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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작가
이 원 좌
Lee, Won Jwa
眞景山水境의 獨自的인 語法 만들어 낸
畵壇의 重鎭
김남수 / 미술평론가
미술사적 시각에서 관찰할 때 세계적인 화가는 1세기 동안에 한 두명이 탄생한다고 한다. 이런 화가들을 심층 분석을 해보면 미적 완성을 성취하려고 하는 예술성, 독자성, 영원성 등 한결같이 그 목적이나 이상향이 발현되고 있다. 산수화는 한국미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양식이다. 까닭은 산수경은 우리가 낳고 자란 삶의 터전이요, 훗날 우리가 돌아갈 마음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우리의 산수화를 그려왔다. 그 가운데는 숱한 원로나 선배화가들이 산수화가로서 생애를 살다 갔지만 후세 사가들에 의하여 100년 동안에 한 두명에 거론될 만큼의 이름을 남긴 화가는 드물다.
중국에도 1천년 전에 荊浩(907∼915)라고 하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이론과 실기를 겸전한 당대의 대가였다. 사혁의 6法에 필적하는 그의 저서 필기법(筆記法)에는 畵6要(氣, 韻, 思, 景, 筆, 墨)가 실기를 위한 체계적 이론서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붓과 먹을 쓰는 방법론을 제시한 화론가였다. 그는 소나무와 산을 스케치하면서 철저한 사실주의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해온 화가다. 조선시대의 화가 겸재 정선은 '仁旺薺色圖'나 '金剛山圖'를 완성해 낸 眞景山水畵家다. 3백년이 훨씬 지난 시대의 화가이지만 오늘까지도 후세들에 의하여 숭앙 받고 있는 예술인이다. 그 까닭이 모화사상에서 탈출한 한국성 완성에 성공한 화가라는 것이며, 그에 의하여 최초로 진경산수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작가가 표출코자 하는 피사체의 진수만을 화폭에 담는 작업이 벌써 이때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야송 이원좌는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산수화가다. 그의 예술세계는 수묵을 주조로한 남화정신과 고법을 바탕으로 해서 출발을 했지만 그동안 산수경의 집요한 천착과 자기개발을 통하여 독자적인 자기 필법(筆法)을 만들어 낸 역량 있는 작가이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산행을 하고 사생을 하는 등 삼매경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역시 한가지 일에 매달리면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순수하고 올곧은 성품 탓은 아닌가. 언젠가 그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자연에 너무 얽매이면 신의 뜻에 억눌리게 되고, 자연을 지나치게 경시하면 인간의 재주가 그에 미치지 못함으로 신에게 버림을 받는 꼴이 된다' 라고 소신을 피력한 적이 있다. 자연과 인간의 상관관계를 함축미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양정신은 사유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추사가 주창한 유천희해(游天戱海) 사상이라던지, 천리길을 걸으면서 만권의 책을 읽으라는 선현의 가르침은 화가이면서 훌륭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야송은 자신의 회화세계에 대하여 글을 통하여 기술하기도 하고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을 논리정연한 문장력으로 표현이 가능한 문필가이기도 하다. 이른바 집필(執筆)과 사색을 동시에 하는 유망한 중진이다.
