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밑으로 여동생 둘이 있고 막내가 남동생이다. 손위론 누이 셋이 있다. 오 녀 이남 중 내 위치는 딱 가운데다. 내 위로 형 한 사람 있으면 위아래로 남녀가 골고루 있었으련만 아쉽게도 형이 없다. 칠 남매를 기르신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짐작도 안 간다. 요사인 자녀를 처음부터 아예 낳지 않고 사는 부부들도 많다는데 그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자녀 시대였다. 오죽하면 국가에서 산하제한을 했겠는가. 사실 그때는 요즘처럼 임신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이가 생기면 유산되지 않는 한 모두 낳았다. 낳았으니 길러야 했고 가르쳐야 했다.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다자녀가 복이 아니라 끔찍한 고통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다행히 무사무탈 하게 잘 커서 제 앞가림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자녀가 저주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잘 살고 못살고는 둘째치고 화목한 가정이 최고가 아닐까 싶다.
집에서 걸어서 한 이십 분 거리에 여동생과 같은 반 여학생이 살았다. 교회 학생예배에서 그 애를 처음 보고 난 그만 가슴앓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론 절대로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침 내가 학생부 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 오해라도 불러일으키면 학생부 전체에 좋을 게 없었다. 우린 평범한 동네 오빠와 동생 사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7개 부락 중 우리 동네가 6반에 속하는 데 그 애는 5반에 살았다. 7개 부락에 살고 있는 나의 동창생 남자들이 무려 25명이나 된다. 나머지 여학생까지 합치면 한 마을에 동창생이 총 30 명이 넘는다. 그중에 몇몇 동창생 남자들이 말썽을 피웠다. 소년원에도 몇 번 다녀올 정도로 부모님 속을 꽤나 썩게 했다. 철없던 한때의 치기였겠지만 순진했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불량청소년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참 이해가 안 갔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백팔십도 다른 존재로 바뀔까 궁금하였다. 한 가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말썽을 일으키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읍내에 있는 태권도장을 다니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태권도는 무술을 배우는 곳이기 이전에 예절을 숭상하는 법을 먼저 가르치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운동을 통해 자신을 지키고 신체를 단련하기 위함보단 남들 앞에서 허세 부리고 발차기 같은 잔재주를 배워 속된 말로 쌈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게다가 같은 부류끼리 어울리면서 본의 아니게 악한 성격으로 변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었다.
학생 예배는 매주 토요일 저녁 일곱 시에 시작했다. 일부는 공적 예배를 드렸고 이부 순서는 학생회 자체 활동으로 진행되었다. 생일을 맞은 친구가 있으면 그를 위해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말이 생일파티지 백 원 이백 원씩 한 푼 두 푼 모은 학생회비로 장만한 것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케이크 대신 초코파이를 여러 개 쌓아놓고 초 대신 성냥을 사용했다. 거기다 과자 몇 봉지와 사이다나 콜라 한두 병이 전부였다. 등을 모두 소등한 채 우린 빙 둘러앉아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성냥에 붙은 불을 끄면 손뼉 치며 축하해 주었다. 전등을 밝히고 접시에 담아놓은 과자를 나누어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생각은 일도 없었다.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마냥 즐거웠다. 학생부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전도사님이 가져다준 도서들을 뒤적여서 할 만한 것들을 골라 적용하였다.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하면서도 우린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공동체로 조금씩 성장해 나갔다. 그중에서 해마다 십이월이 오면 성탄 전야제를 학생부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십이월 초부터 우린 매일 저녁마다 교회에 모여 성극을 연습하고 크리스마스 노래에 맞춰 어린 유치부 아이들과 함께 율동을 준비하였다. 벽면엔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소품들을 만들어 붙였다. 솜씨 좋은 남학생 두어 명에게 산에 올라가 크리스마스트리에 쓸 나무를 베어 오게 하였다. 전나무가 제일 좋지만 그런 나무는 귀해서 대신 노간주나무 중에서 모양이 좋은 것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 일은 내가 앞장섰다. 어려서부터 나무와 꽃을 가꾸는 걸 좋아해서 어느 산에 가면 그런 나무가 있을지 나보다 잘 아는 학생은 없었다. 그렇게 준비해 온 트리는 여학생들이 예쁘게 장식을 하였다. 교회에서 지원해 준 돈으로 오색등을 구입해 트리와 교회 입구를 장식했다. 날은 점점 추워졌다. 난로에선 장작이 타닥타닥 소릴 내며 훈훈한 실내 온도를 유지해 주었다. 우리들은 난로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성극 대본을 외웠다. 극 중에 가장 많은 대사를 하는 인물은 대개 마리아와 동방박사였다. 특히 마리아는 뱃속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아기 예수님을 표현해기 위해 배를 불룩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성모 마리아 역할은 여동생 친구가 맡았다. 또박또박 대사를 외우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어느 때보다 그윽했다. 