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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의 자세와 행동}
불교에는 불교만의 예절과 의례가 있습니다.
처음 불교를 접하는 불자는 불교 예절을 잘 알아야 편한 마음으로 불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 예절의 근본정신은 늘 부처님을 생각하고 가르침을 되 새기며 행하도록 도와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절을 아는 것은 깨달음의 첫 걸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잘못을 반성하고 삶 속에서 다가오는 삿된 유혹을 물리치며 우환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하거나 스님을 찾아뵙고 상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인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식사를 할 때에 먼저 합장한 뒤에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며, 맛에 탐닉하거나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하루 일과를 걱정하거나 원망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채 잠들지 말아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하루를 참되게 살아가도록 기도하거나 수하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삼보에 귀의한 불자로서 평상시 모든 행이 겸허해야 하겠지만, 특히 수행 도량인 절에서는 더욱 정숙하고 경건한 자세가 기본입니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몸가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행의 길에 수행자의 자세는 마음이 표현된 모습이므로 항상 경건하고 겸허한 자세가 기본이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불자들이 취해야 할 자세와 행동, 서있는 자세, 앉아있는 자세, 걷는 동작, 앉고서는 동작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또한 손 모양의 기본 자세인 합장과 차수, 그리고 그 밖의 수행과 신행 생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차수와 합장
차수(叉手)는 손을 교차한다는 말 그대로 평상시 도량에서 손을 쓰지 않을 때 하는 자세입니다.
손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손가락 부분이 서로 교차되게 하여 왼손의 손가락 부분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고 단전 부분에 대고 있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손을 바꾸어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아도 무관한데, 어느 손이 가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편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합장(合掌)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의 전통적인 인사법으로서 인사 및 예불, 법회 등 불교 생활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쓰이는 예법입니다.
합장은 손바닥을 마주 합하는 자세로 손바닥을 밀착하여 빈틈이 없어야 하며 손가락 사이가 벌어져서도 안됩니다. 두 손을 통해서 마음을 모으고, 나아가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 위에 합쳐진 한 생명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차수와 합장은 서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앉아 있을 때에도 같은 요령으로 자세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차수인 경우에는 마주잡은 두 손을 단정하게 무릎 위에 놓으면 됩니다. 동작의 측면에서 볼 때는 차수에서 합장, 또는 합장에서 차수로 동작이 연결 되어야 부드러운 자세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앉는 자세-좌선/꿇어앉은 자세
좌선(坐禪)
불자의 자세는 불자가 아닌 사람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앉는 자세에 가장 큰 특징이 있습니다. 불자의 앉는 자세는 참선 할 때의 좌선 자세를 기본으로 합니다. 이는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앉아 용맹정진하신 자세인 것입니다. 좌선의 대표적인 결가부좌(結跏趺坐)입니다.
꿇어앉은 자세
독경이나 염불 시에는 꿇어 앉는 자세가 좋습니다. 장시간 동안 지속하기 어려운 자세이나 예경, 축원을 할 때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반드시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때의 눌린 발은 절할 때의 발과 같이 오른발을 밑에 두고 그 위에 왼발을 ꡐXꡑ자로 교차시켜서 앉는 것이 보통인데, 자세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본인의 습관대로 오른발과 왼발을 바꾸든지 또는 두발을 일자로 나란히 놓아 힘들지 않고 오래 앉아 있기에 적합한 자를 취해도 좋습니다. 꿇어앉는 경우에도 허리를 곧바로 세우고 몸의 평형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절의 의미와 공덕-반배/오체투지/고두배
불교의식에서 절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은 삼보에 대한 예경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절은 그 자체가 하나의 휼륭한 수행 방법이기도 하므로, 참회나 기도의 방법으로 108배, 1080배, 3000배등이 활용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절을 많이 하면 아름다움과 건강을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으며, 스스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부처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시며, 죽어서는 극락에 태어나고, 마침내는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반배(半拜)
삼보에 예경을 올리는 절은 큰 절이 원칙이지만 사정으로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반배를 하는데 반배는 이럴 때 합니다.
절 입구에서 법당을 향하여 절할 때
길에서 스님이나 법우(法友)를 만났을 때
옥외에서 불탑에 절을 할 때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옥내법회라 하더라도 동참 대중이 많아서 큰 절을 올리기 적합치 않을 경우
3배나 108배, 1080배, 3000배 등의 오체투지하기 전과 마친 후
부처님 앞에 헌화를 하거나, 향, 초 그밖의 공양물을 올리기 직전과 올린 후
법당에 들어가거나 나오기 전
기타 필요시
오체투지(五體投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삼보님께 하는 절은 오체투지의 큰 절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때 오체란 몸의 다섯 부분인 왼쪽 팔꿈치, 오른쪽 팔꿈치(양 팔꿈치), 왼쪽 무릎, 오른쪽 무릎(양 무릎), 이마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도(印度)의 예절로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하는 절인데 인도에서는 접족례(接足禮)라 하여 온몸을 땅에 던져 절을 하면서 공경하는 사람의 발을 두 손으로 떠받들었다고 합니다.
오체투지의 절은 우리나라 재래 예법인 큰절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되 반드시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오체투지의 예는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입니다.
오체투지의 큰절을 할 때 두 팔꿈치와 두 무릎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동작의절차상 땅에 닿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나 반드시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여야 합니다.
큰절하는 동작을 순서대로 구분하면 먼저 서 있는 자세에서 합장하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구분하면 먼저 서 있는 자세에서 합장하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합장 반배합니다. 그런 다음 합장한 자세에서 그대로 두 무릎을 굽혀 반듯하게 앉습니다.
왼손을 가슴에 가볍게 대고, 오른손을 뻗어 몸을 굽히면서 이마가 닿을 지점을 짚습니다. 이어 왼손을 오른손과 나란히 놓고 윗몸을 숙여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완전히 엎드립니다. 엎드린 상태에서 두 손을 가볍게 뒤집어서 무언가 받들어 올리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이 때 왼발은 오른발의 발바닥 위에 가볍게 포개어 놓아야 합니다.
일어설 때는 엎드릴 때와 정반대의 순서를 따르는데, 먼저 펼쳤던 손을 뒤집어 왼손을 가슴부근에 갖다 댄 다음 오른손을 거두어 합장하면서 다리를 풀고 본래의 자세로 일어섭니다.
고두배(叩頭排)
불자는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몸을 던져 절을 하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3배를 올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수한 절을 한다 해도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뜻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3번째 절을 하고 일어서기 전 부처님의 한량 없는 공덕을 생각하며 지극한 마음을 더욱 더 간절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예배의 마지막 끝에 머리를 땅에 다시 한번 조아리는 고두(叩頭)를 합니다.
이는 또 유원반배(惟願半拜)라고도 하는데, 무수히 예경하고픈 간절한 심정을 여기서 마치게 되는 아쉬움을 표하는 예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두배는 3배뿐 아니라 1배, 7배, 108배를 비롯 모든 절의 마지막 절을 마치고 일어서기 전에 합니다.
고두배하는 법은 마지막 절을 마치고 몸이 오체투지의 상태에서 두 손바닥이 부처님을 받들기 위하여 위로 향한 자세에서 팔굽을 펴지 말고 머리와 어깨를 들고 손은 얼굴 아래서 합장을 하였다가 그대로 땅에 두어야 하며 고개를 들고 전방을 주시해서는 안됩니다.
머리와 어깨만을 잠깐 들었다 다시 이마를 땅에 대는 단순한 동작으로 할 수도 있고 머리와 어깨를 약간 들고 팔굽을 땅에서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손으로 합장 자세를 취하였다가 즉시 손을 풀고 다시 두 손과 이마를 땅에 대는 방법도 있습니다.
절의 의미와 공덕-반배/오체투지/고두배
불교의식에서 절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은 삼보에 대한 예경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절은 그 자체가 하나의 휼륭한 수행 방법이기도 하므로, 참회나 기도의 방법으로 108배, 1080배, 3000배등이 활용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절을 많이 하면 아름다움과 건강을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으며, 스스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부처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시며, 죽어서는 극락에 태어나고, 마침내는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반배(半拜)
삼보에 예경을 올리는 절은 큰 절이 원칙이지만 사정으로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반배를 하는데 반배는 이럴 때 합니다.
절 입구에서 법당을 향하여 절할 때
길에서 스님이나 법우(法友)를 만났을 때
옥외에서 불탑에 절을 할 때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옥내법회라 하더라도 동참 대중이 많아서 큰 절을 올리기 적합치 않을 경우
3배나 108배, 1080배, 3000배 등의 오체투지하기 전과 마친 후
부처님 앞에 헌화를 하거나, 향, 초 그밖의 공양물을 올리기 직전과 올린 후
법당에 들어가거나 나오기 전
기타 필요시
오체투지(五體投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삼보님께 하는 절은 오체투지의 큰 절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때 오체란 몸의 다섯 부분인 왼쪽 팔꿈치, 오른쪽 팔꿈치(양 팔꿈치), 왼쪽 무릎, 오른쪽 무릎(양 무릎), 이마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도(印度)의 예절로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하는 절인데 인도에서는 접족례(接足禮)라 하여 온몸을 땅에 던져 절을 하면서 공경하는 사람의 발을 두 손으로 떠받들었다고 합니다.
