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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世) 장간공(莊簡公) 휘(諱) 융(戎) ( ? - 1339년)
11세(世) 광정공 휘 규(奎)의 아드님으로서 벼슬은 중대광판삼사사(重大匡判三司事) 남양부원군이셨으며 시호는 장간(莊簡)이셨다. 어머님은 삼한국부인 광주 김씨이시다. 태어나신 해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족보에는 1339년(충숙왕 복위8년 을묘(乙卯)에 서거(逝去)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배위는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 나주 나씨(羅州 羅氏인데 지밀직사 유(裕)의 따님으로 3남 4녀를 낳으셨다. 남양군 휘 주(澍), 문정공 휘 언박(彦博) 파밀직공 휘 언유(彦猷)의 생모이시다. 계배(繼配)는 창원군부인(昌原郡夫人) 회산 황씨(檜山 黃氏)인데 판중추공 휘 언수(彦修)를 낳으셨다.
장간공의 묘소는 충남 서천군 후당곡(忠南 舒川郡 後堂谷) 삼합폄(三合窆)(즉 삼 합장)으로 계시는데 그 동안 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있던 차 공(公)께서 서거하신 후 538년 만인 (1877년)에 비석조각을 찾아내어 묘소를 확인한 후 묘역(墓域)을 제대로 개축하고 당시 영의정이었던 21대손 순목공(淳穆公)이 비갈명(碑碣名)을 짓고 19대손 재현공(在鉉公)이 글씨를 썼으며 17대손 병위공(秉瑋公)이 예서(隸書)하여 비석을 세웠다. 그 뒤 22년 후 21대손 판서 순형공(淳馨公)이 추기(追記)를 써서 고쳐 세운 것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이 묘소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배위 두 분까지 삼합장으로 모시고 있다.
公의 묘소가 충남 서천에 모셔진 것은 충혜왕(忠惠王)으로부터 홍주목(洪州牧)을 식읍(食邑)으로 받았기 때문에 공이 서거하신 후 황씨부인이 이곳으로 낙향(落鄕)하여 사시면서 공의 묘소도 이장(移葬)하여 나중에 삼합장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그후 조선이 건국하면서 공의 후손들이 이성계(李成桂) 세력에 의하여 몰리게 되어 화(禍)를 당하거나 또는 멀리 피신하게 되니 자연히 오랫동안 실전(失傳)되었고 타성인(他姓人)의 소유지로 변해버렸으니 공께서 별세하신 후 근 600년만에 되찾게 되었으니 후손들의 영광은 물론이요 공의 홍복(洪福)이요 음덕(蔭德)의 소치라 할 것이다.
공(公)께서는 독자(獨子)이시지만 누님들이 여러분이 계셨는데 한 분은 순화원비(順和院妃); 충선왕비(忠宣王妃)이고 또 한 분은 명덕태후(明德太后); 충숙왕비(忠肅王妃) (충혜왕(忠惠王)과 공민왕(恭愍王)의 어머니) 이시다.
* 장간공의 행장(行狀)과 인품
1, 공(公)께서는 출생 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339년(충숙왕 복위8년) 기묘에 서거하셨다.
2, 공께서는 1316년(충숙왕 3년) 병진 4월에 삼사사 지금의 (중앙은행 총재) 상호군; 군중경호) 정3품계로 출사(出仕)하였다.
* 공께서는 아버지 되시는 광정공이 고려의 왕권을 재확립시키는데 제일의 공신이기 때문에 고려조정의 실력자로 군림(君臨)하고 있던 때의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누님들이 둘씩이나 왕비가 되셨으니 관직에나아가시지 않으려 하였지만 매부인 충숙왕의 요청으로 처음 출사하면서도 상당히 높은 벼슬자리로 나가시게 된 것이다.
3, 1316년 6월에 아버지 되시는 광정공께서 서거하셨다.
4, 공께서는 충숙왕이 원(元)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그 복위를 위하여 중신들과 협력하여 재집권하도록 힘썼으며 누이인 명덕태후가 어진 성덕을 쌓을 수 있도록 크게 보좌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5, 중대 광판삼사사라는 벼슬을 지내셨는데 중대광의 위계(位階)는 종1품계이며 판삼사사라는 관직은 지금의 재경원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6, 남양부원군은 아버지되시는 광정공으 군호를 습봉(襲封)(뜻; 이어받음)한것이며 시호는 장간이시다.
7, 생질(甥姪)되는 충혜왕은 성정이 거칠고 황음 무도(荒淫 無道)(뜻; 주색의 빠져 사람으로서 도리를 돌라보지 아니함)하여 공과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옛 보첩 서문을 참고 하여보면 공께서는 순박하시고 아주 근면하신 분으로서 선조의 유덕을 잘 계승유지(繼承維持)하셨다는 말이 있고 고려의 운(運)이 쇠진해 갈 때에 출생하였고 왕실과의 연척관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융성함을 도리어 두렵게 여기셨고 보국재상의 높은 벼슬지위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위난(危難)을 해결하고 나라를 유지하는 높은 경륜(經綸)과 공업(功業)이 당대의 크게 빛날것이어늘 국가의 역사(歷史)에 증빈한바가 없으니 자못 한스럽다고 기록되어 있다.(장간공 묘표 참고)
주(註) 장간공의 네 아드님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남양군 휘 주(澍), 문정공 휘 언박(彦博) 판밀직공 휘 언유(彦猷) 판중충공 휘 언수(彦修)의 4형제 이 신데 이 어른들이 오늘날의 남양홍씨 남양군파, 문정공파, 판밀직파, 판중추파의 각 파조(派祖)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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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世) 남양군(南陽君) 휘(諱) 주(澍) ( ? - 1342년)
12세(世) 장간공 휘 융(戎)의 큰아드님으로서 본래는 휘(諱)가 언주(彦澍)라 했는데 벼슬은 삼중대광첨의상의삼사좌사(三重大匡僉議商議三司左使) 남양군(南陽君)이셨으며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 나주 나씨(羅州 羅氏)가 생모이시고 창원군 부인(昌原郡 夫人) 회산황씨(檜山黃氏)가 계모이시다.
공의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고 족보에는 1342년(충혜왕 3년)임오에 별세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배위는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인데 좌정승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사숙공(思肅公) 악(渥)의 따님이다.
공의 장인 되시는 사숙공은 벽상삼한공신으로 도첨중찬 ; 오늘의 국무총리)를 지냈고 충숙왕 8년 그후 좌정승을 또 지낸 분으로 한어(韓語)와 몽고어에 전통한 학자이었다. 청주한씨가 명문가로 발돋음하기 시작한 것이 이분의 조부되는 문혜공(文惠公) 강(康) ; 도첨의중찬)으로부터 3대에 걸친 위업(偉業)에서 비롯된 것이니 당시의 명문귀족간의 결연(結緣)이라 하겠다.
