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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방의 빛-하동기 박은경 선교사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은경
영화 映画
日本語 http://cafe.daum.net/mylucia/CcjI/132?docid=3303880956&q=%C0%CF%BA%BB%BD%AE%B5%E9%B7%AF&re=1
위 주소를 누르시면 일본의 쉰드러 리스트 스기하라 치우네의 영화나에 대한 더욱 자세한 소개를 볼수 있습니다.
일본어로 나오니까 일본어 공부에 도움~!
오늘 수요기도회후 성도들과 이야기하다가 들었어요.
생명의 여권을 만들어줬다고 했는데 무슨 내용인가 들었더니 나중에 인터넷 찾아보라고 이름을 가르쳐주더라구요.
일본역사와 일본어 공부에 도움이 되니 추천~!입니다^^
여기 저기 자료 찾으며 봤더니 역시 크리스쳔이었군요~!
할렐루야!
인물소개 人物紹介
스기하라 치우네 (杉原千畝)
1900년 1월 1일 생 - 1986년 7월 31일 사망
1900년 기후현에서 태어난 스기하라는 고교졸업 후 의사가 되길 바랬던 아버지의 희망을 뒤로 한 채 1918년에 와세다 대학의
영어과에 입학했다. 1919년에 일로(日露)협의학교(후 하얼빈 대학)에 입학한 스기하라는 11월에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외무성의 관비유학생으로 중국 하얼빈으로 가서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1920년 12월부터 1922년 3월까지 육군에서 복무했다.
1923년에 일로협의학교 러시아학 과정을 수료한 스기하라는 1924년에 외무성의 서기로 채용되어 하얼빈 대사관의 2등 통역관을 거쳐
1932년에 만주국 외교부 사무관이 되었다. 만주국 외교부에서 정무국의 러시아 과장 및 기획과장으로 소련과의 북만주 철도할양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일 당시 책임자가 되어 양도댓가로 당시 금액으로는 거액인 약 4억 5천만엔을 받아냈다.
만주국 재임시절 망명 백계 러시아여성인 클라우디아 아폴로노프와 1924년 결혼했지만 1935년에 만주국에서 퇴임하면서 이혼했다.
이 때 러시아 정교회의 세례를 받아 스기하라는 정교도로 개종했다. 그 후 14살 연하의 키쿠치 유키코(2008년 10월 8일 사망)과
재혼해 일본 외무성에 복귀한 스기하라는 1937년에 핀란드의 일본공사관에 부임했으며 1939년엔 리투아니아의 일본영사관 영사대리로
부임했다.
스기하라는 원래 희망했던 모스크바 대사관 부임으로 예정되었었지만 소련측이 스기하라의 부임을 거부해 입국자체도
거절당했기에 인근의 핀란드로 배치되었던 것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여름에 독일점령하의 폴란드에서
리투아니아로 도망해 온 수많은 유대인이 각국의 대사관 및 영사관을 찾아 비자를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반유대적 사상을 지닌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합병했기 때문에 각국에 존재한 리투아니아 대사관 및 영사관은 폐쇄되어
유대인 난민들은 업무를 지속했던 일본영사관에 찾아와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중남미에 위치한 네덜란드의 식민지 섬)로
통과비자를 내 달라고 밀어닥쳤다.
당시 <유대인에 대해서는 일반 외국인 입국처리규칙의 범위 내에서 공정히 처리한다>라는 규정이 있었지만 외무성에서는
<통과비자는 행선지 국가의 입국허가수속을 완료하고 여비 및 체제비의 상당액을 소유한 자에게만 허락한다>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스기하라는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자도 통과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일본정부는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생각해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실시하는 박해정책에 중립을 표명했지만 이를 무시할 순 없어
통과비자에 여비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유대인 난민에 대해 실시한 <외무성 유대인 난민취급 및 규칙>에 의거한
것으로 표면상으론 유대인 난민에게 공정한 중립입장을 표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자 발급자격이 사실상 맨 몸으로 도망쳐 온 유대인에게 주어지긴 어려운 것이었다. 유대인 난민들의 비자발급 요건이
매우 까다롭자 스기하라는 본국에 자격완화를 요청했지만 이는 허락되지 않았다. 1940년 7월 18일에 스기하라는 외무성에
긴급한 비자발급허가를 요청했는데 다음날 보내진 전보엔 <비자의 허가는 내각이 현재 개조중이라 발급할 수 없다>라는
회신만 왔다.
새로운 내각이 성립되자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에게 직접 인도적인 비자발급 요청을 재건의한 스기하라는 7월 23일에 오히려
친독파였던 마쓰오카의 <모든 유럽대사관 및 영사관은 난민에게 비자발급을 허가하지 않는다>라는 통고를 들어야 했다.
