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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사상 선양과는 거리가 멀다
원통7리 소공원, 만발한 철쭉꽃 밭에 지은 집에서 한밤을 잔 것이다.
옥의 티라면 인제에서 원통을 바이패스(by pass)하여 한계령을 넘어가는 44번국도(설
악로)가 지근이라는 점.
전에 내설악을 오가던 너른 도로는 여기에서 북면소재지까지 구도로가 되고 말았다.
아침 7시 30분 출발.
북면소재지에서 걸어온 시간 만큼 늦게 기동한 셈이다.
44번국도의 개통으로 삼거리가 된 원통교차로에 들어서는데 도로변 제재소의 노파가
아침부터 무척 무료했나 쉬었다 가라며 붇들었다.
'늘 사랑이 가득한 집' 흔들의자에 앉혀 놓고 우유와 초코파이로 손님을 대접하는 그녀.
69세라는 노파는 75세 영감을 교통사고로 사별하고 자식들과 생활한단다.
휴일(석가 탄일)에 외로운 노모에게 집을 맡기고 모두 일찍 야유나간 자식들.
외로움이 온몸에 밴 표정인데 자식들은 느끼지 못하나.
엄나무잎차가 몸에 좋다며 앞 마당의 엄나무 잎을 마구 따주고, 다리아꽃이 아름답다며
뿌리를 캐주려고 애쓰는 노파.
오죽이나 마음 붙일 곳이 없으면 늙은 나그네에게 맘을 다 쓸까.
부처님 나신 오늘 절에라도 갈 것이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자식들 위해 집이나 지키고
있는 바보 할매.
그런데도, 자기 자식들에 대한 늙은 길손의 비판에 모정은 시무룩해 갔다.
멀어져 가는데도 망연히 서있는 할매.
말벗이라도 더 되어주지 못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사랑이 가득한 집이 아닌 것 같다.
석가탄일(음력 4월 8일/5월 17일)이 금요일이라 황금 3연휴가 시작되었다.
전국 대부분의 차량이 설악산으로 몰린 듯 길마다 차량 행렬로 줄을 잇고 있다.
원통8리를 지났다.
마을의 지형이 물고기 머리(魚頭) 같아 어두리냐 해발245m에 위치했으면서도 높은 산
깊은 골 때문에 어두워서 어두원리 인가.
44번도로 설악로는 어두교를 지나 한계교차로로 달린다.
설악휴게소가 차도 사람도 만원이고 관벌교차로도 사방으로 장사진이다.
그러나 옛 관청이 있었다 하여 관평이라 했다는 관벌마을을 지나고 북천(한계교) 건너
한계교차로는 한계령, 미시령 차량들만 바쁠 뿐 황량하다.
좁은 길목이었던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2006년 초에 개장했다는 인제온천이 죽은 후 더욱 그럴 것이다.
24시간 찜질방, 모텔, 휴게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연쇄 사망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개업과 휴업을 잇따라 하여 앞날이 불투명했다는 온천이었다.
자금력과 경영력이 모두 없는 한 사람의 과욕으로 인해 무수한 중소 관련자들이 막심한
피해만 입게 된 것이다.
진부령, 미시령 길 새 46번도로가 한계터널과 용대터널을 뚫고 달림으로서 북천과 함께
가는 고원통로는 초라한 옛길로 강등되었다.
46번도로는 정자문교차로에서 합류해 이합집산을 하며 십이선녀탕휴게소를 지난다.
용대관광지 교차로를 지나면 북천 건너에 백담사 만해마을이다.
용대리 내설악에 있으며 설악산 등산의 으뜸 들머리인 백담사(百潭寺)는 신라 때(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창건되었다는 고찰이다.
한계사 외 여러 이름이었다가 이조 영조때(1783)에 백담사로 바뀌었으며 3.1만세운동
33대표,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한 불교승려, 저항시인인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시집 '님의 침묵' 등을 집필했다는 절이다.
또한 전두환과 이순자 부부의 3년(1988년부터) 유배지다.
만해마을은 백담사 한참 전 초입에 있지만 만해 한용운(萬海)의 문학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 2003년에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설립했단다.
