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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질서 찾기의 몸부림들
―1990년대 시의 도전과 응전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1.
벌써 금세기도 5년여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른바 1990년대도 벌써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이 1990년대는 자신의 특징과 동일성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는 듯하다. 시를 포함하여 문화의 일반이 오히려 일종의 혼돈과 무질서를 각축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1990년대 자체가 이미 지난 19세기의 그 무렵처럼 세기말적 허망을 재촉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 5천여 억 원의 부정축재 파문도 그렇다. 좀 더 차분히 지켜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새로운 세기로서의 2천 년대를 향한 능동적인 전망을 포괄하고 있는 면은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지난 1980년대의 밥상을 설거지하는 정도에서 그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따름이다. 설거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설거지해야 하겠지만 그 방향이 오늘의 무질서와 혼돈을 호도하는 쪽으로 잡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염려가 오늘의 현실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여러 새로운 징후와 경향들을 필자가 미처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데서 기인할 수도 있다. 최근 정치권의 부정축재 파문 속에도 이미 새로운 미래가 창출될 수 있는 원동력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제반 현실이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져 있고, 따라서 그에 관한 질서를 바로 세우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오늘의 현실 일반이 보여주는 이러한 면은 시의 경우에서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여전히 이렇다 할 체계를 세우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다급한 모습의 수많은 시가 씌어지고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좀 더 섬세하게 따져보면 우리 시의 오늘과, 그것들이 이루는 특징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고는 혼돈과 무질서를 계속하고 있는 우리 시의 현존에 대하여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일종의 갈래와 체계를 제공하려는 데에 목표를 두려고 한다. 불완전한 대로 오늘의 시들이 이루는 특성들을 종합하고, 그에 얼마간의 질서를 부여하여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시문학을 맞는 우리의 다짐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2
지난 1980년대 내내 이 땅의 양식 있는 인사들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가치와 행동의 중심에 ‘민족 민중에의 마음’이 자리해 있었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것이 못된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 및 민족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뜻 있는 사람들이 지난 1980년대 내내 민중의 마음으로 바쳤던 땀과 피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민족 민중에의 마음’과 함께 했던 전국민적 열정도 이른바 문민정부가 세워지고 1990년대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현금에 이르러는 몰라볼 정도로 잦아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공공연히 ‘민족 민중’ 운운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는데, 1980년대에 제기되었던 제반 문제가 여전히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이들 문제가 충분히 의미 있는 이월가치로서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간과되어 안될 것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오늘의 시에서도 ‘민족 민중에의 마음’이 그 나름의 적당한 변용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 때의 그것에는 1980년대와는 사뭇 다른 시각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 시대정신의 중심이 변했고, 이에 따라 시적 자아의 모습도 변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은 ‘민족 민중에의 마음’이 구체적인 시로 형상화되는 과정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 동안의 우리 시의 리얼리즘의 운동 과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돌이켜 보면 지난 1980년대의 리얼리즘 운동의 경우 ‘민족 민중에의 마음’을 지나치게 협착하게 받아들여 일종의 슬로건으로까지 인식했던 감도 없지 않은데, 주지하다시피 그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던 폐해는 매우 크다.
리얼리즘의 내포가 좀 더 폭넓어져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구중서는 아예 ‘광의의 리얼리즘’을 주창한 바까지 있는데, 필자는 그의 논리에 전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리얼리즘이 현실을 진실되게 재현한다고 할 때의 ‘진실’의 의미에 대하여 좀 더 심오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하는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사실 백낙청이 말하고 있는 ‘지공무사’ ‘사무사’의 정신과 함께 하지 않는 ‘민족 민중에의 마음’이 제대로 된 시로 형상화될 가능성은 별로 많지 않다.
다음은 리얼리즘의 이러한 정신과 함께 하고 있는 채광석의 시 「須彌山」(《창작과비평》 1995년 가을호)의 전문이다.