그녀는 모른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늦은 밤 교회 문을 닫고 각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교회에서 가까운 친구들은 집으로 달려갔다. 교회에서 먼 친구들은 함께 모여서 각자의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가로등이 없던 시절이라 손전등을 비추지 않으면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깜깜하였다. 한참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이 들렸다. 학생들은 깜짝 놀라 하나로 똘똘 뭉쳐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래서 뒤쪽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더니 그곳에 건달처럼 동창생 두어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일부러 큰 소리로 거기 아무개냐 이 밤중에 어딜 가냐고 물었다. 그제야 동창생 녀석은 일이 탈로난 줄 알고 아무 것도 아니라며 엉거주춤 멈추어 선다. 내가 있는 한 지들이 함부로 애들을 괴롭힐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노리는 건 오직 한 가지다. 어떻게 하면 여자애를 꼬셔볼까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철없는 것들이 무슨 행패를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일 때문에 예배 후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서야 난 집으로 혼자서 돌아가곤 하였다. 학생회장이란 책임이 그만큼 막중했다. 여학생들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야 함은 물론이고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해결해 주어야 했다.
성탄 이브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교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누가 교회에 남아 있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다들 집에 갈 생각을 아니한다. 내일은 전교인이 한 자리에 모여 성탄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서 준비한 떡국을 먹는다. 이후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올해의 성탄절도 아주 끝난다. 지난 한 달 동안 밤마다 교회에 모여 성탄 전야제를 준비하며 웃고 떠들었던 일들이 어느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엔 뭔가 아쉬웠던 우리들은 교회 지하실로 내려갔다. 말이 지하실이지 하나의 대피소 역할을 하는 장소로 작은 방 정도의 크기였다. 지하실은 교회 한가운데 밑에 있다. 내려가는 별도의 계단은 없고 수직으로 매달린 나무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모두가 지하로 내려가면 마지막으로 들어온 친구가 마루판에 연결된 뚜껑을 덮었다. 난방시설이 전혀 없는 지하실은 춥고 어디선가 곰팡이 냄새가 났다. 장판은 눅눅한 습기로 늘 축축했다. 방석이란 방석은 모두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등이 닿는 벽면에도 방석을 빙 둘러 세워놓았다. 거기에 등을 기대고 가운데에 담요를 깔았다. 우린 담요 밑으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이겨냈다. 아니 추워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 용케도 과자를 챙겨 왔다. 행사 때 쓰고 남은 것을 가져온 것이다. 누가 먼저 무엇을 하자고 제안하기 전까지 모두는 그저 웃고 떠들어 댔다. 이럴 때 꼭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무서운 얘기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다. 어디 책에서 읽었거나 누구의 입담을 통해 주워 들었든지 한 사람씩 돌아가며 무조건 이야길 해야 했다. 이야기가 깊어지면서 우린 점점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왠지 등골이 서늘하게 느껴져서다. 얼굴과 팔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쯤 “꽥” 하고 소릴 지르면 우린 모두 극심한 공포감에 휩싸여 “엄마야”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이때 누군가 전등을 껐다. 학생들은 깜깜절벽 속에서 아우성이다. 빨리 스위치를 올리라고 소릴 질러 대며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모두가 돌아갈 시간이다. 나는 또 학생들의 보디가드로 나서야 했다. 내일이 성탄인 데 오라는 눈은 오지 않고 하늘엔 별이 총총 떠있다. 하나 둘 학생들을 보내고 그 애와 나 둘만 남아 밤길을 저벅저벅 걸었다. 우린 아무 말이 없다. 뿌옇게 보이는 길을 더듬으며 그 애가 사는 집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우린 걸어가면서 서로의 어깨를 살짝 부딪히기도 했고 손끝이 닿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느껴졌다. ‘나 말이야 사실은 너 좋아하고 있어’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그녀의 집 앞이다. “오빠 고마워요 오늘 수고했어요 조심히 가요” “응 그래 너도 수고했어” 그녀는 얄밉게도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동네에서 동생 벌 되는 친구를 불렀다. 이 친구는 동창생 남동생인데 동창과는 별로 안 친한데 그 친구 동생과 평소에 거의 붙어 지내다시피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달빛이 푸르도록 환한 밤중에 그 녀석을 앞세워 난 그녀의 집을 찾아가고 있다. 내 품 속엔 그녀를 향한 나의 고백을 쓴 편지가 들어있다. 손엔 그녀에게 줄 작은 액자 선물을 들고서, 나 혼자는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동생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함께 그 애의 집까지 가달라고 부탁을 해두었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 밤이다. 하늘엔 둥근달이 떴다. 아마 보름달 이쪽저쪽이었던 것 같다. 