만해의 심오한 사상을 감히 논할 능력이 내게는 없으나 그가 승려의 결혼을 주장한 점
만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이 주장에는 공감한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근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
으므로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 뿐 불교의 궁극
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는가”(건백서 일부)가
만해의 주장이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지난 4월 초(2013년), 만해가 한때 교편을 잡았던 동국대학교에
만해마을을 기부했단다.
만해문학박물관, 만해학교를 비롯해 문인의 집, 심우장 등 6개동의 현대적 건물과 종각,
광장, 운동장 기타로 다양하게 구성된 200억대 시설을.
동국대학교는 10개의 시설로 이루어진 이 문화, 교육, 휴식 공간을 운영한다는데 얼핏
보아도 만해사상 선양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인종과 종교 국경을 초월한 실천과 개혁정신을 선양하기 위해"라면서도 시중 잡상인의
바가지 상혼이 통째로 배어있으니까.
풍력발전소는 다다익선이다
용대2리 식당촌 '국수네'에서 국수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휴전선 길에서 라면 외에는 처음으로 먹은 국수 메뉴가 비빔 보리밥을 곁들여서 먹을만
했으며 기회가 오면 또 먹어볼 것이다.(도로묵이 될까)
한데, 확장된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에 비하여 늘어난 식당촌은 간판만 요란할 뿐 왜
활기가 없어 보일까.
곳곳에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맥이 빠진 기분이니.
공휴일의 용대초등학교가 쓸쓸하기 그지없다.
평일이라 해도 그럴 것이다.
병설유치원까지 고루 갖추고 있으나 이 학교의 운명도 불투명한 것 같다.
58회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나 재학생 총원 44명에 교사 10명과 7명의 직원이라면 곧
학생수보다 교직원수가 더 많아지겠다.
평균치는 학년당 학생수 7.3명에 교사당 4.4명이지만 지난 2월 졸업생이 15명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학년별 재학생수가 역 삼각형 형일 것이다.
학령기 인구 유입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미구에 분교와 폐교의 수순을 밟게 되지 않을까.
서남동길에서 확인한 경상남도의 경우 1면 1교 외의 전교생 60명 이하인 소규모 학교는
통폐합 한다는데 광역지자체의 자립도가 최하위권인 강원도는 재력이 뒤따라 주는가.
불경기가 원인인가 사양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가.
용대리의 찜질방 문도 잠겨있다.
나 또한 10대로에서는 의존도가 100%였으나 이즈음에는 어쩌다 이용할 뿐이며 지출의
억제가 그 이유니까 경기의 침체로 보아야 할까.
성공적인 경제정책이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순환하도록 막인 곳을 뚫어주는 것이건만.
용대리에도 풍력발전설비가 들어섰다.
아주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좀 더 광범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쉽게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말과 실천이 따로따로지만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서도
걸핏하면 들먹이면서도 가장 낙후상태인 이 분야에 더욱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는 것.
나는 세계 4대 풍력발전 시장의 하나라는 스페인에서 2달반을 거의 매일 풍력발전 팔랑
개비 밑을 걷거나 원근에서 보면서 걸었다.
그리고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 있다.
장대한 칸타브리카 산맥(Cordillera Cantabrica)을 비롯해 무수한 산줄기에 한도 끝도
없이 서있는 풍력발전기지만 자연 파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자연 사랑의 실천을 최소의 훼손과 최선의 복원으로 한 결과일 것이다.
일하기 편하게 마구 파헤치고 복원은 시늉만 하는 우리와 본질적 차이점이다.
우리도 백두대간을 비롯해 많은 적합 산줄기와 해안에서 풍력발전에 의한 전기 생산의
비중을 끌어 올려야 한다.
풍력발전소는 다다익선이다.
환경단체들의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최소의 파괴와 최선의 복원에 철저를 기하면서.
산을 훼손하고 자연을 괴롭히는 주범은 어이없게도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이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하는 짓마다 파괴와 훼손의 결과만 낳는다.
더구나 온 국민이 휴양만 하고 살겠다던가.
이름난 산은 모두 휴양림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마구잡이로 파괴하는데 국민의 건강을
위함인가 장삿속인가.