오체투지의 절은 우리나라 재래 예법인 큰절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되 반드시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오체투지의 예는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입니다.
오체투지의 큰절을 할 때 두 팔꿈치와 두 무릎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동작의절차상 땅에 닿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나 반드시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여야 합니다.
큰절하는 동작을 순서대로 구분하면 먼저 서 있는 자세에서 합장하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구분하면 먼저 서 있는 자세에서 합장하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합장 반배합니다. 그런 다음 합장한 자세에서 그대로 두 무릎을 굽혀 반듯하게 앉습니다.
왼손을 가슴에 가볍게 대고, 오른손을 뻗어 몸을 굽히면서 이마가 닿을 지점을 짚습니다. 이어 왼손을 오른손과 나란히 놓고 윗몸을 숙여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완전히 엎드립니다. 엎드린 상태에서 두 손을 가볍게 뒤집어서 무언가 받들어 올리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이 때 왼발은 오른발의 발바닥 위에 가볍게 포개어 놓아야 합니다.
일어설 때는 엎드릴 때와 정반대의 순서를 따르는데, 먼저 펼쳤던 손을 뒤집어 왼손을 가슴부근에 갖다 댄 다음 오른손을 거두어 합장하면서 다리를 풀고 본래의 자세로 일어섭니다.
고두배(叩頭排)
불자는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몸을 던져 절을 하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3배를 올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수한 절을 한다 해도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뜻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3번째 절을 하고 일어서기 전 부처님의 한량 없는 공덕을 생각하며 지극한 마음을 더욱 더 간절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예배의 마지막 끝에 머리를 땅에 다시 한번 조아리는 고두(叩頭)를 합니다.
이는 또 유원반배(惟願半拜)라고도 하는데, 무수히 예경하고픈 간절한 심정을 여기서 마치게 되는 아쉬움을 표하는 예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두배는 3배뿐 아니라 1배, 7배, 108배를 비롯 모든 절의 마지막 절을 마치고 일어서기 전에 합니다.
고두배하는 법은 마지막 절을 마치고 몸이 오체투지의 상태에서 두 손바닥이 부처님을 받들기 위하여 위로 향한 자세에서 팔굽을 펴지 말고 머리와 어깨를 들고 손은 얼굴 아래서 합장을 하였다가 그대로 땅에 두어야 하며 고개를 들고 전방을 주시해서는 안됩니다.
머리와 어깨만을 잠깐 들었다 다시 이마를 땅에 대는 단순한 동작으로 할 수도 있고 머리와 어깨를 약간 들고 팔굽을 땅에서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손으로 합장 자세를 취하였다가 즉시 손을 풀고 다시 두 손과 이마를 땅에 대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찰 예절
사찰은 거룩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신성하고도 장엄한 곳입니다. 속세의 때를 씻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곳이며,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스님들이 상주하시면서 공부하는 수행 도량이기도 합니다.
사찰에 가면 일반적으로 일주문(一柱門), 불이문(不二門), 천왕문(天王文), 해탈문(解脫門)을 지나게 되는 것이 통례입니다. 이외에도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정해진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일주문은 사찰 입구입니다. 세속의 미혹에 젖어 자신의 참모습을 잠시 잊고 살았더라도 여기서부터는 부처님 도량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이 곳 일주문에서 합장하고 법당 쪽을 향해 공손하게 반배를 올리면서 사찰 예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조심스럽게 행동하여야 하는데,
사찰에서의 행동은 이렇게 합니다.
법당문에 들아갈 때에는 가운데 문으로 다니지 말고, 왼쪽 혹은 오른쪽 옆문으로 출입하여야 하며 볼일 없이 법당에 들어간다든지 탑에 올라가서는 아니 된다. 법당 앞이나 탑에 침을 뱉지 못하며, 모자나 지팡이를 법당 벽에 걸거나 기대지 아니하여야 한다. 그리고 불상이나 탑을 돌 때 먼저 합장 반배를 한 다음 합장한 채 시계 방향으로 돌면 된다. 《사미율의》중에서
사찰에서는 항상 가운데(어간)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을 믿고 수행하는 이는 자기를 가장 낮은 위치에 두어야 하며 모든 이를 공경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주문에서 법당을 향해 반배를 올리고 자세를 바로 한 다음에 뒷짐을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지 말고 신발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길 한쪽을 택하여 걷는데 일반적으로 보행자의 방향인 좌측 통행이 무난합니다.
다음으로 천왕문에 들어서면 좌우에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사천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동한 나머지 스스로 불교를 보호하는 신장이 되기로 원을 세운 하늘 신입니다. 따라서 불자들은 사천왕의 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반배의 예를 올립니다. 아직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경의를 표할 대상을 만나는 경우에도 반배를 합니다. 법당에 이르기 전에 역대 조사스님의 부도(浮屠)를 지나게 되면 합장 반배하며 길에서 스님이나 법우(法友)를 만나는 경우에도 합장하고 반배를 하여야 합니다.
법당 앞의 탑은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신성한 곳이며, 실제로 사리가 모셔져 있지 않더라도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반배로 삼배를 올립니다. 그리고 탑을 도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의 오른 쪽에 탑이 오도록 하고 그 주위를 돕니다. 이것은 오른쪽을 중요시하는 인도의 전통예법을 따른 것입니다.
몸이 불편하여 지팡이를 소지하거나 비오는 날에 우산(우비)을 가지고 사찰에 갔을 때에는 우산을 법당 벽에 기대어 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찰에 와서는 화급을 다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먼저 법당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참배하여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 곧바로 올라가면 사찰의 대웅전 마당에 이르고 마당에 설치된 탑전에 예배를 드리고 계단을 올라가서 법당에 이르게 됩니다. 법당에 올라가서 계단은 중앙계단과 좌우의 계단이 별개로 있는 경우도 있고 넓은 중앙계단 하나만 있는 경우도 있는데 중앙계단을 피하여 오른쪽 또는 왼쪽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야 하며 계단이 하나만 있는 경우에는 중앙을 피하고 측면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법당문 앞에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는데 이 때 신발은 잘 정돈하여야 합니다. 정갈한 마음의 표현이 신발 벗는 데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법당 예절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가 있는데 법당 정면에 중앙문이 있고 양쪽 옆에 각기 하나씩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당 좌우 측면에 또 문이 하나씩 있는 것이 우리나라 법당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법당 안을 보면 가운데 상단이 마련되어 불보살님을 모시고 그 좌우에 신중단이 있는데 상단의 주좌(主座)를 기준으로 가운데 통로를 어간(御間)이라 하고 법당의 정면으로 난 가운데 문을 어간문이라고 합니다. 법당에 출입할 때에는 어간문을 이용해서는 안되며 측면으로 난 문이나 좌, 우측의 문을 이용하여야 합니다.
법당은 부처님을 모시고 스님과 불자들이 전진하는 신성한 장소이므로 항상 정숙하여야 합니다. 문을 열 때 요란한 소리를 내게 되면 다른 불자들이 정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문을 조용히 여는 행동도 수행하는 것입니다.
법당문을 열 때는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목을 받쳐 잡고 오른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약간 들어올려서 문을 열어야 합니다. 법당에 들어서면 상단(上壇)의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반배합니다. 다음에는 법당에 들어간 목적에 맞는 행동을 하는데 공양을 올기기 위하여 불전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예배를 하기 위하여 적당한 자리를 찾아갑니다. 이때는 합장한 자세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걸어 가야 합니다. 또 부처님께 절하고 있는 다른 불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하고 또 상단을 중심으로 하여 가운데 통로인 어간은 사용해서는 안되고, 부득이 어간을 지나갈 때에는 합장한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경건하게 통과하여야 합니다.
부처님께 올리기 위하여 향이나 초를 준비하였더라도 이미 촛불이 켜져 있거나 향이 피워져 있으면 준비한 향과 초를 그대로 부처님 전에 올려 놓는 것으로 공양을 대신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켜 놓은 촛불을 끄고 자기가 준비한 초에 다시 불을 붙여 올린다든지 이미 촛불과 향불이 피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옆에 다시 촛불과 향불을 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향을 올리는 방법은 합장한 자세 그대로 부처님 전으로 조용히 걸어 나갑니다. 부처님 앞에 이르게 되면 그 자리에서 반배를 올립니다. 그리고 향합에 있는 향이나 준비한 향을 오른손으로 집되 향의 중심부를 잡고 촛불에 향불을 붙입니다. 향에 붙은 불을 입김으로 끄지 말고 손을 이용하거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경건하게 꺼야 합니다. 불 붙은 쪽이 위로 가도록 두 손으로 받쳐 잡되 오른 손은 향의 가운데를 잡고 왼손은 오른 손목을 받쳐 잡습니다. 다음에는 향든 손을 이마 높이로 올려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표한 다음 향로 중앙에 똑바로 꽂습니다. 그리고 합장한 자세로 반배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참배를 드리면 됩니다.
