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 : 1 - 7절
“집사를 세운 결과”
유대인들의 전통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구제 사업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매주 금요일이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열 네 끼에 해당하는 음식 값을 주었습니다. 원래는 칠일 동안 세 끼 씩을 먹으면 스물 한 끼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구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하루에 두 끼 씩 먹을 수 있게 총 열 네 끼의 식사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이런 구제 말고 두 번째 구제의 방법은 방랑자들을 위해서 식사 배식을 하는 구제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돈을 줘서 구제를 하고 방랑자들에게는 식사를 대접해서 구제를 하는 두 가지 종류의 구제 사업을 전통적으로 했었던 것입니다.
1절에 보면 ‘구제’라는 단어가 등장을 하고 있는데 1절에서 언급을 하고 있는 구제는 앞에서 말씀드린 두 종류의 구제와는 다른 구제였다고 보면 됩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구제는 사실 매일 할 수 있는 구제의 형태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매일의 구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해 왔던 구제와는 다른 성질의 구제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다른 구제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미쳤다고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구제를 하겠습니까? 유대교에 있다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을 하고 기독교인이 된 순간 더 이상 유대의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구제의 혜택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기독교인들 중에 가난한 사람들을 따로 불러서 매일 구제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렇게 구제 사업을 하다 보니까 파벌 아닌 파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눠졌었는데 한 종류는 히브리파 사람들이었고, 또 한 종류는 헬라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쉽게 설명을 하면 국내파와 해외파였다고 보면 됩니다. 해외파 같은 경우는 그 당시 공통어였던 헬라어에는 능통한 반면에 국내파 사람들이 주로 사용을 하고 있던 아람어에는 서투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던 집사라는 직분을 만들어서 집사 일곱 명을 세우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는 집사라는 단어가 안 나오지만 사도행전 21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집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고 하는데 원래의 뜻은 ‘섬기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직분 중에 아직까지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직분이 집사입니다. 아직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집사 직분과 권사 직분이 거의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를 통틀어서 봐도 그런 흐름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추세이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사람들이 집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뜻 그대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면 기독교가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교회에서 섬김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고상한 단어가 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우습게보면 안 되는 것이 섬기라고 세운 집사님들 때문에 그렇게 혼란스럽던 예루살렘 교회가 순식간에 정리가 되면서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지 보세요. 7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1,2년 정도가 흘렀다고 볼 수 있는데 섬김의 일꾼을 세워 교회 안에 나타났던 위기를 잘 정리를 했더니 오히려 기회가 되어서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심지어는 제사장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적대적인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인데 집사님들이 얼마나 그 직분을 따라 잘 섬겼는지 그런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한 번 설교로 5천 명, 3천 명이 기독교인들이 되었다는 기록들을 앞에 있는 말씀을 통해 봤는데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이렇게 해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대략 2만 명에서 2만 5천 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섬김을 통해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017년 12월 10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BMW 댈러스 마라톤 대회가 있었습니다. 여성부 1위로 달리고 있던 뉴욕 정신과 의사인 첸들러 셀프가 결승선을 고작 183m를 남기고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리가 완전히 풀린 첸들러 셀프는 더는 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던 2위 주자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2위 주자인 17세 고교생 아리아나 루터먼은 1위로 달리던 사람을 부축하고 함께 뛰기 시작했습니다. 의식을 잃을 것 같은 첸들러 셀프에게 아리아나 루터먼은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결승선이 바로 저기 눈앞에 있어요.'라고 끊임없이 응원하며 함께 달렸습니다. 그리고 결승선 앞에서 그녀의 등을 밀어주어 우승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날 첸들러 셀프는 2시간 53분 57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지만 오히려 2위인 아리아나 루터먼에게 더 큰 환호와 찬사가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아리나아 루터먼은 어린 나이인 12살 때부터 댈러스의 집 없는 사람을 위한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도왔다고 합니다. 어쩌다 한 번 섬김의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섬김이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런 섬김을 꿈꾸고 교훈을 삼아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원칙 중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섬김의 원칙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6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가면 누가 큰 사람이 되냐면 섬김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기준이나 가치와는 정반대라서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실천할 수 없는 원칙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원칙이 가감 없이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1인 1전화기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편하게 사용하고 있는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출신의 안토니오 무치라는 사림이 벨보다 16년 앞서 전화기를 선보였기 때문에 벨이 처음으로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미국 대통령은 벨의 전화기를 보곤 “세상에 누가 이렇게 쓸데없는 물건을 사용하겠냐?”고 농담까지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은 존경받는 '전화기 발명가'가 되어 존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전화기를 발명하게 된 동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벨은 자신이 발명한 전화기로 많은 돈을 벌 목적이 아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느냐에 의미를 두었던 사람입니다. 특히 농아학교에서 발성법을 지도하면서 청각장애인 학생들이 꼭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벨은 전화기를 발명했던 것입니다. 벨의 이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헬렌 켈러는 자신의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를 벨에게 헌사하며 그를 향한 존경심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농아들에게 말을 가르치고 대서양에서 로키산맥까지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해 주신 분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1922년 8월 2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미국의 1천4백만 전화 가입자는 1분 동안 통화를 중단하고 그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벨처럼 이런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이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영광으로 그치지를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왕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문지기가 더 낫다고 할 정도인데 얼마나 큰 영광을 얻게 될지 쉽게 상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은혜와 영광은 그곳에 가서 확인을 하기로 하고 중요한 것은 섬김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낳느냐는 것입니다. 7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졌다는 것인데 정확하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성경 일독을 하고 암송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워진 집사들의 섬김에 불이 붙어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말씀에 순종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제자의 숫자가 더 심하게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고 유대교의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던 제사장들조차도 복음을 듣고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섬기는 일꾼들이 세워졌을 때 당연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고, 내부적으로 봐도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차별이나 분란이 일어나지 않고 모든 문제들이 해결이 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을 쓰게 된 것이고 집사들은 공평하게 구제 사업을 하는 섬김의 모습을 보여서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 곳이고 사랑이 풍성한 곳인지를 만방에 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올린 글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매우 추운 날이었습니다. 어찌나 추웠는지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데 손발에 감각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종종걸음을 하며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린 남자아이와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 한 분이 전철 계단 손잡이를 잡고서 계단을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별생각 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앞장서 올라오는 그 아이가 할아버지의 손이 닿을 계단 손잡이를 열심히 손으로 문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또래의 아이들처럼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데 장난치고는 아이의 표정과 몸짓이 너무 진지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천천히 그 아이의 행동을 살펴보니 아이는 할아버지가 잡을 계단 손잡이를 따뜻한 자신의 체온으로 녹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순간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섬김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섬김에 대해서 대단한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위해 손잡이를 문지르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런 작은 섬김도 누군가에게는 가슴 벅찬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사 감동을 받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100% 감동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고 직분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섬김이 습관이 되고 인품이 되도록 늘 노력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왕성해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꾼들이 많아진다는 것인데 그러면 교회는 건강해질 수밖에 없고 그런 건강함이 외부에 표출이 되어서 제자가 심히 많아지고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특별히 섬김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며 그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