공의 묘는 황해도 백천군 화산면 구리화산 남향(黃海道 白川郡 花山面 九里花山 南向)에 계시는데 조선개국초 우리 홍씨의 수난기에 감추어져 오랫동안 실전 하였다가 1852년(철종 3년 임자)에 비갈조각을 얻어 비문을 보아 증거를 얻어서 공의 17대손 판돈녕공(判敦寧公) 휘 기섭(耆燮)이 여러 종인(宗人)들을 거느리고 묘역을 개축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19대손 판사공 종서(鍾序)가 비문을 작성하고 판서공 종석(鍾奭)이 글씨를 썼다. 매년 10월 1일 시재를 지내다가 해방이후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향화(香火)를 끊게되니 자손들의 송구한 마음이 가시지 않던 중에 노곡문중의 발의(發議)에 따라 전국 종친들이 단합하여 공의 셋째 아드님 당성군 산소 위에 설단(設壇)하여 비석을 세웠으니 장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남양이며 화산(花山)과 가까운 곳이다, 통일이 되어 다시 전과 같이 시제를 봉행할 수 있을 때까지 잠정적으로 매년 음 10월 6일에 아드님 당성군과 한날에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 남양군의 행적(行蹟)
1 , 남양군의 호(號)는 행촌(杏村)이며 남양군이라는 군호는 3대째 습봉이다.
2, 첨의상의(僉議商議)라는 벼슬은 궁중(宮中)의 재정(財政)을 맡고 있는 것인데 아버지 되시는 장간공과 같이 재무관계를 관장(管掌)하는 높은 자리에 계셨음을 알 수 있다.
3, 공께서는 1342년에 별세하셨으니 장간공이 돌아가신 후 3년만에 별세한것이다. 출생년대는 확실치 않으나 10남를 두셨으니 40은 넘기셨지 않을까 하여 출생 년도를 추측할 뿐이다.
4, 공의 묘비문에 이르기를 공께서는 고려말 고려의 운(運)이 다하여 정국이 혼란하고 세상이 시끄러울 때의 시대인지라 부귀이달(富貴利達)의 명리(名利)를 취하지 않고 술로써 세월을 보낸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세상에 나서기를 피(避)한신 것 같다.
5, 공(公)께서는 10남매를 두셨는데 흥(興) 대언(大言), 은(恩) 삼사좌윤(三司左尹), 징(徵) 판밀직사당성군(判密直司唐城君) 빈(彬) 판사(判事)의 4형제가 있고 또 하나 출가(出家)한 양가대사(兩街大師) 가유(可乳)가 있다. 따님은 다섯 분이다. 사위로는 제학공(提學公) 창녕 성대용(昌寧 成大庸), 좌사(左使) 광주 김원명(光州 金元命), 도사(都事) 행주 기원의(幸州 奇元義) 찬성공(贊成公) 문화 유씨(文化 柳氏) 지사(知事) 남희괄(南希适)이 있다.
6, 공의 후손들이 현재 많이 번창하고 있는데 남양군파의 파조가 되신다. 그리고 공은 4형제이셨는데 문정공 휘 언박(彦博) 판밀직공 휘 언유(彦猷)판중추공 휘 언수(彦修)가 아우들이다.
14세(世) 당성군(唐城君) 휘(諱) 징(徵) ( ? - 1338년)
13세(世) 남양군 휘 주(澍)의 셋째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상당군 부인 청주 한씨이시다, 공(公)께서 태어나신 해는 확실(確實)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족보에는 고려 우왕(禑王) 무진 1388년 정월 12일에 화(禍)를 당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公)의 처음의 이름자는 사조(師祖)이셨으며 관직은 순성익대보리공신 광정대부 판밀직사 상호군 당성군이셨다.
배위는 곡성군 부인(曲城郡 夫人) 서원 염씨(瑞原 廉氏)인데 문하시중 고성부원군 충경공(忠敬公) 제신(悌臣)의 따님으로 공민왕비와 형제간이고 따라서 고려말의 권신(權臣) 염흥방(廉興邦)과도 남매간이 되신다. 족보에는 고려 충목왕(忠穆王) 정해 (1347년)에 태어나서 조선 태조 병자 (1396년 7월 21일에 작고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의 묘소는 노곡 묘좌에 계시는데 오늘의 경기도 연천군 백합면 노곡리이다. 그리고 염씨할머니도 적성면 전곡(箭谷) 자좌(子坐)에 묘소가 계신다.
종옹공(拙翁公) 휘 성민(聖民)께서 경기감사로 계실적에 옛 노인의 권하는 말을 듣고 적성 서쪽 [사울지)에 있다는 염씨할머니 묘를 찾아 참배하였는데 거기 서있는 비석 한 조각에 당성군 홍 징(洪徵) 처(妻) 곡성염씨지 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이태조 5년(1396년)에 졸(卒)하니 나이 50세(歲)이었다고 하였다, 나이를 따져보니 염씨할머니께서 정해년에 출생하신 것으로 인정되고 공의 출생도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 될 뿐이다.
이러하여 실전(失傳)되었던 염씨할머니 묘소를 찾았으며 당성군의 묘소는 숙종27년(1701년)에 적성 노곡 근처에 거주하는 외예(外裔)가 가노(家老)의 말을 듣고 종인등(宗人等)에게 증거를 확실히 제시하여 묘표(墓表)를 찾아내고 확증(確證)을 얻어 개봉(改封)하여 비석을 세우니 11대손 담포공(淡圃公) 수헌공(受瀗公)이 찬(撰)하고 13대손 위인공(偉人公)이 글씨를 썼다, 이리하여 실전 되었던 당성군의 묘소도 찾게 되었던 것이다.
@ 당성군의 행장
1377년(우왕3년) 신주(信州) 문화(文化) 안악(安岳). 봉주(鳳州) 등지에 침입한 왜구(倭寇)와 싸우던 양백익(梁伯益)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등이 전세가 불리하여 원군(援軍)을 요청하자 당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계셨던 당성군(唐城君)께서는 이성계(李成桂) 임견미(林堅味), 변안렬(邊安烈)등과 함께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출전 왜적을 방어했다.
이로 인하여 뒤에 당성군에 봉해졌으며 1384년(우왕10년)에 북쪽의 변방이 시끄러워지자 정몽주(鄭夢周)등과 함께 동북면(東北面)의 파견되어 사태를 조사하는 한편 이듬해까지 지밀직으로서 문하평리상의 우인열(禹仁烈)과 함께 한양부에 판견되어 중흥산성(重興山城)의 형세(形勢)를 시찰하였다.