혹한의 겨울밤이었지만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은 결코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춥기는커녕 내 가슴속에선 뜨거운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세상 태어나서 오늘처럼 가슴이 뛰고 뜨거워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매형이 자전거를 사준 날 보다 더 마음이 설레었고 두근거렸다. 이게 사랑일까 이게 정말 사랑일까. 난 솔직히 그런 거 몰랐다. 그냥 좋았을 뿐이지 다른 어떤 건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무엇을 하든 그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밥을 먹는 순간에도 잠을 자는 중에도 공부를 하는 시간에도 신성한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난 오직 그녀 생각으로 숨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이런 내 마음을 눈곱만큼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오늘 밤 드디어 그녀에게 고백편지를 건네주려 한다. 드디어 그녀의 집 앞에 당도하였다. 난 멀찌감치 물러나서 동행한 동생에게 그녀를 잠시 불러내라고 하였다. 심장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고백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다시 집으로 달아날까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사내자식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할 것 아냐. 그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난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빠가 이 밤중에 웬일이세요.” 난 아무 말 못 하고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포장지로 싼 선물을 건네주었다. “집에 들어가서 뜯어봐 그럼 ”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자꾸만 킬킬댔다.
다음 날 여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소리소리 지르며 나에게 따지듯 말하였다.
“아이고 오빠 때문에 동네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어.” 드디어 터질게 터졌구나. 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여동생에게 한 마디 대구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였다. 말인즉 쉬는 시간에 그녀가 내가 전달한 편지를 자기네 반 여학생들에게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그토록 좋아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껴져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아니면 어린 마음에 치기 어린 생각으로 그렇게 누설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우 고등학교 이 학년 남학생과 중학교 삼 학년 여학생 사이에 벌어진 썸 타는 이야기다. 아직 철부지 어린애들인데 알면 얼마를 알았고 느끼면 또 얼마나 느꼈을까. 그런데 그 일이 하나의 우스갯소리로 끝나버린 것이다. 통탄할 노릇 아닌가. 나의 짝사랑은 그렇게 불같이 타오르다가 어이없게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사회 초년생 때 직장생활을 하다 잠시 고향에 들렀다. 마침 몸살이 났다.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읍내 병원을 찾았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간호사와 함께 그녀가 앉아있는 게 아닌가. 숙녀가 다 된 그녀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진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예쁘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었지만 이전처럼 그녀가 내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그녀 역시 나를 보고 겸연쩍은 얼굴로 인사를 하였다. 처방전을 들고 나오면서 그녀를 향해 살짝 목례를 하였다. 그것이 그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이가 들어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읍내에 사는 나의 중학교 동창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 읍내에서 돈 푼이나 있는 집안인데 그가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놈에게 시집을 갈게 뭐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녀석은 술독에 빠져 살다 결국 일찍 단명하고 말았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을지 무척 궁금하였지만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 여동생에게 물어보면 금방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좋은 사람 만나서 다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짝사랑은 흔히 말하듯 짝사랑 일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닭살 돋는 과거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나의 감정과 생각의 틀을 얼마나 아름답게 성장시켰는지 모른다. 인생 살면서 용기와 배짱을 부려야 할 때가 참 많다. 정말 자신이 그토록 원한다면 성공은 둘째치고 먼저 행동으로 옮길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의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도 난 당당하게 대시하였다. 내게 필요한 사람인 줄 알면서 그냥 세월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그때의 경험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