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9. 태고정에 걸려 있는 안평대군의 글씨, 일시루(一是樓)
2008년 봄, 필자는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집행부 임원의 자격으로 묘골 육신사에서 개최된 ‘묘골방문의 날’ 행사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날의 행사는 매년 양력 5월 2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정기행사로 순천 박씨 충정공파 청장년회가 주관하였다. 전국의 묘골 박씨들이 이 날 하루 종족(宗族)의 출발점이자 정신적 고향인 묘골에 모여 종족의 화목을 다지는 행사였다.
당시 우리 일행은 주최 측으로부터 과분한 대우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태고정’ 누마루에서의 만찬(?)이었다. 태고정이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 보물 제554호라는 공식적인 명함 외에도, 묘골에 있는 그 어떤 사물들보다도 묘골을 가장 잘 대변하는 존재, 한마디로 ‘묘골의 랜드마크’ 아니던가!
그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문중 관계자 한 분이 나서 태고정과 일시루(一是樓) 편액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 분의 설명에 의하면 태고정은 한석봉의 글씨요, 일시루는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것이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어느 한 분이 그 주장에 대해 반박성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문중 관계자는 좀 당황스럽다는 듯 짧게 답을 하고는 대화의 주제를 얼른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음. 그게 말입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여하튼 우리 집안에서는 예로부터 다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1. 박팽년 선생의 절친 안평대군
현재 태고정에 걸려 있는 일시루와 태고정 편액은 복제품이다. 원본은 묘골 입구에 있는 사육신기념관에 별도로 전시되어 있다. 묘골 박씨 문중에서 일시루 편액을 안평대군의 글씨로 보는 것에는 다 그 이유가 있다. 편액에 남아 있는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당호와 함께 예로부터 문중에서 전해져 내려온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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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에는 ‘일시루’라는 현판이 있는데 전언에 의하면 부(父) 중림과 자(子) 팽년이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저택 누각에 게판된 안평대군의 친필 현판으로서 병자피화 때 어느 지사가 몰래 떼어서 간직해 두었던 것을 다시 찾아 게판한 것이다.
대구향맥(박약회대구광역시지회,199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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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즉슨 이렇다. 그 옛날 박팽년 선생의 집에 안평대군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편액을 떼어 숨겼고, 나중에 이것이 묘골로 흘러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상상의 나래를 한 번 펼쳐보면 어떨까. 다음과 같이 말이다.
“이것은 그대의 할아버지 거처에 걸려 있던 물건일세. 나는 그대의 할아버지와는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었지. 그래서 병자년의 화란이 있었을 때 나는 인수[박팽년의 자(字)]의 물건을 하나라도 건져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네. 세상이 다 알다시피 당시에 인수와 비해당은 군신의 관계를 떠나 붕우(朋友)[친구]였다네. 그래서 나는 비해당의 낙관이 남아있는 이 일시루 편액을 선택했던 게야. 그런데 이제 와서 들으니 인수의 손자인 그대가 살아남아 이곳 묘골에 정착한다고 하니, 이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것일세.”
박팽년[1417-1456] 선생과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은 요즘 말로 절친(?)이었다. 저 유명한 몽도원서(夢桃源序)[몽유도원도에 붙인 서문]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국보급 유물인 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현재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때는 일본 내에서 국보로까지 지정되었다가 현재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모습을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였던 안견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로 이 몽유도원도에 박팽년 선생이 단 서문이 「몽도원서」인 것이다. 참고로 이 몽유도원도에는 박팽년 선생 외에도 안평대군 본인을 비롯한 20여명에 이르는 당시 명사들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 여기에서 잠시 「몽도원서」의 일부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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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략) 그러던 어느 날 비해당(匪懈堂)이 몸소 지은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를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행적이 진기하고 문장이 섬세하였다. 깊숙한 시내와 들판의 상황 그리고 도원(桃源)의 멀고 가까운 모습들이 옛날의 시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는데, 나 또한 따라 노니는 그 행렬 속에 끼어 있었으니, 그 글을 읽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옷깃을 여미고 감탄하기를 “이런 일이 있었다니, 참으로 기이하도다!”라고 하였다.
…(중략)… 꿈과 깨어 있는 상태에 대한 논의는 옛 사람도 어려워한 바이거늘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그 사이를 분별하여 따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제 그 글을 읽고 그 행적을 생각하여 내가 평소부터 품어오던 마음을 달래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울 뿐이다. 비해당이 구경했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사실을 기록한 뒤 문사들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청하면서 나도 그 곳 노니는 행렬 속에 끼어 있었다하여 특별히 서문을 짓도록 명하시니 글 솜씨 서툴다 하여 이를 사양할 수 없어 짐짓 이 글을 써두는 바이다.
