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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정신과 한글나무 국어운동
오동춘(짚신문학회 회장)
〔가〕 한글 나무 창립 동기
1908년 8월 31일 창립한 우리 한글학회는 역사 깊은 학술단체이다 한힌샘 주시경(1878-1914)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세운 단체이다. 한글학회 창립 때부터 주시경 제자로 한글학회 회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에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 잃은 슬픔이 창자를 끊는 듯하다는 내용의 시 <단장애곡>을 1910년 17세 중학생 일기 책에 시로 남겨 놓았다. 일제시대 “한글이 목숨이다”는 신념으로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을 반대하고 우리 말과 글과 얼을 지키는 독립투쟁 중에 불후의 명저 <우리말본>을 지어 우리 국어사랑 나라사랑에 온몸 바쳐 나라 지키다 함흥감옥 옥고도 3년 치르셨다.
원자탄 두 개의 하나님 심판을 받고 패망한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은 우리 나라 국어 교육은 감옥에서 풀려난 외솔 선생이 새나라의 말과 글로 나라 바로 튼튼히 세우려 한 온 땀과 정성을 다 기울여 우리 나라의 꿈나무 학도들이 가로쓰기 한글전용 교과서로 국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라 겨레사랑의 훌륭한 외솔 선생의 한글전용정책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울대 출신 교수 중심의 국한혼용파들의 행패에 많이 시련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 5.16 군사정변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 장군이 1965년 3월부터 5년간 실시해 온 초등 중등학교 국한혼용 국어 교육의 실패를 인정하고 1970년부터 모든 교과서의 한글전용 정책을 펴기로 어문 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여기 당황한 남광우 이응백 교수 일파가 만든 어문 교육 위원회 연구회 중심으로 한글 전용 정책을 반대하고 정치적으로 김종필 총리, 민관식 문교 장관이 한글 전용정책에 반대의 쐐기를 박았다. 상용한자 1800자를 정하여 중학교의 900자, 고등학교에 900자를 가르치는 한문 교과를 설정해 한문교육을 하기로 했다. 한글학회는 한글전용 대책을 위해 그 전에 한글전용 단체로 한글학회 부설 한글문화협회를 먼저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병설 단체로 전국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뒤에 한겨레 한글나무 고등학생 모임으로 이름 바뀜)를 만들기로 한글학회 이사회가 결정했다. 전국 국어 운동 고등학생 연합회 이름은 1988년도에 한겨레 한글나무 고등학생 모임으로 순수한 한글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1975년 2월 1일 전국 국어 운동 고등학생 연합회 구성 준비를 해온 한글학회는 2월 10일 발기인 총회를 열고 2월 22일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허웅 한글학회 회장, 유재한 상무이사, 문제안 한글운동가, 이봉원 한글운동가 네 분이 참여하고 현장에 나와 고등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때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남녀 고교생 명단은 아래와 같다.
덕수상고 강태성 회장
덕수상고 김태선 총무부장
덕수상고 이덕배 계몽부장
배제 고교 유희진 감사
배제 고교 황원영 섭외부장
배제 고교 변성섭 회원
대신 고교 김경민 연구부장
대신고교 김상민 회원
대신고교 신종휴 회원
동국사대부고 최원붕 회원
이화여고 김옥희 부회장
이화여고 장봉숙 서기
이화여고 이경순 회원
개성여고 주설령 감사
경희여고 김일호 회원
배화여고 유종순 회원
배화여고 조경희 회원
나라의 한글나무 보배 일꾼을 앞에서 허웅 한글학회 회장님은 당시 대신 고교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인 오동춘 교사를 전국국어운동 학생연합회 모임 지도교사로 임명해 주셨다. 나는 외솔 천배 스승님, 한글학회 이사장 겸 회장이신 하웅 스승님 두 스승님께 연세대 배움집에서 국어 교육을 받은 제자로서 내게 한글사랑 나라사랑의 짐을 어깨에 주신 사명감을 깊이 느꼈다. 자랑스러운 고등학생들을 잘 지도하여 한글사랑 국어운동을 통하여 나라를 빛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고교국운회 초대 회장 강태성은 이미 덕수상고 우리 말글 지켜쓰기 운동회에서 이경복 선생님 지도를 받으며 국어운동이 잘 되어 있는 학생이었다. 김태선, 이덕배 두 학생도 국어 운동에 이미 훈련된 소신 있는 학생들이었다. 김옥희 장봉숙, 장봉숙, 이경순 세 이화여고 학생들은 한글학회 회원이신 안송산 이하여고 국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보낸 학생들로서 국어 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대신 고교 김경민 김상민, 신종휴 세 학생도 대신 고교에서 내게 한글사랑, 나라사랑 교육을 깊이 배운 제자들이었다. 그 밖의 다른 창립회원 학생들도 해당 학교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 준 모범 학생들이다.
고교 국운회(전국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 줄임말) 학생들에게 허웅 회장님은 자랑스러운 한글세대로서 우리 말 우리 글을 바로 지켜쓰는 국어운동의 푸른 횃불이 되어달라고 당부해 주셨다. 유제한 한글학회 상무이사님도 세종대왕의 뜻을 잘 받들어 국어 운동에 힘써 승리하라 격려해 주셨다. 열렬한 한글 운동가 문제안 교수님도 오늘 전국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 조직은 한글나라 발전에 큰 기둥을 세우는 일로써 크게 기대된다고 열심히 국어운동 하라는 격려를 해주셨다. 서울대 국어운동 학생회 회장을 역임하신 한글 운동가 이봉원 님은 우리 학생들에게 이봉원 작사 금수현 작곡 <내 말 내 글 “한글나무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1절
제 것일랑 버려두고 남의 것만 찬양하던
조상이 예 있어서 검은 구름 펴 놓았네
배달이여 잠을 깨어 이 땅을 밟게 하세
내 말 내 글 내 조국이 그 얼마나 빛나는가
2절
제 것 여기 없었던들 남의 속에 묻혔을 걸
핏줄이 살아 있어 풍랑조차 물리치니
배달이여 힘을 모아 겨레탑 쌓아 올리세
내 말 내 글 내 얼이 그 얼마나 굳셀손가
우리 말과 글과 얼을 사랑하는 뜻깊은 노래를 우리 창립총회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정성껏 잘 가르쳐 주었다. 노래 배우기 전에 우리 학생들은 자랑스러운 한글세대로서 창립 선언문을 힘차게 외쳤다.
창립 선언문
『우리는 한글세대로서 우리 말 우리글 우리 얼를 더 크고 넓게 지켜 펴기에 앞장서서 억만년 길이 갈 우리 한글문화 창조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더욱이 500년이 넘는 긴 역사 속에서도 광복 30년이 된 오늘날에도 한글은 가시길 속에서 그 전부의 빛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이 비극을 하루속히 멈추게 하고 나아가서 우리 말을 깨끗하고 쉽고 바르고 풍부하게 하여 우리 한글문화의 줄기찬 물줄기를 온누리에 흐르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약한 힘을 바쳐 한글 전용의 시대적 명절을 부정하는 일부 어른들의 시대착오적 태도는 우리 문화를 퇴보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분별 없는 외래어 남용, 더럽혀진 말들이 판치는 우리 언어 사회를 밝고 깨끗하게 하는데 우리의 조그만 힘을 보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운동이 곧 나라 사랑이요 겨레 사랑의 디딤돌이 됨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우리 글을 두고도 우리 선조들이 어려운 한자의 노예가 되어 나라까지 잃었던 슬픈 역사를 우리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어 운동의 횃불을 들고 일어선 우리 한글세대는 피끓는 조국애로 기어이 한글만의 우리 생활, 한글만의 아름다운 사회 건설을 이룩하고 말리라 굳게 다짐합니다.』
1975.2.22.
〔나〕전국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 활동
한글나무 모임 창립회원 일동이 우렁차게 창립 선언문 낭독으로 한겨레 한글나무 고등학생 모임(전 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 1988년 6월 25일 제28회 정기 모임에서 이름을 바꿨음) 창립을 마친 한글나무 고등학생들은 정음사 최철해 사장님 곧 외솔 최현배 박사님 막내 아드님의 배려로 외솔회관으로 활동 장소를 정했다. 회현동에 있던 정음사가 전 성만상업전수학교였던 7층 건물로 이사하여 교실로 썼던 공간이 많았다. 그 한 공간 교실이던 장소를 쓰게 하여 한글나무 창립하던 해 1975년 3월 첫 토요일부터 외솔회관에서 한글나무는 국어운동을 시작했다. 외솔회 운영의 큰 기둥 역할 하시던 최철해 정음사 사장님의 한글나무 사랑은 뜨거웠다. 외솔회 사무국장을 지내시고 미국으로 이민 가신 정봉화 전 대한일보 편집국장이 외솔회로 보내온 10만원 성금을 최철해 사장님은 우리 한글나무 발전기금으로 주셨다. 오동춘 지도 교사와 최철해 사장은 사장실에서 외솔회와 한글나무 발전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한글나무 학생들은 1기 때부터 식목일이면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주시경, 최현배 스승 산소에 참배를 가고 가져간 나무도 산소 가에 심었다. 한글나무 국어운동 장소인 외솔회관 전 성만상업전수학교 건물로서 내가 1년간 이 학교 국어 교사를 지낸 추억이 생생한 장소였다. 여기 이제 한글나무 남녀 고고생 국어운동 한글운동 지도교사로서 다시 전에 밟았던 외솔 회관에 다시 출입이 되어 감개가 무량했다. 우리 한글나무 학생들의 국어운동 활동을 그들의 삶과 함께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다> 한글나무 국어운동 활동
1) 매 토요일 학술토론 활동
1975년 3월 5일 첫 토요일 오후 3시부터 남녀 한글나무 고교생들이 충무로 외솔회관에 모여 들었다. 그 당시 근처에 김영삼 대통령이 다니던 충현교회와 외솔회관 옆에 성만상업전수학교 설립자였던 박후진 장로가 시무하던 충무로 교회가 있었다. 한글 토론은 주제토론, 독서토론, 자유토론, 연합토론 등으로 나누어 진지하고 열린 토론을 펼쳐 나갔다. 1기 학생들이 넥타이 외래어를 우리 말로 어떻게 순화시키는 것이 좋겠는가? 거기에 알맞는 말을 찾는데 아주 심각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결론은 목댕기로 하자였다 1981년도 7기 때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말글얼> 주보는 제9기 때까지 이어오다가 9기 때부터 주보 이름이 <한글 새싹>으로 바뀌었다. <말글얼>, <한글 새싹> 주보에 발표한 주제 토론 주제는 <말글얼>, <한글전용의 내용>, <한글 기계화의 문제점>, <언어와 문학>, <한글과 우리 문화의 새 모습>, <한글>, <한글전용 운동>, <한글 이름>,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 <조선어학회와 그 후에 학자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 <한글을 기계로 쓰기>, <국어 교과서의 문제점에 대하여>, <한글나무>, <말과 언어의 주체성>, <대중매체 속의 외래문화>, <교과서와 친일문학>, <사람의 말>, <한글만 쓰기>, <부려 쓰기와 갈무리>, <책과 우리 생활과의 관계>, <국어 사전에서도 사라진 고운 우리 말들>, <한말글 이름>, <조기 한자교육>, <언론 매체의 중요성>, <말과 글의 폭력화>, <청년 문화의 왜색 물결> 등이 있다. 이 주된 내용은 말과 글과 얼에 관한 내용이다. 한글 전용, 한글의 기계화의 세계화 방향을 토론하고 한글문화의 주체성 외래 언어문화, 조기 한자교육 등의 배척성을 잘 드러냈다. 세종대왕 조선어학회 친일 관계 등의 언어 정치의 역사의식도 주제 토론에 잘 담았다.
