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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일반 스크랩 깃발의 시인 청마와 마면 금당 최규용
보헤미안 추천 0 조회 51 10.11.11 09: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

 

ꡐ깃발ꡑ의 시인 청마 유치환

                                                                                                                      ●글 ­강희근시인, 경상대 교수

1.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을 흔히 ꡐ깃발ꡑ의 시인이라 부른다. 시 「깃발」의 서두 ꡐ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ꡑ이 그의 이름 뒤에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미당에게 「국화 옆에서」가 있는 것과 같고 소월에게 「진달래꽃」이 있는 것과 같다.

청마에 대한 일화는 구전되는 것이 많지만 더불어 쓸 만한 것이 의외로 없다. 그런 가운데 문덕수의 『청마 유치환 평전』(2004, 시문학사)이 나와 가뭄의 단비가 되고 있다. 앞으로 쓰여지는 이 글은 문덕수의 이 저서를 중심으로 이영도, 최계락이 엮은 서간문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98, 중앙출판공사)와 차영한의 『청마 유치환의 고향시 연구』, 기타 필자가 전해들은 내용을 붙들고 재구성해 나가게 될 것이다.

청마는 통영초등학교 4학년을 수료한 그 해(1922년) 3월 20일 동경의 부잔〔豊山〕중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통영 포구에서 똑딱선을 타고 부산까지 가서 그곳에서 도항 증명서의 확인을 받으며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관부연락선을 탔을 것으로 보인다. 청마는 그때의 일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ꡐ그러므로 열다섯 나던 해 그때, 형 동랑이 유학하고 있던 일본 동경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대로 조그마한 버들 바스켓 하나를 들고 건너가, 이국 소년들 가운데 끼여 중학시절을 보내자니 더욱더 성격은 내성적으로 움츠려들었던 모양입니다.ꡑ라고.

그런데 청마는 어떻게 하여 동경 유학까지 가게 되었을까. 먼저 한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ꡐ자식 교육ꡑ에 대한 결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마의 유학은 형 동랑의 유학까지 소급해 살필 필요가 있다. 아버지 유준수가 맏아들 동랑을 유학 보낼 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최삼한기〔崔三漢騏, 뒤에 통영여고 교감이 되었고, 산청, 함양쯤에서 근무하다 사망, 동인지 『삼사문학』 멤버, 아호는 두춘(杜春)〕 집안사람들과 의논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최삼한기의 외가 쪽에 이미 일본 명치학원 중학부에 다니는 박명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마가 유학할 때는 한국에서는 전국적으로 향학열이 뜨거워져 통영에서 건너간 동경 유학생만도 6,70명에 이르렀다. 청마가 부잔중학에 들어갈 때 그의 형은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형제는 하숙집 한 방 한 이불 속에서 의좋게 지냈다. 아우 치상도 1년 뒤 현해탄을 건너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므로 청마의 아버지는 학비 부담에 허리가 접혔을 것이다.

청마가 4학년 되던 해 형 동랑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로 진학하고 청마는 그해 2학기 때 귀국하여 동래고보에 전학했다. 청마는 전학의 이유로 아버지가 손댄 다른 사업의 실패라고 밝힌 바 있다.

동경 유학생 시절에 고향의 소녀와 연서를 열심히 주고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소녀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생 권재순이었다. 청마는 문학의 길을 걷게 된 동기를 ꡒ14살 소년으로서 벌써 이성과의 무엔지 모를 애정에 눈떠, 한 소녀를 사랑한 그 달콤한 로맨스와 센치에서부터 뿌리 들기 시작하였던 것을 스스로 ꡐ햇발처럼 행복하고/ 달콤한 연정에 일찍 눈 떠/ 민들레 따서 가슴에 꽂고/ 꽃 같이 우울할 줄 배웠네라ꡑ고 그 시절을 회감하는 시 「소년의 날」을 썼다.

2.

청마는 동래고보를 졸업한 그 다음해(1928) 4월 10일 연희전문 문과 본과에 입학했다. 이 때 본적은 통영군 통영면 조일정(朝一町) 500번지로 되어 있었고 그가 믿은 종교는 기독교장로회였다. 청마는 연희전문의 기독교 학풍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 한편으로 심중에 남아 있는 동경유학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입학한 해는 1928년이지만 언제 중퇴했는지는 미상이다.

청마는 연희전문에 입학하기 전년인 1927년 통영의 ꡐ참새ꡑ모임에서 발행한 동인지 『참새』에 참가했다. 제2권 1호에는 「단가」라는 제목의 소품 9편이 수록되어 있다. ꡐ맑은 밤 우르르니/ 뭇별사이로/ 내 넉시는 구천(九天)을/ 달음질 쳐라ꡑ 토막이 보이는데 이것이 문자화 되어 발표된 최초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1928년 청마는 연희전문에 학적은 그대로 둔 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ꡒ실상은 앞으로 살아갈 무슨 실질적인 직업거리나 하나 배워 나오자는 뜻에서 였다.ꡓ고 그가 말한 바 있다. 그는 동경에서 사진학원에 들어가 사진기술을 터득했다. 그 후 귀국한 청마는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는 유약국 2층에 사진관을 차렸다. 그로서는 최초의 생업인 셈이다.

호적부에는 1929년(21세) 4월 5일 권재순과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무렵 생업문제에 있어서 권재순과 긴밀히 협의하여 결정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권재순은 중앙보육학교를 마치고 고향인 통영의 진명유치원 보모로 근무했다.

