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하목정 창건주 낙포 이종문
프롤로그
전의이씨 예산공파 낙남조 이필은 아들 대에서는 외아들 참판공 이경두만 뒀고, 손자 대에 와서 일곱 명의 손자를 뒀다. 이 손자 대에서 전의이씨 예산공파는 크게 세 계열로 나뉜다. 장손인 낙포공 이종문계, 차손인 참봉공 이종택계 그리고 숙계손叔季孫인 이종무·이종효·이종언·이종도계다. 이중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열은 아무래도 장손인 낙포공 이종문계다. 이번에는 생원 신분으로 임란의병장을 지내고, 하목정을 창건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 조선 중기 대구 대표 선비 중 한 명인 낙포 이종문에 대해 알아보자.
생원生員 이종문
이종문李宗文[1566-1638]은 자字가 학가學可, 호는 낙포洛浦다. 1588년(선조 21) 23세 나이로 사마시[과거시험 중 소과]에 합격했으나, 문과[과거시험 중 대과]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재주를 아까워했던 한 시험관의 추천으로 그는 금화사별좌禁火司別坐를 시작으로 제용감 직장,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45세 때 삼가현령에 제수됐지만 부친상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1612년(광해군 4) 비안현감으로 부임해 임기를 마쳤고, 1617년(광해군 9) 양성현감, 1620년(광해군 12) 55세의 나이로 군위현감에 부임해 치적을 남겼다.
그는 두 명의 부인을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증숙부인贈淑夫人 옥산전씨로 지평을 지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의 딸로 수월당 이지영과 다포 이지화 형제를 낳았다. 전경창은 대구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퇴계 문하에서 수업한 인물로 대구 성리학 1세대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두 번째 부인은 증숙부인 전주이씨로 장령을 지낸 이령李笭의 딸로 부용당 이지발과 임하처사 이지시 형제를 낳았다.
이종문은 39세 때인 1604년(선조 37) 고향인 하산 낙동강가에 하목당을 세웠다. 그는 비록 문과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비안현감·양성현감·군위현감 등을 지내고 이곳 하목정에서 여생을 보내다, 1638년(인조 16) 6월 15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하목정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석 달 후, 그의 아들 이지영·이지화 형제의 청으로 당시 사간원 사간으로 있던 동계東溪 권도權濤가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그 내용 중에 나오는 인물평과 명銘 부분을 소개하면 이렇다.
○ 공은 성품이 자상하고 온순하고 조심성이 많아 다른 사람과 경쟁하거나 구차스레 영합하지 않았으며, 또한 남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집안에 있을 때엔 정의情意가 돈독하여 자연스럽게 어긋남이 없었다. 대개 올바로 등용되어 재능을 세상을 위해 다 쓰지 못하고 집안에서 머물렀던 것이 애석하다.
○ 생각하니 태사께서 덕망이 있고 훈업勳業이 있으셨네 / 침체되지 않고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 이어왔네 / 공의 대에 이르러 능히 집안의 명성을 이었네 / 약관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끝내 멀리 날지 못하였네 / 말로末路의 때를 만나 벼슬이 재주를 따르지 못하였네 / 덕을 후손에게 넉넉히 남기어 두 아들이 벼슬길에 있고 평생을 유유자적 하셨네 / 고종考終하여 온전히 돌아가셨으니 오복 중의 하나일세 / 사는 고을은 하빈이요, 지명은 기곡이라네 / 남쪽으로 향한 언덕에 공의 무덤이 있나니 후세 사람들이여! / 훼손하지 말고 상하게 하지 말지어다.
임란 의병장 이종문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이종문의 나이 2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총을 앞세운 왜적의 총칼 앞에 조선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부산에서 출발한 왜적이 한양을 함락시키는데 불과 20일밖에 걸리지 않았을까. 조선 관군은 ‘무전유패無戰有敗’였다. 고을 수령은 물론 전투를 해야 하는 장수와 병졸까지도 무기를 내던지고 하나 같이 도망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의주로 몽진해 전황을 살펴보던 선조 임금, 참다못해(?) 교서 하나를 작성해 영남 땅으로 내려 보냈다. 의병이 일어나기를 독려하는 교서였다.
