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19 의거(義擧)
1960년 4, 19 학생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의거로 말미암아 자유당 정부가 분괴되고 이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부정선거(不正選擧) 관련자는 모두 입건하고 상당수 요직에 있는 분도 교체(交替)되고 동회장도 바뀌었는데 새로 부임한 동회장님은 이영도란 분이시고 인촌 김성수의 처남(妻男)이며 고대에서 근무 하신 분이시다, 전 동회장 최창만 분께서는 4, 19가 나자 갑작이 돌아가시었다, 새로 부임한 동회장님은 일부 통장(統長)을 교체하는데 나를 불러 그 동안 고생만이 하였다 하면서 앞으로 나하고 같이 손잡고 동회일 을 잘하자고 하면서 9 통장(統長)으로 임명하였다, 아마도 자유당 정권 때 야당(野黨)이라고 곤욕(困辱)을 당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통장을 보게 되니 28세(歲)의 가장 나이 어린 통장이 되였다, 동회장님은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봉급을 타도 동희일의 쓰시고 시간이 여유가 있을 때마다 그 당시 종암동 국민은행 뒤에 고대 농장이 일부 있을 적에 농장 관리도 하시고 하였다, 또한 나보고 와서 배추 무김치 거리를 가지고 가라 하여 니야가를 가지고 가니 통장 먹을 것만 가지고 가라 하여 좀 더 가지 고와 이웃과 나누어 먹었던 일도 있다,
5가 쪽 동네에는 예로부터 겨울이 돌아오면 은 공터에다 움막을 짓고 봄이면 헐어버리는 행사가 1960년 중반까지도 있었는데 주택이 들어서면서 공터가 없자 매년 짓던 일이 사라졌다, 그 당시 움막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은 1900~1910년생인 분들이 노인 측에 속한 것을 보아 40 세(歲)이상 분들이 출입 한 것으로 보인다,
◉ 할머님께서 돌아가시다
1939년경 셋째 아버지께서 작은 어머님하고 불화(不和)로 별거(別居)하시고 우리식구들이 인천에서 살적에 셋째 아버지는 금붕어 장수를 하시다가 일본으로 가시고 순식(淳植) 순철(호적으로 순용(淳容) 둘 아이를 할머님이 맡아서 둘째아버지 집에서 같이 사시다가 1943년경 안암동 103번지에서 종암동 52번지로 이사 하시여 아래 체에서 사시었다, 순식이와 순철이는 유리공장에 다니면서 고생하다가 순식이는 의용군으로 나가 소식이 없고 순철이하고 같이 사시였고 셋째 아버지는 해방 후 귀국하시어 경전에 다니시다가 1956, 8 24일 안암동에서 돌아가시고 1960년경 작은 어머님이 순철이를 데리고 가시고 할머님은 작은 집에 계시다가 병환이 나시어 우리 집에 오시였다,
할머님은 손자들을 다 알아보지 못하시었다 음료수 떡 같은 것을 나에게는 주어도 순창이나 다른 손자가 달라 하면 제가 누구냐 하고 못 주게 하시었다, 그러시다가 병환이 악화되어 돌아가시게 되니 가족들을 할머니 곁을 교대로 지키고 있는데 고모부가 오시오 보시고 나는 산소자리를 마련 할 터이니 하면서 나 가시여 모두 나가 배웅하였는데 어머님이 느낌이 이상하여 방에 들어가 보니 불과 1 분도 안 되였는데 운명하시었다 그때가 1961년 음력 3월 11일이다, 할머님은 평상시 나는 죽으면 화장(火葬)하지 말고 매장(埋葬)을 해달라고 유언하다시피 하였다, 월계2동(지금의 염광여자중고등학교 부지) 그때만 하여도 안동 김씨의 종중(宗中) 산 이였다,
그 후 안동 김씨 종중에서 염광재단에다가 매각하여 산소를 이장(移葬)하여 달라는 통지를 밭고 날을 택(擇)하여 1982년 음력 윤 6월에 그 자리에서 화장하였다 그 때 작은 집에서는 같은 할머니인데도 일절 관련(關連)치 안고 순태는 화장에 참석하면 나쁘다고 하면서 회피하여 우리 형제들의 도움으로 작업할 사람을 사서 고모 고모부 덕표 나하고 가서 그 자리에서 화장을 하였다, 작업이 끝나고 갈려고 할 때에 순법이가 할머니 사진을 가지고 왔다,
☆☆ 5, 16 혁명(革命)