이 유치원은 미션계였는데 시인 김춘수가 이 유치원에 다녔다. 김춘수는 「행이불언(行而不言) 하는 청마」(시문학, 2002.9) 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ꡒ청마를 알게 된 것은 내 나이 다섯 살 됐을 때다. 나는 그 나이에 미션계통의 유치원에 다녔다. 하루는 수업 중 우연히 밖을 내다보니 어인 청년 한 사람이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은 그 뒤에도 또 한 번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참 뒤에 뜻밖에도 전연 엉뚱한 장소에서 그 청년이 나타났다.ꡓ

청마의 결혼식은 그 무렵으로서는 선구적으로 치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피로연에서 그의 형 동랑은 곱추 춤을 추었고 신랑신부는 통영 밖의 고개 너머까지 드라이브도 실현했다는 것이다. 결혼한 그 해 장녀가 출생했다. 어질고 온전 하라는 염원을 담아 항렬자를 쓰지 않고 ꡐ인전(仁全)ꡑ이라고 이름 지었다.

청마는 1930년 9월 3일 고향 문우들과 함께 통영에서 프린트판 회람지 『소제부 제1시집』을 발행했다. 문학적 생애를 통해 스스로 주동하여 낸 최초의 동인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때 일본의 아나키즘 시와 정지용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은 그는 비로소 의식적인 시 창작을 하기 시작했다.

『소제부 제1시집』에 발표한 26편의 청마시는 시인으로서 출발선상에 선 그의 초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예술시냐, 아니면 메시지시냐 하는 초기의 시적 고민의 두 갈래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감각에 접맥이 된 이미지의 흔적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이 부분 연구의 새로운 과제가 된다 할 것이다.

청마는 『소제부 제1시집』에 발표했던 것 중에서 「소리개」와 「정적」 두 편을 『문예월간』 1931년 2월호에 발표하게 되는데 이 두 편이 이른바 공식문단 데뷔를 기록하는 작품이 되었다.



3.

청마는 통영에서 영업이라고 작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이었다. 마냥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나 마시며 세월을 소비하는 동안 순식간에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방황했던 1931년~32년 그 무렵이다. 1931년에 차녀가 태어났고 1932년에는 삼녀가 태어났다.

이 때 차녀 춘비가 홍역을 앓았다. 청마는 ꡐ둘째야 가엾게도 / 그렇게 앓아서 못견디느냐/ 내일은 일요일/ - 홍역에는 가재가 좋다니!/ 나는 산골을 찾아가서 가재를 잡아오리다ꡑ〔점경(點景)에서〕라는 시를 썼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 중에 그의 평생 친구인 하보 장응두(何步 張應斗, 1913~1972)가 있었다. 장하보의 시조 ꡐ원(願)ꡑ은 부산 용두공원 입구 길가 좌편 언덕에 청마의 시비 ꡐ그리움ꡑ과 나란히 서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 허송하는 청마에게는 이를 밤낮으로 걱정하던 결혼한 지 3년 밖에 안 된 아내 권재순이 있었다.

권재순은 청마의 삶을 새롭게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고 청마를 신학교에 입학시키려 했다. 허만하는 ꡐ청마풍경ꡑ에서 ꡐ신부는 반대하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둘이서 새 생활을 찾아 평양에 갔던 것이다. 그러나 연희전문학교도 뜻에 맞지 않아 중퇴했던 그는 신학교 입학을 끝내 거부했다.ꡑ고 쓴 바 있다.

청마 일가가 평양에 간 것은 1932년 그의 24세 때였다. 평양에서 잠시 어떤 회사의 사원으로 일했는데 그 무렵 평양에서 영문학자이며 수필가인 한흑구를 만났다. ꡐ유치환을 만나게 된 것은 바로 내 고향 평양에서였다. 그의 현부인 안 지 두 달이 채 못 되고 몇 차례의 술상을 나누기도 전에 서울 본사로 영전하고 말았다. 부인은 딸만 둘을 기르고 계셨다. 그는 어떤 회사의 지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를ꡑ(『청마문학』 1집, 한흑구의 「청마와의 교우기」)

평양에서 두어달 머문 뒤 청마는 1934년 부산 초량동 100번지로 이주했다. 부산에서는 화신(和信)회사 사무소장이었던 시인 조벽암(1908~1985) 밑에서 구매사무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아내 권재순은 초량의 한 유치원(현재 삼일유치원) 보모로 있었다. 청마는 이 무렵 늑막염을 앓던 아내를 간호하면서 다음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ꡐ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愛憎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소조히 그대 위를 스쳐부는가ꡑ(시 「병처」)

1935년에는 장남 일향(日向)이 부산 초량에서 태어났다. 1936년에는 초량동 집으로 찾아온 시인 이상(李箱)과 부산 우체국 맞은편에 있는 여관에서 하룻밤 동숙했다. 이상은 일본 동경으로 가던 중에 청마를 찾았던 것이다. 그 이듬해 3월에 동경에서 객사했던 것으로 보아 이상에게는 청마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고국의 시인이 되었으리라. 청마의 회고문(「저항자와 시」, 영남일보, 1955, 4)에는 ꡐ눈이라기보다는 버꿈한 안와(眼窩), 커다랗게 웃는 웃음이 웃음이라기보다 무섭기까지 한 까마귀의 화신 같은 역설적인 그 모습으로서 손에 든 것 하나 없이 표연히 부산 초량의 나의 우거(寓居)에 나타나…… 술을 마시고 역전의 한 여관에서 취하여 같이 하룻밤을 자고는 다음날 아침 연락선으로 일본으로 떠나 보낸 그 길이……ꡑ라 적혀 있다. 충격적인 한국 모더니즘의 중심이었던 귀재(鬼才)이상은 1937년 3월 동경에서 27세로 요절했다.

청마가 만났을 때는 이상이 죽기 전의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은 것 같지만 그보다 앞서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미당을 만났을 때는 이상이 술집 여인의 옷 단추를 계속 눌러 댔다는 것 아닌가. 폐병 3기로 죽어가는 생명을 붙들고 마지막 S.O.S를 단추에다 쳤던 것이었으리라.

4.