* 당성군의 피화(被禍)
고려우왕 14년(1388년) 정월에 공의 처남인 염흥방을 탐종(貪縱)(뜻; 의리 없고 재물을 탐내고 윗사람을 업신여긴다는 것) 이라는 죄목(罪目)으로 죽일 때 이일에 연루(連累)(남의 저지른 죄에 관계되어 함께 걸림)되어 공께서는 화(禍)를 같이 당하였다. 고려말의 무서운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영(崔瑩)과 이성계등이 이인임(李仁任)의 계략을 받아 이들의 반대세력인 염흥방을 왕명에 항거한 것으로 몰아 기습작전을 전개하여 집을 포위하고 일격에 처형하였든 것이다, 이때에 당성군도 영흥방의 일당으로 몰리어 단순히 염흥방의 누이와 혼인하였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당하셨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당성군께서는 셋째아드님 좌랑공 휘 상연(尙淵)과 함께 화를 당하셨고 큰아드님 봉교공(奉敎公) 휘 상빈(尙濱)과 둘째아드님 좌랑공 휘 성부(尙溥)께서도 이에 연좌되어 화를 입었었다. 이것이 우왕 14년 무진 1월에 발생한 사건이다, 결국은 얼마 안 가서 이인임도 최영에 의하여 권좌에서 밀려났으며, 최영 또한 그해 12월에 이성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만다, (위화도 회군) 이렇게 당성군 일가는 피의 숙청을 당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참조)
* 당성군의 자손들
공(公)께서는 6남 4녀를 두셨는데 큰아드님 상빈(문과, 봉교, 무진피화) 둘째 아드님 상부(문과, 전법좌랑, 무진피화) 셋째 아드님 상연 (문과, 좌랑, 무진피화) 넷째 아드님 상직 절제사 다섯째 아드님 상검 도사 여섯째 아드님이 상리 좌랑이고, 따님 유원정(柳爰廷) 서산인(瑞山人) 이조개국공신 중추원부사 서원군(瑞原君) 따님 성부(成溥) 창령인(昌寧人) 문첨지(文僉知) 부(父) 창산군(昌山君) 문효공(文孝公) 사달(士達) *자;(외손) 현감 효원(孝源) 직장 효연(孝淵) 따님 허지신(許之信) 하양인(河陽人) 주부(主簿) 부 개성유수 천규(天珪) *자 주부(主簿) 심(諶) *여 호군김중본문관찰사죽산안망지(護軍金仲本文觀察使竹山安望之) 감찰 이처중(李處中) 따님 김로(金輅) 연안인(延安人) 연안군공희공(延安君恭僖公) 부 밀직제학 을진(乙珍) *자 목사(牧使) 영철(永轍) 사직 영륜(永輪) 첨지 영번(永轓) *여 문주부 경주이물민(慶州李勿敏)
오늘날 당성군의 후손들은 대족(大族)으로 번성하여 경향각지에서 180여개의 세거지를 가지고 활약하고 있다, 조선조만 하더라도 6명의 정승과 30여명의 판서, 180여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여 가문의 위세를 떨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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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世) 좌랑공(佐郞公) 휘(諱) 상부(尙溥)
남양군파 14세 당성군 휘 징(徵)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곡성군부인 서원 염씨이시고 우왕(禑王) 14년 무진년 1388년에 피화(被禍) 되었다.
@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進士 洪武癸亥 文科典法 佐郞賜緋魚袋 本朝贈吏曹參議 配淑夫人 平壤趙氏
전사 홍무계해 문관전법 좌랑사비어대 본조증이조참의 배숙부인 평양조씨
忌八月二十一日 父通禮門祗候思理 祖三司左尹 平壤君忠臣 曾祖大提學文克公
기팔월이십일일 부통례문지후사리 조삼사좌윤 평양군충신 증조대제학문극공
延壽 外祖保勝別將竹山宋光彦 墓在長湍云 按麗史林堅味傳云公 戊辰被禍
연수 외조보승별장죽산송광언 묘재장단운 안려사임견미전운공 무진피화
주(註) 우왕10년 계해(1383년)에 문과전법 등과 하시여 진사 좌랑공이 되시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下賜) 이조 때에 증(贈) 이조참의이고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평양 조씨이고 기일은 8월 21일 부(父)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사리(思理) 조(祖) 삼사좌윤 평양군 충신(忠臣) 증조(曾祖) 대제학 문극(文克) 외조(外祖) 보승별장 죽산 송광언(竹山 宋光彦)이시다.
공께서는 우왕14년 무진 (1388년) 정월에 역성혁명(逆姓革命) 소용돌이 속에 아버지 휘 징(徵) 형 휘 상빈 아우 휘 상연 3부자가 피화 되었다, 묘는 경성 용성면 송철동(鏡城 龍城面 宋鐵洞)(함경도 최북단) 전배 묘지에 합장하였으나 을유년 (1404년) 양주군 상수세장지에 설단하여 향사로 모시고 있다.
공(公)께서는 3남 1녀를 두셨는데, 큰아드님 직장공(直長公) 휘 지(智) 둘째 지평공(知平公) 휘 령(齡) 셋째 사정공(司正公) 휘 척(陟) 따님은 이수강(李守綱) 용인인(龍仁人) 부사(府使) 부(父) 관찰사 백지(伯持) *자(외손) 경력 문검(文儉) 병사 행검(行儉) 좌랑 양검(良儉) 군수 신검(信儉) 군수 숭검(崇儉) *여(외손녀사위) 도평군말생전실(桃平君末生前室) 유수(留守) 안동 권세(安東 權勢) *여 군수 한양조준(漢陽 趙峻) *여 감찰 평산 신윤관( 平山 申允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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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世) 사정공(司正公) 휘(諱) 척(陟)
남양군파 좌랑공 휘 상부(尙溥)의 셋째 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숙부인 평양조씨 이시다, 벼슬은 진사(進士) 중군사정공 증(贈) 이조참판이시다.
@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進士 中軍司正 贈吏曹參判 慕遠錄云都承旨 墓楊州釋迦谷 配贈貞夫人 延安
진사 중군시정 증이조참판 모원록운도승지 묘양주석가곡 배증정부인 연안
金氏 父判書文靖公自知 祖密直濤 曾祖密直提學光厚 外祖大提學平壤趙瑚
김씨 부판서문정공자지 조밀직도 증조밀직제학광후 외조대제학평양조호
墓廣州加次里丙坐
묘광주가차리병좌
주(註) 벼슬은 진사 중군사정 증직(贈職) 이조참의 모원록기록에는 도승지이며, 묘(墓)는 족보에는 양주군 석가곡(楊州郡 釋迦谷)으로 되었으나 실전되어 1975년 을묘 4월21일 배묘(配墓) 좌측에 설단 하였으나 1998년 양주군 은현면 큰아드님 호은공 휘 연(演)과 같이 모시고 매년 추향으로 모시고 있다.
배위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연안김씨(延安金氏)이며 부(父) 판서문정공 (判書文靖公) 자지(自知) 조(祖) 직밀도(直密濤) 증조(曾祖) 밀직제학(密直提學) 광후(光厚) 외조(外祖) 대제학(大提學) 평양 조호(平壤 趙瑚)이다.