부처님께 향 공양을 올린 다음에는 신중단(神衆壇)에 나아가 순서에 의하여 향을 올리고 참배합니다. 혹 자리가 복잡할 때는 그 자리에서 방향만 틀어 참배해도 됩니다.
법당 밖으로 나올 때에는 먼저 법당 안에 다른 불자님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자기가 마지막으로 법당을 나오게 되는 경우에는 촛불을 끄고 정돈한 후 나옵니다. 법당은 거의가 목조 건물이므로 불조심에 항상 유의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촛불을 끌 때도 불전으로 나아가 반배 후 손으로 불을 끄거나 별도의 기구를 사용하여야 하며, 촛불을 끈 다음 다시 뒤로 물러서서 합장 반배하고 법당을 나옵니다.
나올 때에도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합장한 자세로 법당 옆문으로 와서 상단의 부처님 전에 합장 반배 한 후 뒷걸음으로 법당문을 나옵니다. 법당을 나와서는 먼저 신발을 신고 뒷사람은 앞 사람이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또한 자기 신발을 다 신은 후에는 다른 불자들의 신을 좋은 위치에 가져다 주든가 흐트러진 신발이 있으면 가지런하게 놓습니다.
법회와 예불에 동참할 때
법회는 불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가장 거룩한 공간이며, 생활을 점검하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또한 예불은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올리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법회와 예불이 있을 때는 반드시 참석하여 부처님께 정성스런 마음으로 참배하고 법사의 설법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법회장에 들어갈 때에는 법당 예절에 어긋남이 없도록 행동해야 하며, 특히 어간에 앉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법회장에서는 특정한 사람을 위하여 자리를 잡아 놓고 다름 사람이 앉지 못하게 하거나, 좌복을 서로 먼저 차지하려는 행동, 풀썩거리며 던지듯 깔아 놓는 행동, 깔려져 있는 좌복을 밟고 다니는 행동, 자기가 쓰던 좌복을 정리하지 않고 나가거나 또는 타인에게 미루는 행동 등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법회는 일정한 의식에 의해 진행되므로 법문만을 듣기 위해 의식진행을 귀찮게 여기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또 법문만을 듣기 위해서 늦게 입장했다가 법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의식에는 동참치 않고 가는 일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법문시 설법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여 가볍게 여기거나 너무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되며, 아는 것은 다시 한 번 새겨 듣고 모르는 것은 더 공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아울러 이렇게 공부하고 수행한 내용은 주위 사람에게 널리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찰에서 숙박하는 경우 새벽에 도량석의 목탁소리와 종소리가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자리를 정돈한 후에 법당에 나아가 참여해야 합니다.
스님에 대한 예절
스님은 스승을 의미하며 재가불자들이 받들고 존경하며 항상 가르침을 받는 친근한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스님을 뵈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합장 반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교에 관하여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재적사찰의 주지스님이나 평소 존경하는 스님을 찾아가 법문을 듣고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밖에서 스님을 만나면 그 자리에 서서 합장 반배하고, 실내에서는 1배를 올려야 합니다.(어떤 경우는 3배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좌선하실 때, 공양하실 때, 경전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등등은 절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님을 모실 때에는 스님과 마주서거나 스님보다 높은 데 서면 안되고 작은 말소리도 잘 들리도록 가까이에서 모시되 스님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또 스님이 앉으라고 하기 전에는 앉지 않으며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스님께 절을 하고자 할 때에 스님이 그만두라고 하시면 절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큰스님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고자 할 때에는 먼저 시자(侍者)를 통하여 허락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님 방에 들어 갈 때에는 법당에 들어갈 때와 똑같이 행동해야 하며, 큰스님께는 부처님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합장하고 삼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스님은 재가불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정진하고 계시기에 재가불자들은 수행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의복이나 음식, 약 등을 공양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잘 모셨을 때 스님은 더욱 정진하여 참다운 스님이 될 것이고 불자는 참다운 불자가 될 것입니다.
불교의 공양법
불교에서는 밥을 먹는 것을 '공양ꡑ이라 합니다.
이는 불교에서 공양하는 것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출가한 스님에게 공양하는 것은 단지 굶주림을 면하거나 맛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보와 사중(四重: 국가, 부모, 스승, 시주)의 은혜를 갚고 삼도(三途: 지옥, 아귀, 축생) 중생의 고통을 건지기 위한 수행의 방편입니다. 즉, 안으로는 부처님의 진리를 체득하고 밖으로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또한 재가불자도 공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알의 쌀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는 무수한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하나 하나의 노력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며 먹습니다.
불교의 공양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상공양과 발우공양입니다. 상(床)공양은 일반 가정에서의 경우처럼 밥상 혹은 식탁에서 공양하는 것으로 공양의 인원이 소수일 때나 편의상 쓰여지고, 발우(鉢盂)공양은 불교의 전통으로 대중이 동시에 공양하거나 수련 및 수행시에 행해집니다. 대중이 함께 모여 정진하는 도량에서는 공양시에 발우공양을 하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한다고 해서 이를 대중(大衆)공양이라고도 합니다.
발우(鉢盂)란 스님들의 밥그릇인데 발(鉢)은 응량기(應量器)라 번역하고 수행자에 합당한 크기의 그릇이란 뜻입니다. 우(盂)는 중국 말로 밥그릇이란 뜻입니다.
발우공양의 의미는 부처님과 음식의 은혜에 감사하며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고, 음식과 물을 아끼며 공양을 통해 얻은 힘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겠다는 것입니다.
발우공양의 유래는 부처님께서 당시 인도의 수행풍습대로 매일 사시(巳時: 오전 10~12시)에 한끼 공양을 하셨는데 그릇 하나에 시주받은 음식을 드신 데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발우공양법은 현재의 음식 쓰레기 문제 즉,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므로 가정에서도 생활화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편 향과 초, 공양미, 감로차 등의 시물(施物)을 부처님께 바쳐 목마르고 배고픈 중생에게 회향하고, 중생의 고통을 여의케 해주는 것도 공양이라고 합니다. 공양(供養)이란 자양분을 기른다는 뜻이며, 삼보님께 올리는 정성스러운 모든 것은 공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을 다해 바치는 정성스러운 공양은 삼륜(三輪)이 청정할 때, 즉 받는 이, 받는 물건, 주는 이가 청정할 때 크나큰 공덕이 뒤따른다고 합니다.
재가불자의 예절
재가불자 사이의 호칭을 보살님, 거사님, 법우님 등으로 부르고 법명이 있으면 꼭 법명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마을이나 사찰에서 만났을 때는 합장 반배로 정중히 인사하고 법회 중일 때에는 목례로 하면 됩니다.
가까운 불자가 경조사를 당했을 경우는 즉시 찾아 보아야 하며, 불자 사이에 상부상조하여 함께 돕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재가불자 사이에 시비거리가 있을 때는 화합정신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자를 사칭하여 불교를 비방하거나 삼보를 헐뜯는 사람을 보면 잘 타일러 구업(口業)을 짓지 않고 정법의 세계에 동참하도록 다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사찰의 구조}
사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승원(僧院)과 당(堂)입니다.
당은 일반적으로 사원의 중심이 되는 불당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는 ꡐ금당ꡑ 또는 ꡐ법당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 당이라는 것은 불상을 봉안한 불당이나 법당 뿐만 아니라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과 강당 등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당은 불상을 봉안하고 불교의 각종 행사를 봉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강당은 경과 율을 강설하고 연구하는 장소입니다.
사찰의 의미
우리들은 절이라고 하면 맑은 물이 흐르는 산 속 깊은 곳을 떠올리게 됩니다.
맑은 물소리와 어울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고요히 잠자던 풍경을 흔들고 그 소리가 은은히 번져가면 도량석을 도시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산사를 깨우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절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보면 절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발걸음 닿는 가까이에 있는 도심속의 절을 찾아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부처님 앞에 합장을 하고 앉으면 마음이 고요해 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절은 어떠한 곳일까. 절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이나 불화 등을 모시고,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곳이며,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찾아가 수행을 하고 부처님의 법음을 듣는 곳입니다. 절은 범어로 비하라(vihara)라고 하고 비하라(毘訶羅)라고 음역하며, 수행을 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주처(住處), 유행처(遊行處) 등으로 번역합니다.