진정코 국민을 위한다면 방사능 공포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벗어나도록 원자력발전소를
대체할 방도로 산간지의 풍력발전소 건설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백골병단 전적비 앞에서
용바우 아래가 되어 용의터 또는 용대동이라 했다는 용대리(龍垈)의 계절은 겨울이다.
용대리와 덕장은 동의어처럼 인식될 정도로 거대한 덕장마을이니까.
성수기인 12월부터 이듬해 이른 봄까지는 후조처럼 몰려들었다가 덕장 일이 끝날 때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때문에 지금(5월 중순)은 한가한 시기라 썰렁한 느낌이다.
덕장일대를 돌아보게 하는 미니열차를 운영하겠단다.
비수기에 대한 궁여지책인가 전라남도 곡성 기차마을의 벤치마킹인가.
또한, 도로사정의 획기적인 개선은 차량의 유입에는 성공하지만 지역 상권에는 도리어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기 쉽다.
정체가 심해야 머물게 되는데 원활한 소통은 대부분의 차량을 질주하게 하니까.
차량의 매연과 소음은 공해임이 분명하나 낙수(落穗) 또한 적지 않다.
한데도, 차량들의 진입을 막고 우회를 강요했다.
곧, 마을의 상권이 죽을 것은 명약관화다.
이번에는, 마을 도심을 지나가도록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만들어 놓은 우회로를 막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마을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 만사는 일리일해, 일해일리가 정한 이치건만 손해는 감수하지 않고 이익만 챙기겠
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분기 도로는 56번 미시령로인데 46번 진부령로가 갈려 나가는 형국인 용대교차로 지점.
북동쪽으로 뻗은 진부령로에 들어섰다.
용대교 지나 용대삼거리의 신선봉 자락 거북바위 아래(용대리산250-1)에는 '백골병단
전적비(白骨兵團戰跡碑)가 있다.
지금껏 보아온 무수한 전적비 앞에서 보다 더 숙연해지게 하는 전적비다.
적군으로 변장하고 적의 후방으로 침투해 적진 800리를 유린, 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용사들이다.
특히 대남침투중인 빨치산 사령관(인민군중장) 이하 지휘부 전원을 섬멸하는 등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전투에서 용전 분투해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산화한 호국의 군신들.
총원 817명 중 364명이 전사했으니 얼마나 애절하고 절통하고 통곡할 일인가.
더욱 안타까운 점은 동작동(58위)과 대전(3위)의 현충원에 위패 61위가 안치되어 있을
뿐 303위는 아직껏 행방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전략>
참전노병들이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스스로 성심으로 참여하여 억만금과도 비유할만
한 성금 5천5백여만원을 기금으로 영구히 이 사업을 계승케 하고자 한다> 는 '백골병단
기념사업회'의 '용대백골장학회'가 세운 '헌성비'가 읽는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이렇게 지켜낸 나라를 일부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군인들이 30여년을 농락했다.
그들이 뿌려놓은 악의 업보에서 벗어나려 해도 한 세월이 가야 하는데 그 값을 다 치루
기도 전에 또 그 악의 씨가 좌지우지하려 하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죽했으면 심복의 총에 죽고 이 옆 백담사로 유배왔을까 마는.
고개드는 진부령의 추억들
용대리황태마을 앞에서 북천을 따라가는 옛길을 버리고 용대1교, 2교를 지나, 우리나라
최북단 휴양림인 국립용대자연휴양림(연화동안보전시관) 입구(연화교)도 지났다.
진부령 4km지점을 지나면 북천 군계교다.
군계교를 건너서면 고성군 간성읍 흘리(高城郡杆城面屹里) 땅이다.
여기도 금강산 가는 길목이란다.
남북이 통일된다 해도 금강산 가는 길이 하도 많아서 선택하는데 고민 많이 해야겠다.
통일만 온다면 하도 고민을 많이 해서 검은 머리가 순백이 된들 어떠랴.
그 때에는 금강산이 목표가 될 까닭도 없다.
가다 오다 들를 정도가 될 것이니까.
진부령 고갯마루 직전, 알프스 스키장 입구 못미친 곳의 Yes! Ski샵이 방치되어 있다.
