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시대를 깨우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6~1979
여정남기념사업회 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삼천리, 2017. P.456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1946-1979)이다. 이 책은 해방이후부터 4월 혁명을 거쳐 군사쿠데타 전까지, 유신 체제 수립 이전, 그리고 유신 그 이후의 세 시기로 다루고 있다. 즉 경북대 성립시기부터 유신의 종말로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해까지, 통일과 민주의 열망으로 학생들은 무엇을 추구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 기록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뒷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녹취록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사건들의 고비마다 젊은 청춘들이 불의에 항거했기 때문에 역사는 발전한다. 그 젊은 청춘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4.19도 박정희의 종말도 없었듯이, 왕과 성직자을 단두대로 보내는 프랑스 대혁명도 없었다. 생 쥐스트가 혁명에 가담한 나이가 23살이었다. 그리고 25살에 피선거권으로 공안위원회에 들어갔다. 어느 나라에서 역동적인 역사의 발전에는 청춘들의 힘이 컸다.
요즘 사회 변혁에는 예전의 젊은 지성인들보다, 소위 말하는 다중들의 참여가 더 큰 것 같다. 프랑스 혁명기나 우리들의 앞 시대에 대학생 즉 젊은 지성인들이 선도적 역할을 하고 또한 나라의 기둥들이었다. 세상은 많이 바뀌어, 일부의 지식인들의 사상 전파를 다중의 인민들이 구체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것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이다. 나는 항상 강조하지만 한글세대는 말과 글의 생산과 소비 방식도 다르고, 전달과 확장도 다르다. 들뢰즈의 표현으로 덧붙여서 말과 글이 전파될 때, 그 속도와 강도도 그 어느 시대보다 다르다. 말과 글이 엄청난 속도와 두께(덧글, 리트윗, 좋아요)를 지니고 온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아니 빛과 같은 속도로 날고 있다. 진정으로 말과 글, 게다가 동영상이 노마드처럼 전 지구를 돌고 있다. 이제 상층을 이루는 벽은 균열을 넘어서 파열되었다. 새 시대를 여는 다중지성은 청춘의 인민이 아닐까 한다. (50Q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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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시대를 깨우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6~1979 3
# 집필진: 4
석원호 경북대 강의교수(1, 2, 3장, 맺음말 집필),
윤정원 경북대 강의교수(8, 9장 집필),
이경숙 경북대 강의교수(10, 11장 집필),
최병덕 경북대 강의교수(4장 집필).
허종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들어가는 말, 5, 6, 7장 집필).
여정남기념사업회는 1975년 4월 9일, 여정남 열사를 포함한 여덟 분이 사형 당했다. 32년이 흘러 2007년 서울지방법원 재심 판결에서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무죄 선고되었다. 그 뒤 유가족과 경북대 선후배들이 모여 여정남 열사의 명예 회복과 정신 계승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고, 2013년 4월 13일에 ‘여정남기념사업회’를 창립했다. 2014년 4월에는 유가족들이 출연한 기금과 동문들의 모금으로 경북대학교 교정에 여정남공원을 건립했다. 해마다 4월 9일이 되면 열사의 뜻을 잇는 행사를 열고, 조국 통일과 사회민주화 운동에 힘쓰고 있다. / [인혁당 사법 살인으로 사형당한 여덟 분, 서도원(1923년 3월 28일-1975년 4월 9일, 당시 52세), 도예종(1924년 12월 25일-1975년 4월 9일 당시 51세), 송상진(1928년 9월 18일- 1975년 4월 9일 당시 47세), 우홍선(1931년 출생, 1975년 4월 9일 당시 44세), 김용원(1935년-1975년 4월 9일 당시 40세) 이수병(1936년 12월 1975년 4월 9일 당시 39세), 하재완(1931년 1월 10일- 1975년 4월 9일 당시 43세), 여정남(1945년 5월-1975년 4월 9일 당시 30세). ]
# 발간사 5
경북대학교는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 농과대학을 모태로 1952년에 ‘한강 이남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국립 종합대학으로 출범했다. 이 경북대학교를 전국에 특별히 알리게 한 인물이 있다면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대구사범)와 여정남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아주 다른 길을 간 사람이다. (5) [책이 운동사인에 발간사 모두의 첫 문단에 박정희 이름을 넣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방식으로 쓴다는 것, 달리 말하는 것이 운동사가 아닌가! 게다가 말라르메의 자서전은 아닐 지라도 보르헤스의 글쓰기를 빌려 볼 수도 있다.]
지금 경북대학교 교정에 이 두 사람을 기리는 공간과 구조물이 있다. 박정희 기념물은 사범대학 신관 현관에 청동 부조로 남아있고, 사회과학대학 앞에는 여정남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박정희 청도부조는 모두가 숨죽인 유신 시대, 최고 권력자에 아부하기 위해 그의 대수 사범학교 동창인 당시 총장[김영희]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정남 기념공원은 그를 기리는 대학 후배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 (5-6)
이 책은 사건의 연대기적 서술 중심에 평가를 최소한 결합하고, 사건의 정치사적 배경과 운동의 주체였던 이념서클의 활동상을 복원했다. 또 당시 서클의 학습, 엠티, 문화 방면을 생동감 있고 풍성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이 읽을 만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기존 연구에 부족한 운동 주체들인 이념 서클의 다양한 활동을 구술조사를 통해 집중적으로 복원했다. 관련 사진과 선언문, 유인물, 학습용 커리큘럼 등 자료를 수집하고 중요 사건의 인물들에 대한 녹취 작업도 진행했다. (7)
지난해 10월부터 펼쳐진 ‘촛불혁명’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건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주권자들의 직접행동은 결국 헌법 재판소로부터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어 내었다. 사악한 적폐 세력을 물리치고 민족과 민중의 주권을 지속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중대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족 복현’과 함께 한 수많은 청춘들이 이 과정에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4월의 맑은 하늘 아래. 우리의 끊는 피를 조국에 바치자”던 외침의 우리 모두의 가슴에 살아있다. 4월은 매일의 오늘이다.