사십대 웬 아줌마가 봉분만한 배를 싸안고
시팔 좇팔 네기미 개 같은 놈 하며
해남시장을 빠져 나온다 양손에 찬거리 봉다리 가득 들고서
무슨 좇이 다 늙어서도 좇이여 힘들어 죽겄구만,
당신 남편을 두고 하는 소린지 어쩐지 아예 악을 써가며
날숨 들숨 오입하듯 뺐다 넣다 한다
좀 들어드릴까요 했더니 훤히 내다보이는 젖가슴 사이께
애 불알만한 땀을 닦아내던 아줌마, 쑥스러웠던 걸까
총각 글씨 난 평생 애 못 낳는 병신인 줄 알았당께로, 웃는다
이십의 처녀 같은 홍조를 들킬세라 뒤뚱뒤뚱 앞서가며
어매 시팔 어매 좆팔 네에미 추접스런 놈 하며
수미산을 꼬옥 싸안고 아줌마, 첫 배처럼 종종걸음친다.
이 시는 우선 먼저 해학으로 가득 차 있는 시인 채광석의 ‘민중에의 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에 투영되어 있는 그러한 해학이 “사십대의 웬 아줌마”에 대한 비판적 ‘내려다봄’으로서가 아니라 애정 어린, 그리고 즐거운 ‘들려다봄’을 통해 획득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적 화자인 ‘총각’의 “좀 들어다 드릴까요”와 같은 말에 이미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인 “사십대의 웬 아줌마”와 함께 하고 있는 수평적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예의 ‘민중에의 마음’으로부터 우리가 지난 1980년대의 그것과는 얼마간 다른 정신을 읽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시에 포유되어 있는 ‘민중에의 마음’으로부터는 무엇보다 어떤 격렬한, 의도되고 선취되고 강제된 이데올로기를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독자의 인지영역 안에 펼쳐지는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일상의 형상으로부터 삶의 따사로움과 정겨움을 먼저 읽는다고 하는 것이 옳다. 이 따사로움과 정겨움이 실제로는 독자들의 살아 있는 정서와 세계관을 변화시켜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랑과 평등이 실현될 수 있는 내일을 이루게 하지 않겠는가.
‘민중에의 마음’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이러한 실사구시적 정신은 ‘민족에의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민족에의 마음’이 분단 조국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고, 조국통일에의 의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이 목청 높은 반미구호 등의 차원으로 전개될 경우에는 시적 정서와도 무관해질 수밖에 없고, 시의 바른 차원을 획득하기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것이 기존의 당위적 사실을 선험적으로 반복할 경우에는 지리한 상식의 나열에 그치기 쉽다. 중요한 것은 ‘민족에의 마음’ 역시 자신의 살아있는 체험 속에서, 살아있는 깨달음 속에서 되살아날 때 하나의 시로서 일정한 성취에 이르게 되리라는 점이다.
오늘의 정치‧경제적 현실에서는 ‘민족에의 마음’을 담아내는 일 그 자체가 지난 1980년대와 같은 반독재 투쟁의 일환이 되기 힘들다. 새삼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 시대에는 민족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전술적 실천의 일부로 작용한 바도 있다. 물론 오늘의 현실이라고 하여 분단체재로 인해 형성된 기득권 층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가 시에서 ‘민족에의 마음’을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은 이제 무언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어야 마땅하다. 조국통일에의 당위성과 민족자주에의 당위성을 목청 높여 부르짖는 차원으로는 시의 기본적인 경지에도 이르지 못하거니와, 최소한의 감동도 담아내지 못하기 쉽다.