청마는 부산의 화신지사를 그만두고 1937년(29세)에 통영으로 귀향했다. 통영에서 향교 재단이 운영하던 통영 협성상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산양읍 신봉리 봉전 마을에 있던 이 학교는 뒤에 통영 도남동 속칭 ꡐ발개ꡑ라는 현 유람선 터미널 근처로 옮겼다. 이 학교에는 시인 정진업(1916,4,1~1983, 4)이 교원으로 있었다. 그렇게 되자 청마는 평생 친구 장하보, 그리고 정진업과 어울려 다니며 날마다 막걸리를 마셨다. 그 당시 막걸리는 오통잔(왕대포)으로 울고 웃고 세상에 대한 울분과 시대에 대한 비분으로 마시고 또 마셨다.

이 시절 청마는 발행, 편집인이 되어 그 해(1937) 7월 1일 부산 초량에서 동인지 『생리(生理)』를 발행했다. 이 때 동인은 청마, 아우 유치상, 최상규, 김기섭, 박영포, 최두춘 등이었는데 모두 통영 거주자들이었다. 청마의 아우 유치상은 청마가 조사를 받기 위해 자주 호출당했던 일경에 붙들려가 고문을 당했던 것 같다. 이때의 충격으로 유치상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고 큰 형 동랑이 거주하던 서울에 가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 곳에서 사망했다.

청마는 ꡐ소제부ꡑ, ꡐ생리ꡑ등의 동인 운동을 거쳐 1939년에 첫 시집 『청마시초』(청색지사)를 내었는데 국판 125쪽 호화 양장이었다, ꡐ청마(靑馬)ꡑ라는 호는 여기서 확실한 그의 호로 굳어진 셈이다. 이호는 그 이후 이름보다 더 보편화되었다. 청마를 호로 삼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노작 홍사용(露雀 洪思容, 1900~1947)이 지어주었다는 설이다. 허만하의 기록 ꡐ청마 풍경ꡑ에 의하면 금당 최규용(錦堂 崔圭用, 1903~?)이 서울 종로의 훈정동에 하숙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마침 동거하던 홍사용이 별 큰 뜻 없이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홍사용이 청마를 보고, ꡒ자네가 마면(馬面)이니 청마라 함이 좋지 않을까?ꡓ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차영한 시인의 주장이다. 청마의 시에 「울릉도」라든가 「파도」라든가 바다에 관한 시가 많은 데 스스로 푸른 갈기를 세우고 오는 파도의 이미지인 청마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란 견해인 것이다. 『청마시초』는 수필가이며 시인이기도 한 김소운(金素雲, 1908 ~1981) 의 주선으로 나왔는데 김소운의 소개로 화가 구본웅이 주관하던 청색지사에서 시집을 내면서 그 호가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그 해 4월 서울의 남산 아래 경성 구락부에서 문단의 여러 선배들이 출판 기념회를 열어주었는데 이 때 청마는 김소운의 고마움을 피력했다는 것이다.

1940년 3월에 청마는 협성상업학교를 이직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북만주로 갔다.

ꡐ청마ꡑ라는 말 속에 역마살이 있었던 것일까. 빈강성 연수현 유신구 2호(濱江省 延壽縣 維新區 2號)로 간 것이다. 스스로의 이주라고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탈출의 행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나이 32세였는데 권재순(31세), 맏딸(11세), 둘째딸(9세), 셋째딸(8세) 등 가족 모두가 함께 간 것이었다.

빈강성 연수현에는 형 동랑의 처가에서 마련해두었던 농장이 있었다. 그 농장은 동랑의 아내 심재순의 아버지 소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마는 그 농장을 관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것이었다. 형 동랑이 가지 않았던 것은 국내 연극 운동에 대한 남다른 집념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청마는 1945년까지 일제하의 한반도에서 탄압과 감시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동랑은 일제의 집요한 협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청마는 『구름에 그린다』(1959, 신흥출판) 에서 ꡐ만주! 만주는 이미 우리의 먼 선배에서부터 광막한 그 벌판 어디 메에 모진 뼈를 묻지 않은 곳이 없으련만, 나는 나대로 내게 따른 가권을 거느리고 건너갈 때는 속으로 슬픈 결의를 가졌던 것입니다.ꡑ

라고 쓴 바 있다. ꡐ슬픈 결의ꡑ는 무엇이었을까.

5.

1940년 3월 국내에서는 더 이상 시 쓰기도 생활하기도 어려워진 시대 상황의 예감 속에서 청마는 만주행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ꡒ나의 인생을 다시 한 번 재건하여 보자ꡓ는 내심의 다짐이기도 했을 터이지만 그 때 그가 생각했던 재건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재산가가 되는 꿈이었을까, 아니면 인생의 다른 국면 전환이었을까. 청마는 뒤에 ꡐ이 길은 나의 생에 있어서 한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 탈출이 없었던들 장차 나의 신상에 어떠한 이변이 생겼을지 예측키 어려웠던 것입니다.ꡑ(유치환, 『구름에 그린다』)라 술회했다.

청마 일가는 빈강성 연수현 유신구에서 2년 정도 살다가 그 곳에서 백리쯤 떨어진 연수현 가신촌(延壽縣 嘉信村)으로 이사했다. 세째 딸 자연은 「나의 아버지 청마 유치환」(『청마문학』, 3집, 2000)에서 그 생활에 대해 썼다. ꡒ저희들이 만주에 가서 처음 산 곳은 연수현이었고 그곳서 2년쯤 산 뒤에 그 곳에서 백리쯤 떨어진 가신촌이라는 한적한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만주 갈 때에 큰아버지께서 가신촌에 많은 농토를 사셔서 아버지께 관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연수현에서 아버지가 다니시기에 너무나 불편했던 모양입니다.ꡓ 이 내용에서 큰아버지가 농토를 많이 샀다는 대목은 큰아버지가 농토 관리를 아버지께 맡겼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듯싶다.