육선생유고(육선생유고편찬위원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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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비해당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지은 「몽유도원기」를 선생에게 보여주며 서문 짓기를 명하니, 선생이 사양하지 못하고 글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몽도원서」에 등장하는 ‘비해당’이라는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2. 세종이 안평대군에게 당호 ‘비해당(匪懈堂)’을 내리사
답부터 먼저 말하면 ‘비해당’은 박팽년 선생의 절친 안평대군 이용(李瑢)의 당호(堂號)이다. 비해당이라는 당호는 안평대군이 25세 때인 1442년[세종 24] 6월, 아버지인 세종이 직접 안평대군을 불러 면전에서 지어 내려준 호이다. 안평대군은 이때의 일에 큰 감동을 받아 앞서 소개한 「몽도원서」의 경우처럼 절친 박팽년 선생을 찾아가 「비해당기문」을 부탁했다. 아래는 사육신박팽년[순천박씨장학회, 2015]에 실려 있는 「비해당기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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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正統) 임술(壬戌)[세종 24·1442년] 6월 어느 날 안평대군이 대궐에 입시했다. 상감께서 조용히 물으시기를 “너의 당명(堂名)은 무엇이라 하느냐.”하였다. 안평이 없다고 대답하자 상감께서 「증민(蒸民)」의 시를 외우시고, 또 「서명(西銘)」까지 외우시며 이르시기를 “비해(匪懈)[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일에 게으르지 않다.]로 현판을 다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이에 안평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받들면서 기뻐 놀라워했다. 그리고 궁중에 있던 여러 선비에게 말을 구하여 그 뜻을 펼치니 이는 대개 상감께서 내려주어 권면하신 것을 자랑하고자 함이었다. 나는 가만히 듣고 찬탄하며 말하길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우리의 자손에게 영원히 전해질 교훈이로다.” …(중략)… 이제 안평은 타고난 바탕이 탁월하여 배우기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기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와 잠깐 동안이라도 반드시 선비답고자 하니, 그 부지런함이 지극하다 하겠다. 성상께서 특히 이로써 명하신 것은 오직 그것을 권면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신 까닭이다. 따라서 아침저녁으로 더욱 이에 종사하여 성상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중략)… 이 당(堂)[비해당]은 곧 국가와 더불어 끝없이 편안함을 함께 하리라. …(중략)… 내가 문장이 졸렬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이끌어 성상의 뜻을 펼쳐내지 못하고 다만 이름 지어 준 세월만 기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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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해당기문」은 안평대군의 당호인 비해당의 내력에 대해 박팽년 선생이 서술한 것이다. 이번 이야기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바가 바로 이 비해당이다. 다시 말해 ‘비해당=안평대군’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태고정 처마 아래에 걸려 있는 ‘일시루’ 편액을 자세히 살펴보면, 좌측 하단부에 작은 글자 석 자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편액에 있어 이 위치에 새겨진 글자는 편액의 글씨를 쓴 이를 나타낸다. 따라서 일시루 편액에 새겨져 있는 이 작은 글자 석 자가 일시루 편액 글씨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현재 태고정에 걸려 있는 복제판 일시루 편액과 기념관에 걸려 있는 원판 일시루 편액에는 모두 다음과 같이 석 자가 새겨져 있다.
‘匪懈堂’
사실 일시루 편액을 두고 안평대군의 글자를 집자하여 모각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그 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지금의 시점에서 어느 설이 맞고 어느 설이 틀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 검토하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한 말씀만 덧붙이고자 한다. 사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데 감히 어느 누가 나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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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 처마 아래에 걸려 있는 일시루 편액. 좌측 하단부에 안평대군의 당호인 ‘匪懈堂’이 보인다.
3. 에필로그
필자는 매주 1-2일 정도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 해설 요청을 받고 정식 풀코스로 해설을 할 경우, 필자는 마지막 코스로 반드시 답사객과 함께 태고정 대청에 오른다. 대청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묘골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해설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묘골과 육신사 해설에 있어 피날레를 장식할만한 공간으로는 이곳 태고정만한 곳이 없다. 여하튼 답사객과 함께 태고정에 오르기 전, 태고정 기단 아래에서 필자가 꼭 하는 멘트가 있다.
“여러분! 저 태고정에 걸려 있는 두 개의 편액이 보이시죠. 좌측은 태고정 우측은 일시루입니다. 우측에 걸려 있는 ‘일시루’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이자 자신의 둘째 형인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의 글씨입니다. 지금 태고정에 올라가시면서 일시루 현판 좌측 아래를 잘 살펴보시면 비해당이라는 안평대군의 호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대청 안쪽에 걸려 있는 태고정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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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 대청. 사진 속 태고정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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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 처마에 달려 있는 태고정과 일시루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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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
늘~~평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