연합토론 주제는 <외국말 조기 교육에 대하여>로 언어의 주체성 자주성을 보여주며 연합 독서토론으로 지정된 작품 황순원의 <별>, 이청준의 <다시 태어나는 말>,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등의 작품을 사전에 다 읽고 회원 저마다 독후감 또는 감상, 작품 비판의 말을 주고받는 토론을 사회자를 세워 독서 토론으로 잘 전개해 나갔다. 문학에 접근하는 좋은 학술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자유토론 주제는 <만남>, <학교살이>, <우리 모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 <공해 없는 환경에서 살기 위해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한글만 쓰기 - 우리 말을 살 찌우는 전제 조건> 등의 주제로 우리 남녀 고교생들이 자유롭게 의사를 조사하여 말하기 듣기 공부가 잘 되었다. 우리 한글나무 학생들은 학술토론을 통하여 언어 소통 능력이 향상되고 자기 언어 표현의 훈련을 잘 쌓게 되어 감성이 순수하고 꿈결이 푸른 남녀 1, 2학년 선후배 간의 정서나 동료 남녀 간의 따뜻한 친목의 우정이 많이 꽃피었다. 그리하여 8기 한재석과 김지원, 10기 정석영과 박미연 13기 한정일과 14기 허성희 등 다섯쌍 정도의 부부가 탄생하기도 했다.
2) 고궁 거리 한글 계몽 운동
고교 한글나무가 태어나면서 바깥 활동으로 가장 크게 벌인 활동이 덕수궁, 경복궁, 창경원, 어린이 대공원 등의 고궁이나 공원, 광화문, 서울역 앞, 고속터미널 앞 그 밖에 종로 을지로 거리, 지하철역 등지에서 우리 한글나무 학생들은 한글 계몽지를 나누어 주며 외래어 일본말 쓰지 말고 우리 말을 쓰고 우리 한글을 사랑하라는 내용의 계몽지를 건네주며 국어순화 활동, 한글 사랑 나라 사랑 운동을 펼친 것이다. 고궁 거리 계몽은 3.1절, 어린이날, 현충일, 광복절, 한글날 중심으로 한글 계몽을 펼쳤다. 1970년대 후반 거리 계몽으로 강남 고속터미널 정류장이나 지하철 입구에서 <한글 사랑 나라 사랑> 한글 계몽지를 길손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한글사랑 주장하다 한자 중독 손님을 만나 말문이 막히는 곤욕을 치르던 당시 서울고교 2학년 주종휘군이 내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선생님 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그 사람을 당할 수 없어요. 가 만나 보세요” 하며 내게 응원을 청해 왔다. 고속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도 한글 계몽을 하다말고 주종휘군 따라 그 사람 있는 곳에 갔다. 한글세대가 한글나라에서 한글계몽하는데 반대말씀을 많이 하셨다는데 한글시대 한글세대를 사랑하여 한글나라 빛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며 나는 지도교사 오동춘 선생인데 누구신지 명함을 하나 주시지요라고 말했다. 받아본 명함은 충남대 한문학과 조종업 교수였다. 충남대 유정기 교수가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전용정책을 반대하다가 파면당하기도 한 국한혼용 주장자들이 많은 대학이 충남 국립대였다. 나는 한글시대의 당연성 말글의 주체성을 말하며 땀흘리는 한글세대를 사랑해 주시라고 기회되면 한 번 만나자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대전에서 상경하는 길이었다. 한글나무 모임 계몽지는 공병우 타자기 연구소에서 후원해 준 계몽전단지였다. 앞에 제목은 ‘우리말 우리글 사랑은 나라사랑 겨레사랑이다’로 되어 있다. 1975년 10월 9월 529돌 한글날 만든 당시 이름 전국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의 한결계몽지였다. 이 계몽지 아래는 공병우 한글타자기의 우수성이 광고되어 있었다. 이 한글계몽지에 한글나무 고등학생 주장은 아래와 같다.
1. 판치는 서양말, 일본말 찌꺼기를 쓰지 말고 우리말을 지켜 씁시다.
2. 어려운 한자말은 쉬운 우리 말로 고쳐 씁시다(은익무기→숨긴무기).
3. 문패는 쉽고 예쁜 한글로, 신문은 한글로만 만들고, 방송은 우리말을 쓰는데 앞장 서서 우리말 우리글 계몽에 앞장 섭시다.
4. 모든 잡지 출판물, 간판 등은 한글로서 우리말 우리글을 지켜 쓰고, 한글로 한데 뭉쳐 조국 통일 이룩합시다.
우리 한글나무 모임을 사랑하여 한글계몽전단지 제작비를 후원해 주신 당시 공병우 타자기 연구소 공병우 소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한글계몽지 연도별 제목만 보면 아래와 같다.
1. 우리말 우리글 사랑은 나라사랑 겨레사랑이다(1975.10.9. 529돌 한글날)
2. 국어는 나라의 큰 힘이다(1978.10.9. 532돌 한글날)
3. 바른말 고른말로 어린 새싹 잘 키웁시다(1980.5.5. 어린이날에)
4. 한글사랑 나라사랑(1981.10.9. 535돌 한글날)
5. 우리 말·글로 힘! 힘을 기릅시다(1983.10.9. 537돌 한글날)
6. 한글의 발전은 나라의 발전(1984.10.9. 538돌 한글날)
7. 우리 말·글·얼 사랑합시다(1987.10.9. 541돌 한글날)
8. 한글사랑 나라사랑(1988.10.9. 542돌 한글날)
9. 한글사랑 나라사랑(1991.10.9. 545돌 한글날)
10. 한글사랑 나라사랑(1991.10.9. 546돌 한글날)
11. 우리는 한글 겨레, 한글날을 국경일로 합시다(1993.10.9. 547돌 한글날)
12. 한글은 국제 글자, 세계의 알파벳(1994.10.9. 548돌 한글날)
13. 우리 얼산이 겨레가 됩시다(1995.10.9. 549돌 한글날)
한글나무 1975년도 1기부터 1999년도 25기까지 한글나무 학생들이 한글계몽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한글사랑 나라사랑 국어사랑에 횃불활동을 눈부시게 했다. 한글나무 한글세대가 거리나 고궁, 공원 등지에서 한글과 우리 말과 우리 얼을 사랑한 정신은 우리 한국의 한글이 세계문자대화에서 두 번이나 일등의 금메달을 차지하는 오늘의 영광이 있게 된 것으로 본다. 어린이 대공원에서 한글계몽 국어운동을 할 때는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와서 점심을 먹었다. 이름을 슬기롭고 옹골차다는 뜻을 지닌 순 우리 한글 이름을 지은 김슬옹 군은 김용성 한자이름을 과감히 버리고 한글이름으로 당당히 한글전용을 부르짖고 한글만쓰기 국어운동에 늘 앞장 서 왔다. 김슬옹 군은 한글나무 활동 후 연세대 국문과로 진학하여 외솔 최현배 박사님, 김윤경 박사님 한글사랑 나라사랑을 잘 배우고 연세대에서 문학석사(1991), 상명대에서 국어사 전공 문학박사(2005), 동국대학교에서 국어교육과정전공 국어교육학박사(2010), 모교 연세대학교에서 훈민정음학 전공 문학박사(2020) 학위를 취득하여 우리나라 3박사학위를 가진 귀한 국어국문학계통 박사 소지자로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한글나무 4기 출신 김슬옹 박사는 한글나무 활동 중에 김용성 한자 이름을 순우리말 김슬옹 슬기롭고 옹골차다는 뜻으로 이름 바꾸어 한글이름 문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현재 세종국어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대학에 강의를 하며 간송미술관 소재 국보 70호의 훈민정음 해례본을 다시 깊이 풀이하여 학계의 많은 격려와 찬사를 받고 있다. 저서만 해도 세종대왕, 훈민정음 관계 단독 저서를 비롯 공저까지 98권이 되고 <세종과 소쉬르 비교연구> 논문을 비롯 13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국어순화 차원에서 서클을 최초로 “동아리”로 바꾼 한글운동가로 이름이 빛나고 있다. 김슬옹 박사와 한글나무 모임에서 학술활동을 함께하며 국어순화활동도 거리와 고궁, 공원 등지에서 하며 송골도 한글나무 고교생들과 나름대로 피와 땀을 흠뻑 쏟았다. 내가 교육계에 있으면서 만든 새 말은 얼(정신)이 산처럼 살아있는 사람이란 뜻의 “얼산이”라는 말을 내가 만들었다. 그리하여 1995년 10월 9일 거리계몽 한글전단지 제목에 <우리 얼산이 겨레가 됩시다>에 부려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골 제자들이 다 나라 겨레의 아름드리 큰 일꾼이 되도록 송골교육철학으로 참삶, 뼈삶, 빛삶의 새말을 만들어 한글나무 고교생뿐만 아니라 중, 고, 대학 송골 제자들 가슴에 다 심어 주었다. 1974년 한글나무 1기(초대 회장 강태성 덕수상고생(작고함))을 비롯 25기 장미(행신고교), 최미영(인덕공고), 으뜸빛까지 새천년에 이르기까지 한글사랑 나라사랑 거리, 고궁, 공원에서 땀 흘려 국어운동에 힘써 큰 빛을 보여 준 그 노고를 다시금 감사하며 격려해 마지 않는다.