가신구 마을 주변에는 토성(土城)이 있었던 것 같다. 청마의 시에 ꡐ까마귀는 성(城) 귀에 모여들 근심하고ꡑ(북방 10월)라는 구절이 보인다. 청마의 춘비, 자연 두 딸은 가신성 밖에 있는 조선인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왕복 거리가 16리나 되는 먼 길이었다. 청마는 학교에서 일찍 귀가한 막내 자연이를 데리고 성문 밖까지 나가 춘비 마중을 가곤 했었다.

국내에서 술벗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두주불사의 청마는 만주에 가서 술과 벗, 그리고 주시(酒時, 매일 반복되는 그 시간의 술 마시는 시간)가 그리워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당시에 쓴 그의 시에는 술과 관련된 대목이 있다. ꡐ타고 가는 망아지를 소주(小舟)인 양 추녀끝에 매어두고/ 낯설은 호인(胡人)의 객잔(客棧)에 홀로 들어앉으면/ 오열인 양 회한이여 넋을 쪼아 시험하라ꡑ(절명리)는 대목에서 ꡐ객잔ꡑ은 여관이나 주막일 것이다. 청마는 벗도 없이 이방인의 주막에 들러 독작(獨酌)을 기울였다. 어쩌면 처절한 고독이요 울음이었으리라. 망아지를 타고 술집에 간 것은 한 편의 코메디 같다.

ꡐ흥이 오르면 빼주〔酒〕에 돼지 발쪽을 사다놓고/ 저 건너 갈미봉도 부르고/ 어하 농부도 부르고 ꡐ(ꡐ나는 믿어도 좋으랴ꡑ에서) 정처 없이 발길이 닿은 한국의 유맹(流氓)들끼리 모인 자리에는 배갈과 돼지 족발에 노랫가락이 어울린다. 부모도 모르고 고향도 모르고 수만리 이적(夷狄)의 땅 끝에 온 이들은 청마가 관리했던 농장의 일꾼들이었으리라. 청마는 이들을 ꡐ카인의 슬픈 후예 나의 혈연의 형제들ꡑ 이라 불렀다.

낮의 농장 관리 일이 끝나면 청마 일가는 어떻게 지냈을까. 셋째딸 자연은 ꡒ북만주의 추운 겨울저녁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가끔씩 뚱배(凍梨:언 배)내기 화투를 치셨지요. 그럴 때 저는 언제나 아버지 편이었고, 아버지가 이기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패를 아버지께 알려드리기도 하여서 ꡐ어머니께 맞을라ꡑ하고 아버지께서는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ꡓ(유자연, 앞의 글) 이런 화투놀이 외에 쌀, 닭, 감자 등의 점심거리를 장만하여 강가에 물놀이를 가기도 했다.

청마 일가는 빈강성 가신에서 다시 흑룡강 성도인 하얼빈으로 옮겼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시에 나오는 지명만을 놓고 보면 그의 역마살은 하얼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수백리에 뻗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청마는 북만주에서 일본의 항복을 알기나 한 듯이 1945년 6월 식솔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아내의 권유가 있었던 듯하다. 아내 권재순의 꿈에 고향으로 얼른 돌아오라고 손짓을 하는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라는 것이었다. 청마 일가는 돌아온 지 2개월 여만에 조국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사 종전 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위험과 고생은 말로 형언키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마는 광복 후 첫 번째로 맞은 식목일에 붙여 시 「식목제」를 썼다. ꡐ보라 오늘/ 보랏빛 장백산맥이 남으로 남으로 갈래 뻗은/ 아세아 동쪽 작은 반도의 산이란 산 메란 메엔/ 그골짜기에 깃들여 사는 온 백성들이/ 양춘의 따뜻한 햇빛을 입고/ 옛 이스라엘 족속들이 나라를 찾아 광야에 호소하듯/ 오랜/ 인욕의 헐벗긴 어머님인 조국을 애석하여/ 마음으로 나무를 심어 아끼기에 강산 허옇나니ꡑ(제1연) 이 시를 두고 문덕수는 ꡒ웅혼 웅장한 규모의 억센 기상 속에 애국적 정열과 조국의 미래에 대한 염원의 용솟음이 청마 특유의 비장한 어조로 토로되어 있다.ꡓ고 평했다.

필자도 이 ꡐ식목제ꡑ를 읽고 ꡐ청마의 ꡐ식목제ꡑ를 읽는다ꡑ는 시를 몇 년 전에 썼다. ꡐ종지기 접시 같은 시만 돌아다니는/ 시대/ 청마의 ꡐ식목제ꡑ를 읽는다// 대형 주발(周鉢)이다ꡑ로 시작되는 시다. 청마의 시를 읽다가 요즘 시를 읽어보면 너무나도 스케일이 작고 쇄말한 느낌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청마의 아내 권재순은 광복이 되자 통영에서 문화유치원을 경영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것을 광복되던 해에 사들여 원장이 된 것이었다. 작곡가 윤이상이 이곳의 부원장을 맡았다고 한 구전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부산대 김정자 교수의 글(문화유치원 시절, 시문학 2003. 3)에는 유치원 4회 졸업생으로 정해주(전 진주산업대 총장), 엄옥자(부산대 교수), 김정자 등이 있었다고 밝혀져 있다.