野松의 視點分析과 技法의 特徵
야송의 회화세계가 높이 평가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세계의 화성(畵聖)들 가운데는 창(窓)이나 다리(橋)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화가도 있다. 영혼과 가교의 메타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야송의 작품세계를 놓고 일부의 평자들이 단순한 사생주의자, 제작의 스케일을 보고 자기과시욕, 반복적인 매너리즘 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과는 전혀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 몇 가지 이유를 지적해 보면 첫째 야송의 산수경은 한국은 물론이요, 중국, 일본 등 동양회화를 추구하는 동양삼국에서는 독보적인 자기언어가 발현된 예술양식을 정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사생현장에서의 시점분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들은 현장에서의 단순한 사생주의 화가라고 혹 폄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화면을 정밀 관찰하고 분석을 해 보면 단순한 재현과는 전혀 시점(視點)이 다르다. 이른바 피사체를 관조하고 필요한 진수만을 화폭에 담는 재구성 작업을 통하여 또 다른 자연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겸재 정선이 진경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이미 그때 이러한 기법을 쓰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동 시점에 따라 형상은 달라지고 작가의 정신세계가 게재함으로서 자연이 재창조되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셋째 기법상 방법론의 문제다. 그는 부벽준이나 피마준법을 즐겨 구사하고 있다. 붓의 놀림이나 운필이 다소 까다로운 기법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기법이 그가 추구하는 예술양식과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작업이 모작이나 카피가 거의 불가능한 것도 디테일한 공필적 테크닉을 필요로 한다던지, 많은 시간적 적공(積功)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넷째 야송예술의 중심사상과 정신주의 문제다. 그는 분명히 한국성을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세계의 예술양식과 그 누구도 닮지 않은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독선의 논리는 자칫 한국미술을 세계의 고아나 사생아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할 때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의 예술양식 속에서 공존할 수 있고 공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세계질서의 반열에 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만의 향수나 애정은 세계시장에서 외면 당할 수밖에 없 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야송의 예술세계는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예술정책 당국이나 사회와 기업이 국익의 차원에서 가능성이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은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 서양화가 이한우는 파리 룩상부르 상원 박물관에서 2005년 초대전을 받고 있다. 유화로 한국의
예술정책 당국이나 사회와 기업이 국익의 차원에서 가능성이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은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 서양화가 이한우는 파리 룩상부르 상원 박물관에서 2005년 초대전을 받고 있다. 유화로 한국의 산을 그린 한국성 예술이라는 이유로 초대전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900평 규모의 전시 공간에 500호 크기의 유화 약 70점이 선 보일 예정이다. 이는 상원에서 소요경비 몇 억을 투자해 가며 추진되고 있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야송 이원좌는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산수화가다.
그의 예술세계는 수묵을 주조로한 남화정신과 고법을 바탕으로 해서 출발을 했지만
그동안 산수경의 집요한 천착과 자기개발을 통하여 독자적인 자기 필법(筆法)을 만들어 낸 역량 있는 작가이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산행을 하고 사생을 하는 등 삼매경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역시 한가지 일에 매달리면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순수하고 올곧은 성품 탓은 아닌가.
이러한 공간에 야송의 산수가 전시된다고 가정해 보자. 국위선양은 물론이요,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세계 속에 한국의 얼을 심는 대 축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송은 금시 세계질서의 스타덤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인은 일시에 급조되는 것은 아니다. 한 작가가 만들어지려면 적어도 4, 50년의 세월을 필요로 한다. 예술인에게는 그만한 노하우가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의 명화가 1점에 한화로 500억이나 1000억에 거래되고 있는 것도 물량개념으로 계산될 수 없는 예술인의 창조적인 노하우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도 만시지탄이 있지만 서둘러 세계적인 작가를 발굴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한다.
極과 極을 달리는 作品의 스케일
전국 방방곡곡을 손금 들여다보듯 누벼온 야송의 능소능대(能小能大) 한 작품세계는 화폭이나 크기에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이른바 1cm 크기에서 48m의 초거작을 제작하는 신들린 그의 예술행위는 실로 우리 세대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치열한 작가로 꼽을만하다. 1cm와 48m의 작품이 그 내용에서 추호도 차별성이 없는 그의 성실성, 노력과 집념은 시종일관 그 작업태도가 처음과 끝이 같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지난 94년, 서울 정도 600년 기념전에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의 대작실, 소품실, 병풍실, 수석화(壽石畵)실, 도화(陶畵)실, 원목화실, 선화(扇畵)실, 두방(斗方)화실, 스케치실 등으로 나누어져 600점이 전시됐다. 이 전시장을 둘러본 참관인들은 국내에서 처음 보는 메가톤 급 전시이기도 하지만 예술성과 독창성, 개성있는 어법 등이 표출되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나 톤은 유니크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데 감동과 찬사가 이어졌다.
壽石畵가 남긴 逸話
요즘 수석인들은 석보(石譜)를 즐겨 만들고 있다. 자신의 애장석을 기록이나 문헌으로 남기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작가 야송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수석들을 창조적으로 리얼하게 묘사하는 등 이를 팔폭 병풍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그는 수석인이요, 실제 물상을 모델로 설정하고 이를 리얼하고 예리한 기법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선배작가들이 괴석이나 뒤틀리고 모난 수석 등을 골라 그림을 그렸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야송의 수석화는 평면의 수반 위에 수석을 포치하고 디테일한 필치로 이를 창조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전국의 수석인들이 자신이 애장하고 있는 실물의 수석보다, 야송이 붓으로 친 수석화가 훨씬 좋아 다투어 수장했던 일화가 있다. 작가는 이 수석화 덕분에 어려운 고비를 별 탈 없이 넘기기도 했다.