여기 짚신문학회에서는 연세대학교에서 26년만에 문학박사 학위 취득한 김슬옹 박사에게 박사학위 축하패를 2020년 8월 28일 학위 받은 날로 만들어 9월 25일 금요일 점심 때 광화문 나주곰탕집에서 설성경 연세대 명예교수, 오동해, 오양심, 강순구, 강순예, 임문혁, 이실태, 오선경, 김경애, 허만배 등의 회원이 모인 자리에서 짚신문확회 회장 오동춘 박사가 김슬옹 박사에게 문학박사 학위 취득한 박사학위 축하패를 수여했다. 학위 축하패 내용은 아래와 같다.
축
박사학위 축하패
짚신문학회 상임부회장
문학박사 김슬옹님
논문제목 : 훈민정음 해례본의 역주 방법론 정립에 관한 연구
위 사람은 끈질긴 학구열과 굳은 신념으로 국보 훈민정음을 깊이 연구하여 위 논문 제목으로 26년만에 모교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우리 회원 모두는 이를 기뻐하여 이 축하패를 드립니다
2020년 8월 28일
짚신문학회 회장 오동춘
김슬옹 박사는 1970년대 송골이 지도하는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 고등학생 국어운동 단체에 철도고교 1학년 때 가입하여 당장 이름부터 한글이름 김슬옹으로 바꾸고 고교국운회(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 준말임) 활동에 앞장 서서 활동하며 고교 때부터 존경 흠모해 오던 외솔 스승을 사모하며 사학의 명문 연세대학교 국문과로 진학하여 석·박사가 되어 대학에 출강하며 한글나무 고등학생모임 선배 동문으로 후배들을 잘 돕고 있다. 제 38회 학술부분 외솔상 수상자로 외솔회 이사 감사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글학회 연구위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문위원으로 학자의 길, 한글운동가의 길을 걷고 있다. 세종국어문화원 원장으로 세종문화를 추모하는 스승 외솔학문연구, 외솔나라 겨레사상, “한글이 목숨이다” 말씀하신 외솔 스승의 한글사랑으로 밤낮없이 연구하여 외솔의 높은 빛난 발자취를 열심히 뒤따르고 있다.2021년도 정부가 수여하는 제40회 세종문화상 수상자가 되어 우리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세종의 한글정신 외솔의 우리 말글얼 사랑정신으로 훈민정음학 대석학인 김슬옹 박사의 제40회 세종문화상은 김슬옹 박사의 고교 한글나무 시정부터 지금까지의 땀과 피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김슬옹 박사와 한글나무 4기(77~78년) 으뜸빛을 지낸 박덕영 군은 서라벌고교 재학 중에 한글나무모임 국어운동에 전념하고 고교 졸업 후 연세대 법과대학에 진학하여 영국에 가서 국제법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모교 연세대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하고 숙명여대 교수를 거쳐 연세대 법과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7기 변정수 군도 연세대 국문과로 진학하여 문화활동에 큰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고교 재학 중에 4기로 한글나무 활동을 한 주종휘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 연극 연출가로 영화감독으로 크게 연예계 지도자로 활동을 했다.
3) 한글나무 기별 활동
한글나무가 25기까지 활동하고 아이엠에프(IMF) 여파로 한글학회 예산도 없어지고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대입시 공부에 시달려 한글나무 활동에 적극성이 없었다. 한때는 경기여고 교사 임문혁 선생님, 경희여고 문윤희 선생님의 측면 지원으로 많이 도움이 되었다. 경기여고생 경희여고생들이 회원으로 많이 가입이 되었다. 학생들은 <말글얼> 보람(뱃지)를 달고 자부심과 긍지를 품고 열열하게 국어운동을 했다. 학교가 다른 남녀학생들이 잘 모여 정다운 친목이 이루어졌다. 전주 가나다모임과도 교류하고 전국 고교 국어순화반 학생들과도 교류했다. 1975년부터 4년간 총무로 외솔회관에서 모여 활동할 때 식목일이 되면 묘목을 준비하여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주시경, 최현배 선생님 산소에 참배하고 가져 간 소나무, 향나무 등을 산소 주위에 심었다.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이삼십명 정도가 갔다. 당시 외솔회 총무간사 박대희 님이 안내하며 많이 도와 주셨다. 6월 6일 현충일에는 내가 근무하던 대신고교 운동장에서 선후배가 청군 백군이 되어 축구, 배구, 달리기 등 몇 가지 종목으로 재미있게 운동을 했다. 도시락을 싸와서 나누어 먹으며 하루의 체육대회를 잘 마치곤 했다. 과천동물원, 천안독립기념관, 서울근교 유원지로 소풍도 갔다. 그런 가운데 방송출연, 단체거리계몽, 거리간판조사, 자체연수교육, 신문사방문, 방송사, 대학학보사, 한글학회 등을 방문하여 외래어 문제, 한글가로쓰기 문제, 국어순화문제 등을 논의 대담하기도 했다. 한국방송공사(KBS), 문화방송(MBC), 동양방송(TBC), 기독교방송(CBS) 방송 출연으로 한글계몽에 힘썼다. 그리고 한글학회 회장이신 허웅 박사님이 학술활동, 한글계몽활동도 좋으나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국어공부도 하는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허웅 교수님의 글 고교국어교과서에 실린 <우리말의 특질>에 대해 강연을 해주셨다. 이어 박두진, 김계곤, 이태극, 곽종원, 박지홍, 전규태, 김석득 교수님들의 국어강의를 들었다. 그 밖의 저명인사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을 초청 강연을 들었다. 방송언어에 대한 인사로 황선길 문화방송 제작위원, 이봉원 기독방송 피디에게 강연을 들었다. <뿌리깊은 나무> 잡지 발행인 한창기 사장님, 순한글잡지 발행 이야기를 들었다. 3.1 여성동지회의 조애실 시인의 강연은 오후 내내 4시간 정도 독립투쟁하며 일제 경찰서에서 고문 받은 이야기를 길게 했다. 인상적이었다. 함께 오신 전창신 삼일여성동지회 당시 회장님은 나를 보고 내게 교회에 여자장로가 왜 필요한지 아느냐고 질문하고 스스로 남자장로님들 싸움 말리는데 필요해서 뽑는다고 조금은 농담조로 말씀했다. 예술활동으로 우리말 우리글 우리얼 사랑을 위해 학생들은 큰잔치 이름의 종합예술제를 벌였다. 4기 때 시작된 큰잔치 연극에 노교수 역을 잘한 서울고교 1학년 주종휘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 연출자 영화감독 영화제작자로 크게 활동했다. 주종휘가 주연 노교수역을 할 때 천사역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단 숙명여대 서갑숙은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와 여러 방송의 탤런트로 활동했다. 연극에 재판정 검사역을 맡았던 10기 대신고교 출신 소진은 서울법대를 거쳐 사시 합격하고 진짜 검사가 되어 활동했다. 지금 광장 법무법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10기 대신고 출신 정석영 군은 큰잔치 재판정 변호사역을 잘 연기 했다 서울공대 출신으로 공학박사가 되어 지금 대전에서 정부 기관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한글나무 활동을 마치고 대학 진학한 한글나무들이 교육계로 많이 진출했다. 4기 박덕영 연세 법대교수, 4기 김슬옹 외대 초빙교수, 고수일 전북대 교수, 이은령 숙명여대 교수 등이 있고 초, 중, 고교 교편을 잡은 한글나무 동문들이 많다. 은행계통은 덕수상고 출신 1기 김태선, 이덕배,2기 전세운, 등이 은행 지점장을 지냈다. 출판계로는 2기 김희상, 4기 조은희가 크게 활동했다. 그리고 지도교사 나의 안내로 1기, 2기 중심으로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월현 1리 덕초현에 농촌봉사활동을 전개했다. 농촌 어린이들에게 글짓기, 그림그리기, 방학숙제 도와주기, 함께 놀아주기 활동을 3박 4일간씩 활동했다. 밤에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오동춘 선생이 새마을운동 정신을 심어주었다. 1981년도 7기 때 주보 <말글얼>을 발간, 9기 때 <한글새싹>으로 이름 바국 주보에 토론주제, 국어순화된 말 등 소식을 실었다. 8기에서 회지 창간호 <한글나무>를 발행했다. 4호까지 발간하며 한글관계 교수님들 글, 자신들의 문학작품, 국어운동이론 등 다양한 내용으로 알차게 책을 엮었다.
1976년 1월 1일부터 약 20년간은 지도교사 댁에 새배를 왔다. 18평짜리 오동춘선생 집이 좁아서 학생들이 시차제로 왔다. 내 아내는 연탄불에 두그릇 세그릇씩 먹는 학생들 떡국 끓여 내느라 고생이 많았다. 1990년도 새배온 학생들은 재학생 한글나무에 15기 경복고 김훈, 대신고 조한상, 시흥고 이은경, 중앙여고 양경원 등 15기가 10명으로 많이 왔다. 졸업생 4기 김슬옹, 박덕영, 7기 변정수, 이경호 등 선후배 43명 이름이 방명록에 적혀있다. 내가 소지한 한글나무 새배 온 방명록은 1981년도부터 1997년까지 이름이 30명 정도씩 올라 있다. 대신중 제자 김경배와 김슬옹 철도고교 학생은 50년 넘게 지금까지 1월 1일 내게 세배를 오고 있다.
