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첫 순교자 尹持忠의 최후 진술과 기적
"천주는 최고의 아버지, 천지만물의 창조자"
"양반 칭호 박탈 당해도 天主께 죄지을 순 없어"
※ 주 내용
◇ 한국천주교 첫 순교자 윤지충 (尹持忠)
◇ 사문난적' 죄목의 윤지충·권상연 모진고문 받고도 背敎거절‧‧‧‧‧‧‧
◇ 투옥 수감중 윤지충의 수기‧‧‧‧‧‧‧
◇ 참수 후 '시신 9일이 지나도 부패안해 '‧‧‧‧‧‧‧
◇ 구베아(Gouvea) 주교 기록문‧‧‧‧‧‧‧‧
◇ 한국천주교 첫 순교자 윤지충 (尹持忠)
전주 전동성당 안에 꾸며진 스테인드 글라스들 중 하나. 천주교 첫 순교지 터에 세워진 성당답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의 칼(형틀)을 차고 있는 모습과 결박당한 채로 신앙을 증거하고 있는 권상현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
한국천주교 첫 순교자인 윤지충의 본관은 해남이며, 자는 우용(禹用),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그의 가문은 남인의 명문세족 집안이었고, 6대조가 윤선도(尹善道)이며, 윤두서(尹斗緖)가 그의 증조부다.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서 한의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경(憬)과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행실이 조신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가문의 학풍은 개방적이었고, 신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뜻을 두고 학문에 몰두하여 1782년 가을 고종사촌인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 형제와 함께 서울 봉은사에서 공부하였다. 1783년 봄 증광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후에는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1784년 겨울 서울로 올라간 윤지충은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당시 천주교인들이 자주 모이던 김범우의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천주실의’와 ‘칠극(七克)’ 등을 빌려 필사하여 연구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한 후에도 3년동안 은밀하게 연구와 묵상을 계속하다, 1786년 무렵 정약전에게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배운뒤, 이듬해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고종사촌 매형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지헌(持憲)은 물론 자신의 명성을 듣고 홍산, 고산, 고창, 무안 등지서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또 윤지충은 이웃에 살던 외사촌 형인 권상연(權尙然, 1751∼1791)에게도 자신이 탐독하던 서학서를 빌려주어 신앙에 눈뜨게 했다. 얼마 뒤 윤지충은 권상연에게 세례를 주었다.
한편 1790년말 윤유일(尹有一)이 북경에서 가져온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의 사목 서한에는 가성직제도를 금할 것과 함께 조상제사금지조항이 들어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양반 신자들이 떠났지만, 윤지충은 교회의 명령을 충실히 준수하였다.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그 재를 집 뜰 안에 묻었으며, 신주를 넣었던 빈 궤(櫃)만 사당에 세워 놓았다.
그런 가운데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초빈을 했다가 8월에 가서야 장례를 치렀다. 그는 장례절차를 고민하다 상주로서의 예의범절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권상연도 그의 결정에 동의하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상례(喪禮)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더우기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의 행위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의 이같은 공개적 제사폐지 행위를 목격한 친척과 친구들은 이들을 불효한 아들이며 윤리를 어긴 죄인이라 비난하였으며, 마침내 이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의 소문이 중앙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홍낙안(洪樂安)은 진산사건을 접하자 9월 29일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편지를 보내 윤지충의 집을 수색하고 체포하도록 촉구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0월 26일 진산군에 자수했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을 회유하고자 했으나 그의 굳센 믿음과 결의를 꺾을수 없어, 그들을 10월 29일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압송하였다. 전라감사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짐승보다도 못한 짓이라 꾸짖고, 이는 국가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윤지충은 신문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다. 그는 서학서를 보고 천주가 우리들 모두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조물주임을 알았다고 말하고, 천주교는 참된 마음으로 천주를 섬기는 종교이며 중국의 경서에서 가르치는 충성과 효도도 천주의 명령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윤지충은 “죽은 사람에게 술이나 밥을 올려 제사지내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며, 혼은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형체가 있는 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혼은 덕으로써 음식물을 삼습니다”라고 오히려 유교적 체계와 가치관을 정면으로 공박했다.
