했으며, 이때 적벽부(赤壁賦)를 짓고, 또한 이 무렵 참선 수행에도 몰입함.
50세 때 다시 관리로 복직됨. 54세 때 항주(杭州)의 태수로 부임하며 백성을 위한 일에 헌신함. 57세 때 양주(揚州) 태수로 부임. 같은 해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됨.
59세 때 반대파의 무고로 혜주(惠州)로 안치되나 유배 중에도 실권을 가진 지역 관리들과 교우하며 백성을 위한 일에 신명을 다 바치며 지역 하급 관리들의 부정 바로잡기, 혜주에 두 대교 건축하기, 광주(光州)에 병원 설립하기, 도시를 개조해 홍수 막기 등을 건의하여 실행에 옮김.
65세 때 복직되었으며 다음해인 1102년 7월 28일 상주에서 입적入寂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