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御使) 박문수 墓에 얽힌 이야기
지금도 우리에게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은 옛날 얘기로 들었던 암행어사들의 활약상에 관한 이야기 일 것이다.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남원 동헌에서 진탕한 잔치와 여흥이 한창일 때 암행어사 출도야~!를 외치는 대목이 가장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행적을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어사 박문수 이다.
조선시대 지금으로부터 약250년 전 어사 박문수가 병천 지방에 머물고 있을 때 방문객 중에 유명한 지관이 있었다.
박문수는 지관에게 자기가 죽으면 묻힐 묘 자리 하나를 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지관은 며칠을 돌아다닌 후 천안 북면의 은석산 중턱에 장군대좌형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장군만 앉아 있을 뿐 병졸이 없는 명당이었다.
지관은 박문수에게 “은석산 중턱에 장군대좌형의 명당을 보아 두었는데 장군 밑에 병졸이 없는 것이 한 가지 흠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어사 박문수는 “그럼 어떤 비보책은 없는 것이오? ”하고 지관에게 물어 보았다.
지관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향(向) 앞 잘 보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들어 병졸 노릇을 하면 비보가 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해 주었다.
어사 박문수는 한참을 생각 하다가 “ 그럼 병천 땅에 시장을 개설하면 되겠구려 ? 하고 물어 보았다.
그 말을 들은 지관은 손뼉을 치며 “ 참 좋은 묘안 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박문수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묘에서 바라다 보이는 병천에 시장을 만들었다.
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자연히 장군의 병졸인 군사 역할을 했다.
어사 박문수가 죽은 뒤 은석산 중턱에 있는 장군 대좌형 명당에 음택을 만들어 묻히게 되였는데 그 후로 그 묘의 음덕을 받았는지 후손들이 발복하여 많은 재물을 모으고 높은 벼슬을 하였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 병천장이 비좁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시장을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자 고령 박씨문중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주재소로 몰려가서 사장을 옮기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농성을 벌였다.
병천장이 박문수의 장군대좌형 무덤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면 장군에게 병졸이 없어지는 꼴이 되여 후손들에게 이어지던 발복이 끊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문수의 후손들로 인하여 병천장은 지금까지 그대로 존속되고 있으며 박씨 문중도 계속하여 번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