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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역설‧3
역설 정신과 개념의 재검토
박대현(문학평론가)
1. 역설의 사유 구조와 개념의 기원
역설(paradox)에 대한 이해는 흔히 그 어원에 집중된다. 역설은 para(넘어서는)와 doxa(의견)의 합성어다. 모순된 진술을 통해 상식적 의견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역설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정의는 ‘para’(넘어서는)의 구체적인 의미를 간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para’의 중요한 의미는 역설이 인간 지식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역설은 인간 지식의 한계가 분명히 작용할 때 발생한다. 인간의 지식에 한계가 없고 전지전능한 신의 차원이 허락된다면, 인간 세계에 역설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역설은 이 세계에 내재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언어와 지식의 한계를 전제로 한다. 인간의 언어와 지식이 모종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할 때 인간 이성의 논리적 파열로 인한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설은 인간 지식의 한계에 육박하고 그 너머(para)를 탐사하고자 하는 사유의 논리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시론에서 역설의 가치를 처음으로 간파한 이는 클리언스 브룩스(Cleanth Brooks)다. 브룩스는 역설이 시인의 언어 속성 자체 내에서 생겨난다고 하면서 시의 언어가 역설의 언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시의 언어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과학의 언어와 달리 꾸준히 상호수식하면서 사전적인 의미를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고, 이 파괴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새로운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이다.필립 휠라이트는 클리언스의 관점을 이어받아 역설의 구조적 본질을 논리학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역설을 세부 개념으로 분류한 이로 평가받는다. 그는 역설을 표층적 역설과 심층적 역설로 구분하고, 심층적 역설을 다시 존재론적 역설과 시적 역설로 구분한다. 필립 휠라이트의 이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설의 구조적 본질에 대한 천착이다. 휠라이트는 역설의 조건으로서 ‘모순율로부터 자유’를 언급한다. 모순율은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논리학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휠라이트는 논리학의 관점에서 시의 역설을 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론의 역설 개념은 코울릿지의 ‘상상력’ 이론에서 시작하여 리차즈의 아이러니 이론으로 발전하고 다시 이것이 브룩스와 휠라이트의 역설 개념으로 발전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코울릿지의 상상력은 서로 반대되거나 이질적인 성격의 균형과 조화를, 리차즈의 아이러니는 반대되는 충동의 화해와 평형을 시의 중심 원리로 삼고 있다. 리차즈의 이론이 코울릿지의 상상력 이론에서 나왔음이 물론이다. 브룩스는 시의 이질적인 충동을 모순으로 이해하여 시의 언어가 역설의 언어임을 천명하였고, 휠라이트는 논리학의 모순율 개념으로써 시의 역설 개념을 보다 자세히 규정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시의 역설 개념이 논리학적으로 설명되는 데 일정한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다. 시문학은 근본적으로 비논리성에 기반한 언어 예술이다. 역설은 서양 논리학에서 해명되지 못한 모순을 안은 논리적 궤변으로 간주되어 왔다. 논리학에서 다뤄진 역설 개념을 시문학에 적용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수를 가져온다. 시적 진술의 모순은 논리학의 엄밀한 모순 개념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 있어서의 역설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역설의 개념에서 벗어나 포괄적이고 창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역설은 보다 심화된 아이러니 개념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었으나, 브룩스와 휠라이트 이후로 논리학의 역설 개념이 시론에 도입됨으로써 역설은 아이러니와의 개념적 혼란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역설의 개념을 서구 논리학의 관점에서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2. 필립 휠라이트의 역설 개념과 역설의 근본 정신
1) 모순율 중심의 역설 개념과 그 의미
필립 휠라이트는 역설의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서구 논리학의 근본 원칙을 도입한다. 서구 논리학의 근본 원칙에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 있다.