··· 지금 영남의 고을과 군대가 계속 왜적에게 함락되는 것은 한 도의 병력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변란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백성들이 달아나고 무너져 와해되었다. 하지만 백성들이 어찌 본심으로 왜적에게 투항하고 복종하려 했겠는가! 만일 그들을 하나하나 깨우쳐주고, 또 선비들이 충의로써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하고,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관군과 협동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오히려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선조의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 있었다. 우리 달성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일 만인 4월 22일[20일설, 24일설, 27일설 등도 있다] 고향인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 장군의 지인과 노비 등 약 50명으로 조직된 이 의병이 임진왜란 조선 최초 의병이었다.
선조의 교서를 접한 대구 선비들은 1592년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모임을 갖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른바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이라 칭하는 대구권 의병이었다. 공산의진군은 대구를 크게 ‘읍내·수성·해안·하빈’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면이나 리 단위로 작게 나눠 진영을 갖췄다. 의병창의 당시 총대장은 낙재 서사원, 공사원[참모]은 태암 이주가 맡았다. 읍내는 6명의 ‘리장里將’을 두었고, 3개현에는 각각 1명씩의 ‘현장縣將’을 두고 그 아래에 면·리·촌장을 두었다. 당시 수성현 대장은 모당 손처눌, 해안현 대장은 괴헌 곽재겸, 하빈현 대장 겸 서면장은 당시 나이 27세였던 낙포 이종문이 맡았다.
이중 지금의 하빈면과 겹치는 지역은 하빈현이다. 조선시대 하빈현은 지금의 달성군 다사읍·하빈면, 달서구 성서, 고령군 다산면 일부를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당시 하빈현 의병장을 살펴보면 하빈현 대장 겸 서면장은 하산 출신 이종문, 남면장은 임하 정사철 선생의 아들인 낙애 정광천, 동면장은 홍한, 북면장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의 5세손인 묘골 출신 박충윤이었다.
하빈현 의병장 이종문의 활략은 초유사招諭使[난리가 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 학봉 김성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때의 공으로 이종문은 임란원종공신에 오르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증직됐다.
삼부자三父子 의병창의
임란 때 27세의 나이로 하빈현 의병대장 겸 서면장을 지낸 낙포 이종문. 사실 그의 집은 남다른 이력이 있었다. 아버지 이경두, 동생 이종택 그리고 자신, 삼부자가 모두 임란 때 의병창의 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병절교위 용양위 좌부장을 지낸 아버지 참판공 이경두李慶斗[1541-1610]는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증직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올랐다는 기록이 대구여지승람, 성주읍지 등에 실려 있다. 동생 이종택李宗澤[1570-1599] 역시 임란 때 곽망우당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한 공을 인정받아 ‘장사랑 예빈시 참봉’에 제수된 인물로 의병 창의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그런데 참봉공 이종택은 임진왜란 때 가슴 아픈 가정사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인 의인宜人 순천박씨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아직 출가하지 않은 친정집 여동생과 함께 낙동강으로 몸을 던져 순절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순천박씨 부인에게는 열부 정려가 내렸고, 하산 옆 마을인 묘골에는 지금도 ‘박씨부인 순절묘’라 불리는 자매 묘가 남아 있다. 순천박씨 자매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다룰 기회가 있으니 그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에필로그
1592년 7월 창의한 공산의진군 각 지역 의병장의 나이는 서사원이 43세, 손처눌이 40세, 곽재겸이 46세였다. 이에 비해 이종문은 약관의 나이를 조금 지난 27세에 불과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그로서는 문과 준비에 한창이었을 나이다. 하지만 그는 투필종군投筆從軍 했다. 나라가 어려우니 잠시 붓을 놓고 칼을 들기로 한 것이다. 우리 지역 출신 임란의병장으로 이름난 월곡 우배선 장군도 이종문처럼 백면서생白面書生 신분으로 붓을 던지고 칼을 잡았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