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천수명 |
위 치 |
표고(m) |
보존상태 |
평균용출량 (㎥/일) |
용 도 |
이용시설 |
‘가마수’ |
대포항 서쪽 |
0.0 |
양호 |
2,000 |
미이용 |
없음 |
‘뱃물’(존자물) |
〃 동쪽 |
2.4 |
〃 |
1,200 |
〃 |
〃 |
‘구명물’(대포항) |
〃 북쪽 |
5.0 |
〃 |
4,350 |
농업용 |
보호시설 |
‘똥낭물’ |
〃 서쪽 |
6.0 |
〃 |
100 |
미이용 |
없음 |
‘가운데물’ |
〃 가운데 |
0.0 |
위치 멸실 |
- |
- |
고갈/멸실 |
‘도욕샘’ |
약천사 경내 |
44.2 |
양호 |
3,100 |
생활용 |
집수/보호시설 |
‘구명물’(약천사) |
〃 |
53.7 |
〃 |
10,220 |
〃 |
보호시설 |
‘선궷내물’ |
약천사 서쪽 |
48.6 |
〃 |
12,000 |
농업용 |
없음 |
‘동수’ |
법화사 서남쪽 |
144.0 |
〃 |
400 |
미이용 |
보호시설 |
※ 자료 출처:제주도, 1999, 제주의 물, 용천수.
① 선궷내물
약천사 서남쪽 해안도로 다리가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2~300m 올라가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암반 틈 여러 곳에서 샘물이 솟아난다. ‘선궷내’ 물에서 가장 용출량이 많은 곳은 구시목 바로 위에 있는 ‘엄장알물’이다. ‘엄장알물’은 과거 ‘검자리’, ‘동골왓’ 일대의 논 농사에 이용되었다. ‘검자리’ 일대를 논으로 개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5년 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당시 ‘검자리’ 일대의 농업 용수는 지금의 약천사 대웅전 아래 부근에서 용출하는 ‘엉덕물’이었다. 그 용천수를 ‘선궷내’까지 끌어온 다음, 구시로 ‘선궷내’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여 검자리 일대까지 관개했다. ‘구시’는 나무나 돌로 수로를 만든 것을 말한다. ‘선궷내’의 구시는 거대한 통나무에 凹 모양으로 홈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구시가 얼마나 컸던지 그 위로 사람과 소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시가 있었던 그 일대를 지금도 ‘구시목’이라 부르고 있다. 암반을 뚫는 난공사 끝에 ‘선궷내’의 ‘엄장알물’이 ‘검자리’ 일대에 관개되면서 구시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엄장알물’의 관개로 인한 농업 용수의 안정적 공급은 ‘검자리’ 일대의 개답(開沓)을 더욱 활발케 하여 논의 면적을 증가시켰으며, ‘동골왓’까지도 논농사가 가능해졌다(제보:임달문).
1960년대 말부터 일기 시작한 감귤 재배 붐이 1970년대에 접어들어 더욱 가속화되면서 대부분의 논들이 감귤원으로 전환하게 된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벼농사는 완전히 해체되어 버리고, 이제는 관개 수로나 논둑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밖에 없다. 벼농사가 사라지면서 ‘선궷내’ 물의 이용이 감소되었지만, 아직도 주변 감귤 과수원의 농업 용수로 중요하게 이용되고 있다. ‘선궷내물’은 맑고 시원하여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찾고 있기도 하다. 수질은 약알카리성으로 염소이온은 10~30mg/ℓ이고, 질산성질소는 4~7 mg/ℓ이다.
② 동수(東水)
법화사 입구에서 회수 방향으로 중산간도로(16번 국도)를 따라가면 제2회수교가 있다. 이 곳에서 서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북쪽으로 빠지는 작은 농로가 있는데, 이 농로 모퉁이에 ‘동수’라는 샘물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 일대에 관방시설의 하나인 동해방호소가 있었다. 4․3사건 전까지는 이 샘을 중심으로 대포 상동(大浦上洞)이라 불리던 마을이 있었다. ‘동수샘’이 있었기 때문에 동해성과 대포상동이 이 일대에 입지할 수 있었다. 과거에 비해 용출량이 작아졌다고 한다. 수질은 약알카리성을 띠고, 질산성질소는 14~20mg/ℓ, 염소이온은 20~25mg/ℓ으로 조사됐다.
③ 도욕샘
약천사 경내 남쪽에 있는 샘으로 물이 좋아 약수로 이용되기도 했다. 최근 커다란 연못으로 말끔하게 정비되어 약천사의 명소로 등장했다. 수질은 약알카리성으로 질산성질소는 4~23mg/ℓ, 염소이온은 9~23mg/ℓ로 조사되었다.
