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샘물을 다기에 담아 책상 위에 놓다
항일 의병전적지 답사기를 쓰면서 날이 갈수록 글 쓰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지난해 가을부터 이 일에 매달렸으나 여태 15편밖에 쓰지 못했다. 일과에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늘 글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지만 막상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아도 글이 줄줄 나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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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 농성광장에 세워진 죽봉 김태원 의병장 동상 |
ⓒ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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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한 텔레비전에서 티베트의 구도자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자세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들 구도자들은 성지를 찾아가면서 험한 산길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오체투지(五體投地 먼저 두 무릎을 땅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대고 다음에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함)를 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이제까지 이미 역사학자들이 공들여 써놓은 기록을 보고, 길 안내를 받으며, ‘구름에 달 가듯이’ 전적지를 훑어본 뒤 내 글방으로 돌아온 다음, 다시 기록과 사진을 살피고, 후손이나 관계자들이 남긴 녹음을 들어가며 글을 써 왔다. 곰곰 생각할수록 내 정성이 부족했다.
오늘도 온종일 책상머리에서 궁싯거리다가 이런 원인을 깨닫고서는 목욕재계로 진지한 자세를 가다듬고자 전재 고개 너머로 가 몸을 닦은 뒤 돌아왔다. 그러고도 한 줄도 쓰지 못해 함박눈이 쏟아지는 한밤중에 다기(茶器)를 들고 뒷산 우물에 가 맑은 샘물을 길어다 책상 위에 올려 놓고는 먼저 나의 무지함, 교만함, 오만함을 빌었다. 그리고 천지신명과 선열에게 호남의병전적지 답사기를 매끄럽게 끝낼 수 있는 열정과 지혜를 달라고 빌고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바깥에는 함박눈이 소록소록 쏟아지고 있다. 나는 글방에서 불을 밝힌 채 일백년 전 의병장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낮과는 달리 이제야 자판이 두드려지고, 글 쓰는 행복감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상전벽해가 된 상무대 보병학교
2007년 11월 6일(화) 내 호남의병전적지 안내를 해 주시는 고영준씨가 하루를 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아마도 피치 못할 집안 사정이 있는 듯하였다. 현지에서 답사자는 늘 상황대처를 잘 해야 한다. 생명평화결사 순례단을 이끌고 전국을 일주하시는 탁발 도법 스님이 순례자는 대중들이 주는 대로 먹고, 아무 데서나 잠자는 데 익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답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어찌 숙소에서 하루를 빈둥거릴 수 있으랴. 마침 간밤에 이태 전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 길에 만난 적이 있는 김태원 의병장 후손 김갑제씨와 연락이 돼 나 혼자 답사 길에 나섰다. 그는 광주 무등일보 논설실장으로 근무 중인데, 그곳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무등일보사는 상무지구에 있다는데 그곳은 바로 지난날 광주 보병학교가 있던 곳이다.
나는 학군단 7기 보병장교로 1969년 2월 말부터 그해 6월 중순까지 16주 동안 기초 보수교육을 이곳에서 받았다. 춥고 졸리고 배고팠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보병학교. 보병학교 하면 ‘3보 이상 구보’ ‘선착순’ ‘원위치’ ‘훈련’ ‘통일’ 이런 구호와 함께 엉덩이가 시퍼렇도록 매 맞은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나는 장교 계급장을 달고도 매를 맞았는데 그 무렵 신병 훈련소의 인권침해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지난날 우리 군이 왜 귀한 젊은이를 데려다가 그렇게 배 골리고, 두드려 패고, 인권침해를 하였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나중에 내가 부대를 운영해 보니까 사병들이 실컷 배불리 먹고도 1종(쌀이나 보리 등 주곡)이 남아 돌았다. 육군 정량대로 급식하면 배가 고플 리가 없는데 그것을 중간에서 갈취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아마도 그들 중에는 별까지 달고서 국가유공자 행세를 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지난날 우리 군은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이라고 할 만큼 온갖 비리들이 활개쳤다. 이는 창군 주역들이 일군(日軍)이나 위만군(僞滿軍) 출신으로, 식민지 찌꺼기를 벗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백성을 위한 군인이라기보다는 권력자를 위한 군인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택시기사가 상무지구 무등일보사 앞에 내려주었다. 혹이나 옛 보병학교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그 일대는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하듯, 상무대 보병학교 블록 건물이나 연병장은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빌딩숲으로 변해 있었다.