공(公)께서는 2남이시다. 큰아들 호은공 휘 연(演) 둘째 목사공 휘 정(淀)
17세(世) 목사공(牧使公) 휘(諱) 정(淀)
남양군파 사정공 휘 척(陟)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정경부인 연안 김씨이시고 공(公)의 벼슬은 원주목사(原州牧師) 증직(贈職) 이조판서이다.
@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原州牧使 贈吏曹判書 配贈貞夫人密陽朴氏 父參判訥生 祖典書忱 曾祖判書
원주목사 증이조판서 배증정부인밀양박씨 부참판눌생 조전서침 증조판서
思敬 外祖府尹陽川許晐 生一男一女 墓積城 配贈貞夫人 原州邊氏 父部令尙朝
사경 외조부윤양천허해 생이남일녀 모적성 배증정부인 원줍변씨 부부령상조
祖摠制頤 曾祖原州府院君 安烈 外祖正郞順天金有恭 墓加次有碣
조총제이 증조원주부원군 아열 외조정랑순천김유공 묘가차유갈
주(註) 공의 기록은 전한바 없고 벼슬은 원주목사 증직 이조판서이며 배위는 증 정부인 밀양박씨 부 참판눌생 이시고 조부는 전조 침(忱) 증조 판서 사경 (思敬) 외조 부윤 양천 허해(陽川 許晐)이며 1남 1녀를 낳으셨으며 묘지는 적성(積城) 계배 증 정부인 원주 변씨 부 부령 상조 조부 총제 이 증조 원주 부원군 외조 정랑 순천 김유공(金有恭)이며 1남을 낳으셨다. 묘 가차유갈
공(公)의 형님이신 호은공 휘 연(演)께서는 단종(端宗)이 손위(遜位)(뜻;임금의 자리를 사양함)하자 종신토록 자취를 감추었다가 세조(世祖)무인 (1458년 2월 23일에 돌아가시었다. 이 소식을 전하여지니 세조가 연(演)의 아우 정(淀)을 불러 형의 유고가 있을 터인데 내가 보고싶으니 갖다 달라고 하였다.
정(淀)은 형의 문집(文集)이며 유고등(遺稿等)을 갖다주었다, 그랬더니 구구절절(句句節節)이 단종을 사모(思慕)하고 자기를 불가(不可)하다는 내용뿐이었다. 세조는 자기비위를 건드린 것이 화가 나서 불 속에 모조리 넣고 태워버렸다. 그래서 호은공 유교는 전해져 내려온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자(子) 2남 5녀 큰아드님 당은군 휘 임(任)이고 둘째 호군(護軍) 휘 간(侃)이다. 딸 김진(金瑱) 청풍인(淸風人) 봉사(奉事) 부(父) 동지의지 *자 판관(判官) 광후(光厚), 딸 신계원(愼繼源) 거창인(居昌人) 판관 부 첨지선경(僉知先庚) *자 극효(克孝) *극충(克忠) *여 진천 송임(鎭川 宋任) *자 첨정(僉正) 전의 이창업(全義 李昌業) *여 장수 황륜(長水 黃綸) *순천 박한하(順天 朴漢河) 딸 최운(崔沄) 딸 우후(虞侯) 딸 이가수(李加壽) 전주인 사직(司直) 부 군수 윤(倫) *자 세창(世昌) *여 수찬(修撰) 경주 김응벽(慶州 金應壁) 딸 황연(黃演) 자주인(結主人) 부 윤신(潤身) *자 세걸(世傑) (公)은 양주군 양지 해촌에서 추향(秋享)으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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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世) 당은군(唐恩君) 휘(諱) 임(任)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휘 정(淀)의 큰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증 정부인 밀양 박씨이시다. 벼슬은 가선대부동지중추(嘉善大夫同知中樞)이시고 증창성 당은군이시다.
@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嘉善大夫同知中樞 贈贊成唐恩君 諡貞簡壽八十四 配贈貞敬夫人 陽川許氏
가선대부동지중추 증찬성당은군 시정간수팔십사 배증정경부인 양천허씨
父郡守蓀 祖府使扉 曾祖判事愭 外祖別檢和順崔安善 墓廣州其自山
부군수손 조부사비 증조판사기 외조별검화순최안선 묘광주기자산
주(註) 벼슬은 간선대부동지중추이시고 시호는 정간이시고 생년월일은 잘 알 수 없고 다만 84세 수(壽)로만 기록되어있다. 배(配)는 증(贈) 정경부인 양천 허씨이시고 부 군수 손(蓀)이시고 조부 부사 비(扉)이시고 증조 판사 기(愭) 외조 별검 환순 최안선(崔安善) 묘지는 광주 자산이시다.,
공(公)께서는 3남 3녀를 두셨는데 큰아드님 익원군 휘(諱) 경림(景霖) 둘째 도열공 휘 경주(景舟) 셋째 도사 경여(景礪) 딸 윤공(尹恭) 파평인(坡平人) 현감(縣監) 부(父) 부사 홍(洪) *자 무부사사(武府使士) 정(貞) 참봉계정출계(參奉繼鄭出繼) *여 선전관무(武宣傳官) 여흥민간(驪興閔簡) 경주김태보(慶州 金台輔) 딸 강이공(姜利恭) 진주인(晉州人) 주부(主簿) 부(父) 정랑 안복(安福) *자 판관(判官) 식유(湜洧) *여 안동 권광(安東 權光) 성주이공주(星州 李公柱) *여 전주유악(全州有渥) 딸 현사숙(玄思肅) 창원인(昌原人) 현감(縣監) 부(父) 사평(司評) 준(俊) *자 생원(生員) 근 우 정(瑾 瑀 珽)
19세(世) 익원군(益原君) 휘(諱) 경림(景霖) (1458년 - 1545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당은군 휘(諱) 임(任)의 큰아드님으로 자(字)는 윤경(潤卿)이고 도열군(度烈君) 남양군(南陽君) 휘 경주(景舟)의 형님이시다.
