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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되는 영산강의 두 사람
만드리 전수마을 서창동.
'만드리'는 이 지방에서 백중(百中/음7월15일)에 불렀던 노동요(勞動謠)란다.
논에 자란 잡초를 맨 마지막으로 없애는 최후의 김매기'만도리'에서 유래된 농요라는데
지금 이 노래를 부를 사람이 있는가.
농가에서는 백중날 머슴과 일꾼들에게 후한 아침상을 차려주고 용돈과 휴가를 주었다
하나 머슴도 일꾼도 없음은 물론 김매기 자체가 없는 농촌이다.
풍년가 까지도 기계의 굉음으로 대체된지 오래다.
농사의 힘겨움을 노래로 달랬던 선조들의 지혜와 유산을 복원하고 보존하려는 의지는
가상하나 맥빠지는 일일 것이다.
강태공들이 밤을 새울 만한 재미를 보지 못했나 다리밑 조대도 쓸쓸한 아침 6시 40분.
시야는 짧아도 잿빛 영산강물을 카무플라주(camouflage)해주는 듯한 강안개가 오히려
고마운 아침.
영산강 동쪽 둔치의 붉은 레인(lane)을 따라 걷기를 시작했다.
두 줄 중앙분리선이 있고 노란 선으로 인도를 구분해 놓은 듯한 자전거길이다.
자룡이 헌 창 쓰듯 마구 쓰고 있는 둔치.
황룡강의 합수지점 반대편인 이쪽에 조류관찰대가 설치되어 있다.
조류는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으나 정지하는 순간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를 가리는 대를 만들어 놓았으리라.
시각은 둔하고 청각이 특히 예민한 조류들도 있다.
경험 많은 엽사는 시동을 걸어놓은 차 안에서 총을 겨누기도 한다.
차의 시동이 꺼지는 순간 위험을 느끼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광주지역의 영산강자전거길은 비교적 바쁘다.
광주광역시에 자전거 애호가가 많아서 그럴 텐데 조류관찰대 옆에서 꽤 긴 시간을 지켜
보았으나 관찰대에 들렀다가 가는 자전거 주자를 보지 못했다.
둔치를 훼손하며 설치한 의미가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미 지겹도록 보아왔기 때문일까.
특히 장거리 주자들은 인증센터 외에는 정지하는 일이 거의 없다면 무얼 의미하는가.
목포 하굿둑을 80km 앞둔 지점(노면에 표시)을 통과한 시각은 7월 25일 9시 30분.
28일로 예정한 하굿둑 골인일을 목포 C의 요망대로 하루 당겨도 되겠다.
백두대간의 인연인 산벗 C의 산행일정(자기네 산악회의 일요일산행/28일)에 훼방자가
되지 않으려면 보속(步速)을 조금 높여야 하겠다.
일요일에 도착한다면 그는 아마도 나 때문에 산행을 포기하게 될 것이니까.
승용교 아랫길에서 한 초로남을 만났다.
암 투병중인데 최고로 효과가 있는 개똥쑥을 캐러 전국을 누비고 있다는 이다.
항암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진 후 전국적으로 많이 재배하고 있는데도 야생만이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는 그는 왜 자르지 않고 뿌리째 뽑아갈까.
재배할 욕심이 없다면 또 자라나서 다른 필요한 이들도 뜯어다가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잘라가는, 더불어 살려는 마음을 왜 갖지 못할까.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겉 인상처럼 속마음씨도 고약한 사맒임이 분명하다.
기어코 회복해서 약자들(병자와 음지의 사람)을 위로하겠다는 일념으로 악기를 익히고
있는 이가 있다.(어제 만난 이)
그런가 하면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동병상련은 커녕 다른 환자에게 돌아갈 기회마저
없애버리는 이 사람.
대조되는 영산강의 두 사람.
하느님, 부처님, 전능한 분이 하늘에서 약을 내려보내신다면 누구에게로 떨어질까.
마음이 약이며 독이고 이슬도 약이 되는가 하면 독도 된다.
아무리 명약이라도 이런 심성이 고약한 사람에게는 독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이다.
과연 전국의 개똥쑥이 그를 살리는 약이 될까.
한데, 나는 이제껏 개똥쑥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실물을 보여줘서 처음 알게 되었지만 내가 걸어온 산야에서 실컷 보아온 풀이다.