‘민족에의 마음’ 역시 실사구시의 정신과 함께 하는 진실된 자아의 미적 성숙 속에 존재해야 한다는 데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모더니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참된 리얼리티가 되지도 못하거니와, 제대로 된 감동에 이르지도 못 한다. 변화하는 오늘의 상황에 따른 끊임없는 깨달음 속에 존재할 때 시에서의 ‘민족에의 마음’도 그 의의를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이러한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임동확의 「비무장지대」(실천문학 1995년 가을호)와 장석남의 「德積疏」(《창작과비평》1995년 가을호) 등이다. 특히 장석남의 시는 인식의 면에서보다는 형식의 면에서 ‘민족에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민족형식의 이월가치를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임동확의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찌 발목을 꺾는 지뢰밭,
한치의 방심도 허락치 않는 이곳에서
개개비는 잘 자란 갈대밭에 둥지를 틀고
제삼줄나비는 더 힘차게 나무들의 수액을 빨며
얼마나 격렬한 열정의 흘레를 나누는가
한낱 스쳐 지나갈 유행일 수도 있는
모든 과장된 포즈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절망의 천적들인 열목어를 키우며
어찌하여 희망처럼 대책 없이 쏟아지는 폭포수는
동해로, 서해로 꿈 뜨게 흘러드는가
저 뚜렷한 재[灰]와 가시 철책의 경계선
추억의 불모지를 그리움의 습지로 뒤바꾸며
그러나 단지 생각 많은 인간만이
접근 금지인 생태의 지옥일지도 모를
그곳마저 기어이 낙원이 되고 마는가
필시 가슴 저미는 상처 위에 황홀한
우점종의 아름다움만을 꽃 피우는가
이 시는 민족 분단의 결과로 형성된 비무장지대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사실 비무장지대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우선 통일조국의 건설과 관련하여 따져보면 남북의 체제가 공히 극복되고 지양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부터 주목되어야 한다. 남북한의 어느 체제에 대해서든 일방적인 경도와 편들기만으로는 오늘의 현상을 결코 바르게 타개할 수 없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남북 분단의 결과인 비무장지대로부터 오히려 일련의 모범을 발견할 수도 있다. 수많은 지뢰가 묻혀 있고, 또 갖가지 살상 무기가 대치해 있는 이 비무장지대에서 역설적이게도 온갖 생명들이 그 스스로 지니고 있는 성정들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낙청의 표현대로 “살벌한 남북 대치의 부산물로 한반도에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생태학적 실험의 현장이며 희귀동‧식물의 서식처를 겸한 대규모 녹지대가 생겨났다는 사실”에서 거꾸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 임동확에게 그것은 하나의 의문일 수밖에 없다. 어째서 남북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죽음의 공간으로 설정된 이 비무장지대에서 온갖 생명들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꽃을 피운다는 말인가. 임동확의 위의 시는 다름 아닌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기인한 내적 질문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기초한 정서적 감동이 아니라 분단 현실에 토대를 둔 반성적 질문인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민족에의 마음’과 함께 하고 있는 그의 이러한 반성적 질문의 경우 깊이 있는 심미적 충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이 시에 드러나 있는 반성적 질문의 경우 적잖은 깨달음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민중 민족에의 마음’을 완미성 있는 작품으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자기 자신의 체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소문과 풍문을 시로 형상화할 때 제대로 된 작품으로 완성되기 어렵다는 것은 두루 잘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체험이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개인사 속에서 오래도록 곰삭아 드러날 때 그것은 비로소 서정의 자기 빛깔을 갖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바로 그러한 면에서 개인사적 체험으로 곰삭아 온 민족사적, 또는 민중사적 체험의 시적 형상화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개인사 속에서 오래도록 뒹굴어 온 ‘민중 민족의 마음’이 포괄해내는 자기 빛깔의 서정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최근의 시로는 조재훈의 「진달래」(《 창작과비평』》 1995년 가을호)를 얘로 들 수 있다. 이 시는 ‘진달래’라는 시각적 대상을 ‘간 빼먹는 소리’라는 청각적 대상으로 전화해내는 뛰어난 시적 기교를 보여주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배곯은 얕은 산 산자락에
모처럼 햇살이 찰찰 넘쳐
여우 새끼 치는 애장 덩굴 따라
까르르 깔깔
깔깔 까르르
긴긴 해 용천배기 간지럼치는 소리
간 빼먹는 소리
이 시는 우선 먼저 잘 짜여진 형식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진달래꽃의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그것이 전화되어 탄생시키는 수많은 청각적 이미지들의 화사한 면모를 드러내준다. 뿐만 아니라 이 시는 보릿고개 시절의 설움이 녹아 있는 결 고운 서정, 그리고 민중 민족의 체험과도 연계되어 있는 시인 자신의 개인사적인 체험에 기초하고 있는 응축된 이야기 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태여 여기서 꼬집어 밝힐 필요까지는 없는 이 시에 내재되어 있는 응축된 이야기와 이미지, 정서의 의미망이 주는 감동은 자못 크다. 무엇보다 의태어와 의성어들이 이루는 질서는 독특한 음악성과 더불어 이 시로 하여금 서정시 특유의 아름다움을 갖게 한다.