@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字潤卿 中宗庚午文科 靖國功臣資憲大夫工曹判書益原君 忌三月六日 壽八十八
자윤경 중종경오문과 정국공신자헌대부공조판서익원군 기삼월육일 수팔십팔
配貞夫人 咸陽呂氏 忌十月十日 父僉知忠輔 祖縣監宗肅 曾祖佐郞稽 外祖文判
배정부인 함양여씨 기십월십일 부첨지충보 조현감종숙 증조좌랑계 외조문판
書載寧康晉 生七男二女 墓始興栗谷
서재령강진 생칠남이녀 묘시흥율곡
주(註) 자(字)는 윤경(潤卿) 세조 3년 (1458년) 무인생이며 1545년 3월 6일 88세로 졸 하시니 미수(米壽)를 누리셨으며 중종(中宗) 경오 (1510년) 문과정국공신 자헌대부 공조판서 익원군 시호는 문익(文翊)이며 배(配)정부인 함양여씨 기일 10월 11일 부 첨지 충보(忠輔) 조 현감 종숙(宗肅) 증조 좌랑 계(稽) 외조 문판서 재령 강진(載寧 康晉) 7남 2녀로 기록 되였으나 서자(庶子) 2분이 있다. 묘(墓) 시흥 율곡 (현재는;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밤일골)
공(公)께서는 9남 2녀를 두셨는데 그중 두 분이 서자이다. 큰아드님 현감 휘 안세(安世) 둘째 생원 휘 명세(命世) 셋째 도사 휘 필세(弼世) 넷째 현감 휘 우세(佑世) 다섯째 군수 휘 응세(應世) 여섯째 판결사 휘 봉세(奉世) 일곱째 진사 휘 개세(蓋世) 그리고 서자(庶子) 휘 영세(永世) 휘 희세(熙世)이고 따님은 권식(權湜) 안동인(安東人) 군수, 부 첨사(僉使) 치(錙) *자 참판(參判) 침(琛) 따님 유이(柳頤) 전주인 현감 부(父) 사직 승명(承溟) *자 좌랑 지홍(之洪) *여 사평 흥양유충량(興陽 柳忠良) *여 보덕 하양조덕원(漢陽 趙德源)
전기(前記)한바와 같이 서자(庶子)는 자식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족보에는 서자 서녀로 기록하던 것을 1920년 경신에 수보(修譜)시 서자 서녀를 명기하던 관습을 폐지하였다. 따님은 사위에 이름으로 하였으며 시댁(媤宅)의 시아버님 조부 증조 외조부의 관직과 자녀들까지도 기재(記載)하였다.
공은 처음에는 문음(門蔭) (뜻; 귀족이 장손에게 주는 벼슬)으로 출사(出仕) 하여 사복시(司僕寺) 부정(副正)으로 있었는데 그때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에 친아우인 도열공 휘 경주(景舟)께서 선봉에 서자 이를 후원하며 함께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이 되었다.
중종(中宗) 5년 (1510년) 식년(式年) 문과에 50세(歲)의 나이로 급제하였는데 공(公)은 성정(性情)이 맑고 검소하였으며 중후(重厚)하고 온화(穩話)하여 뭇 사람들의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중종반정에 참여한 다음해 정월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가 같은 달 14일에 광흥창수(廣興倉守)가 되어 국고(國庫)를 관장하였으며 중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중종 7년 윤 5월에 사간원(司諫院)의 사간이 되고 다음해 3월 11일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국정의 기강을 바로 잡는 권부(權府)의 수장(首長)으로서 중종의 측근이 되어 보필하였다.
왕조실록등 사료(史料)에 의하면 공은 대사간으로서 예(例)를 들면 함경도의 가뭄 때문에 고통을 받는 백성을 구호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활약하는 모습 등을 많이 보였으나, 대사간의 임무인 관기숙정(官妓肅正)을 위하여 관료들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공박하는 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에는 나서기를 싫어했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중종12년 12월 1일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반정동지인 성희언(成希彦)의 누이가 비첩(婢妾)(뜻; 남의 첩이 된 계집종)살해사건을 일으켜서 물의가 일어나자 사류(士類)의 처는 죽을죄가 아니면 하옥하여 국문 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여 체직(遞職)(뜻; 직무가 바뀜)을 감수했다.
동왕 14년 11월 13일에는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등 사림(士林)의 탄핵으로 공신록권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신진사림의 세력이 몰락하고 훈적(勳籍)이 복권되면서, 그 다음해인 중종15년 2월 23일 가선대부로 가자(加資) 즉;진급이 되면서 강원관찰사를 제수 받는다.
이때 대사간 서지(徐祉)등이 공의 가자됨을 반대하였으나 중종은 공(公)의 경력을 인정하며 공신으로 이미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으니 가자됨이 당연하다 하여 공을 두둔하였다.
동왕 16년 3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니 서울로 돌아왔다가 동년 8월 26일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다음해 3월 13일 윤희인(尹希仁) 조옥로(趙玉路) 김안노(金安老) 등과 함께 정원(政院)의 원로격(元老格)이 된다.
중종 17년 5월에 전라관찰사로 다시 외직(外職)에 나갔다가 사소한 문제로 파직되었으나 중종은 공의 불찰만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공(公)의 충정을 이해하여 동왕 18년 12월 3일에 호조참판으로 복직시킨다.
중종 21년 7월 11일에 경기관찰사로 나가서도 그 치적(治積)의 대부분이 심한 가뭄으로 인해 도배성(道百姓)들의 굶주림을 구 하는데 전념(專念)하는 성정을 베풀었다.
동왕 22년 10월 3일에 신년 하례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그 이듬해 3월 15일에 돌아와서 중종을 독대(獨對)하여 복명하고 명나라의 진신(縉紳)(즉; 관리들) 일람(一覽) 일부를 제출(提出)하여 외교정책(外交政策)을 수행하는데 참고(參考)로 활용(活用)토록 하였다.
동왕 23년 7월 19일에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본직에서 물러났는데 중종 26년 11월 24일에는 병조판서로 제수되어 일국의 병권을 관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김안로(金安老) 일당이 세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경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중종반정의 공신들은 대부분이 병사(病死)하거나 여러 의혹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며 축출(逐出)을 당했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공신으로서는 남곤(南袞)이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다가 중종 22년 3월에 병사하고서는 심정(沈貞)이 재상(宰相)의 자리에 있었는데 앞서 말한바와 같이 김안로 일당이 세력을 잡기 위하여 작서지변(灼鼠之變)(뜻; 쥐를 불에 끄슬음)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은 동궁(東宮)(후에 인종)이 태어나자마자 모비(母妃)를 잃고 또한 건강(健康)마저 미령(靡寧)(뜻; 존경하는 어른의 몸이 병으로 편안치 못함)하여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생일날 쥐를 잡아 불에 끄슬려서 매달아 동궁을 저주한 것인데 김안로가 박귀인(朴貴人)이 소행이라고 규탄해서 박귀인과 그 소생이 유배를 당하였다. 그런데 이 조치에 대하여 심정(沈貞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미심쩍게 보는 여론(與論)이었다.
이때 박 귀인이 유배지에서 심정에게 뇌물을 바치며 구명(救命)을 호소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심정이 강서(江西)로 유배를 당하고 만다.
공께서는 같은 혁명동지의 처지여서 넷째 아들이 우세(佑世)를 강서에 보내어 위로하였는데 공과 척분(戚分)이 있는 허항(許沆)이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이 사실(事實)을 알고 김안로와 한패가 되어 심정이 앙심을 품고 그 아들 심사순(沈思順)과 홍우세(洪佑世)등이 무리를 모아서 사림(士林)을 내치고 주상(主上)을 내치려 한다고 고변(告變)하여 심사순과 홍우세를 옥에 가두고 매를 때려 죽게 하고 이 문제를 확대시켜서 박귀인과 심정을 사사(賜死)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공도 이 사건 때문에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는데 김안로 일당이 공에게도 공격의 화살을 겨누고 있었으나 그 인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중종이 끝까지 비호하여 유배를 면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김안로가 대제학의 자리에 오르니 세론(世論)(즉 여론)이 분분하였었다.
