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안산
조선 시대에 도읍지를 한양(漢陽)으로 정하면서 안산은 기전(畿甸)의 땅으로서 그 위상을 드높혔다. 조선 초부터 안산은 연성(蓮城)이라는 별호(別號)로 불리웠다. 특히 정조 21년(1797)에 정조 대왕의 어가(御駕)가 화성 행행(行幸)길에 안산별궁(安山別宮 ; 안산관아)에 들려 하룻밤 묵으며 안산을 ‘소반 같은 땅 모양, 일만 봉우리 연꽃과 같다’며 풍요롭고 살기좋은 안산에 대해 칭송하는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어가가 거쳐 간 고을의 선비들에게 연성(蓮城)과 관련있는 제목으로 친림과거(親臨科擧)를 베풀었다.
조선 시대에도 안산은 고려 시대에 이어 유력한 인물을 계속해 배출하면서 그 위세를 계속해 떨쳐나갔다. 조선 초기에는 안산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안산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끌어 일등원훈(一等元勳)에 올랐다. 또한 걸출한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강희안(姜希顔)과 강희맹(姜希孟) 형제를 배출하였다. 강희안ㆍ강희맹 형제의 부(父)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 강석덕(姜碩德)이며 모(母)는 세종(世宗)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으로, 강희안ㆍ강희맹 형제는 세종의 이질(姨姪)이 된다. 강희맹은 작은아버지인 강순덕에게 양자로 갔으므로 이숙번의 외손자가 되기도 한다.
후에 영의정에 오른 인조반정의 주역 김류(金瑬)와 조선조 한문학(漢文學)의 대가이자 효종(孝宗)의 비(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인 장유(張維)가 광해군(光海君)의 폭압을 피하여 은거한 곳이 바로 안산이었으며, 이들은 안산에 대한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의 대종(大宗)인 이익(李翊)과 예원(藝苑)의 총수이자 시(詩)ㆍ서(書)ㆍ화(畵) 삼절(三絶)로 유명한 강세황이 안산문화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안산은 서해(西海)의 어장(漁帳) 중 가장 우수한 곳으로 지목되어 사옹원분원(司饔院分院)이 직할하는 안산어소(安山漁所)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산어소에는 정7품 관인 1명이 상주하며 어로(漁撈) 활동을 감독 및 지휘하였으며, 어염(魚鹽) 상인들의 징세 업무도 관할하였다. 안산어소는 조선 시대 안산의 명소(名所)로 수많은 시문(詩文)의 주제가 되었다.
1. 지방제도의 정비
(1) 안산군 지역의 행정제도
안산 지역은 1390년(공양왕 2) 경기좌도에 속했던 안산군은 조선 건국 후에도 안산군이라는 행정지명을 그대로 유지한 채 경기좌도에 속해 있다가 1414년(태종 14) 8도제의 시행으로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그러나1663년(현종4) 안산군은 안산현으로 읍호가 강등되었다.《 현종개수실록》에의하면온양 지방에서 전패(殿牌)를 훔친 생이(生伊)라는 자의 출생지가 안산 지역이라는 이유로 안산군은 안산현으로 강등되고, 안산군수였던 심헌(沈櫶)도 파직되었다. 안산이 강등된 것은〈안산현 관사중건기 安山縣官舍重建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안산현감으로 부임한 이제두(李齊杜)가 관아의 여러 건물들이 무너진 것을 보고 복구를 위해 선혜청 당상인 김좌명(金佐明)에게 공사에 필요한 물자를 요청하여 1668년(현종 9) 가을부터 안산현 관사의 터를 닦기 시작하고 이듬해 4월 낙성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산군의 관원과 강역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중종대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안산군에는 군수(종4품) 1명과 훈도(종9품) 1명이 있었고, 영조대에 간행된《여지도서》에는 군수(4품)와 그 밑에 좌수1명∙별감 2명∙군관 2명∙아전 17명∙지인 12명∙사령 5명∙관노 8명∙관비 10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대 간행된《경기읍지》에도 군수 밑에 좌수 1명∙별감 1명∙장교 1명∙아전 21명∙지인 9명∙관노 9명∙사령 1명∙관비 1명∙면주인 6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여지도서》와 비슷한 인원수의 관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안산 지역의 강역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쪽으로 과천현 경계까지 5리, 남쪽으로 남양부 경계까지 35리, 서쪽으로 인천부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금천현 경계까지 14리, 서울까지 51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1759년 간행된《여지도서》는 기존의 다른 자료와 달리 군현 하부의 행정구역인 면리의 명칭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여지도서》는 방리조(坊里條)를가 장 첫머리에 두고 면별로 명칭∙위치∙호수∙남녀 인구수를 기록하고 있어 안산군의 하부행정단위와 지역 규모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안산군에는 군내면(郡內面), 잉화면(仍火面), 대월면(大月面), 와리면(瓦里面), 마유면(馬遊面), 초산면(草山面)등 6개의 면이 있었다. 다른 군현의 경우 면의 하부단위인 리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과 달리 안산군조에는 리에 대한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리의 명칭을 알 수 없다. 안산군 6개 면의 호구수를 살펴보면 군내면은 호가 408호∙남자 1,070명∙여자 1,050명, 잉화면은 호가 274호∙남자 550명∙여자 540명, 대월면은 호가 239호∙남자 531명∙여자 521명, 와리면은 호가 470호∙남자 1,060명∙여자 1,050명, 초산면은 호가 342호∙남자 781명∙여자767명이 각각 있었다. 안산군 6개 면의 전체 호구수는 1,733호에 남자 3,992명, 여자 3,928명으로 남녀도합 7,92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1789년에 간행된《호구총수》를 통해 안산군 하부행정구역으로 6개 면에 편제된 48개리명(里名)과 호구수를 알 수 있다. 6개 면에 편제된 48개 리를 면별로 정리하면 표와 같다.