1961년 5월 16일 아침 가게 문을 여는데 그때 박상옥(朴祥玉)이가 야경대원(夜警隊員)으로 근무 할 당시 내게로 와서 큰일 낫다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다 하면서 알려주었다, 얼마 후 동회에서 통장회의를 소집하여 동사무소로 가니 동회장으로 군 출신 장교(將校)로 개운사 쪽의 사시는 방(方)씨란 분이 부임하였다, 나는 통장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게를 운영(運營)하고 있었는데 군사혁명군이 명단을 적어 가지고 와서 잡으러 왔다 하면서 집을 가르쳐 달라고 하여 보니 거기에는 부조도 있었다, 벌써 아라는지 모두 피하여 잡지를 못하고 도로 갔다, 혁명군에 잡혀간 사람들은 삼천교육대로 보내진 것이다, 얼마 후 화폐(貨幣)를 교환(交換)한다는 뉴-스가 있자 손님들이 가게로 몰려와서 눈 깜짝할 사이 다 팔렸다, 그때 조금한 구멍가게라 물건을 조금밖에 없지만 정말로 먼지 하나 남기지 안고 다 팔렸다, 1962년 6월의 환율(換率)은 10대 1로 평가절하(平價切下)하여 환(圜)을 원으로 바뀌면서 처음에는 인원수의 따라 한도액만 교환 하였다가 나중에 교환하였다,
※ (한국은행이 설립된 후 1953년 2월에도 원(圓)을 환(圜)으로 100대 1로 평가절하 한 적도 있다)
군사 혁명이 나자 국회(國會)는 해산하고 혁명 군인들의 의해 최고회의(最高會議)의서 국정운영을 하였다, 그 때의 최고의원 한 분이 우리 통 관내의 홍종철(洪鍾哲) 대령이 사시였고 바로 뒤 집에는 대령으로 제대하신 신대선(辛大善)께서 사시였는데 그 분은 육사 5기생이고 홍종철 최고의원은 육사 8기생 김종필과 동기생이라 하면서 홍의원은 내가 포단장 할 적에 내 참모로 있었는데 어찌 하야할지 모른다 하면서 박정희(朴正熙)는 육사 2기생인데 개운사 쪽에 사는 지기섭(池基燮)분과 육사 동기생이라고 하였다,
또한 바로 신대령 아랫집의 사는 홍순동(洪淳東)분은 중령으로 제대하였는데 육여사(陸女士)와는 형수(兄嫂)님의 친척관계였는데 그 분 말씀이 신 대령은 육군의 신대포 박대포 홍대포 3대포 중 한 분이라고 하였다 그 후 청와대(靑瓦臺) 경비 책임자로 일 하시였다, 그러고 보니 3분이 41번지 호수는 다르지만 한 통(統) 이웃집의 사시였다, 지금은 신대성과 홍순동집 자리는 인촌로가 되고 홍장관 집은 선교회가 건립 전 까지도 사시다가 떠나시고 그 자리에는 2002년도의 ENM (세계로 선교회)로 큰 건물로 되어있다,
나는 통장일 을 보다보니 주민과 자주 대화가 있었다, 홍장관의 사모님께서도 동네의 대한 문의가 있었고 하루는 신대성분께서 나는 박정희 최고의원을 만나 춘천(春川) 건설당장으로 가게 되었다 하였다 그 당시 병력 기피자(忌避者) 불량자들의 작업 현장의 책임자다, 그 후 그 건설단이 해산되고 한전(韓電)으로 발령되었다, 그 후 1980년경에 신대성씨는 순효(淳孝)에게 집을 팔고 떠나시었고, 홍순동씨는 50번지로 이사하였으나 고려대학교 부지(敷地)이기에 고대에 인계하고 1977년경 다른 데로 이사하였다,
동회장으로 새로 부임한 서순용(徐順龍) 동회장님께서 통장회의(統長會議)를 하면서 최고의회에서 나왔다 하면서 극장표를 각 통별로 할당하면서 팔라 하였다, 가격(價格)도 비싼데다가 누가 극장표를 살 사람도 없고 해서 홍장관 사무님에게 가서 팔아 달라고 하였다, 그럼 이 표를 다 못 팔면은 어떻게 하느냐 하기에 내가 책임을 진다고 하니 그럼 내가 다 살터이니 나를 달라하여 표 전부를 드리니 돈은 다음에 준다하여 집으로 돌아 왔다,
얼마 후 동회장님과 구청직원이 찾아와서 큰일 낫다 하면서 최고의원 집으로 같이 가자하여 같이 갔다, 사모님은 야단이 낫다 누구의 지시(指示)냐 최고의회에서는 그런 지시한 적이 없다 하면서 국민에게 호감을 사야하는데도 이름을 팔고 이런 한 짓을 한다하면서 단장 전부 회수하고 보고하라 하시었다, 또한 홍장관 집 옆이 철공장 (지금은 기업은행 옆 목욕탕) 이 있어 홍장관 대문 앞에 철물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으면 홍장관님은 이리 저리 비겨가고 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경찰관이 나와 치우라고 하고 가면 경찰관을 불려 내버려 두라 단속을 하면 내가 시켜 그런 줄 아니 내버려두라 하였다, 또한 장관 어머님께서는 매년 성탄절(聖誕節)때면 통장과 어려운 이웃들에게 쇠고기 1근 살 1말씩을 나누어주어 이웃에 인심을 샀다,
