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범물동(凡勿洞),
범이 내려오지 않기를 바란 마을
개관
범물동은 용지봉 북쪽 산자락 끝부분인 지금의 범물2동행정복지센터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한 마을이다. 범물동은 대구시가 지금처럼 팽창하기 전에는 아주 깊은 산골 마을로 논농사를 중심으로 생활한 오지 마을이었다. 1990년대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에 의해 지산동과 함께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급성장했다. 농업이 중심이었던 시기에는 댕대이못, 대덕지 등이 있었으나, 2000년경 댕대이못은 메워져 대구도시철도3호선 범물차량기지가 들어섰고 대덕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당고개를 통해 경산과 왕래했으나 지금은 범안로가 개설되어 경산, 반야월과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또한 앞산터널로를 통해 달서구 상인동과도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대구도시철도3호선의 종점으로 교통 요지 역할을 하고 있다.
범물동은 본래 대구부 수동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전리(泥田里)와 가동(佳洞)을 합쳐 범물동이 되었고 달성군 수성면에 소속됐다. 1963년 대구시 동구 범물동이 됐다가, 1980년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이 됐다. 주요 공공건물로는 범물중학교, 범일중학교, 대구범물초등학교, 대구범일초등학교, 대구복명초등학교, 대구수성소방서, 용학도서관, 대구도시철도3호선 범물차량기지 등이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가락골, 진밭골 등이 있다. 이름난 지명으로는 매봉지, 범바우들겅이, 봉창바우, 용지봉 등이 있다. 보호수로는 수령 200년의 느티나무가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성주배씨지려비(星州裵氏之閭碑)가 있다.
지명 유래
범물동의 ‘범(凡)’ 자는 ‘예사롭다’ 또는 ‘평범하다’는 뜻이고, ‘물(勿)’ 자는 근심하는 모양 또는 금지의 뜻이다. 범물동에는 몇 가지 유래설이 있다. 옛날 이곳에 범이 많았고, 계곡 밑에 샘이 있어 범물동이라는 설, 인근 용지봉(633.8m)에서 내려다본 계곡 형태가 '범(凡)' 자를 닮아 범물이라는 설 등이다. 다른 설도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 전주 최씨, 인동 장씨가 이곳에 피난해 정착했다. 당시 마을 뒷산은 나무가 울창해 범이 살았는데, 범이 출몰해 가축을 물어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범’이 오지 말 것을 바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에 ‘없을 물(勿)’ 자를 써 범물이라고 했다는 설이다.100) 이 밖에도 마을 뒷산에서 범이 많이 울어 ‘범울이’ 또는 ‘범물리’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101) 실제로 이 마을에는 1970년대까지도 늑대가 출몰해 가축을 잡아먹는 일이 있어 밤에 다니기가 조심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범물동에 대해 “옛 수성현 수동면 범물리였으며 범물역이 있었다 함. 동 구역 개편 시 진밭골, 가랏골을 합하여 범물동이라 하였음. 옛날 뒷산에 범이 많이 나온다는 것으로 범물동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범물동은 나지막하게 흘러내린 산자락 끝 평탄한 곳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범(凡)은 여느 마을처럼 마을이 산자락 평탄한 곳에 위치했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물(勿)은 ‘그치다, 말다’의 훈인 ‘말’로써 마을의 줄임말이다. 따라서 범물동은 평범한 마을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00) 하종성, 『역사 속의 달구벌을 찾아서』, 삼일출판사, 2008. 191쪽.
101) 향토사교육연구회, 『대구역사기행』, 도서출판 나랏말, 1996, 36쪽.
가락골·가랫골
가락골은 대구도시철도3호선 용지역 남동쪽 진밭골에 있다. 약 4km에 이르는 진밭골 중간 지점으로 현재 진밭2교 남쪽이다. 과거 가락골에는 10호 규모 작은 마을이 있었다. 가락골에도 여러 지명유래가 전한다. 가락골은 깊숙한 골 사이에 있어 경치가 아름다웠다. 그래서 처음 마을 이름은 아름다울 가(佳), 골 곡(谷), '가곡(佳谷)'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가락골로 변했다고 한다.102) 또 골짜기 주변에 가래나무가 많아 ‘가랫골’로 불리다가 가락골이 됐다고도 한다.103) 다른 유래설로는 마을이 자리한 좁고 긴 골짜기가 마치 베틀에 사용되는 가락을 닮아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가락골의 가락이 엿가락, 가락국수 같이 가늘고 긴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을이 긴 골짜기 사이에 있어 가락골이라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가동(佳洞)’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1960년대 지도에는 ‘가랏골’로 표기되어 있다. 옛날에는 대덕지에서 진밭2교까지를 안골, 안골에서 진밭골 사이를 가락골이라 불렀다. 안골은 대부분 논이었고, 가락골은 논과 밭이 섞여 있었다.(‘진밭골’ 사진 참조)
102)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77쪽.