김안로는 그 아들이 중종의 부마(駙馬)즉 인종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서 그 힘으로 정권을 장악하였고 자기를 배척하려는 사람들을 몰아 내치는 세도를 부리기 시작하였었다.
김안로가 후일 유배되어 사사(賜死)될 때까지 중종 32년 (1537년) 공께서는 오랜 세월을 참고 견디어 오다가 중종34년 3월에 공조참판으로 강등 복귀되면서 동년 10월 23일에는 공을 익원군(益原君)으로 책봉하고 기로소(耆老所)에 입기(入耆)하는 영예(榮譽)로 위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음해 7월 25일 공조판서를 제수하니 향년(享年) 83세였다.
인종원년(仁宗元年) 3월 6일에 세상을 떠나셨으며 슬하(膝下)에 9형제를 두었으니 공(公)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전국 각지에 흩어져서 번창하고 있다, 이 또한 공의 중후한 인품과 청백한 성품의 음덕이라 할 수 있다.
20세(世) 판결사(判決事) 휘(諱) 봉세(奉世) (1498년 - 1575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익원군 휘 경림(景霖)의 여섯째 휘 봉세(奉世)이며 자(字) 흠중(欽仲)이시고 어머님은 정부인 함양 조씨이시다, 벼슬은 통정대부판결사 증(贈) 이조참판이시다.
@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字欽仲弘治戊午生 通政大夫判決事 贈吏曹參判 萬曆乙亥十二月二十日卒
자흠중홍치무오생 통정대부판결사 증이조참판 만력을해십이월이십일졸
壽七十八 靜庵趙光祖門人 配密陽朴氏 忌正月二十六日 父主簿薰 祖檢詳承爚
수칠십팔 정암조광조문인 배밀양박씨 기정월이십육일 부주부훈 조검상승약
曾祖文贊成公簡公楗 外祖萬戶安東權澄 墓廣州突馬壬坐 修撰任叔英撰碑
증조문찬성공간공건 외조만호안동권징 묘광주돌마임좌 수찬임숙영찬비
해설 = 본이름은 흠중이요 연산군 무오(1498년)생 통정대부판결사 증직 이조참판 을해 (1575년 12월 24일 78세로 수(壽)하시고 정암 조광조 문하생이며 배위는 숙부인 밀양박씨 기일은 1월 26일 부 주부 훈(薰) 증조 문찬성 공간공 건(楗) 외조만호 안동 권징 묘 광주돌마임좌 비갈은 임영숙 찬(撰)하였다.
처음부터 공(公)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으며 타고난 천성의 총명함을 겸비하였고 날마다 여러 공경(公卿)들과 교류(交流)하고 공부하며 위로는 정암(靖庵) 조광조(趙光祖)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아래로는 청송(聽松) 형제들과 사귀고 공부에 열중하여 장차 조정(朝廷)에 나아가 그의 실력을 발휘 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으니 운수는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한때 사림파(士林派) 출신 언관(言官)들의 탄핵(彈劾)을 받아 퇴거하였던 공(公)의 숙부(叔父)인 도열공(度烈公) 휘 경주(景舟) 훈구파(勳舊派)가 주동이 되여 중종 14년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신세력(新勢力)을 몰아내고 조광조는 능주(陵州)에 유배되자 공은 성균관 유생(儒生) 천여 명과 같이 광화문(光化門)에 모이여 선두(先頭)에서 조광조 등의 무죄(無罪)를 호소하였으나 조광조는 사약(死藥)을 받고 40여명은 자결하거나 귀향을 갔다.
주(註) 청송(聽松)은 성수심(成守堔)의 호(號)이니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의 제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기묘사화 때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하였으며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追贈) 되었다. 아들은 유명한 우계 성 혼(牛溪; 成 渾)이다.
공(公)은 이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자기의 본분이나 지키고 살자고 하였으나 나이 40이 넘어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내외 관직 16개 부서를 역임하고 장예원(掌隸院) 판결사에 올랐으며 또 외직으로 나아가 남양(南陽) 춘천(春川) 두 고을을 다스리고 마지막으로 괴산(槐山) 군수, 여주(驪州) 목사를 지냈으니 무릇 군수 부사 8 곳을 지냈으며 가는 곳마다 정사(政事)에 공평하고 청렴하여 치적(治績)을 남기니 백성들이 공의 위엄에 두려워하여 감히 간사안 일을 꾸미지 못했다.
공의 성품은 곧고 굵으시며 엄하고 후하여 속의 바른 마음씨와 겉모양의 위엄이 겸비하였으며 말씀은 간결하고 욕심을 절제하였고 잠시라도 외모를 흐트러지는 일이 없이 항상 단정하였다. 근사록(近思錄)과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좋아하였으며 청렴 결백으로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판서공(즉;아버님)을 섬김에 있어 한치도 어김이 없었으며 판서공 또한 일을 만나면 반드시 공에게 물어서 처리하였다.
조 정암(趙 靜庵)이 죄를 얻어 곤장(棍杖)을 맞을 때 공이 홀로 많은 뇌물로 옥리(獄吏)의 표독한 고문을 완화시켜 간악한 무리의 뜻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고 조 정암이 능성(陵城)에서 별세하여 용인(龍人)에서 장사지낼 때 공은 또 달려가서 곡하며 애통해 하였다. 이때 선비들이 스스로 자기의 몸 하나 구제할 겨를이 없는 판국인데 누가 감히 달려가 조문을 할 수 있겠는가?
배위께는 공보다 29년 먼저 별세하였으며 합장하였다. 1남 1여 아들 휘 준(準) 딸 성호문(成好問)창령인(昌寧人) 광흥창수(廣興倉守)부 찰방 유례(有禮)
@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있는 홍판결사 봉세 만사(輓詞)를 옮겨 본다.
대아(大雅)를 선배로 모셨으니 깊은 학문은 옛 경서(經書) 연구했도다. 성명(聲名)은 일대에 높이 올렸고 약(藥) 미끼는 3년을 더 넘겼도다. 옛 고을에는 끼친 사람 남겨 두었고 조정에는 노성(老成)한 신하 잃었도다 저 모든 손자들 덕업을 이었으니 가래나무는 묘역을 옹호했네.
홍영길 역(洪永吉 譯) 임숙영 찬(任叔英 撰) 기갈명 참조(基碣銘 參照)
21세(世) 휘(諱) 준(準) (1533년 - 1570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휘 봉세(奉世)의 아드님이시고 본이름은 평숙(平叔) 어머님은 숙부인 밀양 박씨이시다.