이것은 사실상 스기하라에 대한 최후통첩이었다. 이 때 수련에선 리투아니아 합병과 더불어 일본영사관의 폐쇄통고도 와 있었다.
이러한 정부방침과 소련의 압력을 등에 지고 1940년 7월 25일에 스기하라는 일본을 경유하는 통과비자를 유대인들에게 무조건으로
발행해 주기로 결심했다. 소련정부와 본국에서 재삼 퇴거명령을 받았지만 스기하라와 아내 유키코는 베를린으로 이동하기 전인
9월 5일까지 비자발급을 계속했다. 이 때 발행된 비자숫자가 번호가 매겨진 것만 2,139장이었으며 또 일본영사관의 폐쇄일이 다가오자
작업속도를 빨리 하기위해 도중에 번호기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기록된 비자 숫자외에도 수천 장의 비자와 도항증명서가 발급되었다고도 한다. 또 한 가족당 1장의 비자만 있으면
충분했기에 가족을 포함한 적어도 6,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안전하게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다. 한편 스기하라 자신은
<리투아니아 인 및 폴란드인에게 발급한 통과비자는 2,132건으로, 그 중 유대인에게만 약 1,500건이라 추정된다>라고 외무성에게
보고했다.
비자에 붙이는 인지도 다 떨어지자 스기하라는 직권을 이용해 <긴급발행비자는 요건을 간소화한다>라는 명목으로 무마해
소련에 의해 퇴거되기 전까지 많은 유대인들을 출국시켰다. 이 영사특별허가증에 의한 출국자는 많은 수로 추정되지만
발급기록이 남겨져 있지않아 정확한 숫자는 불명이다. 영사특별허가증의 발행은 그가 베를린으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에도 플랫폼에서 계속 이어졌다.
그 후 국외로 탈출한 유대인들은 시베리아 철도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하여 쓰루가 및 마이즈루 항구에 상륙해
유대계 러시아인의 커뮤니티 및 간사이 유대교단, 고베의 유대조직 등에 도착했다. 당시 양복점을 운영하던 세노 모리오(妹尾盛夫)는
그들에게 옷을 수선하는 선행을 베풀었지만 받아온 옷들이 땀과 먼지에 찌들어 악취가 심했다고 한다.
또 야스이 나카지(安井仲治)를 중심으로 한 탄페이(丹平) 사진구락부에서는 고베에 체재중이던 유대인들을 촬영해
<유랑민 유대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 중 약 1,000명 정도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갔고 나머지는 상하이로
송환되기 전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상하이 조계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큰 유대인 조직이 있어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1945년에 종전을 맞이하기도 했다.
한편 그들이 탈출했던 리투아니아는 독소전의 발발로 인해 1941년 독일군의 맹공으로 소련군이 물러났지만 1944년 여름에 다시
소련이 탈환했다. 독일 점령하의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의 희생자 숫자는 약 20만명에 육박했다. 또 소련영내에서도 많은 유대인들이
시베리아의 유배지로 보내져 사망했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에서 미국으로 도항이 불가능해지자 체류기간이 다한 유대인들은 당시 비자가
필요없던 상하이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상하이에는 독일의 강경책에 의해 세워진 유대인 게토(상하이 게토)가 만들어져
상하이 및 일본에서 상하이로 이동해 온 유대인들은 이곳에 수용되었다.
상하이까지 전화가 미쳤지만 상하이 게토는 유럽같은 반유대주의가 없어 박해는 없었다. 단 종전이 임박해지기 전에 미군이
공습을 실시하는 바람에 게토도 폭격을 맞아 수십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전후 1948년 5월 14일에 미국의 주도하에 유대인들에
의한 국가인 이스라엘이 건국되어 독립을 선언했다.
한편 리투아니아에서 퇴거당한 스기하라 부부는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도착한 후 1940년에 체코대사관, 1941년엔 콰니히스베르크
영사관에서 근무하다가 1946년까지 루마니아 공사관을 역임하면서 유럽을 전전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스기하라는
루마니아 공사관에서 가족들과 함께 소련으로 신병이 넘겨져 1년간 수용소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47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스기하라 가족은 가나가와 현의 후지사와 시에 자리를 잡고 6월 27일에 외무성에서 퇴직했다.
당시 퇴직은 무모한 비자발행의 책임을 지고 강제적으로 물러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단 일본정부는 현재까지도 스기하라가
재직시 외무성에서 어떠한 징계처분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외무성에서 퇴임 후 셋째아들이 백혈병으로 사망하고 누이동생도 세상을 떠나는 등 가족들의 불행이 계속되었다.