인도에 있어서 최초의 절은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 합니다. 죽림정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서 기거하며 수행과 설법으로 중생을 교화했던 장소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절은 그 이전에서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성불하신 그리고 설법하시고, 열반을 보이신 4대 성지가 모두 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 교리에서 보면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고 그 진리를 미혹한 중생들을 위하여 보이셨던 분이고, 스스로 진리를 구현하신 분이기 때문에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합니다. 법신불은 온 세상에 불법이 두루 미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인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예경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하여 부처님을 형상화하여 일정한 장소에 봉안하고 그 곳에 찾아가 스님들로부터 부처님의 법을 들으며, 예불을 올리는데 그곳이 바로 절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 이전에 인도에는 우리가 절이라고 부르는 정사는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인도의 수행자들을 사문이라고 불렀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이땅에 오시기 전부터 있었던 사문들은 정해진 곳에서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고행을 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부처님은 미혹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셨습니다.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를 위하여 최초의 설법을 하신 후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을 향하여 떠나셨습니다. 그 당시 마갈타국의 빈비사라왕은 부인 베데이와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후, 부처님과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짓기로 마음 먹고 왕사성 북쪽 교외에 있는 가란타 장자의 소유인 죽림(竹林)을 희사받아 그곳에 집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불교의 역사상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인 것입니다.
이 정사 중에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당시부터 이름난 곳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천축5정사(天竺五精舍)라고 하는데 기수급고독정사, 축령정사, 미후강정사, 죽림정사가 그것입니다.
또한 범어 상가라마(samgharama)라고도 하는데 승가람마(僧伽藍摩), 가람(伽藍)이라 음역하고, 중원(衆園)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정사(精舍)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중원이라는 말은 불교를 신봉하고 수행하는 사부대중이(四部大衆)이 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정사나 상가라마가 상가(僧伽)의 거주처이지만, 정사는 주로 부처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계신 곳을 말하고, 상가라마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그의 제자들만이 거처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절이나 사찰의 이름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인도에 있어서는 절이라고 하는 곳을 정사나 가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원(寺院)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인도에서 정사나 가람(상가라마)이라고 불리던 것이 중국에 들어 오면서 사(寺)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자(漢字)의 사(寺)는 공공기관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寺)라는 말은 중국에서는 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이전에 관아에 붙여 쓰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사(寺)로 불리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후한명제(後漢明帝) 연평(永平) 10년(67)에 인도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스님이 흰말에다 장경(藏經, 경전)을 싣고 후한의 서울인 낙양(洛陽)에 왔다고 합니다. 그 때 후한에서는 두 스님이 외국인이므로 관례에 의해 외국인을 위한 외무부 소속 관아(官衙)인 홍려사(鴻廬寺)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두 스님이 계실 마땅한 곳이 없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홍려사라는 이름을 두 스님이 타고 오신 흰말을 기념하여 백마사(白馬寺)라고 고쳐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국에 있어서 사찰의 효시라고 합니다.그 뒤로 중국에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승가(僧伽)들의 거처를 사(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원(院)이라는 말은 원래 주위에 둘러친 담을 말하는데 이것이 변하여 주원(周垣), 회랑(回廊)이 있는 건물을 의미했으며, 관사의 이름에도 쓰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시대에 칙명에 의하여 대자은사(大慈恩寺) 등에 번경원(번經院)을 세웠는데 이것이 불교와 관련된 건물에 원(院)이라는 이름을 붙인 효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송나라 시대에는 날에서 세운 큰 사찰에 원호(院號)가 붙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寺)를 절사(寺)라고 읽는데 절은 오로지 불교의 가람을 뜻하고 있습니다. 절(寺)은 흔히 절에 가면 절(拜禮)을 많이 해야하므로 절(拜)이라고 한다고 하고, 일본이인 지은 책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오게 한 것으로, 2년 뒤에는 다시 진(晉)으로부터 아도(阿道)가 들어와 다음해 2월 나라에서는 성문사(省門寺, 또는 肖門寺)를 지어 순도를 있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가람이라고 합니다.
또한 신라에서는 제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의 모례의 집에 와 머물면서 몰래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모례는 원래 국어의 ꡐ털례ꡑ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 ꡐ털례ꡑ의 집에 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교인들이 모여서 믿음을 행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털례의 집은 가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부처님을 모시고 불교를 행할 수 있는 집을 ꡐ털례ꡑ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ꡐ털례ꡑ가 절로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사(寺)를 일컫는 데라(寺)도 털례에서 변천된 것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사찰의 구조-전각/문/요사/탑
사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승원(僧院)과 당(堂)입니다. 당은 일반적으로 사원의 중심이 되는 불당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는 ꡐ금당ꡑ 또는 ꡐ법당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 당이라는 것은 불상을 봉안한 불당이나 법당 뿐만 아니라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과 강당 등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당은 불상을 봉안하고 불교의 각종 행사를 봉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강당은 경과 율을 강설하고 연구하는 장소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 사찰구조는 탑을 중심으로 건축물이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건축물들의 이름은 그곳에 모셔진 부처님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습니다.
사찰은 부처님의 존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며 모든 불자들의 수행과 전법의 중심이 되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찰의 규모에 따라 사찰, 절 또는 암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가람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나라 전통의 사찰 구조는 탑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주요 건축물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그 각 전에 모셔진 불상에 따라 그 전(殿)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대웅전(大雄殿)․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전은 선종(禪宗) 계통의 사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불(本尊佛)로 모시는 본당(本堂)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웅전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법당으로, 큰 힘이 있어 사마(四魔)를 항복시킨다는 뜻에서 붙여진 부처님의 덕호(德號)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한 분만 모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좌우에 협시(脇侍: 좌우에서 모시고 시중드는 보살)보살을 두고 있습니다. 협시보살을 함께 모시는 경우, 사바세계의 교주인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문수보살(文殊菩薩), 오른쪽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로 봉안하는 것이 우리 나라 사찰의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협시 보살은 부처님보다 격이 한층 낮은 분이기는 하지만 이미 부처가 될 수 있는 수행의 경지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왼쪽에 있는 보살로 지혜를 완전히 갖춘 보살로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며 부처님의 교화를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보살이라고 합니다. 지혜를 나타내는 여의주나 칼, 청연화를 들고 있으며 청사자를 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보현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오른쪽에 있는 보살로 부처님의 행원(行願)을 상징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도우며 특히 중생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연꽃을 들고(연꽃 위에 경책을 얹기도 합니다) 흰 코끼리를 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기 때문에 탱화도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봉안한다고 합니다. 탱화는 벽 같은 곳에 걸도록 하는 그림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 그림에서 족자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가장 보편적으로 애용되던 것이 탱화이며 전국의 사찰에서 이 탱화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후불탱화에는 좌우 협시보살로서 문수, 보현보살 또는 제화갈라, 미륵보살을 모시며 순서에 따라 10대 제자를 모두 배치하기도 합니다. 투타제일의 대가섭, 다문제일의 아난, 지혜제일의 사리불, 해공제일의 수보리, 설법제일의 부루나, 신통제일의 목건련, 천안제일의 아나율, 논의 제일의 가전연, 지계제일의 우바리,밀행제일의 라후라 등 10대 제자를 모두 조성하고 있는데, 가섭은 노인의 모습으로 흰 눈썹을 다서 길게 그리며, 아난과 라후라는 청년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좌우 가장자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존상을 표현할 때는 불․보살의 몸은 금색이나 황색을 주로 사용하고 대범천왕, 사천왕, 8부금강, 8부중 등 기타 여러 존상들은 그 존상의 특성에 따라 피부색을 다양하게 표현하기도 하며, 손에 드는 지물이 없고 별다른 수인을 취하지 않는 경우에는 합장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웅전(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 법당)을 대웅보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대웅보전에는 대웅전과는 다르게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삼존(三尊) 모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시는 경우에는 그 부처님을 삼존불(三尊佛)이라고 합니다. 협시 보살과는 달리 세 분 부처님은 격의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똑같이 거룩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존불의 좌우에 다시 협시보살을 두어 불단(佛壇)을 장엄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삼세불(三世佛)을 모시는 대웅전도 있는데, 삼세불이란 현재.과거.미래 세계의 부처님을 말하며 이분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신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세계를 대표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운데 모시고 왼쪽에 미래를 대표하는 미륵불(彌勒佛)을 오른쪽에는 과거를 대표하는 정광불(定光佛, 연등불이라고도 하는데 오랜 예날에 출현하여 석존에게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여 중생을 재도하라는 수기를 주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을 모시게 됩니다.
또한 대웅전에 삼신불[三身佛]을 모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삼신불이란 법신불(法身佛, 영원 불변의 진리를 몸으로 한 부처님), 보신불(報身佛, 오랜 수행의 과정을 거쳐 얻은 무궁무진한 공덕을 몸으로 한 부처님), 화신불(化身佛,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하는 부처님의 몸)을 일컫는 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선종(禪宗)의 삼신설에 따라 법신불로 비로자나불(昆盧庶那佛)을 모시고, 보신불로 노사나불(盧舍那佛)을 화신불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봉안하는 것이 대부분 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삼신불을 봉안하고 있는 사찰은 화엄사상을 중요시하는 사찰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찰에 따라 시대에 따라 대웅전이나 대웅보전에 모시는 본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같으나 좌우에 모시는 보살이나 부처님 등은 여러 가지로 변화가 많았다고 합니다.