청마는 문화유치원 주소로 분가하여 본적지를 옮겼다.(1947. 6. 15) 청마는 유치원 마당 옆에 자리한 사택 2층에 서재를 마련하고 ꡐ영산장ꡑ(映山莊)이라고 불렀다. 넓은 방을 침실 겸 집필실로 쓰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썰렁하게 비워 두었다. 방 한쪽에 밥상만한 작은 앉은뱅이 책상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김춘수는 이 방을 보고는 독일의 시인 한스 카로사가 릴케를 만났을 때 서가는커녕 책상 하나 없었던 릴케의 방을 묘사한 글이 있는데, 그 글이 연상되는 방이었다고 했다.(김춘수, 「행이불언하는 청마」)

김춘수가 어느 날 영산장에 갔는데 벽에 젊은 여자의 나체화가 붙여져 있어 놀랐다는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김춘수는 「행이불언하는 청마」에서 이어서 설명했다. ꡐ둔부가 몹시 솟아 있었다. 내가 유심히 눈을 주고 있자니까 청마가 씩 한 번 웃는 낯을 보였다. 옳지 됐다 싶어ꡓ어찌 된 일입니까ꡓ하고 물었더니 또 한 번 씩 웃고는 그만이었다. 나는 또 무안해졌다. 그 이튿날 가보니 그 그림은 철거되고 없었다.ꡑ

김춘수와 청마가 처음 만난 때는 청마와 권재순이 결혼할 때, 권재순이 보모로 있던 유치원의 원생 김춘수가 화동(花童)으로 뽑혀 그들 앞에서 꽃을 뿌린 1929년이었다. 청마는 21세의 신랑이었고 화동 김춘수는 7세였다. 성장 후에 처음으로 김춘수는 태평동 시장 안에 있던 유약국 집으로 대선배 시인을 찾았다. 마침 점심때라 청마는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 파 뭉치에 고추장을 찍어 입에 막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7.

광복을 맞은 통영의 문화인들은 다른 지역의 문화인들에 못지않은 정열을 보여 주었다. 이들은 ꡐ통영문화협회ꡑ를 조직하고 회장에 청마를 추대했다. 간사는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이 맡았고 회원에는 전혁림, 정명윤, 김춘수(총무) 등이 있었다.

통영문화협회에서는 한글강습회, 시민정서교육, 상식 강좌, 농촌계몽, 연주공연 등을 추진했다. 이때 청마는 말술을 마셨고 윤이상은 간간이 각혈을 했다. 이 협회는 또 근로자들의 자녀를 위한 중학과정의 야간 고등공민학교를 설립 운영하면서 주기적으로 연주, 무용, 음악을 공연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행사는 윤이상이 안을 내었는데 청마는 묵묵히 따라주기만 했다.

그때 협회는 소인극단을 만들어 마산으로 원정 공연을 갔다. 단막극 두 편을 연습해 갔는데 이기영의 ꡐ해방ꡑ과 박재성의 ꡐ호풍(胡風)ꡑ이었다. 연극에 필요한 도구들은 배편으로 보내고 출연자와 스탭들은 버스로 갔다. 버스를 고성에서 갈아타는 2시간 사이 두 연극의 주인공이 애인을 데리고 줄행랑을 친 사건이 벌어졌다.

스탭들은 매우 당황했다. 고성에서 마산까지 가는 사이에 대역을 내세워 적당히 끌고 갈 생각으로 연습을 했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창피만 실컷 당하고 이틀 잡은 극장 스케쥴을 하루로 줄이고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욕은 마산으로 극단을 불러준 마산의 시인 화인(花人) 김수돈이 다 먹었다. 그때도 청마는 남의 일 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김춘수, 「행이불언하는 청마」)

청마와 윤이상은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부산 나들이를 할 때도 늘 같이 다녔다. 그 우정은 두 사람 합작의 교가 만들기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통영초등학교, 충렬초등학교, 통영여자중학교, 통영여자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 등의 교가가 모두 청마 작사 윤이상 작곡이었다. 진주 쪽의 교가는 합작으로 된 것은 없다. 경상대학교 교가는 설창수 작사에 윤이상 작곡이었고 진주여자고등학교 교가는 청마가 작사한 것이었다.

최근에 청마의 출생지 문제가 거론되어 전국적인 화제가 된 바 있는 것처럼 윤이상도 출생지가 산청으로 알려져 약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윤이상의 출생지 문제는 윤이상의 부인이 쓴 인터넷 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산청 쪽의 지방의회 의원들이 찾아낸 자료로는 윤이상이 시천면 덕산에서 태어나 두 살 때 통영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청마는 1946년 4월 4일 발족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서 간부직을 맡게 되는데 회장에는 김동리, 부회장에는 청마와 김달진이었다. 다음해 청마는 2대회장이 되었다. 청년문학가협회는 그해 6월 20일 청마의 사회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ꡐ예술의 밤ꡐ을 개최했다. 조지훈의 개회사와 오상순의 회고담, 정지용(이 때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는 설이 있음), 서정주, 박목월 등의 자작시 낭송, 경기여고 학생 합창단 공연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조선시인상을 제정하고, 1947년 6월 제2시집 『생명의 서』를 출간한 청마에게 제1회 시인상을 수여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1946년 초가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경남지부 결성에 관한 것이다. 결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부산까지 갔던 청마는 모임의 사흘째 열렸던 결성식에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청년 실업가로서 결성에 보탬을 준 탁창덕이 지회장에 관심이 있는 것을 눈치 챈 청마가 자리를 피해준 것으로 당시의 참가자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8.

1949년 제1회 ꡐ영남예술제ꡑ에 청마와 김춘수가 함께 참석했다. 참가자들은 밤에 벌인 술판을 ꡐ밤의 예술제ꡑ라 불렀다. 김춘수의 ꡐ행이불언하는 청마ꡑ에 이 무렵의 일들이 앵글에 잡혔다. 잡힌 대로 필자가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참가자들은 오제봉 스님의 Y사에 모여 철야 음주가무로 신명을 두드렸다. 당대의 주호들이 기고만장하고 아나키스트 시인들이 바닥을 치고 돈다. 월영(月影) 홍두표, 동기(東騎) 이경순, 노석(奴石) 박영환 등이 아나키스트들이다. 거기에 파성(巴城), 화인(花人), 화가 박생광, 청마 등이 주류(酒流)이고 평계(平溪) 이정호와 김춘수 등은 비주류(非酒流). 술을 못 하는 비주류는 겁을 먹고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사태를 관망하면서 여차하면 어디로 튈 계획을 한다.

