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25/2014042501224.html
월드컵이 다가온다.
전 세계인을 단 하나로 뭉치는데 과연 축구만한 게 또 있을까 싶다. 국제축구연맹(FIFA)에 따르면 지난 2010 남아공 월드컵은 204개국 245개 채널에서 방송됐다. 아직 2014브라질 월드컵의 중계 관련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 대회 예산이 지난 월드컵의 약 4배가량인 14조 5000억 원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지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규모의 스포츠 이벤트임을 증명했다. 그만큼 월드컵은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지녀왔다.
이제는 단순한 공놀이라는 말을 꺼내기 무색할 정도다. 오늘날 축구는 정보·통신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며 대규모 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가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축구 스타일이 어떻고 어떤 선수가 뛰는지 또 무얼 먹고 무얼 입는 지까지 알게 된 것 모두 시대의 발전 덕분이다. 그러나 쉽고 빠른 정보공유로 월드컵이 갖는 신비감이 예전만 못하다는 아쉬움도 있다. 대표적으로 월드컵은 새로운 축구 전술 및 전략의 트렌드를 알리는 장이었으나 더는 트렌드를 주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집에서 편하게 소파에 누워 다른 나라 경기를 시청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손쉽게 그들의 자료 및 정보를 구할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월드컵은 이전부터 사용한 전술 및 전략이 국가대표팀의 성적으로 하여금 증명되고 인정받는 하나의 관문으로 탈바꿈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탈리아 선수들이 FIFA월드컵 트로피를 높이 들어 올리며 환호하는 모습.
이러한 의미에서 2006독일 월드컵은 트렌드를 주도한 마지막 대회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의 성공을 통해 알 수 있었듯 4백 수비진과 그 앞을 지키는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 그리고 전형적인 골잡이형 공격수보다 중요성이 커진 공격형 미드필더는 예상대로 몇몇 똑똑한 감독에 의해 4-2-3-1 또는 4-2-1-3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며 결국 4년 뒤 월드컵 무대를 주름잡았다.
스페인 축구냐? 브라질 축구냐? 축구판 새로운 전술 그려질까?
특히 바르셀로나의 세계 제패와 스페인 대표팀이 메이저대회서 보여준 대활약은 트렌드를 읽은 감독의 똑똑함이 보상받은 좋은 예다.
비록 2012~2013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스페인의 두 거함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각각 독일의 거함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에 패하며 결승 무대를 내줘야 했고 미리 보는 월드컵이라 할 수 있는 2013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선 스페인이 홈팀 브라질에 3대0 대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이 같은 사실만으론 전술 트렌드가 바뀌었다 할 수 없다.
이번 유럽 챔피언스리그만 봐도 스페인 팀만 유일하게 3팀이 8강에 올랐고 이 중 2팀이 4강에 올랐다. 게다가 누가 뭐라 해도 스페인 대표팀은 브라질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후보다. 따라서 남아공 월드컵은 유로 2008을 거듭해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역할이 강조되었을 뿐 월드컵이 갖는 전술적 의의에 있어 전혀 특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월드컵이 아닌 리그와 컵 대회 경기서 보여준 영향력이 세계적인 전술 변화 흐름에 막대해졌다는 사실과 이후 이 전술의 완전체라 할 수 있는 스페인 축구의 패배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러므로 전술 트렌드면에서 아주 조용했던 2011년을 제외한 2012년과 2013년은 브라질 월드컵에서 어떤 전술 및 전략이 증명되고 인정받을지 예상케 했을뿐더러 이번 대회 이후 어떤 전술 트렌드가 나타날지 힌트도 남겼다. 우선, 2012년은 스페인 축구의 전술 및 전략이 대중화된 해였다. 2011~2012시즌 수비축구로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첼시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대다수 팀은 높은 공 점유율의 필요성을 느꼈다.
골키퍼와 공격수에게까지 패스 능력을 강조했고 심지어 공격수를 미드필더처럼, 미드필더를 공격수처럼 기용하는 ‘펄스 나인(False 9)’ 또는 ‘제로톱’이라는 개념까지 생겨났다.