영산전․ 팔상전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하여 모신 곳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또는 500나한을 모시기도 하고, 영산회상도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하기도 하는 곳입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나누어 탱화나 존상으로 모신 곳으로, 팔상탱화를 봉안하고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함께 좌협시 미륵보살을 모시고, 우현시에 제화갈라보살(본래 정광불, 또는 연등불 여래라고 하며 아득한 과거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에 장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신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팔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열반까지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수마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 대광명전)
비로자나불(毘盧慈那佛)을 모신 전각을 ꡐ대적광전ꡑꡐ대광명전ꡑ이라고 합니다.
안에는 보통 비로자나불 뿐만 아니라 삼신불(三身佛)을 모시는 것이 보통인데 대웅전과는 달리 가운데 비로자나불을 안치하고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엄전ꡑ이나 '비로전ꡑ에는 비로자나불 한 분만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비로자나불은 현상 세계에 나타난 모든 부처님의 원래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진신(眞身) 또는 법신(法身)을 뜻하는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처님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법신 즉 법을 몸으로 하는 광명의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법신이란 빛깔이나 형상 등으로 나타낼 수 없는 가장 근본적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주와 인생 삼라만상이 생성 소멸하는 것을 관장하고 우주와 인생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원리와 법칙을 불교에서는 ꡐ법ꡑ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법을 몸으로 갖춘 부처님이 바로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부처님인 동시에 모든 부처님과 삼라만상의 근원인 부처님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천엽연화[千葉蓮華]의 단상에서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으로 지권인[智拳印]을 나타내는 특색 있는 불상으로 형상화되었다고 합니다.
비로자나불은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무엇이든 기도하고 갈구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셔서 모든 중생을 제도해 준다고 하며,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의 세계는 특별한 부처님의 세계가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라는 하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은 삼신불(三身佛) 중의 한 분인데 삼신불이란 청정 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慈那佛)과 원만 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을 일컫는 것입니다. 법(法)은 영겁토록 변하지 않는 만유의 본체, 진리, 원리를 뜻하는 것이고, 신(身)은 쌓이고 모인 것이라는 뜻으로 법신(法身)이란 만유의 본체가 쌓이고 모인 것이므로 형상도 빛깔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불(理佛, 진리의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불을 인격화하고 의인화하여 형상화 한 것이 바로 비로자나불상입니다.
노사나불을 보신(報身)이라고 하는데 보신이란 과보의 몸이라는 뜻으로 인(因)에 따라 어려운 수행을 견디고 정진한 노력의 결과로 얻은 유형의 불신으로서 아미타불과 같은 부처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에서 화신이라는 말은 응신(應身)이라고 하는데 이는 보신불을 보지 못하는 이를 제도하기 위해서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신불은 본래 다른 것이 아니고 삼신이 일신이고 일신이 삼신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은 법신과 보신도 함께 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에서 만 가지 법이 생기므로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뒤에는 화엄[華嚴]의 세계를 그린 ꡐ비로자나후불탱화ꡑ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아미타전(阿彌陀殿)
극락전의 중앙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데 아미타불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세계에서 늘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하는 부처님이며 이를 상징하는 뜻으로 극락전을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도 하고, 또 극락세계에서는 수명이 무량하므로 무량수전 [無量壽殿]이라고도 합니다.
극락세계는 서쪽으로 한없이 많은 국토를 지나서 한없이 먼 곳에 있는 나라인데 현재도 아미타불이 그곳에서 설법을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사람은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오직 즐거움만이 넘쳐 흐른다고도 합니다. 극락세계의 집에는 7겹의 난간과 7겹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무 기둥이 있으며, 그 난간과 기둥은 방울과 금, 은, 유리, 수정 등으로 아름답게 장식 되어 있고, 네 가지 보석 외에 산호, 노마, 호박을 더한 일곱 가지 보석으로 만든 연못이 있어 그 연못에는 여덟 가지 공덕을 구비한 물과 모래가 깔려 있다고 합니다.
또 하늘에서는 늘 음악이 은은히 들려 오고 땅은 황금색으로 아름다우며 밤과 낮으로 세 번씩 천상에서 향기로운 꽃이 떨어지고, 백조와 앵무새 공작 등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노래이며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게 되고 착한 일을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질병과 미움과 싸움과 배고픔과 춥고 더움이 없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인의 이상향입니다. 극락전은 바로 이러한 극락세계를 묘사한 전각이며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전각입니다. 극락세계가 서쪽에 있으므로 극락전은 보통 동향집이며 참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아득히 먼 옛날에 법장(法藏)이라는 이름의 보살이었다고 합니다. 법장보살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세우고 살아 있는 모든 자를 구제하고자 마흔 여덟 가지의 원을 세워 한없이 긴 세월동안 고된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원을 모두 이루어서 극락세계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脇侍)보살을 모시는데 관세음보살(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보살이며 병들고 고통 받는 중생 앞에 나타나서 고통과 괴로움을 덜어 주는 자비의 화신인 보살입니다. 남쪽 바닷가 보타락가산이 처소라고 합니다.)과 대세지보살(지혜의 광명을 놓아 모든 중생을 비추어 삼도를 여의고 위 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로 발을 크게 디디면 3천대천세계와 마군의 궁전이 진동하는 큰 힘과 위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 정수리에 보병을 얹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후불탱화로는 주로 극락정토를 잘 묘사한 극락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약사전(藥師殿)
약사 여래는 약왕[藥王] 약사유리광 여래[藥師琉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르는데,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라고 합니다.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신 곳이 바로 약사전(藥師殿)입니다. .
<약사경>에 의하면 그는 동방 정유리세계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두루 고쳐 주고 중생을 재앙으로부터 구해 주며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상보리를 얻게 하는 능력을 가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또 그는 과거 세상에서는 약왕[藥王]이란 이름의 보살이었는데,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그것들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12 가지의 큰 원을 세워서 수많은 세월 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모두 이루어서 부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약사 여래의 명호를 열심히 부르면 옛 사람들이 괴롭히든 외적의 침입에서도 구제 받을 수 있고 극락 왕생도 이룰 수가 있다고 해서 약사 신앙은 넓고 넓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약사 여래 신앙은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유행되었고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과 함께 우리나라 4대 신봉불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약사전(藥師殿)은 보통 동향으로 짓고 그 안에 약사여래를 모시며 협시불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 약사 여래의 덕과 광명이 두루 밝다는 것을 밝히는 일을 하며 약사 래가 하는 일을 모두 돕고, 몸은 육색이며 붉은 연꽃 위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약사 여래의 교화를 도우며 모든 중생의 고통을 안락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보살로 몸은 황색이며 왼손 위쪽에 반달형의 청연화를 가지고 있고, 무량 무수한 보살들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을 모시고 있습니다. 두 분 보살 외에도 방대한 약사여래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궁비라(宮毘羅), 벌절라(伐折羅), 미기라(迷企羅), 안저라(安底羅), 알편라(알偏羅), 산저라(珊底羅), 인타라(因陀羅), 파이라(波吏羅) 마호라(摩虎羅), 진달라(眞達羅), 초두라(招杜羅), 비갈라(毘갈羅)의 열 두 분의 나한(羅漢)을 거느리고 있다고 합니다.
약사 여래는 이들 나한들의 도움으로 억만 중생의 소원을 모두 들어 주고 그 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약사전의 탱화를 잘 보면 이들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약사 여래상은 보통 선정인(禪定人)을 취한 수인(手印)위에 약함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후불탱화로는 약사 여래가 사는 정토를 그린 동방 약사여래유리광 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건물 내부는 대웅전과 같이 닫집을 만들고 천장은 우물 정자형이며 주위에는 연꽃과 비천 등으로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용화전(龍華殿)․ 미륵전(彌肋殿)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이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사찰 당우 중의 하나로 미륵불이 출현하는 곳이 용화세계의 용화수 아래이므로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며 미륵존상을 모신다고 하여 미륵전이라고도 합니다.
용화전 안에는 현재 도솔천에서 설법하며 내세에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할 미륵보살 을 봉안하거나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게 될 미륵불을 봉안하게 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미륵불은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때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처럼 항마촉지인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나 미륵부처님의 서 있는 모습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불탱화로는 용화회상도를 봉안하고 있는데 이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 뒤 3차에 걸쳐 설법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내용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륵 보살은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부처님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서 천인들에게 설법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륵보살이 성불을 하지 않는 네 가지 이유는 국토를 정화하고, 수호하며, 중생을 정화하고, 중생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부처님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륵(Maitreya)이라는 말은 원래 ꡐ친우(mitra)ꡑ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ꡐ마이트리아(Maitreya)ꡑ는 자비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미륵 보살을 자씨 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합니다. 관세음 보살을 대비 보살(大悲菩薩)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륵신앙에는 경전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발전해 왔는데 하나는 ≪미륵상생경≫에 의한 상생신앙이고, 또 다른 하나는≪미륵하생경≫에 의한 하생신앙입니다. 상생신앙은 미륵부처님이 계신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신앙이고, 하생신앙은 미륵부처님이 하루 속히 이 땅에 나타나시기를 바라는 신앙입니다. 미륵부처님은 아직은 부처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미륵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미륵전에는 미륵부처님과 협시보살로 법화림보살과 대묘길상보살 혹은 묘향보살과 법륜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천불전(千佛殿, 불조전)
천 분의 부처님을 모셔 놓은 전각을 천불전이라고 합니다.