103) 지리연구소, 지명조사철, 1959.
당고개·당현(堂峴)
삼덕동과 범물동을 잇는 고개다. 지금은 범안대로가 개통되면서 고개는 없어졌다. 과거 이 고개에 성황당이 있었기 때문에 당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당고개 위치는 지금의 범안로 삼덕 TG와 범물차량기지 사이쯤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 삼덕동과 범물동을 잇는 당고개와 현 범물차량기지 자리에 있었던 옛 댕대이못도 보인다. 구라지와 당고개 사이에 당고개못이 있었으며, 이 골짜기를 당고개골로 불렀다. 당고개못 아래(북동쪽)는 논, 위쪽은 밭이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당고개는 옛날 대구, 경산 간 국도가 없을 때, 이 고개를 통하는 도로가 가장 주요 도로이고, 이 고개에 당나무가 있었으므로 당고개라고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댕대이못·매봉지·곶계지(串界池)·천계지
매봉지는 지금의 대구도시철도3호선 범물차량기지 자리에 있었던 못이다. 매 부리를 닮은 매봉 아래에 있는 못이란 뜻에서 매봉지라 불렸다. 매봉지는 다른 말로 ‘댕대이못’이라고도 불렀는데 못에 댕대이라는 수초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104) 1967년 지형도에 댕대이못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과거 지산동, 범물동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했던 중요한 수원지였던 댕대이못은 2000년 전후 매립되어 범물차량기지가 들어섰다. 옛 지도에는 ‘곶계지·천계지’로도 표기되어 있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곶계제는 수동에 있다. 둘레가 882척(267m)이고 수심이 6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댕대이못은 1927년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기존에 있던 못을 이 시기에 확장·개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104) 지리연구소, 지명조사철, 1959.
매봉
매봉은 대구도시철도3호선 용지역 동쪽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 뒷산이다. 산 모양이 매의 주둥이를 닮아 매봉이라 부른다. 매봉은 인근 지산동 지명유래의 주요 소재이기도 하다. 지산동의 본래 마을 이름은 치산동(雉山洞)이었다. 그런데 꿩은 매 앞에서 꼼짝하지 못한다고 해서 ‘꿩 치(雉)’를 ‘못 지(池)’로 바꾼 것이 지금의 지산동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산동 유래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범바우들겅이·봉창바우·샘바우·장군바위
용지봉 아래 급경사를 이루는 산줄기와 골짜기를 반대편에서 보면 여성이 누워있는 형상을 닮았다. 그래서 이 골짜기에는 좀 특별한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용지봉 정상에서 가까운 ‘범바우들겅이’란 계곡에 얽힌 전설이다. ‘범바우들겅이’는 ‘범바들게이’ 또는 ‘뱀다들거이’라고도 한다. 이 계곡 한가운데 여성의 음부를 닮은 곳이 있는데, 사람이 그곳을 만지면 산 아래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른 동네 사람이 이곳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른 하나는 용지봉 아래 여성의 자궁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넓은 바위 이야기다. 이 바위 주변에는 숲이 형성되어 있는데 숲이 무성한 해에는 아랫동네 여인들이 바람이 나지 않고, 숲이 무성하지 않으면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다.105) 이 바위는 성인 5-6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구멍이 뚫려 있어 ‘봉창바우’라고도 하고, 바위 옆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어 ‘샘바우’라고도 한다. 봉창바우 전설은 옛날 어느 장군이 머리를 박아 큰 구멍이 생겼다고도 하고, 장군이 쏜 화살을 맞은 자리가 구멍이 났다는 설도 있다. 장군이 쉬어 갔다고 해 ‘장군바위’라고도 한다.
105) 수성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수성구 문화유적 둘레길』, 2011, 169쪽.
성주배씨지려비(星州裵氏之閭碑)
성주배씨지려비(범물동 464)는 효부이자 열부(烈婦·절개가 곧은 여자)로 정려를 받은 성주 배씨 부인의 정려비(旌閭碑)다. 용지네거리 남쪽에 있는 범물어린이공원 남동쪽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에 있다. 성주 배씨 부인은 1764년(영조 40)에 태어나 1788년(정조 12)까지 24년간을 살다 세상을 떠난 효부이자, 열부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밀양 박씨 박후성(朴厚成)과 혼인했다. 어느 날 남편이 이름 모를 병으로 몸져누웠다. 그녀는 백방으로 의원과 탕약을 구해 남편을 치료했으나 남편의 병세는 악화되기만 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선혈로 남편의 원기를 잠시 회복시켰지만 남편은 끝내 죽고 말았다. 남편 사후에는 남편 뒤를 따르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팔순 노모를 봉양했다. 결국 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3년 시묘하고 그해 남편 제삿날 남편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지고, 세월이 흐른 1910년 후손들이 정려비를 세웠다.