용맹하고 신출귀몰한 형제 의병장
호남의병장 가운데는 부자나 형제도 더러 있은 바, 김태원(金泰元, 본명 準)과 김율(金聿) 은 친 형제간이었다.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의병에 가담키가 쉽지 않을 텐데, 이들 형제가 의병에 뛰어든 것은 우리 역사에 한 귀감이다.
일제는 이들 형제를 동학당 이후 가장 용맹하고, 그 신출귀몰함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평하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참봉이라 호칭되던 김태원이 인솔하는 의병부대를 ‘참봉진(參奉陣)’, 박사로 불리던 김율 의병부대를 ‘박사진(博士陣)’이라 불렀다고 한다. - 홍영기 편저 <의중태산(義重泰山)>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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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봉 선생 친필 시비 //김태원 의병장이 아우에게 주는 글(나주 남산공원 소재)// 국가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 남아가 어찌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1908년 2월 19일 형 준이 쓰다. |
ⓒ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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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정각, 나는 이들 형제 의병장을 취재하고자 무등일보사 논설위원실 문을 두드렸다. 2년 전, 김갑제씨를 처음 만난 것은 저녁밥을 먹은 뒤 막걸리 잔을 나누는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그는 의병장 후손이 시민군이 되었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일제는 의병들을 '폭도'라고 불렀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은 시민군을 '폭도'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폭도의 후손이 다시 폭도가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때 그 이야기가 내게는 충격으로 각인되었다. 그날 그가 친일파 후손은 해방 60년이 지나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고 말하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랑스러운 조상을 둔 게 얼마나 자손만대에 떳떳하냐. 친일파 후손들이 비록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을지언정, 제 조상 무덤의 비석을 쫓아내고, 남 몰래 조상묘를 이장하는 그 작태가 얼마나 비참하냐. 인생을 길게 보면 '사필귀정'이다."
그러나 갑제씨는 내 말이 친일파를 변명하는 듯이 들렸는지 “의병이나 독립투사의 후손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고 한 말씀”이라며 몹시 섭섭해 했다.
- 아직도 그때 제 말이 섭섭하십니까?
“아니에요. 어린 시절 하도 힘들게 살아서 그랬습니다. 그 시절 의병장 대부분이 절손이 되었지만, 다행히 저희 할아버지 죽봉(김태원) 장군은 39세로 일군의 총탄에 돌아가실 때 남매를 두셨습니다. 아들인 제 아버님은 동지들이 데려다가 일 년씩 돌아가며 키우셨고, 따님인 제 고모님은 신분을 숨기고 13세에 부산으로 시집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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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원 의병장 손자 김갑제씨(어등산 전적지 표지석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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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폭도 지아비를 둔 홀어머니로 움집에서 어린 자식들을 키운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한 편의 소설일 겁니다. 그런 할머니가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가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로 사시다가 뒤늦게 어머니를 만나 오십이 넘어 저희 형제를 낳았습니다."
어린 시절 갑제씨는 당신 어머니가 남의 밭을 매거나 허드렛일을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을 만큼 뼈저리게 가난했기에 할아버지의 의병장 활동을 많이 원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춘기 이후로는 오히려 할아버지가 의병 활동을 하신 긍지로 바르게 살 수 있었다고. - 광주 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이 된 소감은? “당연히 나섰어야지요. 그때 저는 시민군이 되고서 ‘할아버님, 저도 폭도가 되었습니다’라고 영전을 향해 말씀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나라에 불의가 판치고, 무고한 백성들이 무고하게 살상을 당하면 비록 폭도라는 말을 들을지라도 다시 나설 겁니다.”
그는 의병장의 후손답게 매우 당차보였다. 마침 그의 집안 아우가 전적지를 안내해 주겠다고 찾아왔기에 세 사람은 무등일보 논설위원실을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