동일률 | ‘어떤 명제가 참이면 그 명제는 참이다’, 즉 ‘A는 A이다’라는 의미. |
모순율 | ‘어떤 명제도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 즉 ‘A는 A가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 |
배중률 | ‘모든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즉 ‘A거나 A가 아니거나 이 둘 중 하나다’라는 의미. |
이 3가지 원칙을 어기게 되면, 논리의 정합성을 상실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3가지 원칙 가운데서 모순율이 보다 강조되어왔는데,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3가지 원칙 가운데 모순율을 강조한 데서 비롯된 전통이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모순율을 특히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형이상학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원리가 모순율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필립 휠라이트 역시 모순율을 중심으로 역설의 개념을 정의하는데, 역설을 모순율에 대한 도전이라고 분명히 진술한다.여기서 동일률은 차치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배중률이다. 필립 휠라이트는 배중률을 어긴 진술을 비확정적 언사(light statement; assertorial lightness)라고 하여 역설과 구분하였다. 즉 모순율을 어긴 것이 역설이고 배중률을 어긴 것은 그 진술이 명확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비확정적 언사’라고 한 것이다.
ⓐ | A는 죽은 것이고 동시에 살아있는 것이다. | 역설 |
ⓑ | A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다. | 비확정적 언사 |
휠라이트에 따르면, ⓐ 문장은 모순율을 어긴 역설에 해당하고, ⓑ 문장은 배중률을 어긴 비확정적 언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모순율과 배중률은 논리적 짝패를 이루는 원리이다. ‘A이면서 동시에 not-A일 수는 없다’는 모순율과 ‘A와 not-A 사이에 중간자는 없다’는 배중률은 하나의 벤다이어그램 속에 포함된다. 다시 말해 모순율과 배중률은 동일한 벤다이어그램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모순율을 어기면 배중률을 지킬 수 없고, 배중률을 어기면 모순율을 지킬 수 없다. 다치 논리(many-valued logic)가 아닌 이치 논리(two-valued logic)의 세계에서 배중률과 모순율은 상호간에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그럼에 불구하고 휠라이트의 역설은 오직 모순율에 근거하여 정의되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와 ⓑ 두 문장 모두 각각 모순율과 배중률을 어긴 역설로 이해될 수 있으므로, 역설과 비확정적 언사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오세영은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을 어긴 것 모두를 역설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과 비확정적 언사를 구분한 필립 휠라이트의 주장을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휠라이트가 역설을 비확정적 언사와 구분한 것은 논리학의 3가지 근본 원칙 중에서도 모순율을 강조해왔던 서구 논리학의 전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순율을 중심으로 한 역설의 개념 정의가 보다 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 문장은 ‘죽은 것↔살아있는 것’의 대립성을 통해 모순관계의 비논리성이 명확히 드러난다. 반면에 ⓑ 문장은 ‘죽은 것도 아님’과 ‘산 것도 아님’ 사이에 대립성보다는 상호교호성이 작용하고 논리적 해석의 여지 또한 남아있어서 진술의 비논리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필립 휠라이트가 모순율을 중심으로 역설 개념을 제시한 것은 역설을 보다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개념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역설의 근본 정신
필립 휠라이트는 모순율의 모순관계가 분명히 드러나는지의 여부에 따라 역설을 표층적 역설과 심층적 역설로 구분한다. ‘외견상의 모순관계’(a seeming contradiction)’에 근거하는 역설을 표층적 역설이라 하고, 외견상 잘 드러나지 않는 모순관계에 의한 역설은 심층적 역설로 간주한다. 즉, 심층적 역설은 표층적 역설과 달리 모순관계가 깊이 숨어 있어서 외견상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를 포괄한다. 인간의 논리 체계는 인간과 세계의 실재(reality)를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않다. 인간과 세계의 실재는 본질적으로 불명료한 상태로 남아 있다. 심층적 역설은 불명료한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며, 이때 논리적으로 모순된 언어의 뒤틀림(distortion)이 반드시 개입한다. 그래서 시인은 역설에 놀라기도 하지만 역설을 통해 논리를 훌쩍 넘어선 세계의 초월적 진리(truth)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역설의 어원을 환기할 수밖에 없다. para(넘어선)와 dox(의견). 상식적인 의견이나 주장을 넘어선 것이 역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인식 체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역설이다. 