《호구총수》의 안산군 면별 리 편제(1789년)
면 | 리 |
군내면(9개리) | 동암리, 서정자리, 장곡리, 부곡리, 신동리, 점성리, 성곶리, 성곶포촌리, 양등대리 |
초산면(10개리) | 두목곡리, 목감리, 논지곡리, 물항동리, 상직곶리, 광석리, 중직곡리, 하직곡리, 하직곡중리, 하직곡하리 |
잉화면(8개리) | 북곡리, 능곡리, 화정리, 광곡리, 와상리, 고잔리, 월피리 |
마유면(8개리) | 장종리, 응곡리, 월곶리, 죽률리, 정왕리, 구지정리, 신북리, 오이도리 |
대월면(4개리) | 거모포리, 석곡리, 선부동리, 달산리 |
와리면(11개리) | 선곡리, 신각리, 적길리, 무등곡리, 성두리, 이목리, 능내리, 원당상리, 원당하리, 포촌리, 초지리 |
이들 안산군 소재 6면∙48리의 전체 호구수는 호가 2,758호, 인구수가 남자 6,406명∙여자 5,520명으로 도합 1만 1,926명이었다. 1호당 인구수는 4.3명으로 전국 평균 4.28명∙경기도 평균4.0명과 거의 비슷하다.
또한 1895년에 간행된《기전읍지》는 경기도의 읍지를 한꺼번에 묶은 것으로 안산군 6개 면의 56개 리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표와 같이 된다.
《기전읍지》의 안산군 면별 리 편제(1895년)
면 | 리 |
군내면(10개리) | 지장리, 장상리, 장하리, 부곡리, 신리, 점성리, 성포리, 양상리, 양하리, 성륙리 |
초산면(13개리) | 조남리, 제청리, 목감리, 논곡리, 상직리, 광석리, 궤곡리, 중직리, 산현리, 물항리, 하상리, 하중리, 하하리 |
잉화면(8개리) | 북곡리, 능곡리, 화정리, 와상리, 월하리, 고잔리, 월피리 |
마유면(8개리) | 장종리, 조현리, 응곡리, 월곶리, 정왕리, 죽율리, 구정리, 산북리 |
대월면(4개리) | 거모포리, 석곡리, 선부동리, 달산리 |
와리면(13개리) | 산곡리, 모곡리, 신각리, 적길리, 무곡리, 성두리, 이목리, 능내리, 성내리, 원당포리, 원상리, 원하리 |
이들 안산군 소재 6면∙56리의 전체 호구수는 호가 2,472호, 인구수가 남자 5,082명∙여자 5,008명으로 도합 1만90명이었다.《 기전읍지》의호구수는1759년간행된《여지도서》의호구수와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증가하였지만, 1789년에 간행된《호구총수》의 호구수에 비하면 약간 줄어들었다.
안산 지역은 안산군으로서 오랫동안 경기도에 속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의 개혁이 단행될 때, 즉 23부府제가 실시될 때 시흥군∙과천군 등과 함께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23부의 새로운 지방제도에 불합리한 점이 많이 드러나자 이듬해 폐지되고 13도제로 바뀌어, 안산군은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2) 옛 광주부 지역
엣 광주부에서 안산으로 편입된 성곶면∙월곡면∙북방면 3개면에 대한 자료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에 속하였는데, 광주목은 1577년(선조 10) 광주부로 승격하였고, 1683년(숙종 9)에는 광주유수부로 승격하였다. 1690년 다시 광주부로 격하되었고, 1795년(정조 19) 다시 광주유수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가 23부제로 바뀌면서 잠시 광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가 되면서 광주부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 광주부에 속했다가 현재 안산시에 편입된 성곶면∙월곡면∙북방면의 하부행정구역인 리의 명칭과 호구수에 대하여 알아보자. 먼저《여지도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3개 면에 소속된 리의 명칭을 정리하면 표와 같이 된다.
《여지도서》의 성곶면∙월곡면∙북방면 리 편제(1759년)
면 | 리 |
성곶면(5개리) | 일리, 이리, 삼리, 사리, 오리 |
월곡면(7개리) | 일리, 이리, 수서당수리, 오룡동리, 사사리, 상초평리, 하초평리 |
북방면(7개리) | 속달리, 도대리, 대야미리, 이리, 도마교리, 삼리, 팔곡리
|
이들3개면19개 리의 호구수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성곶면은 호가 328호∙남자 711명∙여자 994명, 월곡면은 호가 351호∙남자 497명∙여자 676명, 북방면은 호가 317호∙남자 700명∙여자 811명이었다. 3개 면 전체의 호구수는 996호, 전체 인구수는 남자 1,908명∙여자 2,481명으로도합4,389명이었다.《 호구총수》를 중심으로 이들 3개면의 하부행정단위인 리에대하여 정리하면 표와 같다.
《호구총수》의 성곶면∙월곡면∙북방면 리 편제(1789년)
면 | 리 |
성곶면(5개리) | 일리, 이리, 삼리, 사리, 오리 |
월곡면(9개리) | 일리, 이리, 대대동, 입북동, 오룡동, 사사리, 상초평리, 하초평리, 상수리 |
북방면(7개리) | 속달리, 둔대리, 대야미리, 도마교리, 유곡리, 팔곡리, 건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