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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에세이 ④
아흔아홉 명의 사람들
홍일표 시인
번역가 김현자
지난 해 11월초 횡성군 강림면에 있는 산초두부집에서 김현자 선생과 점심 식사를 했다. 그가 예버덩 문학의 집 입주 작가로 들어와 번역 작업을 할 때였다. 선생은 20대 중반에 프랑스로 건너가 40여년을 살다가 일시 귀국하였다. 그동안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으로 한불대역본시선집을 프랑스 브루노두세 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그밖에도 황동규, 김명인, 마종기, 문정희, 허수경, 진은영 시선집 등을 불역했고, 2023년에는 한국문학번역지원 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어 나희덕 시인의 『가능주의자』를 불역한다고 하였다. 그가 전공한 프랑스 시인 쥘르 쉬페르비엘의 작품을 《현대문학》에 최초로 번역 소개한 이도 선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주천강변을 산책하면서 선생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외과의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억압적 교육에 대한 기억,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는 프랑스 시단의 현실, 난해시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으로 위축된 시의 위상, 아이티 산악지대에서 봉사 중인 안로사리아 수녀의 활동기, 프랑스령 프렌치 가이아나에서 거주할 때 탈북민에게 체류증 발급을 도와준 일, 유럽 가톨릭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 베트남 몽족의 프렌치 가이아나 이주사 등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언어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감지하면서 번역 작업을 하는 선생의 노고 덕분에 우리 문학이 세계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니, 선생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큰 공로자라 할 수 있겠다. 선생이 허수경 시집 번역 중 병세가 악화된 허 시인과 나눈 마지막 통화가 마음 한 편에 짠하게 남았다.
“선생님 번역하시는 거 잘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미안해요. 내가 곧 떠나도 너무 원망마세요”
김병호 시인
우리 시단에 희귀한 시인이 있다. 그는 남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쉽게 한다. 내가 믿고 좋아하는 K 시인이 그렇다. 그는 〈시인의 일요일〉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된 책을 출간할 때 출판사 지원금 6백만 원을 저자에게 돌려준다. 출판사가 크게 기여한 일 없이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지원금 전액을 저자에게 준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출판사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런 일을 할까 싶었다. 대부분 정부 지원금 얼마라도 받아서 어려운 출판사 살림에 보태려고 하는데 그는 예외였다. 도대체 돈 욕심이라곤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해당 출판사가 주위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고, 양서를 잇달아 발행하고 있어 안심이 되었다. 아무쪼록 K의 출판사가 엄혹한 출판 시장에서 살아남아 큰 출판사로 성장하였으면 좋겠다.
박 회장
그가 굵은 금목걸이를 목에 걸고 나타났다. 양손에는 누런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아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그의 직함이 다 적혀 있었다. 맨 위에 00산업 대표, 그 밑에는 00소방협회장, 00영화인협회 지부장, 00지역개발위원회 위원장 등이 빼곡했다. 사람들은 그를 박 회장이라고 불렀다.
“나가 이번에 군의원에 출마하는디요. 좀 도와 주소. 그쪽 잡지에 ‘이달의 인물’로 크게 한번 실어주면 내 단단히 보답할 것이오. 군의원에 당선만 되면 다음엔 국회의원 아니것소. 나 박광천이 사업하는 동안 우리 지역 신세를 많이 졌으니 보답할 기회를 주소. 나가 비록 촌놈이지만 공부도 할 만큼 혔소. 군의원 출마자 중에 박사 학위 가진 놈은 나밖에 없을 거요. 남들은 뒷전에서 개박사니 어쩌니 비아냥거리지만 나름 열심히 혀서 딴 거요. 그라고 지역에서 봉사도 많이 혔소. 요양원, 동네 노인정을 돌아다니면서 돈도 쓸 만큼 썼고, 연말마다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솔찬히 냈소. 나가 졸업한 모교에는 해마다 박광천장학금 천만 원씩 보내요. 들어서 아시겄지만 사업도 모범적으로 잘 한다고 표창장도 여러 번 받았고, 내 사무실엔 여기저기서 받은 감사패가 넘쳐요. 이만하면 군의원 자격이 충분하지 않소?”