그 후 연합군의 도쿄PX 일본 총지배인, 미국무역상회, 니콜라이 학원 교수, 과학기술청, NHK 국제국 등 여러 직장에서
뛰어난 어학력으로 실력을 보인 스기하라는 1960년에 가와카미 무역의 모스크바 지사장, 1965년에는 국제무역 모스크바 지부장으로
다시 해외생활을 보냈다.
1968년에 비자를 발급받았던 유대인 난민들의 일부가 재일 이스라엘 대사관을 통해 28년만에 스기하라와 재회했다.
1969년에 이스라엘 종교장관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스기하라는 1975년에 국제무역 모스크바 지부장 자리를 퇴직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1977년에는 가나가와 현의 가마쿠라 시로 이사했다.
1985년 1월 18일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공로로 일본인으로는 처음이며 유일한 정의의 인물상인
<야드 바셈 상>을 수상한 스기하라는 11월에 예루살렘의 언덕에서 기념식수 및 헌화비가 제막되었는데 당시 스기하라는 고령이라
넷째아들이 대신 참석했다. 아시아의 쉰들러로 불린 스기하라는 1986년 7월 31일에 심장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스기하라 치우네는 일본의 명문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바라는 의사가 되는 것 대신에 동경의 유명한 대학에서 영어를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시간제 부두 노동과 가정교사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기하라 치우네는 해외 유학생 모집 시험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중국의 하얼빈에 있는 일본어 학원을 졸업할 때는 중국어, 영어, 그리고 러시아어까지 습득하며 최우등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른이라는 설익은 나이에 만주에 있는 일본정부의 차관에까지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가 소유하고 있던 만주 철도 주식회사를 사들이는 협상은 러시아를 노발대발하게 했지만 일본에게는 큰 행운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스기하라 치우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분과 조국의 정책이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깨달았을 때 그는 만주 외무부의 대표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협과 잔인한 일들에 대하여 항거하였고 1934년 대표의 자리를 사임합니다.
4년 후 스기하라 치우네는 다시 정부의 부름을 받고 핀란드의 헬싱키에 도착하여 1년 뒤쯤 동쪽으로는 소련을, 서쪽으로는 나치 독일을 둔 리투아니아로 들어갑니다.
1940년 7월, 히틀러의 군대가 동진을 함에 따라 소련 당국은 모든 외국 대사관들에게 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스기하라 치우네는 더 머물 것을 요청했고 놀랍게도 20일간을 연장 받게 되었습니다.
7월 하순, 스기하라 치우네는 유대인들의 생명선이 되는 비자허락(당시,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국외로 피난하고자 각국 대사관에 비자를 요청하였다. 당시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일본영사관에서 ‘일본 통과비자’를 받아 시베리아를 경유해서 일본을 통과한 다음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의 제3국으로 도피하려고 하였다)을 위해 본국에 세 번의 끈질긴 요청을 시도하지만 동맹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던 일본은 이 요청을 거절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일로 스기하라 치우네는 모든 결정권에 제재가 가해지는 전문을 받게 됩니다.
비록 국가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았지만 그는 위기에 처한 생명들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밤낮으로 손으로 비자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 300장의 비자가 홀로코스트를 피하려는 유대인 난민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혹시라도 시간을 낭비할까 두려워 밥을 먹을 때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가 쓰고 있는 동안엔 그의 아내가 밥을 먹여주었고 통증을 느끼는 어깨는 주물러 가며 그는 계속 비자를 썼습니다. 시간이 다가오고 영사관 폐쇄가 임박해 올수록 수백 명이던 군중은 수천 명이 되어갔습니다. 그는 쓰고 또 쓰고 심지어는 그가 탄 기차가 베를린을 향해 출발할 때까지 몇 장을 더 써서 기차 창문 밖으로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떠나는 기차에서 영사 도장을 한 난민에게 넘겨주어 그 사람을 통해 히틀러의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유대인들을 구하게 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 정부는 스기하라 치우네를 외교관직에서 파면시켰습니다.
그 후로부터 6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스기하라 치우네로 인해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기하라 생존자들’로 불립니다.
1986년 그가 죽기 한 해 전, ‘왜 그런 일을 했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저는 정부에 불순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께 불순종을 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생애 말년에 그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아들은 “당신 아버님은 자신이 했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 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정확히 요약해주었습니다. “제 아버님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사신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 데 하나님이 아버님을 필요로 하시자 아버님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드린 것입니다.”
첫댓글 영상보시며 일본어 공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