野松의 代表的인 超大作 作品들
지난 70년대 중반 첫 개인전을 가질 때부터 작가 야송은 대작을 즐겨 그렸다. 한국화단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야심과 의욕에 찬 작업들을 했다. 작품 청량대운도(淸凉大雲圖-48m+6,5m), 주왕운수도(周王雲樹圖-12,7m+2,5m), 무릉하운도(武陵夏雲圖-11,7m+2,4m), 영암군봉도(靈巖群峰圖-9m+1,8m),관음폭포도(觀音瀑布圖-8,1m+2,4m), 노적봉운도(露積峰雲圖-5,25m+45cm),주왕산전도(周王山全圖-7,77m+77cm), 새알산 하효도(夏曉圖-16,2m+1,25m) 등 대작을 너무나 많이 남겼다.
뿐만 아니라 1×1cm의 초미니 작품에 비하면 그가 그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만큼 작가는 자유분방한 자유의 미학을 누리고 있다. 우리시대가 낳은 진솔한 미술인, 공자가 설파한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몸소 실천하는 화가, 야송을 평자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한 구절 식만을 소개해 본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씨 - 동양화에 뜻을 두고 붓을 들기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실경 수묵 산수화에만 전념해 왔다. 이 사이에 우리 나라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화폭에 옮긴 작품 수가 천여 점이 넘는다고 하니 그 치열한 작가정신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몸으로 부딧치고, 마음으로 느끼며, 시각적으로 이해하는 그의 실사작업이야 말로 진실의 탐구가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인환씨 - 어느 시인의 지적만치나 '신들린 사람'인 야송은 주유천하 하며 어지간히 많은 분량의 화선지를 소모하기도 했고, 발길 닫는 대로 찾아다니며 주워 모은 수석들을 집안 가득히 늘어놓고 즐기기도 하는 천성이 '野人' 기질인 그는 79년도에 열었던 ‘連帶山水畵展’이라고 표제가 붙었던 개인전을 거의 같은 시기에 서울의 5개 화랑을 한꺼번에 점거하여 전시회를 펴는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여기에 출품된 작품의 수효는 3백7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야송'이라는 그의 아호만치나 '들판의 야산에 내 팽겨쳐진 소나무'마냥 제멋대로 인 이 작가의 활기찬 예술의욕과 추진력만은 누구나 인정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아동문학가 윤극영씨 -이번에 나를 찾아와 개인전에 출품한다는 소품 몇 점을 보여주면서 몇 자 적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실로 야송을 새롭게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렇게 작은 화면안에 그처럼 광활한 자연경을 응축시킬 수 있는 야송의 데생능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어 흔쾌히 승낙을 했다. -중간생략- '이제 어떤 크기의 종이를 야송에게 맡겨도 그는 모두 편하고 즐겁게 소화해 낼 수 있는 작가로 우뚝선 듯 하다.
미술사학자 허영환씨 - 산수화가인 야송 이원좌의 그림을 보면 1천여 년전 중국 5대 때의 화가 겸 평론가였던 홍곡자 荊浩(필기법의저자)를 생각하게 된다. 이원좌와 형호는 1천여 년이라는 긴 시간과 중국과 한국이라는 먼 공간을 사이에 두고도 비슷한 이미지를 갖게 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형호는 필기법에서 필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야송의 필묵사상과 軌를 같이 하고 있다 하겠다. '필은 비록 법칙에 의하더라도 운용하고 변통하여서 지나치게 진실에 치우치거나 화려한 겉모습에 치우치지 않고 나는 듯이, 움직이는 듯이 하는 것이며 묵은 높고 낮고, 옅고, 깊고, 얕고하는 문채의 자연스러움이 붓으로 그린 것 같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네'라고 설명한다.
이상에서 몇몇 평론가들의 글을 살펴봤지만 한결같이 우리시대의 유망주로 호평을 아끼지 않고 있다.