그간 지도교사 송골 오동춘 댁에 신정 세배 참석인원을 보면 재학생 동문 등 함께 세배를 다녀 갔다. 1기부터 5기까지 한글나무 활동 마친 후 동문으로서 지도교사 송골댁에 세배에 자주 참여했다. 방명록에 쓰인 연도별 지도교사댁 방문 숫자는 아래와 같다.
1980년도. 나안식 6기(서울북공고 1), 김종수(덕수상고 2), 문형우(오산고 2), 서갑숙(숙명여고3) 등 46명.
1981년도. 송인식 3기(경동고 졸), 박덕영 4기(서라벌고 졸), 최선희 6기(경희여고 2), 고길섭 7기(문일고교 1), 김태선 1기(덕수상고 졸) 등 27명.
1985년도. 김영길 10기(충암고 2), 장렬 11기(대신고 1), 배금희 11기(숭신여고 1), 소진 10기(대신고 2), 정석영 10기(대신고 2) 등 48명.
1986년도. 강태성 1기(덕수상고 졸), 장응원 12기(대신고 1), 허성희 10기(서문여고 3), 김억 11기(문일고 2), 차주범 11기(대신고 1), 박향숙 10기(경기여고) 등 56명
1987년도. 변정숙 7기(충암고 졸), 최정숙 9기(영등포여상 2), 이성희 12기(진명여고 2), 곽인철 11기(성남고 3), 최준원 13기(대신고 1), 강태성 1기(초대회장) 부인 임옥영 등 33명.
1988년도. 정석영 10기(대신고 졸, 서울대공대 진학), 박미연 10기(서문여고 졸, 성신여대 진학), 소진 10기(대신고 졸, 서울법대진학), 손지희 13기(신광여고 2), 한재석 8기(남강고 졸), 최은숙 10기(경기여고 졸) 등 43명.
1989년도. 김포서리 13기(신광여고 3), 신소연 15기(동명여고 1), 문지희 15기(덕수상고 1), 김원준 15기(숭실고 1), 김영인 15기(구리여고 1) 등 43명.
1990년도. 이경호 7기(대신고 졸), 김승구 14기(운암고교 졸), 양경원 15기(중앙여고 졸), 천뚝 15기(문일고), 송원미 15기(중앙여고), 전영 16기(동명여고), 김종현 16기(대신고) 등 43명.
1996년도. 김슬옹 4기(철도고 졸, 연세대 진학), 정한힘(작고) 9기(남강고 졸, 연세대 진학), 소진(10기) 허승환 부부, 한재석(8기) 김지원(8기) 부부, 이규동 19기(대신고), 김병우 19기(대신고), 김영상 21기(리라공고 2), 주유익 21기(리라공고 2), 임헌주 21기(혜성 전산고 2), 김기만 21기(한성고 2) 등 20명.
지도교사 송골 오동춘 선생댁 세배는 청소년들의 새파란 꿈이 자라는 사랑의 친목 친교의 낙원이었다. 늦게까지 윷놀이를 했다. 열약한 부엌에서 연탄불에 연방 떡국을 끓여 한글나무 고교생들을 두 그릇, 세 그릇씩 먹게 해 준 안송희 권사님의 노고가 한정없이 고마웠다. 1997년도부터 아이엠에프(IMF) 여파로 새배의 발길도 뜸해졌다. 연하장, 편지나 안부 전화가 나를 기쁘게 하고 있다.
〔라〕한글나무 큰 잔치 활동
한글나무 큰 행사는 제4기(1977년)부터 시작된 큰잔치 종합예술활동은 해마다 연말에 여는 큰 행사였다. 이 큰 잔치 행사에 동문들도 적극 참여 했다. 한글단체 어른으로 오리 전택부 선생, 김계곤 전 한글학회 회장 관람하며 격려해주셨다. 동문회에서는 연극의 연출을 맡아 도와 주었다. 큰 잔치의 연극은 <금관의 예수>, <2학년 3반의 월요일>, <한겨레 한글나무 큰잔치> 스물 두 줄기 창작연극 등 여러 작품을 준비하여 학생들은 기성배우 못지않는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국운회 큰모임은 뒤에 큰잔치로 이름을 바꾸어 1977년 12월 22일(목) 23일(금) 양일 간에 한글회관 강당에서 큰잔치 행사를 시작했다. 행사 내용에 시 낭송, 수필 낭독 악기 연주 등이 펼쳐진다. 절정 행사는 연주이다. 4기 한글나무들은 이근삼락 <원고지> 각본을 준비하고 등장인물에 교수 : 주종휘, 창녀 : 이혜경, 교수 아내 : 양정희, 장남 : 김영태, 감독관 : 이재석, 천사 : 서갑숙 등으로 배역을 정해 한글회관 지하 강당에서 실감나는 연극을 잘했다. 연극을 지도해 준 분은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정상일 학생, 홍익대 전자공학과 김영노 학생이다. 그 첫 번째 안내지에 한글학회 회장 허웅 박사님 격려사에서 시와 글로 연극으로 예술성을 드러내 나라사랑하는 한글나무 학생들의 예술활동이 참으로 장한 일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4기 으뜸빛 이재석 군의 모시는 글이 실려 있다.
두 번째 큰잔치는 사극을 연출했는데 사극의 현대화에 큰 뜻을 보였다. 5기 으뜸빛 이일규 철도고교 학생이 <악수를 청하는 글>을 쓰고 <우리의 목적> 한글 나무 제2조도 실었다. 지도교사 송골은 <푸른 새싹에 물을 줍시다>의 글로 두 번째 큰잔치를 격려했다. 1978년 12월 22(금), 23(토)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혜화여고 2학년 윤명숙 학생의 축시가 안내 책자 앞에 실려 있다.
세 번째 <국운회 큰 잔치>는 1979년 12월 20일(목) 21일(금) 한글학회 강당에서 열렸다. 경희여고 2학년 천현숙 학생의 축시 <국운회 큰 잔치에 바치는>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철도고교 1학년 으뜸빛 손창익 학생의 <첫 인사를 드리면서> 인사말과 지도교사 송골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따뜻한 격려사가 실려 있다. 행사 내용은 국운회 재판정이었다.
다섯 번째 큰잔치는 대신고 1학년 민병호 으뜸빛이 주관한 행사였다. 문학발표 방송 연극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국운회 재판정 출연진은 재판장 정경화,검사 전은경, 변호사 성기영, 피고 한재석 등이었다.
연극 <달처럼 해처럼>에 나오는 출연진은 임수영(오빠), 김지원(누이), 정광섭(범), 전을선(하늘), 허인(지팡이)
여덟 번째 큰잔치(1994.12.28.-29.) 대신고교 2학년 소진 으뜸빛이 임원들과 배푼 잔치였다. 지도교사 송골은 “우리 말글얼 사랑의 표현을 연극, 문학의 밤, 방송제 등 다양한 종합예술제 성격으로 베푸는 잔치가 바로 자랑스런 고교 국운회 잔치”라고 격려사에서 말씀했다. 1부 문학발표에 시 낭송, 독후감 발표를 하고 장렬, 김보영, 김영일이 방송꽁트를 발표했다. 국운회 재판정에 전미영 외 4명이 출연했다. 2부 연극 제목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다. 출연 학생은 동민(김재용), 수진(이민화), 정여사(박향숙), 할아버지(장웅남) 등이다. 15기 중심으로 베푼 여덟 번째 큰 잔치이다.
아홉 번째 국운회 큰 잔치는 1985년 12월 27일(금) 28일(토) 이틀간 한글회관 강당에서 열렸다. 안내 책자에 중앙고교 2학년 장운상 으뜸빛은 모시는 글을 발표하고 <자랑스런 한글나무들> 지도교사 오동춘 선생의 격려사를 앞에 편집했다. <더 큰 나무> 성남여고 2학년 김현숙 축시도 앞에 실었다. 1부 문학발표에 시, 편지글, 일기문, 중창노래, 방송극을 발표했다. 그리고 김미경, 김은숙, 추병호, 이준근, 박영재 등이 재판정에 출현했다. 2부 연극 제목은 <꽃 필 무렵>이다. 출현 학생은 이상훈(김명훈), 이정희(홍경아), 권향숙(이정은), 전영수(아버지), 전희선(어머니) 등으로 11기 12기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열 번째 큰잔치는 1980년 12월 29일(월) 30일(화) 오후 4시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열렸다. 12기 으뜸빛 박영재(대신고1) 학생이 모시는 글을 실은 안내 책자에 지도교사 오동춘 선생은 씩씩하고 믿음직한 우리 고교국운회 열 번째 큰잔치에 모두 가보자는 격려사를 해 주셨다. 1부 국운회 잔치로 축시, 국운회 소식 학술보고(주제 : 은어 비어 숙어) 일기문 등을 발표하고 뜻 깊은 재판정도 열렸다. 재판정 피고는 <우리말 사전>이다. 출연 학생은 문혜영(재판장), 신동진(검사), 김현경(변호사), 최주원(피고), 이창선(증인) 등 13기 중심이다. 2부 우리들 잔치에 시, 편지글, 방송극이 있다. 출연진은 신헌, 김진문, 김경, 권정수 등 13기 4명이다. 가장 핵심 종목인 연극 제목은 <차가운 꽃잎>이다. 이상흔 작 <내 사랑 짱구> 중에서 뽑은 내용이다. 출연진은 정성한(김성민), 조미숙(유지선), 김상현(선배), 홍인아(누나) 등으로 모두 13기 학생들이다.