또 윤지충은 “비록 양반 칭호를 박탈당한다 해도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하지 않습니다”고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당시 유교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던 사회체제에 저항하였다. 이처럼 그가 유교가 요구하는 제례행위를 거부한 것은 곧 양반계층의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이었고, 전통문화와 가치질서에 도전하는 패륜이었으며, 양반으로 상징되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된 것은 당연했다. 결국 정부는 천주교 신자들을 기존의 사회와 정치체제에 대한 반항세력으로 몰아갔다.
윤지충은 모진 심문을 받아 살이 헤어지고 유혈이 낭자해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말끝마다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그리고 “천주의 가르침은 극형에 처해질지라도 결코 배반할 수 없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마침내 11월 8일 정조(正祖)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 역적죄나 강상죄(綱常罪)를 적용하지 않고,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와 발총죄(發塚條)를 적용해 처형하도록 명했다.
사형 판결문이 전라감영에 하달되자 전라감사는 집행을 서둘렀다.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낯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군중에게 설교하면서 씩씩하게 나아갔고, 권상연은 모진 태형으로 초죽음 상태였지만 “예수, 마리아”만 되뇌며 걸어갔다.
마침내 윤지충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참수 당하기 전 그는 목침 위에 머리를 고이고 “예수, 마리아”를 여러번 부르며 태연하게 형리의 칼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들의 시신은 9일 동안 방치되었는데 전혀 썩지도 않고 굳어지지도 않았으며, 목을 올려놓았던 말뚝과 죄상을 쓴 널빤지 위에 흐른 피도 겨울철인데도 조금도 엉기지 않고 흐른 그대로 있었다. 교우들 가운데 어떤 병자는 말뚝과 널빤지에 흐른 피를 씻은 물을 마시고 회복됐고, 어떤 이는 그들의 피가 적셔진 수건을 만지기만 했는데 즉시 건강이 회복되는 이적이 일어났다.
한편 윤지충은 옥중에서 진산 관아에 자수한 후 11월 7일 최후 진술까지의 일을 한문으로 기록하여 신자들에게 전했다. 후대에 압수된 초기 천주교인들의 서목에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초기 신자들은 그를 공경하는 마음에서 이를 한글로 번역하고 여러번 필사하여 전하면서 애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기는 1839년 정하상이 지은 ‘상재상서’의 대본이 되었다.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인 가운데 처음으로 나름대로 확고한 논리체계를 지닌 공술기와 옥중수기를 남겨 천주신앙의 정당성을 증거했던 인물이며, 이후 수많은 신도들의 신심을 고취하고 격려한 ‘신앙의 수호자’였다. 나아가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박해인 진산(珍山)사건의 주동자로서 최초로 ‘순교자의 피’를 흘림으로써 ‘신앙의 씨앗’이 되었다. 그의 열렬하고 의연한 신앙심과 죽음을 불사한 거룩한 순교정신은 이후 한국 천주교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순교터에 전동 본당이 세워져 ‘순교 1번지’로 알려져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다.
◇ 사문난적' 죄목의 윤지충·권상연 모진고문 받고도 背敎거절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자는 1791년 진산(珍山)사건으로 불리는 신해박해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의 처형을 든다. 그들은 모친상을 당하고서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유로 체포돼 처형당하고, 이를 계기로 이승훈 권일선 최필공 등 초기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어 1795년 을묘박해로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이 좌천되거나 유배당하는 등 천주교의 일대 고난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모든 생활양식으로 삼고 주자의 학설에 어긋나는 일은 반역행위로서 사문난적으로 처벌했다.
우리 역사에서 조상을 받들어 제사 지내는 유래는 고대사회에는 원시적인 샤머니즘에 의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였고, 불교가 전성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식에 의해 제사를 모셨다.