‘펄스나인’ ‘제로톱’ ‘게겐 프레싱’ 축구 용어는 진화한다
이듬해인 2013년 축구계 최고의 화두는 ‘게겐 프레싱(Gegen Pressing)’이었다. 선수들의 폭넓은 활동량과 수비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전방에서부터 빠르고 강하게 압박해 역습을 노리는 전략이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클럽 축구 무대에서 가치를 입증한 게겐 프레싱이 월드컵 무대에서도 통한다면 세계 축구의 새로운 핵심 전술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전망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게겐 프레싱을 시도한 독일과 브라질은 적수가 없어 보이던 스페인 축구를 상대로 이미 승전보를 거뒀고 다른 대륙에선 호세 페케르만 감독의 콜롬비아가 4-1-3-2 포메이션의 특징을 살린 게겐 프레싱으로 남미예선 2위(득점 3위·최소실점)를 차지했다. 이렇게 최근 축구계가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고 쉴새 없이 전진 압박하는 축구를 선호하기 때문에 필자는 머지않아 3백과 4백이 아닌 하프백 시스템이 유행하리라 예상한다.
여기서 하프백이란 누군가는 비슷한 유형의 리베로·스위퍼·수비형 미드필더를 떠올릴 수 있어 다소 혼란스럽게 들릴 수도 있으나 이해를 돕자면 수비형 미드필더와 중앙 수비수의 중간 포지션이다. 상황에 따라 수비진 앞뒤를 번갈아 움직이며 수적 우위를 가져가 원활한 공수전환을 돕고 역습대비 및 미드필드 압박이 쉽다. 또 현대 축구에서 가장 만능을 요구받는 측면 수비수는 하프백의 존재로 더욱 자유로운 공격가담이 가능해 선수구성과 빌드업에 애를 먹는 팀이나 3백과 4백을 혼용하는 팀의 입장에선 하프백이 좋은 해결안으로 기대된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이탈리아의 다니엘레 데 로시와 칠레의 마르셀로 디아스가 있다. 둘 다 중앙 미드필더 또는 3백의 중앙 수비수로 나서 빠르고 다양한 경기패턴의 중심점 역할을 한다. (첼시의 다비드 루이스와 맨체스터 시티의 마르틴 데미첼리스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이들은 너무 공격적이거나 수비적이다.)
“이탈리아 로시, 칠레 디아스 같은 선수 주도하는 하프백 시스템 등장할 것”
이는 어쩌면 모든 선수에게 만능을 요구하는 축구계가 모토로 삼는 토털사커 즉 전원공격과 전원수비 전술의 이상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고작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가장 만능형 선수에 가까웠던 박스 투 박스(Box to Box) 미드필더는 기본 4-4-2 전술에 맞춰진 잉글랜드 축구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나 펄스 나인같이 점차 다양한 포지션에서 세밀한 의미의 만능형 선수가 떠오르며 재조명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2013년 투톱과 3백을 사용하는 팀이 늘어난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선수들의 다재다능함은 포지션의 다양화를 불러왔다.
근래만 해도 중원 싸움이 대두한 현대축구에서 두 명의 공격수와 세 명의 수비수를 기용한다는 건 미드필드에서 경쟁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다재다능한 투톱은 미드필드 경쟁력을 잃지 않은 채 충분히 상대 수비진을 곤란케 했고 3백은 점유율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오히려 많은 수비수가 상대의 압박에서 벗어나 수적 우위를 살린 세밀한 플레이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을 줬다.
위 그림은 현대축구에서 거의 필수로 여겨지는 빌드업 상황 중 하나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이를 ‘바텀 체인지(Bottom Change)’라 일컫는데, 중앙 수비수가 상대 공격수의 견제를 피해 넓게 자리하면 이 사이로 수비형 미드필더가 내려가 3백 형태로 빌드업을 진행하는 모습이 마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외국에선 흔히 포켓 플레이(Pocket Play)라 불린다.
핵심은 수비형 미드필더가 가능한 한 늦게 내려가 상대 압박을 혼란케 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하면 수비수는 공 소유시간이 늘어나고 패스옵션은 다양해지며 상대의 압박을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상대 공격수가 수비형 미드필더를 마크하는 걸 예방해야 한다.
하프백은 수비형 미드필더보다 더 아래 머물러 상대의 압박 범위를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이탈리아 대표팀처럼 두 명의 중앙 수비수를 전진시킴으로써 수비수의 공격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물론 완벽한 전술과 전략 및 선수 스타일은 없다. 누군가는 단지 실점하지 않는데 의미를 둘 수 있고 자신의 공격수가 상대 페널티 박스 안에만 있길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상황에 맞게 완벽을 추구하려 한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이 일정한 형태로 오는 흐름을 우리는 트렌드라 부르고 트렌드는 곧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니 최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는 수비수와 공격형 수비수의 등장은 과거의 3.5백(4백의 한쪽 측면 수비수를 공격적으로 기용할 경우 반대편 수비수를 중앙 수비수로 기용해 3백으로 머무는 시스템)과는 다르게 중앙에서 더 자유롭고 유연한 개념의 3.5백인 하프백 시스템으로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