열한 번째 국운회 큰 잔치는 1987년 12월 28일(월) 29일(화) 오후 3시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열렸다. 13기 한정일 으뜸빛 학생과 임원이 주관한 행사였다. 안내 책자에는 지도교사 오동춘 선생의 격려의 글 <눈매 푸른 젊은이를 믿어 주십시오>의 격려사가 앞에 실려 있다. 1부 우리들의 잔치에 축시, 국운회 사랑방 시, 편지글, 방송극(이영훈 외 7명), 노래 풍자극 등을 베풀었다. 풍자극은 <인생은 살면서 배우는 거래요>의 제목으로 함보영, 윤대진, 김미라, 한정일이 출연했다. 2부 국운회 잔치 시(이은주), 학술보고(이은혜, 김승구) 순서 다음에 국운회 재판정을 열었다. 피고는 <초등학교 한자교육>이었다. 출연 학생은 이영숙(재판장), 이승규(검사), 백철(변호사), 김영일(피고), 이은혜(증인) 모두 14기 학생들이다. 뒤에 학생들의 문학작품이 발표되어 있다.
열두 번째 큰잔치는 1988년(단기 4321년) 12월 28일(수) 29일(목) 오후 3시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베풀었다. 14기 이승규 김승구가 으뜸빛이었다. 앞에 창립선언문 우리의 목적 한글나무의 노래 버금빛 김영희 학생 축시를 발표했다. <한글나무를 잘 키우자> 오동춘 지도선생님 격려의 글이 실려 있다. 내용은 1부 우리들의 잔치에 축시(김영희), 시 수필 낭독 학술 보고(채형경, 허종배, 신소연, 조한상) 등의 진행과 연극 <정말 잘 생겼어요>가 연출되었다. 출연 학생은 이한길(시장), 강장환(사내), 박재영(아가씨), 윤대진(부사장), 오세옥(사장 부인), 전정성(서기), 서영아(비서) 등이다. 2부 한글나무 잔치에 김훈, 최정선이 함께 이끌며 방송극 <파리약에 붙은 파리>를 진행하고 재판정 피고로 <대한민국 헌법>을 세워 15기 출신 김영인(재판장), 권오경(검사), 김원준(변호사), 이봉춘(피고), 강희선, 한용수, 김영미(증인) 등이 출연했다. 12기 박영재 14기 김승구 선배를 비롯한 9기 정한힘 도움까지 받아가며 열두 번째 한겨레 한글나무 큰잔치를 잘 마쳤다.
열세 번째 한글나무 큰 잔치는 1990년(4243년) 1월 5일(금), 6일(토) 오후 3시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열렸다. 안내 책자에는 으뜸빛 김훈 학생의 모시는 글을 비롯 창립 선언문(1975.3.22.), 우리의 목적, 한글나무 노래, 버금빛 이은경 축시가 나와 있다. 선생님의 말씀으로 오동춘 지도교사의 격려글로 <한글나무에 물을 줍시다>가 차례 앞에 실려 있다. 김민영 김정삼 두 학생이 이끄는 큰 잔치 내용에 1부 앞마당으로 축시, 사랑방, 문학 – 편지글, 중창(뭉게구름, 제발제발) 한글 기계화 제목의 학술발표가 16기 고미정, 서정희, 송춘성 학생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2부 뒷마당에 문학, 연극, 노래찬조(인창고, 동성고) 방송극 노래, 재판정 대중매체를 피고로 하여 대중매체의 장단점을 재판했다. 출연 학생은 16기, 17기, 18기 학생들이 참여했다. 박성일(재판장), 김영미(검사), 김종문(변호사), 임세환(피고), 박호익, 신현미, 안학준, 양진석, 오선자, 윤현극, 함정우, 허유정(증인) 등이 출연했다.
창작 연극은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인데 이 작품은 17기 신현미 동구여상 학생이 직접 쓴 대본이다. 출연학생은 17기 5명 18기 3명이다. ???(교사), 김경선(반장), 김영한(미현), 박상희(상경), 이윤수(강호), 임권상(정기),정선희(연희), 최승일(계명) 등이 출연했다.
열다섯번째 한글나무 큰 잔치는 1992년(4325년) 1월 3일(금), 4일(토) 오후 3시 30분 광화문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열렸다. 17기 박지현(구리여고), 임세환(대신고) 두 으뜸빛이 17기 18기 중심으로 엮은 안내 책자 차례를 보면 으뜸빛 임세환 학생의 인사말, 버금빛 김경선 학생의 축시가 있다. <다시 생각해 보는 우리의 한글 나무> 제목의 학술발표에 17기 김영관, 선호 학생이 발표했다. 한글나무 재판정이 진행되었다. 연극 제목은 <금관의 예수>이다. 금과 시멘트에 갇혀버린 예수를 구해 준 사람은 오만의 부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가장 천하게 여기는 환자 바로 문둥이로 결론 지어 오늘의 현대인들의 진실을 각성시키는 내용이다.
출연 학생은 전?일(사장), 김종현(예수), 문경재(문둥이), 송선미(창녀), 양경원(순경), 천뚝(신부), 최영화(수녀), 최필훈(거지) 등 15기 16기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열여섯 번째 한글나무는 1992년(4325년) 12월 30일(수)~12월 31일(목) 오후 4시에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열렸다. 안내 책자에는 으뜸빛 18기 대신고 학생 정철재의 모시는 글이 앞에 실려 있다. 12월 30일 첫날 행사에 한글학회 회장 격려사가 있다. 버금빛 정성희의 축시가 있고 김영미가 학술발표를 했다. 창작연극은 <다큐멘터리 02 우리는 ‘황퀴클’도 아니오 ‘이다일’도 아니오이다> 제목의 연극을 연출했다. ‘황퀴클’은 황진이+퀴리+클레오파트라를 줄여 ??만으로 만든 조어이다. ‘이아일’은 이만기+아인슈타인+알랑드롱을 합성 준말이다.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종의 유지나 역사발전을 위해서 훨씬 더 바람직한 대상이라는 내용이다. 출연 학생은 변하영(고미현 아씨), 송예나(김정화 아씨), 정다신(민영아 아씨), 이어진(서나영 아씨), 유예나(원효정 아씨), 선생 <가>(정성희 아씨), 선생 <나>(이승준 도령), 선생 <다>(김정호 도령), 선생 <라>(고재득 도령) 18기 학생들이 주로 출연했다.
12월 31일 큰잔치에는 한글학회 이사 김승곤 박사님 격려사, 방송제, 노래자랑, 재판정 등의 잔치가 진행되었다. 재판정의 피고는 <대학입시>이다. 대학입시 부조리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출연학생은 임정은(재판장), 배효석(변호사), 김세훈(검사), 박성일(피고), 증인 : 강선주,김행경, 류수응, 민영아, 이지연 등 18기 19기 학생들이 출연하여 <대학입시> 재판정을 잘 마쳤다. 지도교사 오동춘 선생님의 <한글세대 잘 가꾸자>의 격려의 글이 한글나무 뒤를 잘 떠받혀 주고 있다.
열일곱 번째 한겨레 한글나무 큰잔치는 1993년 12월 30일(목), 31일(금) 오후 5시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열렸다. 안내 책자에 으뜸빛 김병우(대신고) 학생의 인사말, 김계곤 교수의 격려사가 실려 있고 <씩씩한 한글나무 아는가>의 격려의 글을 써서 큰잔치 여는 학생들의 사기를 돋구어 주었다. 큰잔치 내용으로 학술발표, 창작연극 <이 연극 제목은 무엇일까요>, 노래자랑, 한글나무 방송제, 한글나무 재판정 등을 진행했다. 오동춘 지도교사는 <한글나무 사랑하자>의 격려사를 남겼다.
열아홉번째 한글나무 큰잔치는 1996년(4329년) 1월12일(금) 13일(토) 늦은 5시에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열었다. 22기 으뜸빛 김영상(리라공고)학생의 인사말 오둥춘 지도교사, 격려사 한글학회 김계곤, 김승곤 이사 격려사가 있었다, 창작연극은 <새소식을 알려 드립니다>로 한글날 계몽, 성희롱문제 범죄와 폭력, 노인문제 등을 다루었다.
스무번째 한글나무 큰탄치는 1997년 1월 29일 물날 1월 30일 나무날 열악한 환경 속에서 22기 학생들이 큰잔치를 잘열었다. 한글나무 큰잔치 참가에 버금빛 반은성 학생의 인사말이 있고 오동춘선생님의 <한글나무는 잘 자란다>의 격려사 글이 실렸다. 학술발표자로 반은성(22기) 김슬기(23기)가 영화에 대해 창작연글은 공지윤(22기)가 연출했다 선배들에게 고교 재학시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하는 내용의 연극이다.
스물 한 번째 큰잔치가 1998년 1월 12일 한글회관에서 열렸다. 위례상고생 양경원 김인선 두 으뜸빛 고교생 노력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도 학술발표를 23줄기 김인선 24줄기 이태주 학생이 발표했다. 방송제는 23줄기 이호영 24줄기 최미경 김학민 학생이 진행했다. 연극은 23줄기 양경원이 연출했다. 오동춘선생은 <한글나무 잔치에 오시오> 격려 글로 한글나무 학생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스물 두 번째 한글나무 큰잔치를 1999년(4332년)1월 8일(금), 9일(토) 늦은 4시 30분 한글회관 1층 강당에서 열었다. 오동춘 선생은 <한글나무는 잘자라고 있다>는 격려말씀을 남겼다. 큰잔치 내용으로 학생들은 거리계몽 조사발표, 학술발표에서는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반박을 했다. 재판정 잔치에는 통일신라에 대한 재판을 했다. 출연학생은 이태주(재판장) 장미(검사) 이상영(변호사) 최미경(증인: 왕교려 최치원) 오병석(증인: 김춘추) 김슬기(증인: 김부식) 김인선(신라관리 2) 공지원(증인: 대발해) 권희순(신라 관리 1) 등으로 22기 23기 24기 25기 학생들이다. 25기 최미경 으뜸빛 인덕공고 학생의 여는 말로 큰잔치는 새천년을 앞두고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우리 한글나무 학생들은 우리말과 글과 얼을 사랑하는 국어운동활동을 종합예술활동으로 큰빛을 드러냈다. 그리고 선후배간의 친목도모에도 큰 힘이 되었다.
[마] 한글나무 기별활동 요약
제1기 1975. 2. 22. ~ 1975. 12.20.