내가 그것들을 뜯으려 했다면 아마 엄청 많이 뜯었을 것이다.
심산에서 늘 그 자리에 있도록 뇌두는 내 눈에는 자주 띄는 노루궁뎅이가 정작 그것을
찾아 산을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왜 숨어버릴까.
그놈이 그놈이니 분통이 터질 일이다.
영산강을 걸어오는 동안 자주 들어온 승촌보(광주광역시남구승촌동) 공도교를 건넜다.
들은 이야기는 대개 잘 조성된 휴식공간에 대해서 였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보의 건설 목적과 결과(영향) 등 구체적인 평가 아닌 피상적 느낌의 표현들일 것이다.
이 늙은 길손 또한 사계의 전문가가 아니며 평할 만한 조예도 없으므로 할 말이 없으나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상식은 있다.
왜 승촌보를 만들었는가.
사기꾼의 말은 믿어도 MB정부의 말은 믿을 수 없다 할 정도로 허위와 과장 투성이지만
사실이라고 믿자.
운하를 내걸었다가 빗발치는 저항에 항복하고 4대강 살리기로 후퇴했다고.
그렇다 해도, 4대강 살리기가 "4천명이 1년간 사용할 전기 4.643KWh(연간)를 생산한다"
는 수력발전소를 만드는 짓은 아닐 터.
이미 썩은 물이지만 더 썩히기 위해 가둬두는 일을 했을 리는 더욱 없고.
그래서 속내가 뻔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항복한 척 했으나 이름만 바꾼(4대강 살리기로 위장한) 운하작업이라고.
호남평야의 중심지는 누가 뭐라 해도 김제(전북)인데 왜 뜬금없이 먼 광주 나주의 강에
호남평야를 대표하는 '생명의 씨알'이 형상화 되었는가.(나주평야라 하면 할말이 없다)
둔치의 온갖 시설들도 지자체와 관계 없이 4대강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지금은 설왕설래 중에 있으나 꼼수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아니다, 감사원의 조사로 이미 밝혀졌다.
한반도 대운하 재추진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사업이었다고.
다만, 국민의 혈세를 함부로 쓴 자들에게는 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하게 문책해야 하는데
그놈이 그놈이니 분통이 터질 일이다.
서창에서 서창교를 건너지 않고 직진하면 황룡강을 멀리 U턴하기 때문에 내가 걸어온
코스가 서창교와 공도교(승촌보) 2개의 다리를 건넜음에도 되레 단축된 길이란다.
승촌보의 서쪽은 전남 나주시 노안면 땅이다(학산리).
영산강6경을 알리는 표석 평사낙안(平沙’落雁)이 서있다.
'모래펄에 내려앉은 기러기'라는 뜻이다.
철새들의 쉼터인 영산강변의 절경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영산강을 다 아우르고 있는데
좁은 승촌보로 한정하다니?
영산강문화원 안의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아침과 점심을 때웠다.
자유시간 2개와 500ml냉동팩 물을 배낭 옆구리에 넣어주는 복스러운 미소형 여인.
내 일정을 궁금해 하다가 감동먹었다는 편의점 여인이다.
전망 없는 전망대(날씨 때문일 것)에서 내려와 인증센터 관리(인포메이션) 여직원에게
팁(tip) 하나를 주었는데 반영하고 있는지.
각 인증센터 부스의 스탬프대 옆에 볼펜을 비치하라고.
연월일과 시간이 함께 찍히면(자동) 필요 없지만 수동일 경우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순례길에서는 스탬프를 찍어주는 리셉셔니스트(receptionist)가 시간
까지 기록해 주고 무인인증대에는 기록할 펜이 비치되어 있다.
작은 일인 듯이 보이나 기록 도구를 지니지 않은 당사자에게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저쪽(좌안)에서 지석천을 받은 영산강이 곧 장성천의 합류를 허락하기 때문에 장선천
다리로 멀리 U턴해야 한다.
굉주광역시 광산구 삼거동 서한산 서쪽 황양목골에서 발원해 대야제(堤)에 머물렀다가
노안면을 거쳐서 영산강으로 뛰어들 뿐 장성땅과 무관한데 장성천이다.
마지막 경유지가 노안면 장림마을과 성동마을이라 해서 두 마을 첫자를 딴 이름이란다.