물론 이 시에 제기되어 있는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1980년대적이다. 하지만 실사구시적 정신에서 생각하면 관심의 초점을 오직 그에만 쏟을 수는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경제의 현실이 무역교역량의 경우 세계 13위에 이르게 되었고, 국민 일인당 소득의 경우 1만 불에 육박하게 되면서 이른바 산업사회의 후기적 징후들이 나타나고, 그리하여 지난 1980년대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무수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새삼스러운 예기지만 1990년대에 들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생각할 때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 관한 좀 더 실제적이고도 근원적인 질문이다.
3.
인간의 삶에서 ‘자연’이 차지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되는 도시문명의 폐해와 무관하지 않다. 산업사회의 후기적 징후, 근대사회의 후기적 특징으로서 도시문명이 갖는 무분별한 소비문화와 그에 따른 생태계의 위기로부터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물 한잔 마음놓고 마실 수 없는 공해로 가득 찬 오늘의 현실에서 생태환경 문제를 자각하고,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생태환경 문제 그 자체에 집착하여 삶의 모든 문제를 그것의 하위 범주로 종속시키는 발상은 깊이 있는 반성을 요구하게 한다. 자본주의의 후기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몇몇 나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종의 원리주의적 발상으로 생태환경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백낙청이 지적하는 것처럼 “생태학적 원리주의라는 또 하나의 분파를 보태는 일”은 오늘의 삶이 제기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바로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에 정작의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원리주의가 그러하듯이 생태학적 원리주의도 현대인에게 귀중한 깨우침을 주는 바가” 상당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생태환경의 문제가 자본주의적 근대에 들어 부쩍 우리 사회의 문제로 다가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근대적 삶의 양식 자체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모순의 관계로 이끄는 주범이라는 것인데, 사실 그 모순은 오늘에 이르러 심지어 적대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도정일이 지적하고 있듯이 “근대적 삶의 양식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므로 그것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드러내고 있는 “적대적 모순 역시 역사적 성격”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자못 의의 있는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생태환경의 파괴를 자본주의적 근대와, 근대 이후의 삶이 갖는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들 모순이 자본주적 근대의 산물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의해 언젠가는 극복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라는 적극적인 사고를 갖는 데에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에서의 생태환경에 대한 자각과 실천이 생태학적 원리주의 운동이나 녹색운동의 그것에까지는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녹색평론》지를 주관하는 김종철이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서정시의 세계관 자체가 모든 사물과 생명에 인성을 부여하는 의인관적 태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의인적 수사의 경우 특별히 더욱 그렇지만) 인간과 자연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우리가 시 자체에 좀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근본적으로 세계와의 일치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서정시의 세계관에서는 어떠한 사물과 생명에 대해서도 사람과 동등한 인격을 부여하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할 때 오늘의 시가 보여주는 생태학적 상상력은 다소 복합적인 의미망을 포괄하고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오늘의 지적 노력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생태학 상상력은 대강 두 가지의 축에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바른 관계의 정립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낙청이 말하고 있는 “그때그때의 공해나 오염 문제, 특정지역의 자연보호 같은 단기적 과제와, 인간과 자연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장기적 과제”가 다름 아닌 그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이루는 오늘의 관계를 이러한 정도의 차원만으로 파악하는 데는 물론 문제가 없지 않다. 이 두 가지 “과제를 매개해줄 중간항이 빠짐으로서, 지엽적인 개량과 원대한 이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결과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이 중간항과 관련하여 좀 더 복잡한 깨달음을 말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실제로 씌어지고 있는 우리 시의 생태학적 상상력은 대강 앞의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환경파괴 혹은 공해 및 오염 문제 등에 대한 시적 대응이 있을 수 있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연의 질서 혹은 생명의 경이 등에 대한 시적 자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이루는 모순에 대한 단기적 과제의 측면에서, 즉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시가 그 동안의 산업화 과정에 무수히 씌어져 왔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과제의 경우 이미 지난 70년대 이래 우리 시의 매우 비중 있는 내용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작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작품 속에 담겨 있는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시인의 살아 있는 체험과 관찰에 의해 얼마나 절실하고 진실하게 시로 포착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그것들을 생생하게 구체화하는 시적 질서, 나아가 시적 감동과 함께 하고 있는 새로운 깨달음을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 되리라는 것이다.