천불에는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현재 천불을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탱화로 모실 때는 삼천불을 모두 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천불을 모시게 된 것은 다불사상(多佛思想)의 영향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천불전에는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위시하여 누지불까지 현겁천불을 모시며, 과거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의 삼천불을 모시는 사찰도 있습니다.
원통전(관음전)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사찰 당우 중의 하나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사찰의 중심이 되는 불전일 경우에는 원통전이라고 합니다.
원통전이란 명칭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입니다. 반면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사찰에 대웅전이 있는 경우에는 관음전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지는데 이는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만 아니라 관음보살의 서원이 철두철미 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관음전 내에는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연화좌 위에 앉은 관음상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 보관위에 11개의 다른 모습을 가진 십일면관음, 그 밖에 해수관음, 백의관음, 용수관음, 천수관음 등을 모시기도 합니다.
후불탱화로는 양류관음도, 백의관음도,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 등 모셔진 관음상의 모습에 따라 후불탱화를 봉안한다고 합니다. 또 관세음보살을 협시하고 있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은 조각상으로 봉안하기 어려우므로 거의 후불탱화로 봉안한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하면 갖가지 고뇌를 가진 무량 백천만억의 중생이 관음보살의 명호를 듣고 일심으로 부르면 그 음성을 관(觀)하여 모두를 해탈케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이나 미래불인 미륵불과는 달리 현실세계에서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불교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등 고난에 처해 있는 어떤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을 마음으로 부르면 고통을 피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명부전(冥府殿)․지장전(地藏殿)
관세음보살과 함께 중생구제의 큰 원력으로 많은 대중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는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을 지장전 혹은 명부전이라고 부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의 구세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그 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외에도 염라대왕을 위시한 지옥의 10왕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미륵부처님이 출현하실 때까지 육도윤회의 현실세계에서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고 합니다. 흔히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대원본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고 합니다.
지장보살의 형상은 본래 보살의 모습으로 보관과 영락으로 장엄한 모습이었으나 ≪지장십륜경≫에 의하여 차츰 삭발을 한 사문의 모습으로 모셔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문형의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깨뜨린다는 육환장(석장)과 ꡐ장상명주ꡑ라는 어둠을 밝히는 보주를 들고 있는데, 석장의 여섯 고리는 육바라밀을 상징하고, 육환장의 윗부분에는 화불을 모시기도 하는데 그 부처님은 지장원찬 23불의 첫 번째인ꡐ각화정자재여래ꡑ라고 합니다.
도명존자는 ꡐ환혼기ꡑ라는 중국의 영험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설화에 나타난 도명존자는 중국의 양주에 있는 개원사의 스님으로 우연히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다고 하고, 무독귀왕은 지장보살의 전생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재수보살의 전신이라고 합니다.
지옥시왕 중 진관왕은 도산지옥에 살며 칼산에 떨어지는 형벌을 내리며, 초강왕은 화탕지옥에 살며 끓는 물에 담그는 형벌을 내리고, 송제왕은 한빙지옥에 살며 얼음 속에 묻는 형벌을 주고, 오관왕은 검수지옥에 살며 칼로 몸을 베는 벌을 내리고, 염라대왕은 발설지옥에 살면서 집게로 혀를 빼는 형벌을 내리고, 변성왕은 독사지옥에 살면서 독사로 몸을 감는 벌을 주고, 태산왕은 거해지옥에 살면서 톱으로 몸을 자르는 벌을 주고, 평등왕은 철상지옥에 살고 쇠판에 올리는 벌을 주며, 도시왕은 풍도지옥에 살면서 바람 길에 앉히는 벌을 주고, 전륜대왕은 흑암지옥에 있으면서 암흑 속에 가두는 형벌을 준다고 합니다.
응진전(應眞殿)․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응진전이라고도 하며 영산회상(靈山會上)의 모습을 재현하여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는 10대 제자 혹은 16나한 혹은 500나한을 모신 전각입니다. 우리 나라의 응진전 가운데 500나한을 모신 곳으로는 경주 기림사의 나한전과 연천 은해사의 거조암, 전주 송광사의 나한전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응진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시기 위한 전각이지만, 모두 부처님의 제자이므로 주존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협시보살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과거불인 정광여래의 화신인 제화갈라보살과 현재불인 석가모니 부처님, 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모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상징하고 그 좌우로 8위씩 16나한을 모시거나 500나한을 모시는 것입니다.
'나한ꡑ이란 인도의 예말 아르하트에서 온 말로 아라한 또는 줄여 나한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ꡐ응공, 무학, 응진ꡑ이라고 합니다. 존경 받을 만한 분, 공양 받을 만한 분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처음에는 ꡐ아라한ꡑ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보통은 16나한을 모시지만 18나한을 모시는 경우도 있으며, 빈도라발라사, 가낙가벌차, 가낙발리타사, 소빈타, 낙거라, 발타라, 가리가, 벌사라불다라, 술박가, 반탁가, 라호라, 나가서가, 인게타, 벌나바사, 아시다, 주다반탁가를 16나한이라고 부릅니다.
나한은 부처님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독특한 표정으로 자유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한은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고, 민간신앙에서는 나한에 대한 무수한 설화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서민들의 기복신앙으로 자리잡아 왔습니다.
조사전(祖師殿), 국사전(國師殿)
조사전은 조사스님이나 사찰의 창건주, 역대 주지스님 등 각 사찰과 관련하여 후세에 존경받는 스님들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전각입니다. 사찰에 따라서는 조당, 조사당, 국사전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삼성각(三聖閣, 칠성 독성 산신)
삼성각은 칠성과 독성(나반존자), 산신을 모셔 놓은 전각으로 세 분을 한 곳에 모셨을 때는 삼성각이라고 하고 나누어 모셨을 때는 독성각, 산신각, 칠성각이라고 합니다.
독성각은 나반존자를 모시는 전각입니다. 이 나반존자는 남인도의 마리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고 있는 성자이기 때문에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을 독성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반존자는 삼명(三明)과 자리이타의 두 가지 이익(二利)를 갖추고 있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남김없이 알고 있는 분으로 이 삼명의 능력으로 자리와 이타의 진리를 원만하게 이룬다고 합니다. 민간신앙에서는 부처님의 명을 받아 열반에 들지 않고 남인도의 마리산에서 불멸 후 중생을 제도하도록 되어 있어 주세아라한이라고도 합니다.
산신각은 원래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민족 고유의 토속신앙으로 불교가 재래 신앙을 수용할 때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의 일부를 산신에게 부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찰이 산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일종의 외호신중으로 산신령을 모시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간신앙에서는 산에 사는 영물로 호랑이를 산군으로 모시기 때문에 산신은 언제나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칠성각(七星閣)은 수명장수신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을 봉안한 전각입니다. 북두각이라고도 하는데 칠성은 원래 도교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중국에서 형성된 다음 우리 나라에 유입된 신이라 하며, 칠성을 주존으로 하는 치성광여래를 모시는데, 손에 금륜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있습니다. 칠성탱화의 구도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는데 칠원성군만 그리는 경우와 치성광여래와 좌우의 협시보살과 칠원성군을 그리고 나서 칠성여래와 자미대재 태산노군(남극노인)을 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삼태 6성, 28숙 등 수 많은 권속들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고, 칠원성군이나 칠성여래를 각각 1위씩 7폭으로 그려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독성각, 삼신각, 칠성각은 우리나라 초기 불교 전래시부터 사찰 속에 자리잡은 것은 아니라 조선시대 중기 무렵부터 사찰 속으로 정착한 재래 신앙이라고 합니다..
문(門)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이란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山門)중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문입니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네 곳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덮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에 세운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독특한 형식의 건축물로 기둥을 일렬로 세운 일주문이 상징하는 뜻은 모든 진리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일심(一心) 작용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불교의 근본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산과 바다세계와 인생 정신과 물질, 부처와 중생, 너와 나, 사랑과 미움 등 우주에 존재하는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것이 일심 동체로서 그 근본은 오직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는 뜻이 일주문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일주문에는 보통 사찰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사찰 이름 앞에는 그 사찰이 자리잡은 산 이름도 함께 적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비로서 사찰 경내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천왕문(天王門)
사천왕문은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문으로 천왕문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곳으로서 여기에 사천왕의 조상이나 그림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하던 귀신들의 왕이었는데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천왕은 여러 단계의 천상계(天上界)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천왕천(四天王天)에 살며, 그 나라의 왕인 제석천왕(帝釋天王)의 지시에 따라 사천왕천의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수호신입니다.
