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제 곧 겨울이다. 여성들에게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을 막기 위한 필수 아이템으로는 흔히 롱코트, 글러브, 머플러, 부츠 등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요즘은 좀 상황이 다른 듯하다. 코앞에 다가온 이번 겨울에 여성들에게 가장 트렌디한 F/W (가을, 겨울 시즌)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한여름에나 입을 법한 ‘숏 팬츠’(shorts), 반바지인걸 보면 말이다.
두꺼운 옷을 여러 장 겹쳐 입어도 추운 한 겨울에 반바지가 웬 말이냐고 되물으신다면 당신은 이미 트렌드에 한 걸음 뒤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한겨울에도 많은 멋쟁이 여성들이 갖가지 장치를 동원해서 반바지를 고수하고자 하는 속내는 과연 무엇일까?
유행을 선도하는 한국의 압구정, 홍대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모여 사는 LA는 일년 내내 따뜻하다. 패리스 힐튼, 린제이 로한, 시에나 밀러, 키얼스틴 던스트 등의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파파라치 컷(스타들의 연출되지 않은 실제 모습을 찍은 사진)에는 언제나 한여름의 자유로움과 섹시함이 넘친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들 스타들의 패션 경향은 ‘리얼 타임’으로 한국에 들어온다. 한국의 트렌드 세터(trend setter·유행을 만들고 리드하는 사람)들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파파라치 컷을 연상시키는 반바지 룩을 날씨와 상관없이 선보인다. 여기에 카페나 클럽 등의 난방시설이 훌륭해진 점과 겨울에도 이상 고온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기상 이변 또한 겨울철 여성들이 망설임 없이 짧고 노출이 많은 아이템을 입도록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여름 패션인 숏 팬츠가 시즌에 관계없이 사랑 받는 아이템으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명품 브랜드들의 ‘크루즈 라인(cruise line)’의 사업 확장과도 관련이 있다. ‘크루즈 라인’이란 한겨울에 추위를 피해 계절이 반대인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 유람선이나 요트 등 선상여행을 즐기는 ‘젯 셋(jet set·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상류층)족’ 들을 위한 아이템들을 가리킨다. 가장 대표적인 가로로 줄무늬가 들어간 마린 티셔츠나 하늘하늘 거리는 원피스 등 리조트 웨어의 개념에서부터 여행을 가서 즐기는 골프, 테니스 등 스포츠를 위한 스포츠 웨어 등이 있다. 이런 의류들은 겨울과 봄 사이인 간절기에 선보이게 되는데, 해가 갈수록 그 반응과 수요가 증가하고 있으며 여성 패션의 전체 판도까지 바꿔 놓을 태세다.
추운 겨울로 진입 하기 전 마이클 코어스, 샤넬, 발리 등의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에서는 앞다투어 이러한 ‘크루즈 라인’을 선보인다.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에 반대 계절인 여름옷을 한 매장 안에 선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크루즈 라인’은 다소 칙칙한 겨울 아이템들 사이에서 매장을 더욱 활기차고 환하게 만들어주는 감초 역할을 하면서 소비자들의 소비 욕구를 부추긴다.
‘크루즈 라인’은 처음에는 그야말로 겨울에 크루즈 여행을 즐기는 소수의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아이템이었다. 추운 겨울에 일상복으로 입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구 온난화와 할리우드 스타들의 일년 내내 계속되는 여름철 스타일링 영향으로 또 다른 트렌드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명품 브랜드가 아닌 중·저가의 메이커들도 그 수요를 짚어내게 됐고, 한겨울에도 따뜻하게 입을 수 있도록 울이나 니트 등 다양한 디자인과 소재의 반바지를 선보였다. 다른 패션 소품의 등장도 반바지 패션의 확산에 힘을 더했다. 레깅스와 부츠 등이 인기를 얻으면서 한 겨울에도 반바지를 세련되고도 따뜻하게 입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올 겨울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타이츠나 레깅스에 반바지를 입고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다니는 여성들을 길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번 시즌은 마이크로 미니 숏 팬츠가 유행했던 지난 시즌보다 하이 웨이스트(허리선이 보통보다 더 높이 올라오는) 라인의 숏 팬츠가 많이 선보이고 있고, 길이도 무릎 정도에서부터 허벅지를 거의 드러낸 짧은 길이까지 다양한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명품 브랜드에서는 40만~50만원대로, 일반 브랜드에서는 10만~20만원대의 다양한 숏 팬츠들을 내놓고 있다.
세계적인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컬렉션의 무대에서도 S/S(spring·summer)와 F/W(fall· winter)의 차이점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수영복이나 모피처럼 계절감을 확연히 규정하는 아이템이 등장해야만 그것이 어느 시즌의 컬렉션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패션에서의 계절의 경계는 무너진 상태이다. 옷을 사고 또 사도 다음 날이면 입을 옷이 없어 고민에 빠지는 여성들에게 이러한 패션계의 흐름은 ‘살짝’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겠다. 그만큼 계절에 상관없이 코디네이션에 이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옷장이 좀 더 다양한 조합의 구색을 갖출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번 겨울엔 계절감을 잃어버리고 과감한 패션의 선봉에 서려는 여성들이 분명히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꼭 해야 할 일 하나. 독감 예방 주사는 미리 맞아 두는 게 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