일이 벌어졌다. 제주(祭主)인 파성이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좌석의 중앙으로 진출했다. 아나키스트 시인들도 아나키스트 정신으로 줄줄이 진출했다. 술이 딱 맞게 머리와 가슴들을 지배했다. 그 때, 파성이 아랫도리를 전광석화로 홀랑 벗어 던졌다. 신비가 드러났다. 누군가, 누군가가 뒤따라 홀랑 벗어 던졌다. 신비가 줄줄이 드러났다.

예술의 난장은 이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상했다. 청마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랬다가 그는 다음날 아침, 예술제 현장(개막식인 듯)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전연 피로를 느끼지 않는 모습으로 먼 깃발을 보고 있는 듯이…….

청마는 술자리든 회의장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자 슬그머니 나가버리는 때가 더러 있었던 것 같다. 청마와 어울려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는 수필가 한흑구도 ꡐ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청마도 인제는 취했겠지 하고 생각하면, 그는 간다는 소리도 없이 주석을 떠나서 사라져버리기가 일쑤였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혼자 강변이나 숲속으로 산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ꡑ(청마와의 교우기)고 증언한 바 있다.

1949년 봄에 청마는 김춘수와 함께 서울로 김동리를 찾아간 일이 있다. ꡒ그저 심심하고 갑갑해서 나들이를 나선 셈이다.ꡓ라고 김춘수는 말했지만, 실은 아직도 문단 신인에 불과한 김춘수를 소개하고 알리기 위해 상경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김동리는 그 때 소공동에 있는 경향신문의 문화부장이었다.

청마가 김춘수를 소개하자 김동리는 이미 알고 있다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통영을 떠날 때 청마는 근작시 몇 편을 가지고 가자고 김춘수에게 일렀던 것인데, 작품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도 전에 동리는 가지고 온 작품이 있으면 보여 달라고 했다. 그 뒤 경향신문 문화면에 1주일 간격으로 김춘수의 시 「푸서리」와 「언덕에서」가 발표되었다. 김동리의 집은 그 때 성북동에 있었다. 굳이 자기 집에 하루 묵고 가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청마와 김춘수는 김동리를 따라 소공동에서 성북동까지 걸어갔다. 동리의 집은 조그만 한옥이었다. 장판도 깔지 않은 좁은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아침식사 때 나온 음식은 밀가루 수제비였다. 월급으로 밀가루를 받았는데 미국에서 건너온 구호물자였던 것이다. 이후 그 때 동리의 처지에 대하여 청마는 누구에게든 가타부타 한 마디 말한 일이 없다.

청마와 김춘수는 김동리 집에서 하룻밤 묵고 나와 갈 곳도 없고 하여 영화관 단성사로 갔다. 평소에 청마는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영화를 한참 보는데 청마가 없어졌다. 어디로 갔을까. 그는 영화가 끝날 때 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9.

청마는 1945년 10월 통영여자중학교의 교유(敎諭, 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만났던 사람이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李永道, 1916~ 1976)였다. 이영도는 1946년 10월 15일에 촉탁교원(강사)이 되었으니까 청마가 출근하기 시작한 지 1년 뒤의 일이다.

이영도 시인은 경북 청도의 유천(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259)에서 태어났다. 21세 때 밀양 박씨인 박기주(朴基澍)와 결혼하여 대구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남편이 폐결핵을 앓게 되자 언니가 살고 있는 통영으로 옮겨 남편 뒷바라지에 힘을 썼다. 통영에 있는 언니는 ꡐ박애당ꡑ이라는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통영으로 옮긴 때는 광복되기 전 1944년이었다.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은 1945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청마는 이영도를 만나 시를 써주게 되는데 알려진 첫번째 시는 「새」이다.



12월에 접어드는 추운 하늘 아래

먼 소백산맥이 소리 없이 돌아앉은 거리



하룻날 표연히

내 여기에 내린 뜻을 뉘가 알리오



벗과 만나 받는 술잔도 입에 쓰고

오직 한 마리 땅에 내린 새 모양

마음자리 찾지 못하노니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하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에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시집 『울릉도』(1948)에 실린 10행으로 된 이 시는 청마 사후에 나온 서간문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 중앙출판공사. 이영도 최계락 편저)에는 제목이 「정향(丁香)에게 주는 시 1」로 되어 있다. 그리고 「먼 소백산맥」이 「먼 팔공산맥」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이 원본일까? 필자에게는 후자가 원본인 것으로 여겨진다. 제목이나 배경이 훨씬 구체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에서 청마가 이영도 시인과의 사적인 인연을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후자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시집을 낼 때는 누구든 보다 공공성 같은 것에 유념을 하면서 사적인 체험을 둔화시키는 것이 상례라는 점에 유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시에서 보면 사랑이 시작되는 시기의 투정 같은 것, 애써 자연을 자기들의 것으로 끌어오는 것 등이 독자의 입가에 미소를 띄게 해 준다.

청마와 이영도와의 이야기는 청마 생전에 간간이 돌아다니는 은폐된 것들이었다. K시인이 이영도를 사모하다가 사무침이 하늘에 닿는 날 그가 여류시인의 집에 월담을 했는데 기절초풍할 광경이 영화 화면 같이 흐르더라는 둥, 그 이후 K시인이 청마를 의식에서 추방했다는 둥, 그러저러한 에피소드들이 통영과 부산 언저리를 휴지처럼 바람에 밀려다녔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보면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글은 1946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50년 6.25가 나면서 시대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때까지의 편지들을 몽땅 불살랐다는 것이 최계락의 「머리말」에 밝혀져 있다. 최계락은 그 정황을 이영도의 말을 빌어 적고 있다.