어는 해 연탄파동이 생겼다, 나는 연단장사를 하였기에 홍장관댁에 연탄을 배달하고 하였는데 연탄이 부족하다보니 제때에 배달을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삼표연탄 공장에서 2,000장을 실은 차가 와서 공장에서 보낸 것이라면서 홍장관택의 배달하라 하여 가서 물으니 일 보는 사람이 할머니에게 이야기하여 공장에다 연락하였다 하니 사모님이 야단이 났다『어머님 지금 연탄이 부족하여 주민들은 연탄을 사지 못해 야단인데 장관 집의 연탄을 한 차 드리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하면서 우리 집은 한 장도 드리지 말고 전부 나누어주라 하여 동네에다 나누어주고 사모님 알지 못하게 200장만 드린 일도 있다,
홍장관을 마직 막 본 것은 토요 일날 오후에 연탄을 드리는데 낚시 가방을 메고 막네. 아들(기용)하고 계단을 우수면서 내려가시었다, 그러한데 그날 저녁에 사고가 난 것이다 청평강(淸平江)에서 낚시하다가 갑작이 물이 불어 막네, 아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구하고 자기는 물의 떠내려가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홍장관님은 수영(水泳) 실력이 한강(漢江)을 왕복(往復)한다 하였다, 시체를 찾지 못하고 문상소(問喪所)를 아래채 마당에다 모시였는데 박정희 대통령도 문상을 오시였다, 며칠 만에 잠수부(潛水夫)가 찾았는데 큰 잉어가 뛰어 오르는 것을 보고 거기에서 찾았다고 하였다,
청와대 근무하는 홍순동 분은 나하고 항렬(行列)자가 같다 보니 형님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특히 서민층(庶民層)을 좋아 하시여 허물없이 지네였다 그 분은 술을 좋아 하시여 매일 술을 마시고 돌아오면 은 우리 집을 지나가야 집의 가게 되어있어 자주 만나게 된다, 가끔 업자(業者)들이 따라와 (그때 중국사람 강복무(姜福茂) 중화요리 하는 안암식당에서 요리를 시켜 술을 마시면서 나를 보면 불려드리고 없으면 사람을 시켜 나를 불려내고 같이 먹자고 한다, 그리고 업자에게 내 아우이다 하면서 인사를 시킨다, 그럼 업자들은 항렬이 같으니 진짜 동생인줄 안다,
5, 16 군사 혁명이 나고 부작용도 많았다, 동회사무실 옆의 청년회관짜리에 당구장으로 옥정애 여사에게 세를 주었는데 불하를 받자 각 통장과 주민들이 동대문 세무서에 가서 항의(抗議)를 하자 대표자 세분만 만나자고 하여 나 하고 설재석 서상호가 대표로 세무서장을 만나니 서류(書類)를 보이면서 우리는 하자가 없다하여 보니 서순용 동회장이 불하에 대한 서류에다 직인이 찍힌 것을 보고 동회장에게 물으니 상부에 지시의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옥 여사는 6, 25 사변 때 한강다리 폭파(爆破) 사건으로 책임을 지고 처벌 밭은 부인(婦人)이였다는 것을 알았다,
전국이 안전 되고 예비사단(豫備師團)이 창설(創設)되여 처음에는 동회장이 예비군 중대장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유급제 중대장이 하였다, 나는 통장을 보면서 9소대장으로 있었다, 공화당은 장기직권(長期職權)을 위하여 유신(維新)운동을 하면서 김흥옥 양일출 조한운 불들이 공화당원을 모집하고 동회장도 교체하여 진양갑 동회장이 부임하였다 진 동장은 공화당의 협조가 미흡(未洽)하다하여 동회장과 친분관계 있는 몇 명을 교체하였는데 그때 내가 포함 되여 조창묵(趙昌黙)씨에게로 제 9통장직을 인계하였다, 얼마 후 민방위대(民防衛隊)가 창설 되면서 민방위대장을 예비군으로서 장교(將校)가 우선이고 없을 때는 하사관(下士官)을 민방위대장으로 임명(任命)하고 통장직을 겸임(兼任)한다 하여 몇 명이 교체 되였는데 나는 다시 9통장직을 다시 맡게 되면서 민방위 대장 수당(手當)으로 매달 3 만원 식을 지급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