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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시집 리뷰 자성과 상생의 결의
다시, 비상등이 켜진다. 균과 균의 격전지에서 살아남은 슈퍼맨들이 세상을 활보하는 지금. 턱없이 맑아진 공기를 방호복처럼 입은 사람들이 거리 두기를 허물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근 시인들은 언어와 언어의 격전지에서 자신과 타협하지 않는 먼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시인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사르트르의 말처럼, 시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시인은 ‘호모 로쿠엔스’의 선봉에서 언어와 더불어 살아간다. 거꾸로 쥐고도 훌륭하게 연주했던 아폴론의 리라처럼, 이성적인 지성과 감성적인 영감으로 시를 연주하며 밤을 새는 시인에게 시의 언어는 필연적 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1. 고독한 언어의 부메랑 1 2 음악회에 간 청중들은 보이콧 하듯 마스크를 쓴 채 한 자리씩 떨어져 앉아 있다. 낯선 풍경의 객석을 향해 베토벤 협주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어떤 감정일까?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을 하려면 시간제 예약을 해야 하고, 전화번호를 현장에서 확인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진다. 아이 컨택(eye contact)이 사라진 대학에서는 일방향 비대면 수업에 지친 대학생들이 등록금 반환 시위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교수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학생들의 온라인 시험지를 채점하느라 세기말 같은 학기말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4차 산업 시대의 도래를 넘어 5차 산업으로 달려가는 인간은 생의 절벽에 서서도 파괴성을 내재한 빅데이터의 정보들과 언택트(un-contact)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중이다. 내가 말을 하면/너는 눈을 감지.//내가 잠을 청하면/너는 부스스 일어나.//나는 시간을 못 믿는데/너는 나를 믿는다고 했어.//믿는다며 내 목을 졸랐지/믿는다는 말이 목줄이 되어/나를 한곳에 박아놨어.//어제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오늘의 시간도 곧 사라질 것인데/너는 그것을 믿지 않았지.//시대는 변하는 것이라고/오늘의 우리는 곧 사라지는 것이라고/아무리 설득해도 우리는 믿지 않았어.//너의 완고한 고집에 시달려 온/나는 늘 뿌리 없는 부평초였어.//내 안에서 동거하고 있는 너와 나는/언제쯤 이 갈등의 평행선을 끝낼까. “나”와 “너”는 불협화음이다. 현실 속의 “나”와 이상 속의 “나”는 일거수일투족 부딪힌다. 내 안에 들어있는 두 개의 자아는 결코 융합되지 않는다. “내” 맘에 들지 않는 “나”의 자아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고집불통이다. 현실과 이상에서 괴리된 심층과 표층은 합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너”는 “내”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눈을 감”아 버리거나, “잠을 청하면” 되려 “일어나”버리는 반대급부의 행동을 한다. 믿는다는 목줄을 압정으로 꾹 눌러 놓은 것이다. 70이 넘어서야/내가 한 자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았어./그 작은 몸으로 어떻게/이 세상을 이고 살았는지 모르겠어.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의 무게는 얼마쯤일까?/솜털처럼 가벼운 그런 중량이었기를 바란다//어치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길인데/철 같은 무게를 품고 살았으면 헛된 일이지 - 「생의 무게」 부분 위 두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무게를 돌아본다. 시적 주체는 자신이 “한 자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70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고 진언한다.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유한한 시간이 길어도 팔구십쯤이라고 본다면 생의 무게는 얼마쯤으로 느껴질까? 두보의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예로부터 살아있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고희쯤 되었을 때 생의 무게가 “솜털”처럼 가벼울 수 있다면······. 무게를 잴 수 없는 시인의 길은 미학적 가치를 지향해온 아름다운 삶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현실을 초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를 통해 작은 몸으로도 세상을 이고 버텨온 시간을 가늠해본다. 