그때 박 회장의 폰이 울렸다. 그가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와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한 번 밥이나 먹자는 제안에 응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박 회장에 대해서는 안 좋은 소문이 많았다. 그가 이야기한 것과는 상반된 내용이었다.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조폭 관련설이었다. 지역의 깡패들과 공생하면서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는 거였다.
“최가 놈이 나를 씹고 다닌다는디 그 자슥 주둥아리를 어째쓸까나.”
그가 자리로 돌아와 잔뜩 격앙된 어조로 내뱉었다. 상대 후보를 가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일주일 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박 회장이 구속되었다는 거였다. 공무원에게 돈을 건넨 뇌물공여죄와 회사 공금을 빼돌린 횡령죄, 특정경제범죄법상 사기죄 등이 구속 사유였다. 그가 군의원이 될 가능성은 요원해 보였다. 몸에 달라붙어 있던 흉측한 벌레 한 마리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조명 시인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여왕코끼리의 힘』,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등 두 권의 시집을 낸 조명 시인은 만년 소녀 같다. 언제나 백합처럼 환하게 웃으며 사람을 대한다. 그가 운영하는 횡성 예버덩문학의집에 몇 차례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가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얼마 전 재불 번역가 김현자 선생 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조명 시인이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별사탕을 훔친 적이 세 번 있었는데 성인이 된 뒤에도 그것이 마음에 걸려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가게 인근의 파출소를 찾아 가서 주인 할머니의 연락처를 수소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얼마라도 보상하기 위해서였는데 할머니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후손들의 연락처도 알 수가 없어 포기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가게 물건을 훔쳤다는 죄책감이 늘 마음을 짓눌렀다고 한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는 날 막내 동생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그때의 일을 고백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난 동생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언니, 나는 그때 할머니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쌀 한 바가지 갖다드린 적 있어.”
“그러니? 아, 그럼 됐다, 됐어!”
그제서야 조명 시인은 평생 지고 다니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한 일은 아니었지만 동생이 쌀이라도 갖다 드려서 마음의 빚을 갚은 것 같아 홀가분했다고 한다. 무거운 죄의 굴레를 벗은 조명 시인이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당시의 기쁨을 전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조명 시인의 동생은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는 조영수 시인이다. 얼마 전 동시집 『그래 그래서』를 출간하였다. 아무래도 자매의 맑은 영혼의 무늬는 집안의 오랜 내력인 것 같다.
박제영 시인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글을 통해 달아실출판사 박제영 시인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한 마디로 요즘 보기 드문 사람 같다. 얼마 전 페북에 올린 글을 보면서 우리 시단에 이런 분이 있나하며 적이 놀랐다. 그가 《태백》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면서 미흡한 원고를 반려하고, 대신 필자에게 고료는 지급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기 잡지의 위상을 위한 결단이었다. 박목월 시인이 창간한 《심상》의 초창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박제영 시인과 달리 꼼수로 잡지 발행을 하면서 죽는 소리를 하며 고료 지급을 하지 않는 해괴한 시잡지들도 몇몇 있다. 고료 지급이 어려우면 깨끗이 폐간하는 것이 순리다. 구차하게 연명할 이유가 없다. 힘든 중에도 시단에 무슨 큰 기여를 하는 양 떠벌리지만 실제 그런 잡지내용을 들여다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어 아마추어 동인지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다.