성주배씨지려비 옆에는 마을 당산나무인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지정번호 6-6) 느티나무는 수령이 200년 된 고목으로 둘레 10.4m, 높이 20.15m로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2004년부터 매년 정월대보름날 수성문화원이 주최하고 마을 주민이 참여하는 범물동 당제(堂祭)를 지냈으나 2020년부터는 지내지 않고 있다.
용지봉(龍池峰)·용제봉(龍祭峯)
용지봉(633.8m)은 범물동 남쪽에 있는 산으로 범물동 주산(主山)이다.106) 1918년 지형도와 1967년 지형도에는 용제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제봉은 과거 대구부에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낸 기우산이다.107) 그러나 산이 높고 험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용지봉 대신 폐기된 법이산 봉수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용제봉이 용지봉이 된 것은 용지봉 아래에 있었던 지산동의 지(池)와 용제봉의 제(祭)가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에 용지봉으로 불린 것 같다. 범물동과 용지봉 사이 계곡을 용지봉골이라고 한다. 용지봉에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옛날 천지개벽으로 큰 홍수가 있었을 때, 용지봉 정상만 물에 잠기지 않았다. 이때 용 한 마리가 용지봉 정상에서 홍수를 피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이 봉우리 모습이 홍수를 피했던 용의 뿔을 닮았다고 용지봉이라 했다는 전설이다.
106) 풍수지리 등에서 묏자리나 집터 따위의 운수 기운이 매였다는 산.
107) 다무라 가즈하시, 조선향토지리의 실례 대구편, p64.
이전지(泥田池)·진밭못·골안못·동부수리지
이전지는 진밭골 동쪽 끝부분에 있는 작은 못이다. 긴 골짜기 안쪽에 있어 ‘골안못’, 진밭골에 있어 ‘진밭못’이라고도 한다. 1942년 준공된 저수지로 대덕산, 유건산, 병풍산 등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해발 고도 410m 정도 된다. 과거에는 농업용으로 활용했지만 지금은 산책로, 등산로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이전지에 대해 “골안못은 산과 산 사이에 못을 막았다 하여 골안못이라 부르며 4270년(1937) 왜정 시에 동부수리지로서 신설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밭골, 물밭
진밭골은 대구도시철도3호선 용지역 남동쪽에 있다. 대덕산(603.7m)과 용지봉(633.8m) 사이의 좁은 골짜기 남동쪽 끝에 자리한 산골 마을이다. 진밭골로 가는 약 4㎞ 길이의 골짜기에 난 길을 ‘진밭길’이라고 한다. 진밭길에는 골안못(이전지), 대덕지, 글쓴바위(걸친바위), 넙떡바위, 대룡폭포(대령수), 소룡폭포(반대수), 가락골108) 등이 있다.
진밭골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해 경주 최씨, 전주 최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주위 환경이 아름답고 공기와 물이 좋아 산책로로 인기가 많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10호 정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골짜기 남동쪽 끝에 자리한 마을에는 과거 진밭골 주민 자녀들이 다녔던 지산국민학교 범물분교(범물동 1118-1)가 있었는데, 1988년 폐교가 됐다. 폐교된 범물분교 자리에는 현재 수성구청소년수련원이 들어서 있으며, 주변에는 식당과 카페가 영업 중이다.
진밭 지명 유래설은 두 가지 정도가 전한다. 하나는 옛 대구부지에 기록된 이전동(泥田洞)이라는 동명과 관련있다. 예전 이곳에 큰 늪이 있어 마을 일대가 늘 질퍽해 논농사도 부적합하고 밭농사에도 마땅하지 않아 ‘수전(水田)’, 또는 ‘물밭’이라고 부르다가 ‘진밭’이 됐다는 설이다. 이와 관련해 ‘진전리(眞田里)’109)라는 지명도 보인다. 다른 하나는 ‘길다’의 지역 사투리인 ‘질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골이 길고 완만해서 붙은 지명이다. 참고로 옛말에 ‘밭’은 농경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산, 산자락 등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됐다. ‘긴 밭’이 음운 변화로 ‘진밭’으로 바뀌었고, 한자로는 ‘장전(長田)’으로 쓰였다.110) 지명조사철(1959)에는 진밭골에 대해 “이 골짜기에 습기가 많다(질다)는 뜻에서 진밭이 많았으므로 진밭골이라 불리며 이를 한자로 진전리(眞田里)로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108) 진밭골협동조합, 『진밭골숲길』, 27쪽.
109)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76쪽.
110) 권오현 등저,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 향토사교육연구회, 2002. 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