역설은 기존의 인식 체계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드러내고자 할 때 발생하는 논리적 체계의 파열음이다. 기존의 논리적 체계를 벗어난 세계를 드러내고자 할 때, 논리학의 근본 법칙이 붕괴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역설의 본질은 오늘날의 수리논리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수리논리학의 관점에서 “역설은 논리 자체에 따라 모순적 결론이 이끌어짐으로써 초래되는 이성의 붕괴현상”이다. 역설의 대표적인 예가 거짓말쟁이의 역설(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한 형태인 ‘이 문장은 거짓이다’와 같은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은 참이면서도 거짓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붕괴시킨다.이 역설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이 역설로부터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라는 경이로운 증명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 문장(a)은 거짓이다’(b)는 자기지시적 문장이다. ‘이 문장’ (a)가 자기지시적 문장 (b)를 의미한다고 할 때, 문장 (b)가 참이라면 문장 (b) 스스로 거짓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므로 결국 문장 (b)는 거짓이 된다. 반대로 문장 (b)가 거짓이라면 다시 문장 (b) 스스로 거짓이라고 선언한 것이 거짓이 되므로 문장 (b)는 참이 된다. 이러한 ‘참-거짓’(T-F)의 역설 사슬은 무한히 반복된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이 세계의 지적 체계의 근본적 균열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괴델은 ‘이 문장은 거짓이다’를 ‘이 진술은 증명가능하지 않다’로 변용한다. 이때 마찬가지의 역설 사슬이 무한히 반복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따르면, 무모순성이 가정된 어떤 형식체계라도 수많은 수학적 실체를 다 붙들지 못하며, 이러한 형식체계의 어느 것도 자기 무모순성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세계의 모든 지식을 인간의 형식 체계로 진기호화할 수 없고, 형식 체계로 기호화가 가능한 지식의 경우에는 반드시 무모순성을 필요로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형식 체계 내에서는 무모순성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무모순성의 증명 불가능성은 이 세계의 형식체계에 모순성이 내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 바깥에 이 세계의 형식 체계를 둘러싼 미지의 형식 체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의 형식 체계로부터 미지의 형식 체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순간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역설의 어원 그대로 이 세계 너머(para)로 침투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이성의 붕괴현상이 바로 역설이다. 역설은 인간의 형식 체계와 세계의 실재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발생하는 근본적 균열로서의 이성의 붕괴 현상이다.다시 말해 역설은 세계의 형식체계가 지닌 한계를 포월하여 저 너머의(para) 세계로까지 의미의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시의 역설은 이러한 역설의 의미를 근본 정신으로 삼는다.
3. 표층적 역설과 심층적 역설의 재검토
1) 표층적 역설과 정동(affect)
필립 휠라이트는 외견상 드러나는 모순은 표층적 역설로 간주한다. 표층적 역설은 심층적 역설에 비해 모순 여부를 명확히 판별할 수 있고 논리적인 유추와 설명이 충분히 가능한 역설이다.휠라이트가 제시하고 있는 “즐거운 장애”, “고통스러운 기쁨”, “다윈은 다윈주의자가 아니다” 등이 표층적 역설의 예다. 심층적 역설에 비해 표층적 역설은 논리적 유추가 비교적 손쉬운 편이다. 하지만 논리적 유추의 난이도는 주관적인 것이므로 표층적 역설과 심층적 역설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표층적 역설의 명확한 예는 주로 모순어법(oxymoron)을 통해서 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서 제시한 “즐거운 장애”와 “고통스러운 기쁨”이 그 예다. 몇 가지 흔한 예를 더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조지훈, 「승무」)
ⓑ 찬란한 슬픔의 봄을(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정지용, 「유리창」)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형기, 「낙화」)
위의 예 ⓐⓑⓒⓓ를 보면, ‘곱다↔서럽다’, ‘찬란함↔슬픔’, ‘외로움↔황홀함’, ‘소리 없음↔아우성’, ‘결별↔축복’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외견상 모순이 명확히 드러난다. 각각의 단어는 기존의 언어코드 내에 머물고 있으나, 서로 어울리기 힘든 단어의 조합이라는 모순어법을 통해서 기존의 언어코드로 형성되는 감정 체계를 흔들어버린다. 바로 거기서 정동(affect)이 출현한다. 시인이 신체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진술할 수 있는 언어 코드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기존의 언어코드의 모순적 결합을 통해 신체적 감정인 정동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이처럼 표층적 역설은 정서를 균열시키는 정동의 국면에 관계한다.