시인은 생의 무게를 돌아보는 성찰적 자성으로 초극의 정신적 깊이를 지향한다. 2. 상생의 만찬 사슴은 먹음직스러운/풀밭을 만나면 동료들을/불러 모은다 한다.//그것을 녹명鹿鳴이라 한다.//독식이 없는 만찬인 것이다/고기 한 점 물고 송곳니를 드러내는/짐승들 속에서 녹명은/아름다운 상생인 것이다//그것은 풀이 밭을 이루는 이유이고/세상의 군락지들의 이유이기도 하며/또 어린 물고기가 떼를 짓는 이유다//<중략>//녹명을 하는 사슴을 떠올리면/저녁연기마저 어둑해지던 그 시간/큰 소리로 밥 때를 알리던/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이다. 위의 시 「녹명鹿鳴」에서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목 놓아 우는 것은 동료를 불러 모아 풀밭(먹이)을 함께 나눠 먹기 위해서다. 시경(詩經)의 ‘유유녹명 식야지평(呦呦鹿鳴 食野之苹)’에서 유유녹명은 사슴의 울음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유유’와, 사슴의 울음소리인 ‘녹명(鹿鳴)’으로 풀이된다. ‘유유녹명 식야지평’은 사슴이 들판에서 맛있는 풀을 찾게 되면 ‘유유(呦呦)’라는 울음소리로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먹는다는 의미다. 여기서 유래한 녹명(鹿鳴)이라는 악기는 임금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데 쓰인다. 그 악기의 연주에는 녹명의 의미인 ‘서로 나누고 도와 함께 잘 살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하루에 두 번/달이 지구를 다녀갑니다./지구의 물을 당겼다 놓았다 합니다./그때 물가에 매어두었던/작은 배는 썰물에 기울어졌다/다시 밀물이 되면 평평하게/물 위에 떠 있습니다.//인간의 사랑이라는 것/그와 같지 않겠습니까/한 사람을 두고 삐딱하게 기울어졌다/다시 자박자박 박자를 맞추는 것/지구의 만물도 하루에 두 번/이렇듯 변덕에 드는데/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라고/어디, 다르겠습니까.//만나면 밀물이오/헤어지면 썰물이겠지만/결코 변하지 않는 물때를 다들/알고 계시지 않습니까./그러니 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뭍에 두려니 삐딱하게 기울고/물에 두자니 모질던 결심이/저리도 자박거리니//그 물색없는 마음이/곧 사랑 아니겠습니까. - 「물 때」 전문 밀물과 썰물은 하루에 두 번 지구를 다녀간다. 달이 물을 밀고 당겨 생기는 자연의 현상이다. 이때 물가에 매어둔 작은 배는 기울어지거나 평평해지면서 밀물과 썰물에 영향을 받게 된다. 밀물과 썰물에 영향을 받는 작은 배처럼, 사랑도 누군가를 두고 기울어졌다 멀어졌다 심정의 동요를 일으킨다. 사랑은 인간의 전인격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정서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끼리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최상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화자는 자신의 마음도 “변하지 않는 물 때” 같지 않고 물과 뭍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박거리니 물색없는 마음이 된다고 말한다. 그 “물색없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가장 은유화된 참된 감정이다. 사랑은 틀에 박힌 정형적인 모양새가 될 순 없지만, 물때처럼 변하지 않는 진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는 여전히 헉헉대며/길을 오르고 또 오르고 있네./아마도 나의 피는 경사져 있을 것만 같네./내리막 가속도를/오르막 속도로 착각하고/여태 지칠 줄 모르는 것 같네.//<중략>//하지만 나의 피는/a형도 b형도 아닌 가파른/오르막형/그저 오르고 또 오르듯/높은 곳으로 피들이 또 뛴다네. 생각이 고장 나면/마땅히 갈 곳이 없다//늦은 밤 잠들지 못하고 이따금/이런저런 생각을 고칠 때가 있다/단 한 번도 고장나보지 않는 생각을 두고/누구는 고집이나 아집이라 하겠지만/그것들은 내 평생을 뚝딱거린 연장들 화자의 혈액형은 B형도 O형도 A형도 아닌 “오르막형”이다. 고지를 향해 전진하는 것만이 숙명인 듯 끝없이 오르는 우리는 누구나 “오르막형”이 아닐까? 산 정상을 올라보면 더 높은 산의 정상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우리는 더 높은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지금 화자는 오직 오르기만 해야 한다는 듯이 가파른 생의 오르막을 피 튀기며 올라도 지치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의 “오르막형”은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오로지 위를 향하는 뚝심은 “고집이나 아집”으로도 오해받는 한 방향의 일관적 사고이지만, 평생을 “뚝딱거린 연장” 같은 뚝심이 있었기에 목표를 이루고 꿈을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런저런 “생각”을 “기꺼운 마음으로 고치”겠다고 작정한다. 자아 성찰을 통한 화자의 태도는 관계 속에서 우러나는 긍정의 시각이다. 배옥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