으뜸빛 강태성(1, 2회기)
버금빛 김옥희(1, 2회기)
으뜸빛 강태성은 덕수상고에서 이경복선생 지도하에 우리말 지켜쓰기모임에서 김태선과 함께 활동한 귀한 한글 일꾼이었다. 그의 형도 나의 영도중학 제자였다. 지도력과 실천력이 강했다. 버금빛 김옥희는 이화여고생으로 안송산 국어선생님 추천으로 장봉숙과 함께 한글나무 회원이 되었다. 초대회장 강태성은 40대에 교통사고로 구미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1986년 6월 28일 영동 어느 예식장에서 장옥영 아씨와 결혼식을 가질 때 나는 주례사에서 먼저 하나님 잘 믿는 가정 이루고 사랑약속 잘 지키며 효도 잘하고 나라 겨레사랑 하며 참삶 뼈삶 빛삶의 가정으로 행복하게 잘 살아가라고 힘주어 주례사를 했다. 한결 아들 하나 두고 떠난 강태성 제자가 늘 그립다. 1기 총무를 맡은 덕수상고 출신 김태선군은 아주 성실하고 회원 관리도 잘하고 나의 지시를 잘 지켰다. 신한은행 지점정으로 활동하다 퇴임했다. 1기 활동 업적은 7대 일간지 외래어 사용 빈도수를 조사 발표했다. 그리고 식목일을 지나 1975년 4월 20일 한글나무 핵생들이 마장동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경기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외솔산소를 찾아가 참배했다. 이웃해 있는 한힌샘 주시경 선생 산소도 참배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 지은 주시경 선생에 대한 비문도 읽어 보았다. 박대희 정음사 편집부장(외솔회 총무이사)이 잘 안내해 주었다. 가져간 상록수 나무도 산소 주변에 심고 돌아왔다. 어린이대공원에서 단체국어순화활동을 펼쳤다. 2000명을 대상으로 말의 쓰임을 조사했다. 김석득, 전규태 연세대 교수 정재도 한글운동가 선생 모시고 한글사랑 나라사랑 강연을 들었다. 8월 8일부터 12일까지 4박5일간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월현1리 덕초현 농촌마을에 농촌봉사 활등을 갔다. 내가 중앙여고생, 대신고교생들과 함께 1972년부터 3년간 농촌봉사활동을 하여 덕초현 주민과 어린이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중앙여고 졸업생 엄정숙여사가 횡성군 서기로 있으면서 내게 처음 소개한 가난한 농촌마을 덕초현이었다. 한글나무 1기도 나의 지도하에 강태성 김태선, 최원붕, 박은관, 장봉숙 등 5명이 참여했다. 가져간 학용품을 어린이들에게 나눠 주며 여름성경학교를 열어주고 어린이들과 친근한 벗이 되어주었다. 간판 외래어 빈도수를 조사 발표했다. 한글날 기념식 참여 및 한글계몽을 했다. 공병우 박사가 후원한 한글계몽지로 거리계몽을 했다. 10월 10일에 기독교방송 명랑백일장에 출연 계몽하고 3행시 짓기에 출전하여 계성여고 주설령 학생이 장원이 되었다. 최종 3행시 문제는 우리나라 중강진을 문제로 내놓았다. 심사위원은 새싹회장 윤석중 선생 문제안 세종대교수, 오동춘 대신고교 교사였다. 주설령 한글나무 모람이 장원이 되어 기뻤다. 당시 신일중학교 국어교사 최기호 선생이 기독방송 명랑백일장을 듣고 내게 축하 전화를 해왔다. 최기호 선생은 연세대 국문과 후배였다. 기독교방송 피디(PD)로 일하는 이봉원 선생이 우리 한글나무를 잘 도와주었다. 이밖에도 연말에 1기 회원들은 시립아동병원 방문, 정신박약아 위로 한국방송공사(KBS) 라디오 <우리는 고교생>에 출연 한글사랑계몽을 펼쳤다.
배제고 출신 유희진은 연세대 진학 졸업 후 현재 회사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덕수상고 출신 김태선, 이덕배는 은행가로 진출 지점장으로 활동했다. 이화여고 출신 장봉숙은 서울교육대 졸업 후 초등학교 교편을 잡았다. 이화여고 출신 김옥희는 현재 한국체육대 교수로 있다. 경희여고 문원희 선생이 추천한 김일호는 보건소 일을 하고 있다. 계성여고 출신 주설령은 서울고 출신 4기 주종휘, 대신고 출신 7기 주종흥 3남매가 한글나무 활동을 열심히 했다.
제2기 1975.12.20. ~ 1976.10.30.
으뜸빛 전세운(3, 4회기)
버금빛 조미순(3, 4회기)
덕수상고 출신 전세운은 서울시 고교 모표 실태조사(100개교 학교)를 했다. 2월 22일 한글나무 창립식에 한글학회 허웅 회장 모시고 강연을 들었다. 3.1절 공휴일에 어린이대공원 단체계몽, 은어조사와 상표모으기 활동을 했다. 5월 27일에 문화방송 출연 <별이 빛나는 밤에> 초청 방송한글계몽을 했다. 7월 5일에 문화방송 라디오 방송에 <우리는 여고생>에 출연 한글계몽을 했다. 기독교방송 명랑백일장에 출연 한글계몽을 했다. 6월 26일에 명사를 초대 국어공부에 도움을 받았다. 초대한 명사는 공주사대 하동호 교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님, 송준호 마포고교 선생 등을 모셨다. 2월 22일 창립 첫돌 기념식에 허웅 박사를 비롯하여 한창기 브리태니카 사장, 최철해 정음사 사장, 전규태 외솔회 사무국장, 축사 오동춘 지도교사 인사말을 들었다. 초대회장 강태성은 그간의 한글나무 활동을 보고했다. 2기도 1가 뒤를 이어 강원도 농촌봉사를 갔다. 참여학생 명단은 아래와 같다.
김희상배재고 2이점순 이화여고 2구정우 용산고2
이종만 경복고교 1최원용 덕수상고2조미순 이화여고 2
제3기 1976. 10. 30.~1977.10.29.
으뜸빛 윤백섭(5, 6회기)
버금빛 이은영(5,6 회기)
한영고교 2학년 윤백섭 으뜸빛과 숙명여고 2학년 이은영 버금빛이 잘 이끈 3기 한글나무 활동도 활발했다. 2월 19일 창립 두돌잔치를 베풀고 3.1절, 광복절, 한글날에 단체 한글계몽에 나섰다. 4월 5일 식목일에 상록수 묘목을 준비하고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주시경 최현배 산소를 찾아 참배하고 산소 주변에 상록수를 심었다. 9월 11일 상표모으기 외래어 사용빈도수를 조사 발표했다. 10월 3일 개천절에 서오능으로 들놀이 가서 친목도 이루었다. 1977년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3박4일간 나의 인솔로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월현1리 덕초현에 윤백섭 으뜸빛과 김혜경(숙명여고1), 장방현(오산고1)과 함께 가서 어린이 지도 농촌봉사를 잘했다. 2기때부터 한글회관 건립 모금운동을 하여 3기 때 18,800원을 한글학회에 냈다. 한글나무 동문회는 1만원, 지도교사 오동춘도 1만원을 한글학회 건립헌금으로 냈다. 나는 당시 교사봉급 7만원 중에서 1만원 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룬 초대 법무부장과 애산 이인(1896-1976)선생이 집을 판 사재 3천만원을 한글학회 건립기금으로 기부하여 한글학회가 한글회관 건축기금 모금운동을 벌인 것이다. 그리하여 한글나무 고등학생 일동, 한글나무 동문회, 지도교사 오동춘이 약 3만원 큰 돈을 헌금한 것이다.
한글회관 건립위원회 조직은 고문 곽상훈, 정일권, 한경직 등 32명, 지도위원은 곽종원, 김연준, 김우중, 정주영, 백선엽, 방우영, 최첨해 등 74명이다.
명예회장 백낙준, 회장 이은장, 부회장 김선기, 윤주영, 주영하, 태완선, 집행위원장 허웅, 집행위원은 구상, 공병우, 김계곤, 김석득, 문효근, 박종국, 전택부, 한갑수, 한창기, 유제한, 윤석중 등 26명이다. 위원은 황호동 등 1,128명이다. 이런 큰 조직 속에 한글회관은 1978년도에 완공되었다. 유제한 한글학회 상무는 한글회관은 겨레의 집으로 누구나 쓸 수 있는 공간으로 말씀한 바 있다.
제4기 1977. 10. 29. ~ 1978. 10. 28.
제4기는 배재고 출신 으뜸빛 이재석 학생과 서라벌고 출신 박덕영 후반기 으뜸빛과 숙명여고 출신 서갑숙, 한영고교 출신 송병남 버금빛의 활발한 활동을 보여 준다.
제4기의 가장 큰 일은 방송출연, 거리계몽의 국어운동을 종합예술로 승화시켜 한단계 높혀 미적 감각을 통해 우리말 우리글을 빛나게 하는 큰잔치를 처음 연 일이다. 이근삼의 연극각본<원고지>에 노교수역을 맡았던 서울고 출신 주종휘가 뒤에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연극 연출과 영화감독으로 큰 활동을 보였다. 그 때 천사 단역을 맡았던 숙명여고 출신 서갑숙은 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탤런트로 방송극 인기있는 배우생활을 했다. 허웅박사님도 한글나무 큰잔치는 크게 기대되는 행사라고 격려해주셨다. 단체계몽으로 3.1절날 현충일날 한글날에 활동했다. 방송출연은 동양방송(TBC)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2회 출연 황인용 아나운서와의 국어순화대담으로 한글운동을 했다.
기독교방송(10.6) <여보세요 부인>에 출연하고 동양방송 “이덕화 임예진 쇼”에도 출연 한글계몽운동을 했다. 제3기와 같이 서오능 들놀이를 가서 모람간의 친목을 도모했다. 외솔회 책임운영이사로 우리 한글나무 모임 장소로 외솔회관 공간에 4년간 배려해 주셨는데 한글학회 회관이 새로 건립되어 한글나무는 박덕영 으뜸빛일 때 1978년 9월 11일 모임 장소를 광화문 한글회관으로 옮겼다.