정동은 정서(emotion)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정서가 기존의 언어 코드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정동은 기존의 언어 코드를 벗어나는 감정 체계다. 정동이 신체적인 반응에 가깝다면 정서는 인지적인 해석과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신경과학에 따르면, 정서(emotion)는 사람들의 합의의 산물로서 발생하는 의미이고, 정동은 쾌감/불쾌감이나 평온/동요에 관련된 신체의 느낌에 해당한다. 신체의 느낌에 의미가 결합되기 이전의 것이 정동이고, 의미가 결합된 이후의 것은 정서에 해당한다.즉, 정형화된 인지적 해석은 매우 다양한 신체적 반응을 슬픔, 고통, 기쁨, 행복 따위로 규정해버리고 만다. 정동은 그러한 인지적 해석, 즉 코드화된 언어로부터 벗어난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는 정서가 아니라 정동을 구현해낼 때 시적 충격을 야기한다.
표층적 역설이 정동의 국면보다 의미의 국면으로 더 많이 나아가는 경우 심층적 역설에 보다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 삶의 심오한 존재론적 성찰로 이해된다면, 심층적 역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정진규, 「별」)나 “우리들의 사랑을 위해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서정주, 「견우의 노래」)와 같은 경우도 심층적 역설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심층적 역설에 정동이 전혀 없을 수 없듯이, 표층적 역설에도 “즐거운 장애”와 같이 의미론적 충격을 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표층적 역설은 일반적으로 모순어법을 통해 기존의 언어코드를 벗어나는 감정 체계, 즉 정동에 복무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2) 심층적 역설의 분석과 개념의 확장
심층적 역설은 존재론적 역설과 시적 역설로 나뉜다. 이 구분은 필립 휠라이트 이후로 한국 시론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구분법이다. 존재론적 역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쉽사리 확인할 수 없는 매우 신비롭고 다면적인 초월적 진실을 표현하는 역설이다. 반면에 시적 역설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와 잠재된 의미가 시행 전체 구조에 걸쳐 장난스럽게 반대가 되어 조롱과 비꼼의 의도를 간직한 역설이다.시적 역설은 시 전체에 걸쳐 구조적으로 파악 가능한 것이므로 김준오는 시적 역설을 구조적 역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시적 역설은 아이러니와 개념적 구분이 어렵다. 시적 역설의 이면에는 비꼼과 조롱의 의미가 주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어서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적 역설이 아이러니와 개념적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역설과 아이러니가 공통으로 지닌 이중화의 장치 때문이다.아이러니의 이중화 장치가 시의 표면과 이면에 수직적으로 구현된다면, 역설의 이중화 장치는 시의 표면에서만 수평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 시론의 일반적인 진술이다.이중화 장치의 ‘수평적/수직적’ 구현이라는 기준으로 역설과 아이러니를 구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적 역설의 경우는 이중화의 장치가 수평적인 동시에 수직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시적 역설은 시의 표면적 진술과 대비되는 조롱과 비꼼의 의미가 문면에 노출되므로 이중화의 장치가 수평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시 전체에 걸쳐서 조롱과 비꼼의 의미가 그 이면에 이미 숨어 있기 때문에 이중화의 장치가 수직적으로도 구현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아이러니의 이중화 장치는 수직적이고, 시적 역설의 이중화 장치는 수평적인 동시에 수직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시적 역설은 아이러니와의 개념적인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시적 역설을 구조적 아이러니로 보는 것이 한 방법이다.무엇보다 시적 역설은 조롱과 비꼼이 주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을 뿐, 언어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설 때 발생하는 논리적 모순에 의한 이성의 붕괴와는 무관하다. 시적 역설은 시의 표면적 의미와 상반된 그 이면에 내재한 진심, 즉 시인의 진정한 의도를 분명한 반어로 감춘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의 표면과 이면에 작용하는 의미의 모순된 대립은 진정한 대립이 아니라 비꼼과 조롱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위장된 대립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적 역설은 역설로 인한 이성의 근본적 균열이 발생할 수가 없다.
존재론적 역설은 주로 종교적인 진리와 관계한다. 신의 심판과 자비, 신의 예정론과 인간의 의지 사이에 작용하는 모순관계에 의한 역설이 말해주듯이, 주로 초월적 진리를 표현하는 역설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역설 개념은 지금까지 현대시의 역설을 이해하는 데 많은 제약이 되어 왔다. 존재론적 역설 개념은 필립 휠라이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세계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의 뜻과 그에 기반한 심오한 진리가 편재해 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 바로 존재론적 역설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역설은 불가지론적인 세계의 신비와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역설로 이해되어온 경향이 있었다.