ꡒ그때의 편지야말로 그대로 시요, 문학이었다고 말하는 정운(이영도)여사는 6.25 피란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청마의 일방적인 애정에 자기는 어디까지나 우정으로 자처해 왔었는데 피란을 가서 대한천지가 위기에 놓였을 때 재회의 기약 없는 청마의 안위를 기도로서 달래며 비로소 그와의 정분이 단순한 우정만이 아닌 애정임을 자인할 수 있었노라고…….ꡓ

10.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6)의 머리말에서 편저자의 한 사람인 최계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ꡐ매일 새벽 일기를 적듯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붓을 든 정성과 열모(熱慕),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친 방대한 수량의 편지는 그야말로 지고(至高), 지순(至純)한 우정사(友情史)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서른아홉의 청년에서부터 육순의 노경에 이르기까지 이십년의 긴 일월을 두고 한결 같이 청마가 목마르게 불러온 이름은 ꡐ지애(至愛)한 정운, 최애(最愛)한 당신ꡑ 이었던 것이다.

최계락 같은 동심천사가 이 서간문을 묶는데 일조했다는 것이 어쩌면 하나의 사건처럼 보인다. 동심과 지순한 사랑은 하나로 통하는 것일까. 그래서 최계락이 선후좌우를 끊고 사랑의 이야기 전파에 이름을 헌정한 것일까.

그건 그렇고 우리가 이 서간문집을 읽을 때 놓쳐서는 안 될 의문이 있는데 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청마가 별세한 지 사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책이 서둘러 나온 점, (2) 편저자(이영도, 최계락)가 편지를 받은 당사자(이영도)라는 점, (3) 편지는 주고받는 것인데 이영도가 보낸 편지는 한 통도 없다는 점, 이점들을 머리에 넣고 이 서간문 집을 읽을 때 속에 들어있는 진정성에서 빗겨가지 않을 수 있으리라.

이영도가 받은 청마의 편지 묶음을 놓고 세간에는 두개의 해석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서정주, 문덕수, 최계락, 이광석, 정목일, 박우담, 류준열, 석광운 윤종덕, 이 산, 김규정 등은 우정사의 일환으로 보고 있고 문효치, 김년균, 백시종, 김석규, 박재두, 임신행, 오하룡, 정순영, 표성흠, 고동주, 신일수, 안동원, 이덕, 차영한, 정규화, 오인태, 박구경, 황광지, 우무석, 양곡, 김이듬 등 문단의 대다수 문인들은 애정사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청마가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지 육 년째 접어든 시점의, 공개된 첫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ꡐ정향(丁香)! 1952년. 당신 그린 세월이 이렇게 소리 없이 밀려오고 끝이 없습니다. 깊은 사랑이란 이렇게 슬프고도 어진 선물입니까? 당신, 나의 당신! 그리울 때는 어쩌면 죽을 상히 못 견디겠습니다만 갈앉으면 외려 더욱 반갑고 향그럽습니다. 정향! 당신만은 끝내 높게 맑게 외롭게 있어 주십시오. 귀한 정향! 당신의 그 높고 외롭고 정(淨)함이 이내 나를 빛나게 합니다. 이미 당신을 부르시는 종소리 울려 난 다음 바깥에서는 빗소리 들리고 창이 밝아 옵니다. 궂은 날씨 같은 세상에서 내 비록 남루(襤褸)하고 부끄러운 허울일지언정 내 안에는 빛나는 당신이 언제나 자리하고 눈 떠 계시니 어찌 끝내도록 내사 슬프겠습니까? 스스로 알 듯도 합니다. 어제 황혼 무렵, 산에서 내려오며 꺾어 온 한 송이 항가새꽃. 당신의 붉은 정성, 내게로 향한 당신의 붉은 정성인 양 나의 책상머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진정 참된 사랑을 가졌으므로 나는 다시 어질게 느껴집니다. 세월이 갑니다. 그리운 세월이 갑니다. 바람이 호면(湖面)을 가늘은 살을 끼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세월은 우리의 목숨 위를 스치고 갑니다. 정향!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귀한 정향! 안녕! 6월 26일 청마ꡑ

청마는 편지에서 처음에는 이영도를 ꡐ정향ꡑ(丁香)으로 불렀다. 그리고 1952년 7월 17일부터 ꡐ정운ꡑ(丁芸)이라 불렀다. 정향의 ꡐ정ꡑ(丁)은 스무살 된 사나이를 뜻하는데 ꡐ풋사내 향기ꡑ라는 의미로 썼을까? 아니면 외롭다는 뜻으로 써서 외로운 사람의 향기라는 의미를 주고자 했을까? ꡐ정운ꡑ은 그냥 ꡐ외로운 향풀ꡑ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영도의 생애에 어울리는 아호가 아닌가 한다.


11.

청마가 이영도에 대한 애정을 형상화한 시 작품으로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에 실려 있는 것은 네 편이다. ꡐ그리움ꡑ ꡐ정향에게 주는 시(1)ꡑ ꡐ정향에게 주는 시(2)ꡑ ꡐ행복ꡑ이 그것이다. 그 중 ꡐ그리움ꡑ과 ꡐ행복ꡑ 두편을 사람들이 애송하는 편이다.

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ꡑ(청마의 「그리움」 전문) 필자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 시야 말로 남성 일반이 캄캄한 절벽 같은 여인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감정을 잘 대변해주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암송했었다. 필자는 이십대 후반에 최용호 시인(당시 진주 MBC 보도부장)과 밀착해 다녔다. 퇴근하여 진주 MBC 보도부로 찾아가면 최 시인은 마감뉴스 결재에 바빴는데 결재가 끝나면 기다리고 있던 외부 방문객들을 진주 기업은행 뒷골목 단골 선술집인 ꡐ옥이집ꡑ으로 인도했다.

그 집에서 마시던 주된 주류는 정종이었다. 필자는 다른 사람들이 정종 몇 잔을 들이키는 사이 한 잔을 놓고 애기씨름 하듯이 끙끙대었다. 이때 그 집 마담이 옥이였는데 얼굴이 넓적하고 품이 매우 넓어 손님들의 농담을 줄 곧 잘 받아 주었다. 그 때 필자는 옥이 집을 들어서면서 늘상 ꡒ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ꡓ 하고 읊었다. 그러면 마담은 ꡒ파도야, 파도야 ꡒ하고 호박꽃처럼 웃었다. 그 집에서 필자는 진주 사회의 역학관계, 예술제 운영의 비화 등등 진주 사람으로 알아두어야 할 교양을 습득하곤 했다.