철도고교 출신 4기 김슬옹은 김용성 한자 이름을 슬기롭고 옹골차다는 뜻의 이름으로 바꾸어 한글나무 활동에 앞장서 활동했다. 연세대 국문과로 진학하여 외솔 최현배 스승, 한결 김윤경 스승 한글사랑 나라사랑 정신을 잘 익히고 연세대, 상명대, 동국대에서 문학박사, 국어교육학 박사 학위를 세 개나 취득하여 현재 국문학계 국어 전공 3박사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제 38회 학술부문 외솔상(2016.10.24.)을 받았고 현재 국어세종문화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저서는 공저 포함 98권에 이르고 <세종과 소쉬르 비교 연구> 등 130편 알찬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의 훈민정음학의 대석학으로 활동하고 있다. 으뜸빛을 지낸 박덕영은 현재 연세대 법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고수일은 전북대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조은희는 출판계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제5기 1978. 10. 28. ~1979.12.8.
제5기 으뜸빛 이일규(철도고교생) 9회기 후반기 으뜸빛 김종수(덕수상고생) 10회기 버금빛 신상임(중대부고 9회기) 백은영(숙명여고(10회기)등의 노력으로 5기도 두 번째 한글나무 큰잔치를 열고 식목일에 주시경, 최현배 선생님 산소 참배를 갔다. 어린이대공원, 덕수궁, 경복궁에서 단체 한글계몽을 했다. 6월 6일 현충일날 오동춘 선생 근무하는 대신고교 운동장에서 선후배 청백전 친선 체육대회를 처음 연 것이 큰 보람이 되었다. 행주산성으로 들놀이도 갔다. 1979년 10월 8일 “별이 빛나는 밤에”문화방송에 이일규(철도고2), 신상임(중대부여고2), 정중식(경복고1)이 참여하고 다음날 동양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 에 송골, 김상수(덕수상고2), 최영선(성남고2), 박경희(혜화여고2)등이 출연했다. 한글날 덕수궁 꽃바치기 덕수궁과 경복궁에서 한글계몽지 삼천매를 전했다. 한글날 참여회원은 천현숙(경희여고2), 신상임(중대부여고2), 박경희(혜화여고2), 임현수(이화여고2), 조용숙(배화여고2), 정중식(경복고교1)등이 한글계몽에 앞장섰다. 천현숙이 제4회 민족시(시조)짓기 대회 출전, 한가위 제목으로 가작 입선했다. 1977년 12월 22일 전주가나다모임과 함께 우리 말글얼 사랑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제6기 1979.12.8.~1987.1.19.
으뜸빛 손창익(11회기), 정중식(12회기)
버금빛 양미경(11회기), 나안실(12회기)
6기는 1979년 12월 20일 21일에 세 번째 큰잔치를 열고 1980년 12월 26일 27일 네 번째 큰 잔치를 베풀었다. 덕수궁, 경복궁에서 단체한글계몽도 했다. 6기는 국어공부에 중점을 두어 국어교과서에 글 쓴 교수나 그밖에 인사를 모셔 강연을 들었다. 초청강연으로 허웅박사님(6.21.)에게 “우리말의 특질”을 배웠다. 이화여고 안송산 선생(7.19.)에게 캐나다의 언어현실을 공부했다. 김계곤 교수님에게는 “우리말 적기법의 자취”에 대해 배웠다. 곽종원 건국대 총장님에게 국어교과서상의 직접 쓰신 현대문학 평론강의를 들었다. 9월 20일에는 청록파 시인 박두진 교수를 초청하여 “3.1일의 하늘” 해설을 들었다. 10월 30일에는 서울대 이현복교수의 “표준발음”에 대해 공부했다. 11월 13일에는 이화여대 이태극교수를 초청하여 국어교과서에 실린 “낙조” 시조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학생들은 1977년 2월 22일에 발표한 “창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제7기 1981. 1. 17. ~ 1982. 1.16.
으뜸빛 오준석(13회기)·민병호(14회기)
버금빛 김미성(13회기)·이미랑(14회기)
경복고 출신 오준석, 대신고 출신 민병호, 동덕여고 출신 김미성, 서문여고 출신 이미랑 네 학생이 으뜸빛 버금빛이 되어 제7기 국어운동활동을 잘했다. 경복궁, 덕수궁에 단체한글계몽을 하고 문교부장관 앞으로 “한글이름표달기” 건의를 하고 문화공보부 장관 앞으로 “언어순화, 텔레비전 음성문자의 한자 없애라”를 건의했다. 7월 4일 3.1여성동지회 조애실 시인을 초청 강연 듣는데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다 겪은 수난 고통의 역사를 장장 4시간을 했다. 공부가 되긴해도 학생들이 좀 지루했다. 대성리로 물놀이 가서 친목을 잘 이루었다. 전주 가나다모임을 방문하고 다섯 번째 큰잔치를 열었다. “라디오 서울”에 출연 “가위, 바위, 보” 프로에 참가했다. 9월 5일에 장충단공원 외솔선생 기념비 참배 후 외솔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문화방송 제작위원 황선길님을 모시고 방송언어에 대한 공부를 했다. 연말에 자체 겨울 교육을 실시했다. 1982년 1월 7일 8일에 제1회 한글모임 간담회를 전주 가나다모임과 함께 열었다.
제7기의 가장 창의적인 일은 10월 10일 주보 <얼말글>을 창간했다. 뒤에 곧 <한글새싹>으로 이름이 바뀐다. 한글나무 자유토론 주제나 저명인사 교양적인 글, 국어순화된 말 소개, 외래어, 옛말 등 다양한 학생들의 주장이나 소리가 담겼다. 1996년까지 발행되었다. 1982년 2월 20일자 <말글얼>에는 <고교 국운회 여덟돌을 맞다>지도교사 오동춘 선생 글이 실려 있다.
제8기 1982. 1. 16. ~1983.1.15.
으뜸빛 김영길(15회기) · 한재석(16회기)
버금빛 전정화(15회기) · 김경주(16회기)
대신고 출신 김영길 으뜸빛, 남강고 출신 후기 으뜸빛 한재석과 버금빛 전정화, 김경주의 뭉친 힘으로 8기 활동을 잘 이끌었다. 창립 기념행사를 하고 3월15일 연세대 김석득교수 모셔다 강연을 들었다. 식목일에 최현배 선생 묘소 참배을 했다. 외솔상 시상식에 참여했다. 여섯 번째 큰잔치도 열었다. 어린이대공원 한글날 단체 한글계몽을 하고 대신고교 운동장에서 선후배 팀을 나누어 체육대회도 열었다. 일영으로 들놀이 친목모임도 가졌다. 서울시내 거리간판조사를 하고 3개 일간지 어휘쓰임 빈도수 조사를 했다. 10월2일 경기고 국어연구반과 공통토론도 했다. 한국방송공사(KBS)라디오 “일요일 아침에 만난 사람들”에 출연했다. 1983년 1월 10일, 11일에 전주 가나나모임과 제2회 한글모임 간담회를 가졌다. 제8기의 획기적 일은 회지 <한글나무>창간에 있다. 학생들의 시와 수필이 많이 발표되서 문예지 성격이 보이긴 하나 오동춘 지도교사 <한글나무>축시를 비롯하여 박대희 외솔회 총무간사, 성원경 한글새소식 주간, 경희여고 문윤희 선생님의 격려사가 두드러진다, 선생님 논단에 허웅, 정대구, 이경목 선생님 글이 실려 있다. 국운회 회칙 역대 회장, 부회장 및 회원명단이 있다.
제9기 1983.115.~1984.1.21.
으뜸빛 백승현(17회기) · 김현석(18회기)
버금빛 송선자(17회기) · 이정선(18회기)
제9기는 제17회 정기큰모임을 1월 15일에 마치고 1월 29일 부산 동아대 박지홍교수의 “일제시대의 국어운동”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2월19일 한글나무 여덟돌 잔치에 한창기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의 “토박이말” 김계곤 한글학회 총무이사의 “우리말 맞춤법” 초청 강연을 들었다.
4월 23일에 허웅 박사님 모셔 국어교과서에 실린 “우리말과 글의 특질”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어린이날과 한글날에 한글계몽하고 한글날은 덕수궁 세종께 꽃바치기 식에 참여했다. 5월 14일자로 <얼말글>주보 이름을 <한글새싹>으로 바꾸었따. <한글새싹>은 4x6배판 4쪽의 크기로 1주일동안의 모임소식 및 국어운동에 관한 이론, 회원들의 글을 실어 모임의식을 강화하고 회원들의 주체정신을 이루기 위해 7기가 먼저 <얼말글>로 창간했던 것이다. 현충일날에 한글나무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대신고교 운동장에서 축구, 배구, 달리기, 오재미던지기 등 선배, 후배로 편을을 갈라 재미있는 체육대회를 열었다. 때로는 지도교사 송골은 축구선수로 참가했다. 8월 8일에 거리간판조사(시청앞, 종로2가, 3가, 롯데 지하상가, 소공동 지하상가 등) 9월10일에 3대 일간지 외래어 조사 등을 했다. 여름 겨울 자체 정기연수교육도 잘 실시했다. 한글나무 일곱 번째 큰잔치도 잘마쳤다. 1984년 1월 14일 15일 전주 가나다모임과 제3회 한글모임 간담회를 열고 “영어조기교육”을 토론주제로 연합토론을 벌였다. 9기 출신 동문으로 연세대 졸업하고 회사원이 된 정을병 작가 아들 정한힘이 있다. 영등포여상 출신 최정숙은 시인활동을 하고 있다.
제10기 1984.1.21.~1985.1.19.