공(公)께서는 계사(1533년)에 출생하여 경신(1570년 1월 13일)에 졸(卒)하시고 배(配) 파평 윤씨(坡平 尹氏) 부 호군(護軍) 윤인형(尹仁衡) 조 수천(壽千) 증조(曾祖) 첨지(僉知) 준원(俊元) 외조(外祖) 경력(經歷) 의령남시(宜寧南偲) 묘(墓)는 광주 가차(廣州 加次) 수찬(修撰) 임숙영(任叔英) 찬갈(撰碣)
아드님 한 분이 신데 현감(縣監) 백순(百順)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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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世) 현감공(縣監公) 휘(諱) 백순(百順)(1557년 - 1639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휘 준(準)의 아드님이다. 본이름은 사길(士吉) 어머님은 파평(坡平) 윤씨이시다.
공께서는 명종(明宗) 기사년(1557년)에 출생하시고 거현양 의령현감(擧賢良宜寧縣監)을 지내시고 인조(仁祖) 기묘년(1639년 12월 10일에 83세에 수(壽)하시고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 증승지(孝行 贈承旨)와 정려(旌閭)(뜻; 충신 효자 열녀(烈女)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旌門)세워 주는 일)을 세웠다.
배(配) 양천허씨(陽川許氏)이며 기일은 5월 13일이고 부(父) 봉사(奉仕) 흔(昕)이시고 조(祖) 봉사 환(鋎) 증조 별좌 빙(聘) 외조(外祖) 대사성 파평윤탁(大司成 坡平尹倬) 생 1녀 배(配) 전주최씨(全州崔氏) 기일 5월 1일 부 만호(萬戶) 응성(應成) 조(祖) 인덕(仁德) 증조 중은(仲恩) 외조 부호군 청주한유(淸州韓侑) 묘(墓)은 광주 가차(廣州 加次)합장 대자학 이신(李縡) 찬갈(撰碣)
공께서는 3남 3녀 이 신데 큰아드님 여강(汝剛) 둘째 여관(汝寬) 셋째 여단(汝端) 큰딸 이원영(李元英) 한산인(韓山人) 수사(水使) *자 응사(應詐) *여 이유심(李惟諶) 둘째딸 정양우(鄭良佑) 동래인(東萊人) 좌랑(佐郞) 부 호(灝) *자 승지 태제(泰齊) *여 남원 양영갑(梁穎甲) *여 문지평(文持平) 평강채승구(平康 蔡承龜) 셋째딸 김양필(金良弼) *자 굉(鍠) 환(鋎)
23세(世) 휘(諱) 여강(汝剛) 자(字) 자방(子方) (1591년 - 1641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현감(縣監) 휘 백순(百順)의 큰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양천 허씨이시다.
공께서는 신묘(1591년 3월 3일생이시고 신사(1641년) 10월 29일 졸 하시고 배위 양성 이씨(陽城 李氏) 기일(忌日) 2월 4일 부(父) 수문장(守門將) 계원(繼元) 조(祖) 군수(郡守) 훤(萱) 증조 첨사(僉使) 윤종(潤終) 외조 연안 송대성(延安 宋大成) 묘(墓) 광주 가차(廣州 加次) 계좌(癸坐)에 합장
공께서는 3남 4녀 이신데 큰아드님 삼경(三慶) 둘째 익경(益慶) 셋째 극경(克慶) 딸 최전(崔琠) 딸 이후응(李后膺) 연안인 부(父) 돈선(惇善) *자 상만(相萬) *여 권건(權健) *여 김태중(金泰重) *여 송지겸(宋之謙) *여 홍도장 (洪道長) 딸 이익(李膉) 경주인 부(父) 후갑(後甲) *자 세흥(世興) *자 시흥(時興) *여 김진상(金震鏛) *여 강계(康啓) 딸 안영(安瑛) 부 죽산인 부 경비(敬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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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世) 휘(諱) 익경(益慶) 자(字) 중구(仲具)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휘 여강(汝剛)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양성 이씨이고 족보에는 생 졸의 대한 기록은 없고 배(配) 진주 유씨(全州 柳氏) 기(忌) 2월 23일 부 시영(時榮) 조 벽(壁) 증조 현감 종경(宗敬) 외조 한산 이유창(李惟昌) 묘 광주 가차 술좌(戌座)로 만 되어있다.
공께서는 3남 1녀 큰아드님 우주(遇疇) 둘째 우범(遇範) 셋째 우적(遇績) 딸 김증(金增) *자 무과수장(武科守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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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世) 휘(諱) 우주(遇疇) 자(字) 구보(九甫)
(생(生) 사(死) ?)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휘 익경(益慶)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진주 유씨이시다. 족보에는 배위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부(父) 치도(治道)로만 기록되어있다. 아드님은 한 분 내서(來瑞)이다.
26세(世) 휘(諱) 내서(來瑞) 자(字) 만직(萬直)
(1729년 - 1798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휘 익경(益慶)의 아드님이고 어머님은 밀양 박씨이시다.
족보에는 배(配) 전의 이씨(全義 李氏) 경술 (1730년)생이고 신해 (1791년 6월 9일에 졸(卒) 하시고 부(父) 이시남 (李時南) 조(祖) 진(鎭) 증조(曾祖) 광춘(光春) 외조 김해 김진군(金海 金鎭國) 계배(繼配) 원주 서씨(原州 徐氏) 부(父) 유택(維宅) 묘(墓) 광주 신청동(廣州 新靑洞)으로만 되어있다.
공(公)께서는 1남 1녀로 아드님 광택(光澤) 딸 라봉채(羅鳳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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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世) 휘(諱) 광택(光澤) 자(字) 처한(處漢)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결림(景霖)계 휘(諱) 내서(來瑞)의 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전의 이씨이시다.
족보에는 배(配) 청주 한씨(淸州 韓氏) 묘(墓)는 광주 황학동(廣州 黃學洞)으로만 기록되어있다.
공(公)께서는 2남으로 큰아드님 인간(仁幹) 둘째 문간(文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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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世) 휘(諱) 인간(仁幹) 자(字) 석규(錫奎)
(1764년 - 1834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휘(諱) 광택(光澤)의 큰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청주 한씨이시다.
족보에는 갑신 (1764년)출생 갑오 (1834년 11월 25일 졸(卒)하시고 배(配) 전이 이씨(全義 李氏) 기일(忌日) 3월 5일 부(父) 공(珙) 조(祖) 지예(之藝) 증조 우문(宇文) 외조 김해 김상진(金尙振) 묘 황학동 유좌(酉坐)로 기록되어있다, 공(公)께서는 아드님 한 분 병화(秉和)이시다.
29세(世) 휘(諱) 병화(秉和) 자(字) 대흥(大興)
(1786년 - 1831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의 휘 인간(仁幹)의 아드님이시다. 어머님은 전의 이씨이다.