다음은 도시문명의 급속한 팽창이 인간과 자연의 화해롭던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를 객관적이고도 우회적으로 되묻고 있는 김명수의 시 「안산에서」(『 바다의 눈』)의 전문이다. 다소 익숙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자본주의로서의 근대문명, 즉 도시문명의 건설에 따른 환경파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작품으로서는 이만한 시도 드물다.
토박이 장씨 노인은
성포리 태생인데
8년 전 안산에 공단이 생길 때
부치던 논밭을 다 잃었다
농사 일로 등뼈가 굽은 장씨 노인은
잃은 땅 생각하며
여기저기 비어 있는 집 지을 터에
버리지 않았던 괭이를 가져와
배추밭을 가꾼다
바람이 스산한 늦가을 오후
터 박고 살던 곳 흔적 없고
8년 전 보상받은 돈푼으로
철물점 차렸던 맏아들이
장사를 망치고 서울로 나갔다
바라도 스산한 오늘 같은 날
옛 이웃이라도 찾아가고 싶건만
옛 이웃 살던 산업도로 저 너머
옛 마을 자취 간 곳 없고
갈 수 없는 산업도로
막막한 길에
차들만 씽씽 어지럽게 달린다
이 시는 일단 먼저 자연의 일부로서의 논과 밭이 근대적 산업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일실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아가 그로 인해 논과 밭을 일구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던 한 순수한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고 있으며, 또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가를 드러내준다. 특히 자연의 논과 밭으로부터 소외된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인 ‘장씨 노인’이 보여주는 노력, 즉 “여기저기 비어 있는 집 지을 터에/버리지 않았던 괭이를 가져와/ 배추밭을 가”꾸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자연으로서의 논과 밭은 장씨 노인과 같은 사람에게는 삶의 원초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시에 공해문제, 오염문제 등이 직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시에서 제기되고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기본적으로 미시적인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다고 해야 옳다. 직접적으로 수질오염, 대기오염 등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인 관계에서 보면 다소간은 단기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오늘의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해결해야 할 좀 더 미시적인 과제로서 수질오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신경림의 「낙동강 밤마리 마루」(『쓰러진 자의 꿈』)와 같은 작품도 있기는 하다. 시적 주체의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오염된 현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시적 화폭이 이루는 형상은 얼마간 끔찍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전문을 여기에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기름과 폐수로 거멓게 변색된 모래밭에
고기떼가 허옇게 배를 내놓고 널부러져 있다
이른 아침부터 풀들이 거무죽죽 죽어가고
빨래하는 아낙네도 고기잡는 늙은이도 없다
동력선 한 척이 유령선처럼 강 복판에 떠 있다
오광대가 덧보기춤으로 신명을 돋우었다는
옛 장터에는 올해도 복사꽃이 피지 않았다
등뼈 굽은 잉어를 낳는 꿈에서 놀라 깬
가겟집 맏며누리가 수돗가에서 구역질을 한다
봄날이라 강 안개는 꾸역꾸역 기어올라와
죽음의 잿빛 한 색깔로 마을에 칠한다
이 시는 통영오광대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는 낙동강 가의 밤마리 나루터에서 벌어지고 수질오염의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수질오염이 극복되어야 할 모순이라는 주장을 특별히 겉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 것이 이 시이다. 하지만 이 시에 나타나 있는 끔찍한 강 마을의 모습만으로도 우리는 오늘의 현실이 안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충분히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잿빛”으로 뒤덮여 있는, 즉 오염물질로 뒤덮여 있는 밤마리 나루의 현실로부터 역사적 자본주의의 한 모순을 익히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역사의 한 시기를 슬기롭게 다음의 시기로, 즉 자본주의 이후의 시기로 이행시켜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오늘을 사는 인간의 지혜에 달려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생태환경의 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물론 마찬가지이다. 생태환경의 문제 역시 역사적 자본주의의 한 모순이라고 할 경우,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그것이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개별적 문제는 아니지만, 사실 이 시기, 즉 역사적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들의 지혜 이외의 것으로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지혜의 표본을 여기서 단일한 모습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이미 인류사에 의해 끊임없이 시도되어온 바 있는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일치에의 추구와 결코 무관하지 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따름이다.