올 겨울에는 영업하지 않을 것인가 아예 폐업하고 말았나.
어느 쪽이라 해도 정리정돈하는데 무슨 힘이 든다고 저리 흉물스럽게 놔둘까.
겨울 또는 여름의 짧은 한철 장사는 늘 위험이 따른다.
하늘이 봐주지 않으면 아무리 날고 쏘는 상술을 가졌다 해도 성공할 수 없으니까.
내게 진부령의 추억은 다양하다.
백두대간 보다 진부령스키장이 먼저다.
진부령스키장이 개장된(1971년?) 직후부터 거의 해마다 갔을 것이다.
교통이 불편해 엄두를 내지 못할 때였는데 차를 가진 나를 놔둘 리 있는가.
대부분의 길이 비포장인 양평, 홍천, 인제, 원통, 용대리길을 따라서 진부령에 도착하면
스키 타기도 전에 파김치가 되고 만다.
변변한 숙소도 없었다.
대형 페치카(pechka)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으면 등짝은
늘 시베리아가 되기 때문에 앞뒤로 돌아앉기를 반복하며 소주잔을 나누었다.
그랬어도 그 때는 초면구면 가리지 않고 친소(親疎)가 따로 없고 필요한 것은 나눠 쓰고
모두 한 팀처럼 지냈다.
리프트시설이 없기 때문에 3분도 걸리지 않는 슬로프(slope)의 쾌감을 위해 30분 이상
진땀을 흘려야 했는데 산토끼처럼 올라가는 마을(흘리)의 청소년들이 부럽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사제(私製)스키로도 날세게 휘젖고 다니는 그들에 샘(?)이 나는 듯도 했다.
리프트 시설을 갖춘 스키장이 용평(평창)에 생김으로서 진부령길이 끊겼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리프트를 구비한 알프스 스키장으로 변신한 후 간혹 들르는 정도였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에서 남반도의 종점인 해발526m 진부령 고갯
마루를 처음 밟은 때는 2002년 6월 30일 정오다.
이후에 백두대간 남하와 북상 남하를 거듭하며 종주에서만 3번을 더 밟았다.
통한의 휴전선 길에서 다시 밟았는데 어쩌면 마지막 길일지도 모른다.
지리산을 떠날 때는 늘 진부령에서 바로 북상하게 되기를 열망하고 올라왔으며 생전에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희망적이었는데 지금 권력자들의 소행으로 보아 난망이겠다.
그런데, 진부령 고갯마루 광장은 왜 대수술을 받았을까.
진부령 표석을 비롯해 일체의 시설물이 새로 들어선 미술관 뒤로 쫓겨났다.
그리고 아주 을씨년스럽게 변했으며 음식점들도 완연하게 위축되었다.
고개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에 '백두대간진부령' 표석 하나가 새로 섰을 뿐.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의 소위 임사부절명시(臨死賦絶命詩)의 마지막 절이 생각났다.
저승 길에는 잘 곳이 없다는데 오늘 밤은 어느 집에서 잔다?(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나는 여느날과 달리 한기를 느끼게 하는 진부령 고갯마루에서 숙수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자를 어데서 찾아내는가를 고심하다가 한 결론을 도출했다.
백두대간 때와 서남동길 때 이용했던 속초의 해수찜질방으로 가는 것.
그리고 내일 아침에 빈몸으로 진부령에 돌아와 모처럼 배낭메지 않고 걸어보려고.
속초에는 진부령을 운행하는 버스가 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새로 선 진부령표석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가 한 중년 남녀의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되었다.
경상도 사투리로 미루어 승용차로 여행중임이 틀림 없는 그들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화진포로 가려 한단다.
화진포는 거진을 거쳐가야 한다.
초행인 그들에게 길 안내까지 하게 되었다.
경남 진해에서 여행 나온 그는 진해의 변호사 사무장 이성찬.
편승한 나도, 길 안내를 받은 그도, 모두 서로 고맙다고 인사하는 우리.
그는 진해에 오게 되면 꼭 전화해 달라며 명함을 주고 갔다.
나 또한 종장을 목전에 두고 모처럼 편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