나주대교가 바라보이는 합수지점 쉼터(성북동?)에서 꽤 길게(30여분) 쉬고 있었다.
영산포에서 마감할 요량이라 여유롭다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30여분 동안에 3명의 자전거주자가 통과했다.
산술적으로는 시간당 6명, 12시간을 계상해도 72명, 자전거길을 달리는 주자가 하루에
100명을 넘지 않는다.
어느 야당국회의원이 엄청난 낭비라고 주장할 만도 한 실정이다.
영산강 제1의 자전거길
나주대교 직전 영산강에 멋쟁이 전망대가 서있다.
강변길에서 둔치 위로 놓인 가교(架橋)를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다.
'영산강 전망대 조성사업' 안내판의 글을 요약하면:
"1964년에 목포권역 상수도 취수탑으로 취업해 나주 국가수질자동측정소로 전업, 2011
년 7월에는 전망대 및 수위관측소로 또 전업하기 위해 2012년 3월까지 휴업(리모델링)"
무려 9개월의 성형작업을 마치고 지금쯤 성업중이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방문한 2013년 7월 25일 15시 20분에도 휴업상태다.
성형수술은 잘 된 것 같은데 마취상태가 계속되고 있는가.
4대강사업의 일환으로 착수했을 텐데 4대강은 끝난지 오랜데도 무슨 하자가 있기에?.
섬진강자전거길 준공식과 닮은 꼴인가.
나주대교 일대 둔치에서 여인들의 잡초뽑기 작업이 한창이다.
둔치의 환경미화를 위해 꽃밭으로 조성했는데 잡초밭이 된 것 같다.
돈벌이도 좋지만 삼복 염천이라 고생이 많겠다.
수시로 드나들며 냉수를 마셔댄다.
옆에서 쉬고 있는 나그네에게도 권하는 것이 지금까지 경험해온 시골 인심이건만 물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내 배낭에는 승촌보편의점녀가 준 물이 아직 있으므로 아쉬울 것은 없으나 날씨와 달리
인심 온도는 싸늘하게 느껴져서 일어섰다.
나주대교~영산교 간의 '영산강변로'는 나주시를 바이패스하는 외곽도로다.
복잡한 시가지를 관통하지 않고 영산강을 끼고 달리게 되어 있어 기분도 상쾌한 길이다.
초기에는 영산강의 형상화 라는 독특한 가로등만 외롭게 돋보일 뿐 썰렁한 감이었는데
가로수가 우거지고 강변으로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더욱 안정감이 들게 하는 길이다.
5km쯤 되는 이 구간의 자전거길 역시 영산강 제1의 자전거길(걸어온길중)로 꼽고 싶다.
숲과 꽃,적당한 간격의 벤치와 멋진 쉼터,강물이 맑고 둔치가 온전하면 금상첨화일텐데.
피로하지 않는데도 벤치에 앉고 쉼터에서 쉬었다 가고 싶다면 성공한 시설이다.
모처럼 무심으로 돌아가 편히 걷게 하는 길이다.
주문할 것은 일껏 만들어 놓은 시설의 소홀함이 없는 관리 뿐이다.
여름방학기간을 이용한 국토종주팀인가.
뒤쳐지는 자 없고 참새떼처럼 조잘대며 잘 걷는 것으로 보아 첫날일 것이다.
교사들과 함께 한 어느 중학교학생들인 듯한 팀의 추월을 용인할 만큼 나는 만만디였다.
어차피 곧 향방이 다를 것이니까.(그들의 방향은 1호선 국도인 영암쪽일 테니까)
나주의 영산강에 또 하나의 다리가 놓이는 중이다.
나주의 다운타운과 혁신도시 '빛가람' 간을 연결하는 제2나주대교란다.
'혁신도시'란 "지방 이전 공공기관과 산학 연관의 협력을 바탕으로 최적의 혁신 여건과
수준 높은 정주 환경을 갖춘 새로운 차원의 미래형 도시" 를 말한단다.
'빛가람'은 10개의 혁신도시 중 전남 나주시 금천, 산포면 일대에 광주, 전남 2개시도가
건설하는 전국 유일의 초광역 혁신도시라는데 한자로는 광강(光江)일 것이다.
광주와 영산강(전남), 빛과 강의 합성어.