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를 동등한 관점에서 이해하며 항상 그것들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고자 했던 동양 전래의 자연관을 회복하는 일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일과 관련하여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연과학적 사유방식, 즉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시적 사유방식, 즉 일원론적 세계관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말로 이를 대치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자연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라는, 인간이라는 ‘나’의 생명과 자연이라는 ‘그것’의 생명이 동일한 무게와 크기로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인간 혹은 생명체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순수하고 무구한 마음을 발견하는 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본래부터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열린 마음’을 자각하지 않고서는 사물 및 생명들과 하나가 되어 바르게 교감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다음은 이시영의 시 「풍경」(『무늬』)의 전문이다.
아카시아들이 다투어 포도 위에 샛노란 꽃방석을 깔았다
아가씨들보다 아가씨들 품에 안긴 개들이 먼저 사뿐히 뛰어내린다
이런 날 아스팔트도 단 한 번 인간의 얼굴을 한다
불과 3행에 지나지 않지만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본래 어떻게 맺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시인 이시영의 오랜 성찰을 압축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일단 “아가씨들보다 아가씨들 품에 안긴 개들”이 오히려 열린 마음, 즉 순수하고 무구한 자연에의 본성에 충실하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다. 물론 설레는 마음으로 “샛노란 꽃방석” 위로 “사뿐히 뛰어내”리는 개들의 모습을 통해 시인 이시영이 인간의 이원화되어 있는 세계관의 현존을 비판하고 있다고까지도 그 의미를 확대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2연의 “이런 날”에는 “아스팔트도” “인간의 얼굴을 한다”와 같은 표현이 목표로 하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그는 여기서 ‘아스팔트’와 같은 문명의 산물들까지도 때로는 인성을 갖는 생명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과 그것의 시적 실천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지 않다는, 아니 다르지 않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당위성 속에서 가능해진다. 물론 그러한 당위성이 하나의 깨달음으로 시인 이시영의 가슴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은 역사적 자본주의로서의 근대가 보여주는 생태환경에 대한 위기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 시에서 그가 포착하고 있는 깨달음 속에는 충분히 역사적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오늘의 인간과 자연이 해결해야 할 좀 더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과제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가 포괄하고 있는 생태환경의 위기를 바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구체적인 삶과 관련하여 물성 자체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시적 탐구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위해 손쉽게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불교사상(佛敎思想)을 빌려올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감동 있는 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적 자본주의로서의 오늘의 사회현실이 이루는 생태환경의 위기에 대한 시인의 내적 영감 혹은 깊이 있는 자각이 필요하다. 인간과 자연이 이루어야 할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이 포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의 표면에 생태환경적 문제의식이 즉각적으로 노출될 것까지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주목이 되는 것은 조태일의 근작들이다. 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를 통해서도 익히 살펴볼 수 있지만 그의 시는 최근에 들어 더욱 거시적이고 근원적인 시각에서 인간과 자연이 이루어야 할 이상(理想)을 탐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유형의 그의 시에는 인간이 이루는 오늘의 삶의 모습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근대가 내포하고 있는 생태환경의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인간과 자연이 항상 행복한 일치를 획득하는 데에 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음은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그의 시 「물을 노래함」(《사회문화리뷰》, 1995년 8월호)의 전문이다.