한국 시론 역시 고석규부터 시작하여 오세영, 김준오, 박현수 등에 이르기까지 역설을 이 범주까지만 제한적으로 다루어왔고 논리적 역설의 개념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개념적 정체(停滯) 현상을 빚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리논리학의 역설 개념을 통해서 존재론적 역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4. 논리학적 관점의 존재론적 역설
우선 역설을 필립 휠라이트 이후의 시론적 개념에서 벗어나 논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역설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겉으로 보기에 불가능하며 심지어 자기모순 같지만 사실은 참으로 성립하는 역설이다. 대표적으로 짝수의 개수와 자연수의 개수가 같다는 칸토어의 이론이 해당한다.
둘째, 겉으로 보기에 전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추론에 의거하여 어떤 것이 참인 동시에 거짓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역설이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겉으로 보기에 건전한 논증이 터무니없는 결론으로 유도되는 역설이다. 대표적으로 제논의 역설이 있다.
이상의 3가지 역설을 순서대로 자연과학적 역설, ‘T-F’(참-거짓) 역설, 거짓을 내포하는 역설로 부르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역설을 통해 존재론적 역설의 적용 범위를 보다 확장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시의 역설은 수리논리학에서 정의하는 역설 개념의 엄밀성을 느슨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의 역설은 본래 아이러니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순율을 중심으로 한 논리학적 역설의 구조적 형태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 자연과학적 역설
이 역설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역설의 일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모순된 진술을 통한 진실 혹은 진리의 표현은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과학적 역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과학적 역설은 아직 인간의 지식 체계가 모순적인 현상을 이해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실제 현실 세계에 발생하는 모순된 현상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양자 중첩 현상이 가장 극적인 예다. 흔히 알려진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은 미시적인 세계의 양자 중첩 현상을 거시적인 세계에 적용함으로써 발생한 역설이다. 양자 중첩 현상은 인간의 눈에 분명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 객관적 사실로 존재하는 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현대 시론은 자연과학적 역설 개념을 시론적 개념으로 변용하여 사용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모순어법을 통한 신비로운 형이상학적인 진리(진실)의 현시가 주로 시론적 개념의 역설을 통해 이루어졌다. 바로 이 때문에 역설의 개념 이해와 적용이 종교적이거나 초월적 진리 혹은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시의 비논리성과 과학의 논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인해 자연과학의 역설이 시에 반영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물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시를 해석할 경우 이미 현대시는 자연과학적 역설을 수용하고 있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자연과학적 역설은 인간의 지식 체계가 보다 진보할 때,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역설이다. 모순적인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가능해지게 된다면, 더 이상 역설이 아닐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양자 중첩 현상의 역설은 양자 물리학의 새로운 발견에 의해 모순 현상이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된다면 더 이상 역설이 아니게 된다. 이처럼 역설은 인간이 지닌 지식 체계의 한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2) ‘T-F’ 역설
두 번째 역설은 이미 언급했듯이 거짓말쟁이의 역설에 해당한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이중구속이론과 양자물리학에 거짓말쟁이의 역설 현상이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인문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논리적 극한에서 발생하는 역설이다.거짓말쟁이의 역설은 인간의 논리적 지식 체계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역설이다. 인간의 논리적 지식 체계는 그 자체에 내재된 한계를 넘어서고자 할 때 논리적 파열로 인한 모순이 발생하며, 거짓말쟁이의 역설과도 같은 현상이 빚어지게 된다. 괴델은 이것을 불완전성의 정리로 증명한 바 있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참-거짓-참-거짓……’과 같은 무한반복의 형태를 띤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처럼 자기지시적인 문장이 부정의 의미를 띠게 될 때, 자기를 지시하면서 부정하는 패턴이 자기지시적 진술 안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반복된다. 