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춘(李椿)의 사후 형인 이자흥(李自興)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어린 조카인 이교주(李咬住)를 대신하여 원나라의 천호(千戶)를 세습받아 재직하였고, 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세력(附元勢力)인 이복동생의 외척, 조씨(趙氏) 가문과의 대결에서 승리, 습직했으나, 그 후 원나라의 정책에 의하여 타격을 받게 됨에 따라 점차 원나라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이때 대륙에서 원, 명 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반원(反元) 정책을 추진하던 고려 공민왕은 동북면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연결되어 있는 친원사대파(親元事大派)인 기씨(奇氏)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자춘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이자춘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하여 1355년, 고려에 투항하여 소부윤(少府尹)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와 더불어 동북면을 협공하게 하여 쉽게 이 지역을 점령하여 원의 간섭기 이래 빼앗겼던 동북 영토를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이로써 그는 그동안 뿌리깊게 대립하였던 친원 세력인 조소생을 제거하였다.
또한 이때의 전공으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이 하사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동북면을 떠나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개경에 머무른 지 1년 만에 그가 동북면으로 돌아가려하자 그곳의 토착기반을 이용하여 고려의 조정을 배반할 것임을 들어 그의 동북면 귀환을 대신들이 반대하였으나 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하여 그는 다시 영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4년 뒤인 1361년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문하시중에 증직되었고 조선 건국 후 아들인 태조에 의해 환왕(桓王)으로 추존되었다가 손자인 태종 때 다시금 환조(桓祖)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으로 추존되었다. 능(陵)은 함경남도함흥시에 위치한 정릉(定陵)으로 아내인 의혜왕후(懿惠王后)의 화릉(和陵)도 같은 묘역에 위치해 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