④ 가마수
대포항과 ‘데시비개’ 사이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암반 틈에서 솟아나는 샘이며, 물이 차갑기로 유명하다. 용출량이 풍부하지만, 밀물 시에는 바닷물에 잠겨 버리는 단점이 있다. 여름철 삼복 더위 때 남자들이 즐겨 찾는 천연 목욕탕이다. 수질은 약알카리성이며 질산성질소는 15mg/ℓ전후, 염소이온은 30mg/ℓ로 조사되었다.
⑤ 똥낭물
대포항 서쪽 모퉁이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썰물 때는 드러나고, 밀물 때는 잠겨 버린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 그늘지기 때문에 여기서 자리물회 만들 때나 고기 손질할 때 많이 이용한다. 수질은 약알카리성으로 질산성질소는 10~16mg/ℓ, 염소이온은 110~130mg/ℓ이다.
⑥ 구명물
‘똥낭물’ 위쪽, ‘대포천’ 하구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특히 여름철에 용출량이 풍부하다. 여름철 동네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노천 목욕탕 역할을 했으며, 지금은 농업 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1일 평균 용출량은 4,350㎥ 정도 된다.
⑦ 존장물[尊者水]
‘존장물’은 대포횟집 앞에 있는 샘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뱃물’이라고도 부른다. 대포 포구 인근에는 과거 절이 있었다고 구전되는 ‘절터왓’이 있다. ‘절터왓’ 일대는 용천수가 없기 때문에 그 곳 승려들은 가까운 대포 포구에서 물을 길어다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포 포구에서 영실 서쪽 ‘볼래오름’[佛來岳]의 존자암(尊者庵)까지 중들이 다니던 ‘중질’이 있었다고 한다. 대포 포구는 과거 제주도의 사찰 중에서 가장 번창했던 법화사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존장물’은 ‘존자물’[尊者水]이며, 유명한 대덕고승(大德高僧=尊者)들이 마셨던 물일 것이다(제보:김항선).
대포 마을에 수돗물이 들어오기 전 마을 주민들은 ‘큰개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 먹었는데, ‘존장물’도 중요한 식수원 중의 하나였다. 과거 ‘큰개’ 포구 일대에 살던 주민들도 ‘존장물’을 많이 이용했다. 어부들은 이 물을 이용해 바다에서 잡아온 물고기를 손보기도 했다. ‘존장물’로 만든 자리회는 맛이 기가 막힐 정도로 최고였다. 힘찬 고동 소리와 함께 자릿배가 ‘큰개’ 포구에 입항하면 자리를 팔러다니는 동네 아낙네들은 앞다투어 자리를 산 다음, 구덕에 넣고 멜빵으로 짊어져 부리나케 중문이나 회수 마을로 팔러 나갔다. 시간이 지체되면 변질되어 버리기 때문에 숨 끊어지다시피 뛰어가곤 했다. 자리를 한 바가지 산 남정네들은 ‘존장물’이나 ‘똥낭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 곳에서 비늘을 거슬리고 자릿대가리와 지느러미를 능숙하게 자른 다음 된장, 마늘, 제피낭 잎 등 각종 양념을 골고루 넣고, 맛있게 버무려 자리물회를 만들었다. 자리물회와 강회에다 약주까지 곁들이면서 정담을 나누던 평화로운 모습은 대포 사람만이 만끽할 수 있는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최근 포구를 정비하고 도로를 만들면서 ‘존장물’의 옛 모습이 사라져버려 못내 아쉽다.
이 외에도 ‘모살넙개, 큰엿도, 당앞개, 무근개, 검은머들, 연디밑, 지삿개’ 등 대포 해안 곳곳에서 용천수가 풍부하게 솟아난다.
대포교회 서쪽 중문 지경인 ‘엄낭골’에 ‘구명물’이라 부르는 용천수가 있다. 이 물은 평상 시에는 솟아나지 않으나, 여름에 장마나 폭우 후 ‘구명물’이 터지면서 대량 용출한다. 이 곳은 대포 웃동네 주민들이 즐겨 찾는 천연목욕탕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구명물’은 비록 여름철에서 초가을까지 솟아나지만, 용출량이 대단하다. 5․16 쿠데타 직후 이 물을 ‘너벡이, 잉그니’ 일대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기도 했었다. 충분한 검토 없이 추진된 이 사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구명이 터질 때는 저수되지만, 용출이 그치면서 저수량이 줄어들다가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후에 둑을 허물고 배수로를 정비하여 감귤원으로 개간해 버렸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찰 때는 동네 어린이들이 수영도 하고, 잠자리나 개구리를 잡기도 했다. 저수지에 물이 마를 때는 축구도 하고, 태권도도 배우는 운동장 역할을 했다. 지금은 관광단지 용지로 편입되어 개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