공공기관은 이미 이전했거나 이전중인데 공사도 목하 진행중이다.
이전기관과 입주자나 입주 예정자들의 애로가 어떠한지 불을 보듯 뻔하다.
가장 예민한 교통과 교육, 편의시설을 비롯하여 먼지 때문에 못살겠다는 생활환경 등이
안정되고 소위 혁신도시로 정착되는 날은 언제쯤 올까.
사전에 완벽하게 갖추고 리허설을 해도 미진한 부분이 많건만 이 꼴이면 땜질의 세월도
오래 갈 것이다.
영산강이 원하는가, 광주 전남인의 취향인가, 신설다리는 온통 사장교다.
천편일률의 사장교에 설계자도 시공자도 신물이 날만도 한데 여전하다.
설계도, 공사도 익숙해져서 편하기 때문인가.
시각적 효과, 미적 감각을 위해 고민하는 흔적이 전혀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의 탁월한 기술력으로 둔탁하지 않고, 단조롭지도 않으며, 현란하면서도 오래도록
권태를 느끼지 않을 미관을 얼마든지 창출할 수 있으련만.
교량건설 현장에서 측량하는 중인 측량사가 마시고 있는 얼음물이 갈증을 유발했는가.
이미 뜨뜻해진 내 물보다 얼음물을 마시고 싶어졌다.
늙은이가 다소 편한 것은 염치를 조금 접어준다는 점이라 할까.
물 한모금 마시고 싶다니까 얼음이 녹지 않은 물통을 통째로 주면서 가지고 가시란다.
젊은이의 표정은 언짢지 않고 늙은이를 위한 진정인 듯이 보였다.
영산포 홍어, 딸깍발이 게다소리에 어떻게 지냈는지
고마운 마음만 가지고 얼마 남지 않은 영산포 길에 나섰다.
강 남쪽 영산포는 홍어의 거리다.
어차피 건너야 하는 다리지만 내게는 홀로식단이 마땅치 않은 남쪽보다 영산대교 북단
에서 식사(저녁)한 후 건너는 것이 낫다고 판단되엇다.
영강사거리에서 영산교 쪽을 향해 가면서 기웃거려 정착한 곳은 송죽회관(영강동).
무난한 백반을 시켰으나 공사판 일꾼들로 보이는 한 팀이 구어먹고 있는 두툼한 솥뚜껑
삼겹살에 군침을 삼키기는 내 평생에 처음이다.
밥맛이 돋을 리 없다.
예전, 대간 정맥 종주중일 때는 2인분을 시켜 다 먹어치웠건만.
2인분 주문해 먹다 남기거나 이웃 식탁에 줘도 되련만 늙으면서 그럴 주변도 없어졌나.
바뻐서 신경을 쓰지 못했던 상냥한 주인녀가 내 식탁에 고기가 빠졌다며 삶은 되지고기
한 접시를 가져왔는데 정말인가 늙은이 동정일까.
솥뚜껑삼겹살에 입맛이 주눅들었는지 아무 것도 당기지 않았다.
영산대교로 돌아가 다리를 건넌 후 정자를 찾아 홍어거리를 걸었다
흑산도 홍어가 왜 나주에서 주름잡는가.
사연이 있단다.
고려시대(8대 현종 9년/1018)에 8목(광주.나주.상주.전주.진주.청주.충주.황주)의 하나
였던 나주목이 흑산도를 비롯해 현 신안군의 섬들을 관장하고 있을 때.
잦은 왜구의 침입에 피해가 막심한 섬민들을 보호차원에서 이곳으로 강제이주시켰는데
홍어맛을 잊지 못한 흑산도민들은 뱃길로 홍어를 실어왔다.
한데, 고향에서는 날것으로 먹었으나 뱃길 수일에 절로 숙성된 홍어를 먹게 되었다.
(해남의 어느 상가에 문상갔을 때 우리를 위해 흑산도에서 대형 홍어 1마리를 가져왔다.
맛이 없어서 푸대접 받던 그 놈이 귀로의 휴게소에서, 귀경 후 점차 맛을 내고 있었다)
특유의 썩은 냄새로 입맛을 자극하는 홍어의 시작이다.
