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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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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텔링 스크랩 (강정화) 그리운 부석사
산바라기 추천 0 조회 18 09.03.04 18: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리운 부석사

선비촌  강정화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이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부석사를 소개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바라보는 겹겹이 쌓인 산자락의 저녁노을이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새벽 짙은 안개속에 감춰진 신비로운 가람!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은 몇이나 알까?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경상북도에서 가장 북쪽 위치) 봉황산(鳳凰山,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지점 위치) 아래서 터를 잡은 부석사(신라 의상대사가 중국 유학 후 문무왕 16년에 호국 목적으로 창건한 화엄종찰)는 백여덟 개의 계단이 먼저 찾는 이를 반겨준다.


처음 찾는 이에게는 조금 힘든 곳이기도 하지만 한 계단 한 계단씩의 오름이 시작되면서 세속의 번뇌를 하나 둘 벗어버리라는 뜻이 담겨져 천삼백년 전부터  기다림이  이어진 곳.


 산지가람의 으뜸이자 ‘목조건물의 백미’라는 이름에 걸맞은 편안하면서도 웅장한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 18호,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 된 것임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살아서 극락을 체험 하는곳 부석사!


  여기서 잠시 부석사 유래를 적어본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현장(玄?)의 화엄학(華嚴學)을 배우기 위해 중국행을 결행하였으나 첫 번째는 실패하고 두 번째는 혼자 떠나게 되었다.

두 번에 걸친 시도 끝에 중국으로 가게 된 의상은 등주의 한 신도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37세 장년의 빼어난 의상을 본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여 몸을 단장하고 의상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불가에 귀의한 몸이라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선묘는 도심(道心)을 일으켜 세세생생 의상을 스승 삼아 귀명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해 의상이 당에 머문 10년 동안 신도로서 공양을 계속하였다.


의상이 등주에서 신라로 귀국 할 때에서 선묘는 법복이며 일용품을 준비한 상자를 의상에게 직접 전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주문을 외고 바다에 물건을 던져 의상의 배에 이르게 하였고 이어 자신도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몸을 바꾸어 의상대사의 뱃길을 지켰으며 귀국한 뒤에는 의상대사의 전법(傳法)을 도왔다.

 

신라문무왕이 삼국을 통일 후 어지러운 민심을 불심으로 다스리고자 의상에게 절을 지을 것을 명하자

의상이 전국을 다 다녀 보아도 지금의 부석사보다  좋은 터가 없는지라  이곳에 도착했을 때 도적 떼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선묘가 사방 십리 넓이의 대반석(大磐石)으로 변하여 공중으로 날아올라  의상 대사를 수호하였다. 그때서야 의상이 보통분이 아님을 알고 자리를 내어준다.

의상대사는 겨울은 양지 바른 곳에서 또 여름에는 그늘에서 화엄학(華嚴學)을 강의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절을 짓게 되어 ‘뜰 부(浮)’자, ‘돌 석(石)’자.

부석사란 이름을 갖게 된다.


아직도 떠 있다는 돌! 부석이 궁금하지 않은가?


지금은 석룡이 되어서 아미타 부처(소조여래좌상 국보 제 45호. 이 불상은 고려 초의 여래상 형식을 잇고 있지만 조각 양식은 고려 후기의 특징을 나타내며 석가모니불이면서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몇 차례의 보수와 개금을 거치는 동안 수인이 변경되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항마촉지인을 취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아래 머리를 두고 꼬리는 석등(국보 제 17호 무량수전 바로 옆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이 팔각 석등 국보 )아래에 묻혀 부석사의 수호신으로 있는 선묘낭자의 가슴 저린 사랑으로 세워진 절 부석사!


의상과 선묘의 애틋한 사랑이 아니더라도 무량수전의 배흘림을 만나면 누구든지 사랑하고 싶을 만큼의 넉넉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부석사(浮石寺)


김병헌(김삿갓1807-1863)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 치네


인간백세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관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있네



안양루(安養樓 무량수전앞 누각 안양이란 곧 극락을 말함)에서 내려다보는 그 여유로움이 세속에 찌든 우리에게 모든 근심을 없애줄 때 쯤.

살며시 돌아본 눈길에 맞닿은 보통의 사찰과는 다른 위치에 있는 석등에 의문을 가지며 그 아름답고 고요한 자태에 빠져들게 된다


자 이제  배흘림과 함께 어우러짐이 완벽한 무량수전을 바라보면

아미타 부처의 자애로운 눈빛에 특정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처의 눈길 따라 조용한 오솔길로 오르게 되면 삼층석탑 뒤에 숨겨진 조사당(국보 제 19호 고려시대 건축으로 의상이 수도하던 장소)의 아늑함과 의상대사를 의호하려 그려둔 벽화(국보 제 46호 부석사에 전하는 벽화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것으로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별도의 보장각에 보관되어있다 이들은 범천 제석천 사천왕상으로 현제 남아있는 사원 벽화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동의 밀려 올 때 의상대사의 지팡이 전설이 귓전을 두드린다.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그 싱싱하고 시듦을 보고 나의 생사를 징험하라.”


하신 말대로 지금까지 비를 맞지 않고 물을 주지 않아도 살아 있는 신령한 나무 선비화!(仙扉花 조사당 바로 앞에 자라고 있는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변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음.

광해군 때 경상감사 정조가 절에 와서 이 나무를 보고

“선인이 짚던 것이니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

하면서 톱으로 잘라 가지고 갔다. 그러나 나무는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 나와 전처럼 자랐다.

인조 계해 년에 정조는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였는데 나무는 지금도 사시장철 푸르며 잎이 피고 오월이면 꽃도 핀다 .)


잎을 삶아 먹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설에 이중의 철망 속에 갇혀 피어나는 선비화의 이야기 속에 지금도 살아있는 의상대사의 화엄사상(華嚴思想 화엄경판 보물 제735호. 현존하는 부석사 화엄경판의 판수는 60화엄이 239판, 80화엄이273판, 40화엄이122판으로 도합634판이 전해지는데, 원판과 보판이 혼재한다. 원판은 간기가 없어 정확한 판각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판식과 각판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 때 것으로 보이며, 보판은 조선조 1568년에 새겨진 것이다.)의 깊은 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끼 낀 석축 너머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묻어두고 극락의 문을 닫고 내려온다.


긴 세월에 녹아있는 이야기를 한순간에 다 풀어 담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워 그리움으로 다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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