으뜸빛 정석영(19회기) · 소진(20회기)
버금빛 박우옥(19회기) · 허성희(20회기)
으뜸빛 정석영, 소진은 대신고 출신으로 버금빛 성남송신여고 출신 박우옥, 서문여고 출신 허성희와 함께 10기를 힘차게 이끌어 갔다. 1984년 2월 25일 한글나무 창립 9돌 잔치를 잘 베풀고 어린이날에 대신고교 운동장에서 체력단련의 체육대회를 가졌다. 8기 선배들과 연합토론도 가졌따. 7월21일 제20회 정기 큰 모임을 열고 총동문회를 발족시켰다. 초대회장은 1기 출신 배재고 졸업생 변성섭이 맡았다. 8.15 광복절날 신흥 유원지로 들놀이도 갔다. 연구활동으로 여름에 한국방송공사 한국어연구회를 탐방하여 방송인의 대책을 질문했다. 9월에 경향신문사를 탐방하여 신문가로쓰기에 대한 일문일답을 했다. 9월10일에 설문 및 여론조사로 표준어문제와 외래어 사용 빈도수에 대해 조사 발표했다. 연말에 여덟 번째 큰잔치를 잘 마쳤다. 1985년도 1월12일, 13일 제4회 한글모임간담회에서 전주 가나다모임과 함께 “한글이름” 주제로 공동토론회를 가졌따. 8기가 창간한 한글나무 제2호를 1월 19일 발행했다. 책의 내용은 간추려 보면 창립 열돌에 부치는 송골 축시 “해와 같이 빛내보라”를 비롯해서 국운회 10년사, 회장 소진 인사말, 총동문회장 박덕영 인사말, 발간사, 국어의 현주소와 순화, 한글전용의 뜻을 바로 알자, 숭신여고 출신 박우옥, 서문여고 출신 허성희, 김재용의 꿈틀거리는 생각, 강태성 초대회장의 함찬 박수를 보낸다, 김슬옹의 국어운동 서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웅상, 여준염의 모임에 들어와 보니, 박미연의 논단 고려 속요에 관한 소고, 임문혁 경기여고 교사, 최은숙 경기여고생 시가 실리고 배금희, 김영일 등의 시가 실려 있다.
<딱 둘만 남게 된다면> 시를 남긴 임문혁 시인은 경기여고 교사시절에 한글나무모임에 경기여고생을 많이 회원으로 보내 주셨다. 80년대부터 틈틈이 나를 도와 한글나무 밑거름이 되어 주셨다. 내게는 고교에서 국어를 배운 사제지간의 정과 사랑이 깊어 한글나무 학생들과 함께 우리집에 세배를 오셨다. 열심히 학문을 연구하여 교원대 교육학박사학위 취득하시고 대학도 출강하시며 진관고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한글나무 학생들을 함께 지도해 주신 고마음이 늘 훈훈하다. 한글나무 제3집에서 <벌이 쏘는 것보다 더한 아픔이>시를 남겼다.
제11기 1985.1.20.~1986.2.21.
으뜸빛 탁성욱 · 장웅상
버금빛 배금희 · 김현숙
2월23일 열돌잔치 열고 5월3일 백일장을 가졌다. 현충일날 대신고교에서 체육대회를 열었다. 23회 정기모임열고 8월에 모람들 여름정기교육을 시켰다. 광복절날 정릉으로 소풍를 갔다. 설문 및 여론조사를 했다. (광화문, 종로, 명동)
한글날 덕수궁에서 한글단체계몽을 했다. 1985년 12월28일, 29일 아홉 번째 큰잔치를 잘 마쳤다. 한국방송사 사회부 기자를 방문 기사언어에 대한 질문도 했다.
제12기 1986.2.22.~1987.1.14.
전기 으뜸빛: 장은원 버금빛: 김미경
후기 으뜸빛: 박영재 버금빛: 추정희
1986년 2월22일 열한돌 잔치를 했다. 10기 선배와 외국말 조기교육에 대하여 연합토론을 했다. “밀향” 한마음과 내용의 연합독서토론도 했다. 현충일날 대신고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가졌다. 7월20일에 임원조직 이름을 순우리말로 하기로 했다. 여름정기 단체연수교육을 실시했다. “한글전용”주제로 한마음 연합토론을 했다. 한글날 단체한글계몽을 했다. 12월29일, 30일에 열 번째 큰잔치를 잘 마쳤다. 1987년 1월5일부터 9일까지 7기 변정수 선배가 겨울정기교육을 실시했다. 1월14일 이태극 교수의 시조 강의를 들었다.
제13기 1987.1.17. ~12.29.
전기 으뜸빛 정성환, 버금빛: 문혜영
후기 으뜸빛 한정일, 버금빛: 김현정
1987년 1월 27일 제25회 정기 큰모임가졌다. 2월21일 거리간판을 조사했다. 2월22일 창립 열두돌 잔치를 했다. 6월6일 현충일날 대신고교에서 체육대회를 열었다. 7월 18일 13대 26회기에서 회기변경과 모임이름 변경 문제는 연기하기로 했다. 9월28일 첫 번째 주제발표희의 주제는 “한글전용”이다, 발표자는 장재웅, 김현정, 최준원이다. 한글날 단체계몽을 덕수궁, 경복궁에서 실시했다. 11월28일 두 번째 주제발표회의 주제는 “한글이름”이다. 발표자는 문혜영, 김왕탁, 권정수 등이다. 12월28일, 29일 열한번째 큰잔치가 잘 끝났다.
제14기 1988.1.23.~12.31.
전기 으뜸빛 이승규, 버금빛: 이영숙
후기 으뜸빛 김승구, 버금빛: 김영희
1988년 1월23일 이상범 시조시인의 시조강좌를 열었다. 2월20일 열세돌 잔치를 하며 한글학회 정재도 선생의 강연을 들었다. 5월28일에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주제를 두고 연합독서토론을 가졌다. 대신고교에서 현충일날 체육대회를 열었다. 6월18일에 주제발표회에서 김승구는 외래말, 함보영은 은어, 비속어에 대해 발표했다. 연구활동으로 거리간판조사(3.13. 명동 청량리, 대학로, 동대문) 8월17일 청량리, 명동, 이대입구, 신당동 등지의 거리간판을 조사했다. 한겨레신문사, 서울신문사(스포츠서울) 탐방 한글전용문제에 대해 알아 보았다. 10월달에 문화방송 제작위원 황선길님 초청 방송언어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11월 19일 “교육”을 주제로 연합토론도 열었다. 11월26일은 선배들 대학입시에 승리하라고 엿잔치를 열었다. 11월27일에는 14기, 15기 단합대회를 위해 삼청공원에서 모임을 열었다. 12월 28일, 29일 열두번째 큰잔치를 잘 열었다. 14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6월 25일 제28회 정기 큰모임에서 그간 모임 이름인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를 순우리말로 순화시켜 새로 지은 이름 한겨레한글나무고등학생모임으로 바꿨다. 약14년간 써오던 이름을 한글사랑에 투철한 한글세대가 자기 사상에 맞는 주체적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14기 모임에서 성공을 이루는 빛나는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한글나무는 임원직책 이름도 순우리말로 고쳐 부르고 있다.
제15기 1989.1.21.~12.30.
전기 으뜸빛 김영인, 버금빛: 최정선
후기 으뜸빛 김훈, 버금빛: 이은경
1월21일 전주 가나다모임에 찾아갔다
2월25일 창립 열세돌 잔치에 작가 정을병님 초청 강연을 들었다. 4월16일에 거리간판조사를 했다(대학로, 청량리, 영등포, 신사동, 신촌, 신당동) 6월6일 현충일에 대신고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열었다. 6월17일 황순원의 <별> 작품으로 연합독서토론을 했다. 이청준의 <다시 피어나는 말>로 연합독서토론을 가졌다. 광복전날 천안독립기념관에 여름 소풍을 갔다. 한글날 덕수궁에서 한글단체계몽을 했다. 11월4일 국제 “조어력”으로 연합토론을 했다. 11월8일 서울시내 234개 고교에 한글나무 모임 알리는 종이를 띄웠다. 연말 입시를 앞둔 선배를 위해 엿잔치를 하고 이어 열세번째 한글나무 큰잔치를 잘 마쳤다. 1989년 7월29일 임시 큰모임을 열고 41조로 길게 되어 있는 회칙을 13조로 간략히 고쳤다. 160조에 달하는 세칙도 모임생활에 도움이 되게 만들었다.
16기부터 25기까지 활동은 학술토론 한글나무 큰잔치는 꾸준히 이어왔다.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기별 활동은 생략한다.
[마] 맺는 말
든든한 나라의 보내 한글세대인 한겨레한글나무고등학생모임이 25년간 한글사랑 나라사랑의 큰 빛을 남겼다. 25년간 지도교사로 활동했던 큰 보람을 느낀다. 한글학회 새 건물 건립기금 모금운동에 고등학생들 동문들 지도교사 합하여 약 3만원 헌금하여 한글회관이 친정처럼 아늑해 보인다. 언제나 사용할 권리가 있다. 우리 한겨레한글나무고등학생 출신이 500명 정도 되리라 추산된다. 교육계, 은행가, 연예계, 출판계, 개인사업 등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기대했던 초대회장 강태성 군의 젊은 죽음이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그 뒤에도 한백섭, 한창석, 정한힘<작가 정을병님 아들> 등의 한글나무 제자들의 죽음이 나를 마냥 슬프게 하고 있다. 한겨레한글나무고등학생모임을 적극 후원해 주신 한글학회, 외솔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감사드린다. 아이엠에프 수난으로 중단된 한겨레한글나무고등학생모임이 다시 부활하여 우리 자랑스런 한글세대 고등학생들이 세종정신, 외솔정신을 가다듬고 국어운동, 국어공부를 통해 나라의 나아가 세계의 큰 아람드리 나무 한글나무가 되길 기도해 마지 않는다.
부록
시. 한글나무 잘 가꾸자 오동춘
시. 벌이 쏘는 것보다 더한 아픔이 임문혁
나는 왜 이름을 바꾸었나 김슬옹
한글새싹 1988.9.3.
안내문: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
우리는 한글겨레 한글날을 국경일로 합시다
544돌 한글날을 맞아 한글세대들의 주장: 한겨레한글나무고등학생모임
한겨레한글나무고등학생모임 회칙, 세칙
한글나무 총동문회 회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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