또 사천왕과 그 부하들은 온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이 세상의 선악을 모두 살펴서 그 결과를 매월 8일에는 사천왕의 부하들이 14일에는 사천왕의 태자들이 15일에는 사천왕 자신들이 제석천[帝釋]에게 직접 보고하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불이문(不二門)
사찰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 대웅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이 바로 불이문(不二門)입니다. 불이(不二)라는 말은 ꡐ둘이 아니다ꡑ라는 뜻으로 진리 그 자체를 표현한 말입니다.
일체의 모든 평등하고 원만한 진리가 이 문을 통해서 재조명되고,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아니며 하나를 깨달으면 백 가지에 통달할 수 있다(一通百通)는 것이며,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며, 부귀와 가난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결과가 다르게 보여도 근원을 찾아가 보면 모두가 하나일 뿐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생과 사가 다른 듯해도 생이 있으므로 사가 있고 생 속에는 이미 죽음이라고 하는 도달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이(不二)의 경지에 도달하면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이문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불이문은 금당과 가장 가까운 곳에 만들고 그곳을 지나면 부처님 모신 곳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세운다고 합니다..
요사(療舍)
요사는 스님들이 생활하시는 건물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입니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 일하는 곳, 공부하며 기거하는 곳을 모두 요사라고 함으로 사무실이나 후원, 객실, 창고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요사의 명칭은 여러 가지를 사용하여 현판을 붙이는데 올바른 수행과 참선을 하는 장소하는 뜻으로 해행당(解行當), 수선당(修禪當)이라는 현판을 붙이기도 하고, 지혜의 칼을 찾는 공부를 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심검당(尋劍當), 부처님을 선출하는 장소라 하여 선불장(選佛場)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합니다..
탑(塔)
탑은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Stupa), 또는 빨리어로 투파(Thupa)라고 합니다. 원래는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봉안하고 그 위에 흙이나 돌을 높이 쌓아 만들었던 것이 최초의 탑의 기원이며, 이것을 번역하면 무덤, 묘(廟), 영지(靈地)를 의미합니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입멸하신 이후 여덟 나라의 국왕이 부처님 사리를 8등분하여 각기 자기 나라에 탑을 세우고 봉안했다고 하며, 이것이 불교에서 탑의 기원입니다. 후세에는 사리가 들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쌓아 올려 탑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전탑, 우리 나라에서는 석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발달하였습니다.
탑은 초기불교에서 신앙의 중심이었으나 제한된 사리 수와 유물, 유품의 한계로 탑의 건립이 어려워지자 예배의 대상으로 불상이 조성되었고, 그 불상으로 신앙의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탑은 여전히 부처님의 진신에 귀의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도량을 장엄하고 있습니다. 탑은 양식상으로 3층, 5층, 9층, 13층 등으로 분류됩니다.
금강계단(金剛戒壇)
계단의 본래의 목적은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장소로써, 수계자를 중앙에 앉히고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 앉아 계법을 전수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묘탑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계단은 대승계단이라는 신앙표현의 한 조형물로 사부대중의 호계를 위해 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로는 통도사, 개성의 불일사, 대구의 용연사, 금산사 등에 있었으나,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금산사의 방등계단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석등(石燈)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시설물로서 연등의 의미를 상징한 것인데, 후대에 이르러서는 불전 앞이나 탑 등에 설치하는 가람배치상의 기본 건축물로 변천하였습니다.
부도(浮屠)
고승의 사리를 모신 조형물로 붓다(Buddha)가 어원입니다. 가람배치 구조와는 별도로 건립되었으며, 조상숭배를 중시하는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하였습니다.
부도와 탑을 비교해 보면 양자가 사리를 봉안한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형태는 매우 다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또 건립 위치도 탑이 사찰의 중심 위치인 법당 앞에 세워지는데 반해, 부도는 사찰 경내의 변두리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지며 이를 부도전이라 일컫습니다..
법당의 구조-상단/중단/영단
법당은 통상 상단, 중단, 영단의 삼단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상과 보살상을 모신 상단,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 선신들을 모신 중단, 그리고 영가를 모신 영단이 그것입니다.
상단(上壇)
법당의 어간문에서 바라볼 때 정면에 가장 높은 단상을 설치하고 그 중앙에 부처님상을 모시는데 이 단상을 상단이라고 하며, 부처님과 보살상을 모셨기 때문에 불보살단(佛菩薩壇)이라고 합니다. 혹은 줄여 불단(佛壇)이라고 합니다. 이 상단에는 그 절의 본존불상과 후불탱화를 모시는게 상례입니다.
중단(中壇)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신 신장단(神將壇)을 중단이라고 합니다. 여러 신장님을 모신 단상이기 때문에 신중단(神中壇)이라고도 합니다. 제석천이나 사천왕, 대범천 등의 천상 신중과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가루마, 마후라 등 팔부신장 등을 모신 곳입니다. 또한 우리 민속신앙에 의해 칠성과 산신이 모셔져 있기도 합니다.
영단(靈壇)
영가(靈駕)의 위패가 모셔진 단상이며, 후불탱화로서 통상 아미타여래영도와 감로탱화가 모셔져 있으며 이곳을 하단(下壇)이라고도 합니다.
{불상의 종류}
불상의 구분
불상은 일반적으로 여래상, 보살상, 신장상, 나한 및 조사상으로 구분합니다. 여래상은 나발형태를 하고 있으며, 보살상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지장보살은 예외), 천의(天衣)와 목걸이, 귀걸이 등 장엄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신장상은 주로 무장한 모습을 하고 있고, 조사상은 스님의 모습입니다.
여래상은 부처님의 상입니다.
역사적으로 인도 북쪽 카필라국의 태자로 태어나 출가하여 35세에 부처님이 된 석가모니불을 말합니다.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특히 대승불교시대가 되면 수 많은 부처님이 등장하게 되고 다양한 불상이 조성됩니다. 이들 무수한 불상은 비록 명칭이 다양하지만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격(佛格)이 그 모습에 그대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불(佛)의 격은 착한 일을 한 공덕이며, 보통 32상(相), 80종호(種好)라는 기본되는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즉 상이 원만해야 하고 육계와 백호가 있어야 하며, 옷은 법의(法衣)를 입고 장엄구(莊嚴具)가 없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이것을 조각으로 나타내면 대좌(臺座)에 앉거나 서며 등뒤에 광배(光背)를 두게 됩니다. 이것은 불교의 3부 구성이라 할 수 있는데 불상의 기본적인 구성요소 입니다. 불신의 머리에는 머리칼, 라계 또는 소계의 육계가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白毫),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며, 옷은 삼의(三衣)를 입고, 손은 여러가지 인상(印相)을 짓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형식에 따라 단독상, 삼존상, 병좌상으로 자세에 따라 입상, 좌상, 와상, 유행상 등으로 나뉘어지고, 좌상에도 결가부좌, 반가부좌, 의좌 등 다양합니다.
불상은 무수하리만치 많고 매우 다양하게 분류됩니다.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상과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불이 있으며 이것이 확대되어 각각 천불이 되어 모두 삼천불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사방불, 49불, 53불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불상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이 조성된 것이 석가여래, 아미타, 미륵, 비로자나, 약사여래 등입니다.
부처님 상-석가모니불/아미타불/비로자나불/미륵불/악샤여래
부처님상은 수인과 가사, 그리고 좌보처, 우보처 협시보살에 의해서 구분하며 각 사찰의 법당 명칭으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 선정인, 전법륜인 등을 하고 있고 또, 가사를 걸친 우견 편단의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보처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또는 가섭존자, 아난존자로 되어 있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의 수인은 구품인을 하고 있으며 가사를 걸친 모습은 통견의 모습이고, 좌우보처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되어 있습니다.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은 진리를 표현하는 법신불로서 지권인을 하고 있습니다. 좌우보처로는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또는 아미타불, 약사여래, 미륵불 등 삼존불과 함께 다섯 부처님을 협시로 하고 있으며, 또는 문수,보현보살을 보처로 모시기도 합니다.
미륵불
미륵불은 전각 밖에 따로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사무외인 또는 여권인 등의 수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약사여래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소멸, 의복과 음식 등을 구족시키고자 하는 부처님으로 왼손에 약병 또는 약함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신장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좌우보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로 되어 있습니다.
보살상-관세음보살/문수보살/보현보살/지장보살
보살상(菩薩像)은 대체로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머리칼을 드리우며 장신구를 갖고 옷은 천의(天衣)를 걸친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보살은 부처님의 경지를 깨달은 분이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아직까지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 중생과 함께 있는 분입니다.