(그래서 홍어를 먹으면 정직하지 않을 수 없다)
숙성된 홍어와 탁주는 '홍탁', 홍어에 묵은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는 '삼합'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안동간고등어'의 유래와 환경이 유사하다)
이 마을은 고려시대 부터 영산현이었는데 그 때 흑산도 일대의 이주민들이 인근 영산도
이름을 옮겨다 사용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영산강, 영산포 이름 역시 이 때부터 란다.
(신안군 흑산면 영산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섬으로 흑산도 동쪽에 현존한다)
지금, 전국적 명성을 갖게 되었고 홍어 마니아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지만 영산포홍어가
딸깍발이 일제의 게다(げた/下駄)소리에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과거 일제 강점기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본정통거리"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새롭게 탈
바꿈" 정도로 요약하고 단절의 시대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추측만 해본다.
용케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다가 크게 부활했을 것이라고.
민초들의 생활이 피폐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제때 홍어(국내산)는 지천이었다.
내 할아버지는 장(5일장)에 가시는 날에는 묵직한 홍어를 사서 인편에 보내셨다.
어머니는 동이에 담아 앞마당 집단 속에 묻어 숙성되기를 기다리셨다.
홍어가 오르지 않은 할아버지 진짓상을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도 남획해 국내산은 멸종 위기에 처해있고 칠레산, 포클랜드산이 판을 친다.
이즈음에는 어이없게도 칠레산은 한바다인 남태평양산이라 해서 국내산으로, 대서양의
아르헨티나산, 우루과이산이 칠레산으로 둔갑해 수입되고 있다니 먹을까 말까.
소개받은 정자로 가는 길 강변에 등록문화재자료129호,'영산포등대'가 무료히 서있다.
영산교 옆에 있으나 일제가 등대를 설치한 1915년 그때에는 다리가 당연히 없었을 것.
일제는 당시로는 드문(이지역에는없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건설, 영산강 수위관측과
등대로 사용했으며 1989년 까지 수위관측 임무를 수행했단다.
하굿둑으로 인해 뱃길이 끊김에 따라 우리나라 유일의 내륙등대는 실직하게 되었고.
상징적 의미로 이 등대에 불을 밝힌다(밤에) 해서 과연 영산포의 옛 모습을 떠올려보는
추억의 아이콘이 될까.
영산강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주요시설물이라 하는데 수탈의 게다소리 요란했던
(메뉴 '옛길'21번글 참조) 모습 말고 또 있겠는가.
갈길 바쁜 길손의 걸음을 '금성상운'(錦城祥雲/나주땅의상서러운구름)표석이 붇잡았다.
"황금물결 일렁이는 나주평야와 영산포"를 이르는 영산강5경이란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나.
승촌보는 "호남평야를 대표하는 '생명의 씨알'의 형상화" 라고 하더니 나주평화로 복귀?
('錦城'은 나주의 옛 이름이며 영산포가 한 때 금성시로 승격했다.
영산강 홍보책자에 '錦成'으로 된 것은 단순한 교정 미스라기 보다 몰상식 탓일 것이다)
황포돛배 선착장은 또 무엇인가.
소금과 젖갈, 해산물을 영산포까지 운반하던 추억의 돛배가 부활했단다.
'휴전선155마일'의 임진강 두지리 황포돛배 나루 정자에서 일박했는데 영산포황포돛배
선착장 지근의 정자에 또 집을 짓게 되다니 공교로운 일이다.
파주시가 2004년 3월 임진강에 배를 띄웠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하는 지역에서 착안하여 운항하는 황포돛배에는
민족의 절절한 소원이 함께 타고 다닌다.
그래서인지 호응도가 높고 패키지 체험프로그램도 다양하다.
3인 이상의 팀이 이뤄져야 띄우는 부정기 황포돛배에는 무엇이 함께 탈까.
해산물 샘새? 딸깍발이 게다소리?
서쪽으로 흐르는 강 건너 멀리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는 시각,
영산강 인도변의 정자에 집을 지었다.
가로등이 없는데도 강 저편 아파트단지와 둔치의 체육공원을 밝혀주는 높다란 가로등
빛이 야간경기의 조명탑을 방불케 해서 오히려 눈이 부신 정자다.
핵발전 공포가 날로 확산돼가도 전기소비량도 날로 증가하는데 시골강변도 불야성이다.
어데선가 한 밤만 더 자면 하굿둑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에 밤이 설레려 하는 듯 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