족보에는 병오(1786년생이고 신묘 1831년 정월 12일에 졸 하시고 배 전주이씨 정미 1784년생이고 무신 1848년 2월 25일에 졸 하시고 부 석환(錫煥) 조(祖) 상익(相翼), 묘(墓)는 광주 신청동(新靑洞) 유좌(酉坐)이다.
공께서는 아드님 한 분 태섭(台燮)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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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世) 휘 태섭(台燮) 자 완서(完序) 초휘 녹이(祿伊)
(1816년 - 1874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휘(諱) 병화(秉和)의 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전의 이씨이시다.
족보에는 병자 1816년 생이시고 갑술 1874년 8월 5일에 졸(卒) 하시었다. 배(配) 전주 김씨(全州 金氏) 갑신 1824년 생이시고 계묘 1903년 3월 10일 졸 하시었다. 묘지는 광주 신청동(廣州 新靑洞) 자좌(子坐)
공께서는 아드님 한 분 휘 재석(在錫)
31세(世) 휘(諱) 재석(在錫) ( 1866년 - 1936년)
남양군파 징(徵)후 척(陟)계 경림(景霖)계 휘(諱) 태섭(台燮)의 아드님이시고, 어머님은 전주 김씨이시다. 본시 고향(故鄕)은 광주군 대왕면 지곡동(廣州郡 大旺面 地谷洞) (지금은 성남시(城南市)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사시다가, 1895년경 서울 동대문밖 신설리(新設里)(일명;안감내)에 정착(定着)하시었다. (지금은 용두 2동 762의 2호)이다.
공께서는 관군(官軍)으로서 덕수궁(德壽宮)에서 근무를 하시었는데 1개월에 녹봉(祿俸)이 쌀 한 섬(섬이란; 가마니보다 큰 멱서리 60k 2가마 정도) 북어 20말리 (1쾌)를 밭으셨다고 하며 훈련시(訓練時) 화승총(火繩銃) (지금은 조총이라고함)을 쏘는데 싸리 껍질을 길게 노끈으로 쾌서 불을 붙쳐 허리에다 노끈을 매달고 화승(火繩)에다가 불씨 을 대서 총알이 나아가도록 하는데 잘 쏘는 사람이 다섯 발자국마다 한발씩 쏜다고 하였다,
공께서는 관군으로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인천항(仁川港)에서 배를 타는데 배 안에 전기 불을 보고 건달 불이 바람이 불어도 신기하게도 꺼지지를 않는구나 하시었다. 배는 목적지(目的地)에 도착하여 산으로 올라가서 대포(大砲)를 설치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대나무 숲에 죽창(竹槍) 괭이를 든 반란군이 모여 있는 곳에 대포를 쏘아대고 진격하여 소탕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대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도 근방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께서는 관군해체시(官軍解體時) 총(銃)을 반납(返納)을 하지를 않고 집에다 숨겨두었다. 관군을 고만두고 통을 만들어 파시였는데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춘천(春川)으로 가시어 여러 날 길게는 한 달간을 작업을 하시는 동안 집에서는 배위(配位)께서 장독에 올라가서 일을 하는데 신설동쪽에서 일본 헌병(憲兵) 2명이 우리 집 쪽으로 오는 것이 예감이 수상하여 총을 빨리 간장 독 속에다가 집어놓고 있었는데 헌병이 오더니 다 알고 왔다 하면서 집을 뒤지니 나오지 안차 도로 가버렸다. 그래서 위기를 모면하여 그 후 아궁에다 깊숙이 집어넣었다고 한다. 동네 어는 누군 인가? 밀고하였던 것이다.
공께서는 춘천(春川)에서 저녁밥을 자시고 출발하였는데 거름이 하도 빨라 두루마기 자락이 바람에 날리듯이 팔팔 거리면서 서울 집에 도착하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고 하니 그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의심 점은 총을 가지고 집에 왔다는 점, 춘천을 자주 왕래(往來)하였다는 점, 걸음이 남보다 빠른 점, 관군동료가 만주(滿洲)로 갔으니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야 한다는 점 등등이다. 아마도 그 당시 일제치하(日帝治下)라 가족에게 비밀을 알리지 않는 것으로 추측(推測)할 다름이다.
공께서는 성질이 곧으시고 정성도 지극하시어 절에 불공(佛供)을 하려 가시며 추운 겨울에도 개울(지금에 이공대 짜리)에서 몸을 씻고 가시였으며 쥐덫을 놓아 쥐를 잡아도 죽이지를 않고 애기능(이공대) 근처에다 놓아주고 하였다, 동네에 굿이 있어 구경을 가시자고 하니 내가 궁중에서 석 달 열을 굿하는 것을 보았는데 무엇을 더 볼 것이 있느냐고 하시면서 가시지를 않으셨다.
집안이 대대로 손(孫)이 귀(貴)한데 광주(廣州)에서 안암동으로 거주하면서 자손(子孫)이 번창(繁昌)하여 4남 1여를 두시고, 1936년 음력 10월 19일에 71세로 졸(卒)하시여 우리 집안 가풍(家風)에 따라 탈관(脫棺)으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里門洞) 공동묘지에 안장(安葬)하였으나 도시개발로 인하여 1938년 음 윤달 7월에 묘(墓) 자리에서 화장하였다.
배위(配位)는 몸이 퉁퉁 하시면서 힘이 장사라 쌀 1가마를 번쩍 들어서 머리에다 이고 하시었다. 경주 김재숙(慶州 金在淑) 1878년 5월 20일생이며 1961년 음력 3월 13일에 83세(歲)에 졸 하시여 서울 도봉구 월계동에 안장(安葬)하였으나 염광(鹽光) 여자 중 고등하교가 신축되면서 학교 부지(敷地)로 편입이 되여 차일 피 미루다가 1982년 음 윤달 6월에 묘(墓)자리에서 화장을 하였다. 아버지 김한수(金漢水) 어머님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시다.
공께서는 4남 1여중 장남 휘(諱) 종윤(鍾潤) 자(字) 광윤(光潤) 둘째 휘(諱) 종춘(鍾春) 자(字) 광춘(光春) 셋째 휘(諱) 종수(鍾壽) 자(字) 광수(光壽) 넷째 휘(諱) 종쇠(鍾釗) 자(字) 광쇠(光釗) 딸 1925년 4월 28일생 광례(光禮) 부(夫) 1910년 6월 28일생 안동 김한식(安東 金漢植)
자손(子孫)이 귀(貴)한집에 조상(祖上)님의 가호(家護)가 계시어 자손(子孫)이 번창(繁昌)하여 35세(世)까지 4대에 걸쳐 남자 38명 여자 23명 계 61명이 종지손(宗支孫)은 물론 거의가 안암동에서 출생하여 세대수가 18세대가 안암동에 4세대 수원에 1세대 인천에 2세대 11세대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고 각자 맡은바 일을 충실히 이행하며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