2017년
다시 4월을 맞으며
여정남 기념사업회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9)
* 1946 경북대학생운동사 1979 * 10-11
[중요 연표가 연대순으로 표시 되어 있다. ]
** 차례 12
# 들어가는 말 15-19 [잘 썼다. 누가 썼는지? - 허종이 썼다고 되어 있네..]
제1부 통일국가 수립 운동과 4월혁명
1장 해방과 통일국가 수립 운동
1. 경북대학교의 태동과 통일국가 수립 운동
2. 분단 체제의 강화와 운동의 침체
2장 4월혁명과 진보적 사회운동
1.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4월혁명
2. 학원민주화 운동과 계몽운동
3. 통일운동과 2대악법 반대 운동
제2부 박정희 정권 수립과 학생운동
3장 학생운동과 이념서클의 등장
1. 이념서클 맥령
2. 학술서클 현대사상연구회
4장 한일협정 반대 투쟁과 정사회
1.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투쟁
2. 대중적 이념서클 정사회
3. 1965년 한일협정 반대 투쟁
5장 박정희 장기집권 저지 투쟁
1. 6?8부정선거 규탄 투쟁
2. 3선개헌 반대 투쟁
6장 학원자주화 투쟁과 정진회
1. 이념서클 정진회
2. 총학생회 직선제 쟁취 투쟁
3.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
4. 학원 병영화 반대와 교련 철폐 투쟁
7장 반독재 민주화 투쟁
1. 전태일 추도식 투쟁
2. 정진회의 반독재구국선언 사건
3. 위수령 공포와 구속학생 석방 투쟁
제3부 유신 체제와 민주화 운동
8장 유신 체제 전기 민주화 운동
1. 이념서클의 맥 한국풍토연구회
2. 유신 체제의 성립과 11?5투쟁
3. 학원민주화 투쟁
9장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 사건
1. 3?21 반독재민주구국선언
2. 경북대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 사건
3. 구속자 석방 운동
10장 유신 체제 후기 민주화 운동 281
1. 1975년 봄 투쟁과 침묵 285
같은 1975년 4월 투쟁이었지만 경북대의 징계는 혹독했다. 시위 참가자를 짐계하라는 문교부의 지시나 공문에도 대학들이 처음에는 대체로 의연했다. 서울대는 연일 1천 명 넘는 학생들이 계속 시위를 했는데도 4월 11일 단 한명만 제적시켰다. .. 4월 10일 시위로 제명된 사람은 모두 아홉 명이나 됐다. 김영희 총장은 그야말로 ‘유신 총장’으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92-293)
아홉명은 제명당한 순간에도 서로가 서로를 몰랐다. 1978년 제대 후에야 제명된 학생들이 누구인지 서로 알아보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으니 말이다. 제명자 아홉 명은 다음과 같다. / 박명규(정외과 73학번), 이윤기(불어교육과 74학번), 구용봉(사학과 73), 장명재(사학과 72), 강희주(사회학과 72), 이상익(법학과 72), 이기흥(법학과 73), 윤상권(정외과 74), 이승룡(공업교육과 73) (298) [박명규는 청송에, 이윤기는 인터넷 글쓰기에 자주 나왔었고, 장명재는 전교조 대구경북 지부장을 했었고, 이승룡은 78년(?) 의문사로 사망했다. (50QLH)]
1977년 4월 19일, 인문관에 언어문화연구회(정언회) 회원들이었던 최용식(사회학 75), 장수원(철학과 75), 김동호(일반사회교육 75), 류시대(도서관학과 76)를 비롯한 30여명의 학생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4.19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 집회 참석자들은 최용식, 장수원, 김동호, 함종호, 문성학, 임근태 등이었다. (297) [임근태는 보험업계에 근무하고 있다]
2. 1978년 11월 민주구국대투쟁 299
1978년 11월 7일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전국 40여만 수험생들이 입시 1차 관문을 넘던 날이었다. 요즘이라면 대학 입시 날 모든 뉴스는 입학시험에 묻혀버리기 일쑤지만, 1978년 언론 1면을 차지하는 건 늘상 박정희 정부 관련 소식들이었다. 그날 김병호(철학과 71)와 손호만(역사교육학과 77), 권용원 그리고 유병렬, 최상림 등은 각자 자기에서 2교시 수업을 마칠 시각만 기다리고 있었다. .. 2차 민주구국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다. 김병호와 손호만은 함께 작성한 선언문을 들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1차 투쟁 소식을 듣고 투쟁 의지가 불타올랐던 김병호와 손호만을 한양서점 주인이자 경북대 제적생이었던 박명규가 연결시켜 줬고, 둘은 만나 2차 시위를 기획했다. (307-308)
3. 대학 연합시위와 여학생 운동 319
4. 비극, 끝내 돌아오지 못한
11장 낭만과 결사의 대학 문화
1. 낭만과 자유, 항거
2. ‘불온’해지는 ‘문제’ 서클들
맺음말
부록(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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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50QLH) (4:25 50Q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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