당시에 최시인은 진주 언론의 중심에 서 있었으므로 모종의 제도적 눈길에서 자유롭지 못 했던 듯했다. 최시인은 지나가는 말로 ꡒ현실 속에서 현실을 추구하지 않는 순수 무공해 강시인과 함께 다니는 것은 세상의 눈길에서 아주 자유로와서 좋다.ꡓ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ꡒ파도야ꡓ 라고 소리칠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청마는 한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 비해 연시는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그렇더라도 <행복>은 그 내용이 절절하다. ꡐ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이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바다가 환희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ꡑ

전 4연 중 앞 2연이다. 서술체가 사랑의 진실을 한 없이 느긋하게 풀어나갈 수 있어서 시인의 진실이 아주 실타래처럼 풀려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영도는 서간집 속에서 단 한 편 화답시를 내놓고 있다. ꡐ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서 있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ꡑ(「탑」 전문)

청마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죽은 다음 정신을 수습하고 난 뒤에 쓴 시로 읽힌다. 그런데 필자는 화답에 관한한 이영도 시인이 너무 인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가 없다. 6․25 때 빨치산 들이 쏘던 장총소리 ꡐ따콩ꡑ 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들이 보급 투쟁하러 동네에 내려온 빨치산들을 향해 놀란 토끼처럼 ꡐ다다다다다다다다…ꡑ 기관총 소사를 연이어 하고 나면 동네 뒷산까지 도망간 빨치산들은 얌체처럼 ꡐ따콩ꡑ 한 방만 쏘는 것이다. 매우 경제적인 응수였다. 이영도의 시 ꡐ탑ꡑ이 ꡐ따콩ꡑ하는 소리와 같지 않은가.


12.

1967년 10월께 필자는 천안에 있는 복자 여자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하면서 학교 주최 천안시 천원군 초등학교 백일장 실무를 맡아 보고 있었다

심사위원으로 서정주 시인과 이영도 시인 두 분을 초청했었다. 서정주 선생은 은사였기 때문에 모셨고 이영도 선생은 그 무렵 서간집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으므로 호기심이 발동되었던 터였다.

점심 식사후 심사를 마치고 딸기주를 심사위원 두 분이 상당량 마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서정주 시인께 ꡒ선생님, 피곤해 보이시는데 몸을 좀 편안히 해 계시면 안되겠습니까?ꡓ 하고 말씀 드렸다. 그때 이영도 시인은ꡓ나도 내 제자가 이 자리에 있으면 ꡒ선생님, 피곤하실텐데 좀 뒤로 기대시죠 하고 말했을 것이야……ꡓ 하고 뾰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필자는ꡑ아차ꡑ하는 실수나 실례에 대한 생각보다는 ꡐ여자는 중진시인도 여자일 수 밖에 없구나……ꡑ 하고 여자 일반의 국량에 대해 저울질 하는 쪽으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그 이후 수필계의 거두였던 C여사와의 갈등 관계에서 거듭 확인하는 것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무슨 여성 폄하라는 어떤 의식의 체계를 세운 그런 결과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독자가 없었으면 한다. 필자는 그런 체계도 없거니와 그런 사상이 정작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 해두고 넘어갈까 한다.

그렇다면 딴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C작가와의 갈등관계를 말해볼까 한다.C작가는 한국예총의 수장도 지내고 무슨 장관도 지낸 이른바 큰 인물에 속하는 분이다. 지금부터 10여년전에 전국에서 모인 어떤 수필가 그룹에서 필자에게 수필론 한 시간 강의를 청해온 일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강의 내용 중에 C작가의 수필 ꡐ얼굴ꡑ이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수필의 짜임에 있어 허리 부분이 약하다고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 보였다. 말하자면 그 수필은 한창 외모에 대해 신경을 쓸 나이인 여중학생들의 얼굴 콤플레스를 해소 하기는커녕 잠자는 콤플렉스를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지적 했었다.

수필의 요지를 이야기해 보면 이렇다. ꡒ나는 어릴 때 얼굴이 못생겨 화가 났다. 외국에 나가 있는 아버지께 왜 나를 이렇게 낳아주셨냐고 투정을 부리면 그때마다 아버지는 얼굴보다 마음이 소중하다고 답해 주셨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회를 위해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을 해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서 아버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ꡓ 허리가 약하다는 것은 마음이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설득력이 약하다는 말이다.

얼마 후 서울에서 C작가를 만나 인사를 드렸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강의 내용이 유출 된 것이 확실했다. 그 다음 어떤 장소에서도 그랬고 그 다음 서정주 선생 빈소에서 만났을 때 김종길 시인과 함께 들어오시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ꡐ홱ꡑ 돌리는 일은 분명 여성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지역의 어떤 남성 노대가도 기분이 뒤틀리면 사정없이 고개를 홱 돌렸으니까. 이영도 여사의 일과 C작가의 일은 그분들 고유한 정서의 산물이리라.

청마는 어디로 가셨는가? 청마 이야기하는데 객담이 들어오고 말았다. 청마는1952년 11월10일 한국 아나키즘의 성지(聖地)라 불리는 함양의 고읍 안의(安義)에 있는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았다. 중등학교 교장으로서의 첫 걸음이었다.

1946년 3월 개교했던 안의중학 초대 이사장은 이진언(李畛彦)이었다. 4대 교장은 동경의 와세다 대학을 나온 하기락(河岐洛)이었다. 하기락은 항일운동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던 사람이고 아나키스트였다. 그 하기락이 스스로는 이사장이 되고 친구 청마를 불러 교장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한국다문화원 다음 카페에서 가져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조는 제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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