보통 보살상에는 단독상도 있지만 거의 협시상이며, 자세는 입상․ 좌상 등이 있고 좌상 가운데도 가부좌상, 의상, 반가부좌상 등이 있고 그 형태도 다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살은 여래상의 좌우보처로 나타나기 때문에 여래상을 보고 알 수 있으며, 손에 든 물건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고 관(冠)의 형태에 따라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다니며 연꽃, 감로수병 등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십일면 또는 천수천안의 모습도 있습니다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주로 왼손에 연꽃을 들고 사자를 탄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현보살
보현보살은 실천행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코끼리를 탄 모양이나 연화대에 올라선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은 대비원력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스님과 같은 모습으로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둘렀으며, 육환장을 들고 있습니다. 이 육환장 정수리 부분에는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습니다.
천부신장상
인도 재래의 신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이나 불교를 지켜주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상은 귀족 또는 장군의 모습, 온화한 모습, 진노하는 모습 등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천부신장상 가운데 유명한 것은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 제석천상 등이 있고 각종 명왕상(明王像)도 있습니다.
나한상(羅漢像) 및 조사상(祖師像)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같이 훌륭한 분들의 상을 표현한 것이 나한상이고, 큰스님 같은 분을 조각한 것을 조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두 스님상을 하고 있습니다. 나한상은 가섭존자, 아난존자 등 십대제자를 중심으로 5백나한, 1천 2백 아라한 등 많은 나한상이 있고, 조사상은 용수,무착, 세친, 현장, 원효, 의상, 자장 등 인도 중국과 우리 나라의 고승상입니다.
수인의 종류-선정인/항마촉지인/전법륜인/여원인/시무외인/광배와 대좌
불상의 손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덕을 나타내기 위하여 열 손가락으로 여러 모양을 만들어 표현한 것입니다.
인계(印契), 인상(印相), 밀인(密印), 계인(契印)이라고도 하며, 교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불상을 만들 때 함부로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부처님의 수인을 취해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수인은 여러 종류의 불상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수인의 종류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5인부터 아미타 부처님의 구품인(九品印),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권인(智拳印) 등 매우 다양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5인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정인(禪定印)
결가부좌 상태로 참선 즉 선정에 들 때의 수인입니다. 왼쪽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해서 그 위에 겹쳐 놓으면서 엄지 손가락을 서로 맞대어 놓는 형식입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부처님이 마귀를 항복시키고 성도한 뒤 당신의 깨달음을 지신(地神)에게 증명해 보라고 말하면서 지은 수인입니다. 선정인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위에 얹은 오른손을 풀어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전법륜인(轉法輪印)
부처님이 성도 후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며 취한 수인으로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 예가 많지 않습니다.
여원인(與願印)
부처님이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하는 덕을 표시한 수인입니다. 손의 모습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은 펴서 밑으로 향하며, 손 전체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모습입니다.
시무외인(施無畏印)
중생에게 무외를 베풀어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덕을 보이는 수인입니다. 손의 모습은 다섯 손가락이 가지런히 위로 뻗치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형태입니다. 이 시무외인과 여원인은 부처님마다 두루 취하는 수인으로 통인(通印)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불 입상(入像)의 경우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는 신령스럽고 밝은 빛을 상징화한 불상의 한 구성요소로 불신의 뒤 쪽에 표현한 것을 일컫습니다. 그 형태는 시대와 지역, 혹은 불보살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빛이 머리에만 비추는 두광(頭光, 圓光)과 몸 전체에 두루 비추는 거신광(擧身光, 全身光)이 있습니다.
대좌는 불보살상 및 조사상이 앉는 자리를 말합니다. 대좌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자좌(獅子座)와 연화좌(蓮花座)가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불교 회화}
모든 그림이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불화는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선을 추구하는 예술이 아니며, 불교적 이념에 입각한 주제를 그리는 성스러운 예술입니다. 따라서 좋은 불화는 기법이나 양식의 획기적인 업적보다 불교적인 이념이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표현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령 불교가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가장 성공적인 불화는 이 괴로움에서 해탈 할 수 있는 장면을 가장 멋지게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탱화와 경화
탱화는 비단 또는 베 바탕에 불보살님의 모습이나 경전 내용을 그려 벽 같은 곳에 걸도록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흔히 일반 그림에서 족자로 불리는 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려나 조선조 때는 가장 보편적이고 애용되었던 양식입니다.
탱화의 종류는 그려진 주제의 내용에 따라 상단, 중단, 하단 탱화로 구분됩니다. 상단 탱화는 전각의 상단 즉, 불전의 중앙에 모셔진 불보살상의 뒷면에 거는 탱화로서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불탱화 등이 있습니다. 중단 탱화는 불단의 좌우측에 있는 영단에 모시는 탱화로서 주로 신중이나 호법신 등을 그립니다. 하단탱화는 명부전의 지장보살, 시왕상 뒤에 모시는 탱화입니다.
경화는 불경에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그 경에 설하고 있는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통 변상도(變相圖)라고도 부릅니다. 이 경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직접 그린 사경화(寫經畵)와 나무나 금속의 판으로 인쇄한 판화(版畵) 등이 있습니다.
심우도(尋牛圖)
수행자가 정진(精進)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서 그린 선화(禪畵)로 그 과정을 10단계로 구분하고 있어 십우도 또는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합니다.
감로도(甘露圖)
조상숭배 신앙이나 영혼숭배 신앙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불설우란분경》을 그 근본 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영가단 탱화 혹은 감로탱화, 감로왕도라고도 합니다.
괘불(掛佛)
법당 밖에서 불교의 의식을 행할 때 걸어 놓는 예배용 그림입니다. 법당 바깥에 있는 당간지주 등에 내걸고 법회나 의식을 베푸는 것을 괘불재라고 하며, 괘불을 거는 것을 괘불이운이라고 합니다.
큰 재를 올릴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그 법회의 성격에 맞는 내용의 괘불을 걸게 됩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비는 영산재를 올릴 때는 영산회상도를, 그리고 예수재나 수륙재 때에는 지장회상도나 명부시왕도를 내걸게 됩니다.
변상도(變相圖)
부처님의 일대기 또는 불교 설화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변상도는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전생을 묘사한 본생도와 일대기를 나타낸 불전도, 그리고 서방정토의 장엄도가 그 기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 변상도의 특징은 복잡한 경전이나 심오한 교리의 내용을 한 폭의 그림에 압축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이해하고 불심을 일으키는 중생교화의 방편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법구法具}
법구는 즉 불구(佛具)라고도 하는데, 불법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의미하며, 또한 불전을 장엄하는 여러 가지 사물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법구는 법답게 다루어야 하며 필요한 때만 법식에 맞춰 사용해야 합니다.
사물
법구 중에서도 조석예불 때 울리는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이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의 사물이라고 합니다
법고(法鼓)는 법을 전하는 북입니다. 법고는 보통 쇠가죽으로 만드는데 짐승을 비롯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울린다고 합니다.
운판(雲板)은 청동 또는 철로 만든 넓은 판으로 원래 중국의 선종사찰에서 부엌이나 재당에 달아 놓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해 쳤다고 하나 차츰 불전사물로 바뀌었습니다. 운판이 울리면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제도하기 위하여 울린다고 합니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깎아서 물고기 모양을 만들고 배부분을 파내어 두 개의 나무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냅니다. 목어를 치는 이유는 수중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울린다고 하고, 물고기는 언제나 눈을 뜨고 살기 때문에 수행자는 늘 깨어 있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범종(梵鍾)은 일명 대종, 경종이라고 하며 조석예불과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28번을, 저녁에는 33번을 울립니다. 범종을 울리는 근본 뜻은 천상과 지옥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목탁(木鐸)
목어와 같이 주로 깨우침의 뜻이 있습니다. 목탁은 대중을 모으는데 사용하는 신호이기도 하며 모든 의식 집전에 가장 많이 쓰이는 법구 입니다.
처음에는 쇠로 만들어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나무로 만든 것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법구들은 거의 중국의 선종사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죽비
죽비란 중국 선원에서부터 대나무 통이나 뿌리로 만들어 쓴 것인데, 목탁과 같이 선방에 앉고 일어서고 입선과 방선, 그리고 공양 할 때 행동 통일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선방에서는 언제나 정숙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목탁보다 조용하고 간편한 법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발우(鉢盂)
발우는 부처님 당시부터 공양할 때 쓰던 밥그릇인데 오늘날에도 스님들이 소중하게 쓰시는 법구입니다.
즉 불기(佛器)와 같이 소중한 그릇입니다.
요령(搖鈴)
요령은 남방계통에서는 볼 수 없는 법구입니다.
본래 밀교계통에서 사용하던 도구로서 북방계통의 사찰에 전해져 지금은 모든 의식 집전에 없어서는 안될 법구입니다.
염주(念珠)
염주는 부처님께 기도하거나 절을 하면서 참회할 때 그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법구인데 보통 108 개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 부처님의 깨달음의 상징으로 신앙되고 있는 보리수 열매로 만들어 사용했으나, 지역에 따라 독특한 나무나 그 밖의 재료(율무열매, 용안주, 금강주, 다양한 보석 등)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법구입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