이러한 시적 양태는 현대시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언니는 동생보다 먼저 태어난다 언니는 동생보다 먼저 자란다 동생은 늘 언니의 뒤를 따라 자란다 언니의 옷을 물려 입고 언니의 신을 받아 신고 언니의 그늘에서 키가 큰다 언제부터인지 언니는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성장을 멈출 만큼 언니에겐 삶이 무거웠던 것이다. 언니는 자기만의 방에서 색색의 구슬 같은 알약을 가지고 논다 무수한 진단서 속엔 언니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자라지 않는 언니 몫까지 동생은 열심히 자란다 성큼 자라서 언니가 된다 어느날 언니는 동생을 보고 언니라 부른다 업어달라고 조른다 언니가 된 동생은 언니였던 동생을 업고 끝없는 슬픔 속을 걷는다 결코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언니였던 동생을 업고 끝없는 슬픔 속을 걷는다 결코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언니였던 동생이 죽어 살이 문드러지고 흰 뼈만이 남을 때까지 동생이었던 언니는 업고 걸을 것이다 그 무게 때문에 점점 허리가 굽을 것이다 빨리 늙을 것이다
-성미정, 「언니라는 존재」 전문, 대머리와의 사랑(세계사, 1997)
이 시는 ‘언니’와 ‘동생’의 지위가 바뀌는 국면을 드러낸다. ‘언니’는 삶이 무거워서 결국 성장을 멈추고 ‘동생’이 “언니의 몫까지” “열심 자라”서 “언니가 된다”. 그리하여 “어느날 언니는 동생을 보고 언니라 부른다 업어 달라고 조른다”. 그리고 “언니가 된 동생은 언니였던 동생을 업고 끝없는 슬픔 속을 걷”게 되고, “동생이었던 언니”는 “언니였던 동생”을 업고 걸으면서 “허리가 굽”고 “빨리 늙을 것이다”. 이후의 과정은 자동화된 연상으로 이어진다. 다시 언니가 동생이 되고, 동생이 언니가 된다. 동생이었던 언니가 동생이 되고, 언니였던 동생이 언니가 된다. 이러한 과정이 무한까지 아니더라도 여러 번 되풀이 된다면, 도대체 누가 언니이고 누가 동생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는 ‘참-거짓’이 무한 반복되는 거짓말쟁이의 역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참-거짓’(T-F)의 대립 구도가 ‘언니-동생’으로 치환된 양상인 것이다.
3) 거짓을 내포한 역설
세 번째 역설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논증이 터무니없는 결론으로 유도되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역설이다. 대표적인 예가 제논의 역설이다. 제논의 설명에 따르면 화살은 과녁에 절대 맞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진술이 논리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상황을 역설로 간주해왔다. 역설이 궤변으로 치부되어 대중을 현혹하는 논변으로 평가 절하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은 지식 체계의 진보를 통해 충분히 논파가 가능한 역설이다. 다시 제논의 역설을 예로 설명하자면, 베르그송은 화살이 과녁에 닿지 않는 역설에 내재된 오류를 논파해 낸다. 베르그송은 제논의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를 제논이 화살의 움직임, 혹은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한걸음 한걸음이 분할될 수 없는 운동으로서의 지속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할 가능한 공간으로 이해한 논리적 오류에서 찾는다.그렇다면 베르그송 이후로 제논의 역설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니게 된다. 모순의 내용이 이미 논리적으로 충분히 해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궤변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다. 제논의 역설은 이미 거짓을 내포하고 있다.
제논의 역설은 참을 진술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거짓이 되고 만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의 이중화의 장치를 갖는다. 표면에 드러나는 참과 달리 이면에 거짓이 드리워져 있으므로 이중화의 장치가 수직적으로 구현된 예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제논의 역설과 같이 거짓으로 귀결되거나 거짓을 내포하는 역설은 아이러니의 구조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
……
…
아 썅! (왜 안 떨어지지?)
―최승자, 「꿈꿀 수 없는 날의 답답함」 전문(이 時代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시의 화자는 스스로가 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시 텍스트이므로 논증은 생략된다) 자신의 확신과 다른 상황을 깨닫고 있다. 화자가 확신했던 상황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예상치 못한 결말이나 반전을 준다는 점에서 구조적 아이러니로 규정될 수도 있다.구조적 아이러니는 플롯의 역전과 반전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진술을 했음에도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는 제논의 역설과도 형태적으로 동일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거짓을 내포한 역설은 구조적 아이러니와 유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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