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총림 동화사 제2회 108 성지순례
김제 금산사
2013년 8월 11일(일) 오전7시
동대구역 지하도.불교대학에서 출발 버스 7대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 이다.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 주지스님 일요법회 모습 장병들이 오후13시에 수계법회를 한다고 합니다
보제루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을 오르는 계단 역할.
법회와 강설을 주로하며
템플스테이를 여는 곳-오늘 금산사에 관한 설명을 들은 곳.▲
범종각▲
불전 사물인 범종(지옥중생), 법고(축생), 목어(수중생물), 운판(하늘생물)로
중생을 교화하는 크나큰 울림.
.
오여래 육보살
오여래(五如來)-약사여래불,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육보살(六菩薩)-(월광, 일광, 문수, 보현, 관음, 대세지)▼
석련대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
육각다층석탑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복원한 것임.
오층석탑
미륵전 우측에 자리잡고 있으며, 석탑의 높이는 7.2m.
1971년 석탑을 해체 수리과정에서 수많은 사리장엄구가 발견됨.▲
방등계단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 금산사)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石壇, 방등계단)을 감싸도는구나. 낡은 짐대「幢」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초제(招提,객실)에서 하룻밤자고가니,연기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미륵전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 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라는 것을 상징한 법당.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은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
공사중이라 실제로 보지 못하고 왔슴
금산사에 미륵전이 세워진 데에는 한 가지 전설이 내려옵니다. 진표율사께서 미륵불의 계시를 받고 지금의 미륵전이 위치한 이곳 연못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흙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다음날이 되면 흙은 간 곳 없고 연못은 예전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장보살께서 진표율사의 꿈에 현몽하시어 흙 대신 숯을 채워넣으면 될 것이라고 일러주시더랍니다. 이에 진표율사는 도력으로 안질을 퍼뜨리고 그 눈병이 나으려면 숯을 한 짐씩 지고 연못에 부은 후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지요. 그렇게 해서 연못이 메워지고 그 위에 미륵전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겁니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한 금산사 미륵전은 외형상 3층 규모를 보이는데, 내부는 통층으로 꼭대기까지 뚫려 있다. 이는 그 높이가 39척(11.8m, 최초 33척 철불이던 것이 화재로 인한 소실로 36척의 목불, 다시 39척의 토불인 석고불로 거듭났다고 한다)에 달하는 미륵불을 안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 미륵전 내부 지하에는 철제 연화대가 있는데, 민간에서는 이 무쇠솥(밑이 뚫린) 모양의 연화대를 만지면 속세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알려져 많은 불자님들이 찾는다고 한다.
보제루 앞의 보리수 열매
그늘이 울창한 보리수나무
하지만 보리수는 딱 그만큼의 자기 몸에 맞는 열매만 남기고
나머지는 땅으로 내보낸다고 하더군요.
보리수 열매룰 줍는 불자님
금산사의 보리수열매로 만든 보리수 단주.
보리수나무 아래서.만들어 보세요
원행 주지스님의 재미난 법문을 듣고
13시 맛난 점심공양을 마치며 완주 송광사로 향 하였다 .
첫댓글 울 49학번 법우가 보리수 열매를 듬뿍 담고 있네요 담에는 지도 한장 찍어 주이소오 ㅎㅎ
무더운 날씨인데도 불구 하고 큰 인고의 수행을 하셨읍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
팔공총림 동화사에 108 성지순례가 생겨서 정말기쁨니다 .부처님 가피로 끝까지 함께할수있기를 발원합니다 ~~대구불교대학의 무궁한발전이 있길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