더우면 소나기 되고
추우면 눈이 되고 고드름이 된다
화나면 폭포가 되고
심심하면 보슬비가 되고 가랑비가 된다
여린 풀잎 끝에 매달리면 이슬보석이 되고
슬픈 눈동자 머물면 눈물이 된다
머물 곳 답답하면
천만리 길 휘돌아 바다가 된다
처음도 끝도 없는 사랑이어라
물, 물, 물, 물물물물물물물‧‧‧‧‧‧
이 시에서 시인 조태일은 물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보여주는 여러 특징들, 즉 물에 내포되어 있는 물성(物性)을 추적하고 있다. 변화의 다양성, 자유로움, 그리고 어떠한 것과도 쉽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의 정신 등이 물의 물성(物性)이라고 할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그것이 이내 깨어 있는 사람, 즉 열린 마음의 인간이 보여주는 인성(人性)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도 끝도 없는 사랑”의 마음, 즉 물의 마음은 시인 조태일 자신이 일상의 삶에서, 즉 그와 인간 그리고 그와 자연의 관계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과 결국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물의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은 서정시의 마음 그 자체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성과 이성이 미처 분리되기 이전의 마음, 주관과 객관이 미처 분리되기 이전의 마음을 토대로 하고 있는 서정시의 세계관의 경우 결국 사랑의 마음, 물의 마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의 마음, 사랑의 마음, 즉 일원론적 세계관이 좀 더 강화되지 않고서는 역사적 자본주의 이후의 인간의 삶도 크게 기대될 것이 없다. 그것이 없이는 자본주의적 근대가 다음 시기로 이행된 이후에도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역사적 자본주의 이후의 삶에 대해 전혀 희망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우리 시인들이 현금의 역사적 자본주의가 산출해내고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에 대해 미시적인 면에서, 그리고 거시적인 면에서 끊임없는 자각과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제가 문제로서 제기되었을 때는 이미 그 안에 무수한 해결책이 잠재되어 있게 마련이다.
강조하거니와 오늘의 역사적 자본주의가 떠안고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를 한갓 논리의 유희를 통해 가볍게 해소하고 말아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현실의 한복판에서 그것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사물 및 생명들과 함께 이미 그 징후를 보이고 있는 자본주의로서의 근대 이후의 삶을 떳떳하고 바르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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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글은 1980년대적 문제의식을 완전히 떨어내지는 않는 가운데 1990년대에 들어와 좀 더 본격화된 삶의 여러 모순들과 함께 하고 있는 우리 시의 리얼리티를 말 그대로 거칠고 엉성하게 점검하는 데서 그치고 만 셈이다.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단련되는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시의 ‘민중의 마음’과 ‘민족의 마음’, 그리고 생태환경의 위기에 대한 미시적이고도 단기적인 접근 및 거시적이고도 근본적인 접근 정도가 이 글에서 검토되고 있는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필자는 ‘지금 이곳’의 우리 시가 이루는 현존을 혼돈과 무질서라고 전제하고 나름대로 그에 대한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데에 목표를 둔 바 있다. 그러나 그 소득이 별로 커 보이지 않아 얼마간은 두렵기도 하다. 물론 보잘것없는 대로 ‘지금 이곳’의 우리 시가 보여주고 있는 여러 경향과, 그와 함께 하고 있는 필자의 소박한 생각이 이 글의 여기저기에 피력되어 있기는 하다.
여러모로 부족하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러한 정도의 인식과 논리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만큼 필자로서는 당연히 아쉬운 점이 많다. 또한 불비하기 짝이 없는 이러한 정도의 사유조차 제대로 된 논리의 틀 안에서 드러내지 못한 것 같아 짐짓 부끄럽기도 하다.
애초에는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의 삶과 관련한 또 다른 리얼리티의 하나로서 ‘모성’과 ‘동심’의 시적 현존에 대해서도 따져 보고 싶었음을 여기에 밝혀 둔다. 하지만 원고의 마감 시간과 지면의 한계로 이에 관한 검토는 다음의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 마음 역시 별로 편하지 않다.(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