결 론
이상으로 야송 이원좌의 작품세계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한국성을 지향하는 화단의 유망주로 예술양식에 독자적인 자기언어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의 회화양식은 동양삼국 어디엘 가 보아도 닮은꼴은 없다. 이렇게 따져볼 때 세계미술시장 진출의 가능성이 기대되는 화가로 생각된다. 국가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유망한 화가를 하나 길러내려면 반세기가 소요된다. 선진국은 미술인들을 국가의 보물처럼 보호하고 육성을 한다.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문화관광 소득 등 국가에 이익이 되는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당국은 야송 이원좌와 같은 작가를 정책적인 지원을 함으로서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 낼 때 엄청난 국가의 부를 창출할 수 있고, 작가로 하여금 애국의 길을 인도하는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작가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하여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 것인지 필자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화가 이원좌는 1939년 충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69년 홍대를 졸업한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한때 숭전대, 경원대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창작활동을 위해 학교 마저 그만두고 산행으로 전국을 누볐다. 지방에 있는 모 대학에서 전임유치의 유혹도 있었지만 고사하고 전업작가로 오늘의 위치에까지 온 것이다. 그는 7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야송산수연대화전'을 가졌고, 94년에는 예술의 전당의 '서울정도600년전'에서 야송작품 600점을 선 보였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외 초대전을 가져온 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도 지냈다. 그는 현재 朝雲隨筆同人으로 활약하고 있다.
43년간의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땅에 野松山水館을 찾아가며
글 / 야송 이원좌
1961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중, 고등학교 6년간의 대구 생활을 정리하고 모친과 여동생 세 식구가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를 했다.
대구생활은 모친이 연로하셔서 일거리가 없으니 국수단지를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골목길을 헤매며 장사를 했고 가끔 넝마를 주워 모아 팔기도 했으며 여동생은 방직공장의 여공으로 일했으며 나만 학교에 계속 다녔다. 낮에는 공장을 전전하며 밤에 학교에 나가는 형편이었다. 서울로의 이삿짐이란 이불 한 채, 냄비, 밥그릇 뿐이니 이삿짐이라 할 수도 없어 그냥 서울행 기차만 타면 되었고 다시 버스에 오르기만 하면 아현동에 닿을 수 있었다.
대학 등록금은 시집간 분형이 누나가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등록금은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형편임을 잘 아는 입장이라 일학년을 마치고 육군으로 자원 입대하여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창원의 39사단에서 군대생활을 마쳤다.
학교에서 배우던 모든 책을 부대로 가져가 치열하게 열심히 읽고 쓰고 그리는 일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 군 선배들에게 공부만 한다고 매도 수없이 맞은 기억이 새롭다. 제대 후 2학년에 복학하여 1학기는 장학생 선발에 실패했지만 2학기 시험에 충일장학생에 선발되어 홍익대학교 신문에 타이틀 글자로 내 이름 석자가 한자로 대문짝만큼 크게 나온 것을 보면 추억은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엊그제 같이 뚜렷하고 보니 그 기쁨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후 졸업할 때까지 매 학기 충일 장학생으로 졸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6년 대학 생활 동안 아현동 염리동, 창천동, 이태원동 등 보다 싼 전세방을 찾으려니 13번의 이사를 해야했다. 홍대와 가까운 산꼭대기와 가까운 방을 정해야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태원으로 이사했을 때가 가장 힘든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미 군부대 사격장이 있고 한국군 경리부대가 있는 사잇길로 한참 걸어 걸어 남산 기슭에 있는 판잣집이었다. 여기서 홍대까지 걸어가려면 약 두 시간, 빠른 걸음으로는 한 시간 반 정도였다. 버스차비 조차 구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다행히 평화시장(청계천)에 나가 재봉일을 하는 동생이 월급 타는날 약간의 돈을 얻어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그것마저 없으면 후암동 고갯길을 넘어 국방부 앞을 지나 서울역으로 나와서 굴레방 다리를 지나고 아현동 고개를 넘어 신촌 로타리를 지나 와우산 고갯길을 넘으면 홍대 후문으로 들어선다. 그것은 다시 대현동으로 이사오기까지 계속되었다.가까운 거리에서도 그랬지만 이태원에서 홍익대학교까지 걸어가는 사이 책을 읽었고, 시험에 나오는 것을 메모지에 적어 주머니에 넣었다가 꺼내 읽으며 걸었다.
이러한 생활이 고통스럽다거나 어렵다는 생각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대학을 다닐 수 없다는 생각과 꼭 아버님 어머님 소망인 위대한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쌓여 부모에게 실망스러운 아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힘드는 것이 즐거움으로 이겨내는 노력과 에너지로 바뀌었다.
한일국교 정상화 문제, 군부 독재 문제로 학생 시위가 끊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어떠한 모임이나 집회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단 하루도 그림 그리기 책읽기 공부하기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서울에는 아는 집도 일가친척도 없어서 늘 혼자 그리고 책을 읽는 일 뿐 이였다. 심지어 대학 동기들도 나와 어울리는 것을 피하는 듯 해서 그림 그리는 시간이나 강의 시간에는 교수님의 숨소리까지 기록으로 남기려는 치열함이 있어서 내 강의 노트를 빌려 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렇게 4학년을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발령 받으면서 고향의 처녀 柳貞姬와 결혼 한 것은 1978년 봄이었다. 미술교사 12년에 단간 셋방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된 것은 나의 노력도 있긴 했지만 어머니와 집사람이 허례허식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생활비마저 절약한 결과였다.