박제영 시인은 현재 달아실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영세한 출판사가 그렇듯이 자비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좋은 책을 선별하여 내고자 하는 발행인의 의지가 확고하고, 정확한 인세 지급은 물론 저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아끼지 않는 출판사였다. 박제영 시인은 시도 좋고, 출판인으로서의 자세도 본받을 만하다. 재밌게 읽었던 시집 『안녕, 오타 벵가』에서 “창자가 열두 번 끊어졌다 속에 암것도 없을 때/그런 담에야 나오는 소리”가 정선 아라리임을 일깨워준 박제영 시인의 시집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화가 곽훈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화가가 있다. 지난해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한 곽훈 화백이다. 오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현재는 경기도 이천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그분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다. 그는 늘 새로운 작품에 도전한다. 회화에서 도자기, 설치미술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 없다. 만날 때마다 폰에 저장한 새로 그린 작품을 보여주며 소감을 묻곤 하신다. 작품의 밀도와 긴장이 전혀 이완되거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에 자주 놀라곤 한다. 그때마다 나도 80 넘어서까지 저렇게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곽훈 화백의 열정에 감탄하면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부단한 실험정신으로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피카소를 떠올린다. 60만 넘어도 일선에서 물러나 뒷방 노인으로 머무는 경우가 많은데 피카소는 말년까지 새로움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경쟁자이며 동지였던 마티스에게 피카소가 한 말이 여전히 뜨겁게 다가온다.
그들이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해야 합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그림을 창조해서 사람들이 노발대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무사하지 않은 미친 세계, 즉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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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다보면 ‘부양浮揚’의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다. 이성과 논리의 경계를 넘어서 한 번도 디뎌보지 못한 낯선 땅에 던져진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는 희열과 전율이 온몸을 휩싸고 돈다. 화가들도 같은 경험을 하는 것 같다. 예화랑에서 곽훈 선생의 ‘할라잇(Halaayt)’ 연작을 마주하였다. 할라잇은 이누이트 말로 ‘신의 강림’을 뜻한다고 한다. 곽훈 선생은 “오랫동안 숙고하여 나온 그림보다 우연한 스트로크에 의해 나오는 그림이 더 강한 울림을 준다”라고 말한다. 작위에 의한 의도적 그림이 아닌 예기치 않게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작품이 있는 것처럼 시 또한 규격화된 사유의 범주를 초월하여 쓰이는 경우가 있다. 곽훈 선생의 작품 중 ‘할라잇’ 연작을 특별히 좋아한다. 삶이 시들해질 때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고래의 역동적인 모습을 바라보면 힘이 솟고, 곤고한 육신에 생기가 돈다. 그때 고래는 더 이상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다. 경이롭고 숭고한 우주적 존재로 다가온다. 근접하기 어려운 거대한 고래를 잡기 위해 작살을 던지는 어부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도 숭고하지만 내 눈엔 고래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대인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던 고래의 몸에서 분출되는 원시의 에너지를 마음 가득 충전하고 봄을 맞이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겠다.
철도공무원 이정현
나는 철도공무원 ‘이정현’을 평론가라고 부른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정현 문학평론가와 동명이인이다. 수년 전 그의 글을 처음 접하고 눈이 번쩍 뜨인 적이 있다. 비평의 칼끝이 매서웠다. 아무도 하지 않는 말을 그가 하고 있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자기 말을 하고 있는 그가 궁금했다. 수소문해 보니 그는 기존의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었다. 석, 박사를 거친 고학력자도 아니었다. 본인도 한사코 평범한 독자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옹골찬 평론가였다.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평론가로 인정하지 않는 고루한 문단 밖에서 그는 변방의 자유인으로 비평 활동을 뚝심 있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문력을 알아본 몇몇 잡지에 평문을 발표하고, 시집 해설도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으로 그는 이미 평론가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나는 그가 남들이 만만세를 외칠 때 덩달아 북 치고 장구 치지 말고, 양심에 따라 비평 활동을 대차게 이어갔으면 좋겠다. 조각칼로 나무판에 한 자 한 자 새겨 넣듯 하는 그의 비평은 때론 가혹하고 때론 낯설지만 텍스트의 급소를 겨누어 절묘하게 칼을 휘두를 줄 아는 재야의 검객이기 때문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청소년시집 『우리는 어딨지?』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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