졸업 후로는 오직 그림만이 나의 살길임을 절감하고 짬 나는 대로밤낮으로 그림을 그렸다. 나와 같이 근무한 미술교사 오수웅씨도 그렇게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나 野松 중 하나는 나자빠질 것이라고 웃으면서 한 얘기가 그립다.
197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야송연대산수화전'의 400여 점의 그림은 당시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던 물증으로서의 표상이다.
1977년 2회전을 마치고 2년만에 400여 점이니 이틀에 한 점씩의 산수화와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으니… ‘野松이 수백 점의 작품을 갖고 개인전을 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양에서만 보아도 그렇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의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만한 양이 면 어느 경우엔 일생의 제작량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오광수씨는 평론문에 쓰고 있다.
1979년 세종문화회관 전시 후 관악고등학교 미술교사직을 그만두고 이왕 시작한 그림이니 더욱 열심히 그림에 매달리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먹고 살아가며 세금을 내야하는 녹녹치 않은 현실 문제는 그림 그리기에 전력할 수만은 없는 주춤거림으로 다가와 숭전대학교 미술교육과, 강남대, 경원대 등에 강사와 동아문화센터 등에 나가 보았지만 마음은 늘상 산에 가 있었다.
경남과 대전의 두 대학에서 전임강사로 오라는 곳도 있긴 했지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알 수 없는 끌림에 거절하고 나서 집사람의 투정에 다소 후회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1987년 서울갤러리 개인전을마치고는 경북 북부지방인 청량산, 주왕산, 동대산, 학가산을 헤매며 6년이란 세월을 삭히고 1994년 '서울 정도 600년 野松畵展'을 펼침으로서 KBS, MBC. SBS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9년 野松回甲展을 마치고 난 지금은 내 마음대로 붓을 휘져어도그림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내 마음을 읽고 내 뜻 에 따라주니 수묵화는 참으로 긴 세월인 60년의 세월을 필요로 하는가 싶다.
나의 서울 생활의 뒷모습을 돌아보면 그림이외의 일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나 그림에 관한 일 인 그리기, 스케치여행, 벅찬 전람회 6년간의 산촌 생활 등이 실타래 풀리듯 아슬아슬하게 남아 내 뜻의 물고로 흘러 들어감을 보았다. 나를 점지한 神은 너는 그림이외의 짓을 하면 안 되느니라 하고 말을 들려주는 듯한 착각에 산다.
회갑이 지난 지금도 2008년 야송칠순전을 위한 작품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니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66세 노인이 된 지금도 몸이 아픈 데가 없고 눈도 밝고 다리도 튼튼하니 이 몸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고개 숙여 감사 기도를 올리는 바이다. 또 더하여 배대윤(裵大潤) 靑松군수님이 2년에 걸친 노력으로 청송군 진보면 신촌리 46-3 野松山水館을 마련하여 일생을 두고 그림 한가지에만 매진해온 모든 자료와 그림을 잘 보존하여 한국문화유산으로 길이 남기려하니 그 아니 淸福인가 .
지금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지극 정성으로 靑松군민이나 山水畵를 좋아하는 전국민에게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는 정신으로 날마다 그림과 책을 읽으며 기도 할 것이다.
野松 이원좌 I Lee, Won Jwa
* 1939년생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 개인전 10회
* 한국현대미술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 한국자연대전(서울시립미술관)
* 서울국제현대미술제(국립현대미술관)
*서울정도 600년 야송화전(예술의 전당)
* 한·중 수교 수묵화전(북경인민문화궁전)
* 오늘의 한국화 그 맥락과 전개전(덕원미술관)
* 야송 회갑전(갤러리 상)
* 국립극장 창립 50주년기념회(금수강산도 제작, 273X2200㎝)
* 문인화 정신과 현대회화전(서울시립미술관)
* 한국전통산수화전(미술의 해 기획, 국립현대미술관)
* 수묵화 새천년 오늘전(서울시립미술관)
* 2002 서울국제미술교류전(예술의 전당)
* 한·불 수교 50주년 현대작가 50인전(프랑스 데띠앙드꼬상화랑)
* 경기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제17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실미도 해안을 스케치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