1700년대 후반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히게 된 것은 제사문제였다. 전라도 진산군에 살던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1783년 25세때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서울로 올라와 천주교도들이 모이는 명동의 역관 김범우의 집을 찾았다.
여기서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을 읽고 이것을 붓으로 베껴 연구하고 3년후에는 내종형인 정약전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1789년에는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시는 영광을 입었다. 귀국 후 천주교도 박해가 시작되자 가지고 있던 책의 일부를 불사르고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북경주교의 가르침에 좇아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위폐를 불살라 재를 집안 뜰에 묻었다.
1791년 모친이 돌아가자 상주로서 모든 의식에 따라 장사를 지냈으나 위패를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장례에 참석한 권상연도 같은 행동을 취하여 조상객들의 비난을 받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친척과 친구들로 부터 불효자로 지탄받게 되고 국왕에 대한 반역행위로 고발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곧 중앙 정계로 비화돼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의 집을 수색하고 윤지충ㆍ권상연 두 사람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같은 기미를 알아챈 두사람은 피신하여 체포를 모면했지만 관리들은 윤지충의 큰아버지를 대신 투옥시켰다.
백부의 수감 소식을 들은 윤지충은 이해 10월26일 진산군수에게 자수하였다. 그날 저녁부터 윤지충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28일 권상연이 역시 자수하여 입감되어 백부는 석방하였다. 두 사람은 29일 새벽 전라관찰사가 있는 전주로 압송돼 심한 신문과 고문을 당하였다.
◇ 자수-심문 과정 수기로 남겨
윤지충은 자수하여 신문을 받고 순교 당하기 직전까지 과정을 수기로 남겼다. 다음은 수기의 요약이다.〈10월26일 저녁 무렵 진산군 관아에 도착, 저녁을 먹은 후 곧 신문을 받음. “너는 미신에 빠져 있다는 소문인데 진실인가?”, “아니요. 나는 다만 천주의 가르침을 받을 뿐이요”. 천주의 진리를 말함. 관헌은 장례에 제물을 바치지 않은 일을 비난하고 공자의 말을 인용해가며 마음을 고쳐 잡도록 권고하고 또한 고래의 명가인 윤씨 가문이 멸망하게 됨을 개탄하고 배교(背敎)할 것을 권고했다. “제가 배교의 의사가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천주교를 고집할 것입니까. 고난을 겪고 죽음으로서 진리를 얻는 것이 제가 행할 길이라….” 큰 칼을 목에 채운후 다시 하옥됨.
27일 아무 일 없었음.
28일 조식때 권상연이 투옥되어 들어옴. 정오에 대인(代因)되어 있던 숙부가 출옥함. 일몰 경 다시 끌려나가 이전 보다 큰 칼을 씌우고 신문함.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에게 압송되기로 결정하여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으나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킴.
29일 새벽, 병졸들에게 호위되어 출발, 전주감영에 이르자 밤이었으나 곧 성명 직업 그밖에 예비조사를 받음. 머리에 큰 칼과 손발에 철쇄를 채우고 하옥됨.
30일 재차 신문. “경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믿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천주교는 미신이 아닌가?”, “신은 최고의 아버지이며 천지 만물의 창조자임”, 천주교를 신봉케 한 사정, 서양책의 입수 경과에 관해 취조받음. 또 신주를 태운 일, 제물을 올리지 않은 것, 장례인들을 속인일에 관해 조사받음. “서적을 숨기고 있으면 곧 제출하고 또한 동종자(同宗者)의 유무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라. 또 너희들 사이에 주교가 있어 사교(邪敎)를 전하고 있다는데 사실인가?”, “저는 확실히 제물도 올리지 않았고 신주도 태웠으나 장례자들을 속이지는 않았습니다. 서적은 현재 소유치 않고 주교라고 불리우는 인물은 없습니다.”
“너희들 천주교도들은 고난을 받고 종문(宗門)을 위해 죽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어떤가”, “생을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함은 인간의 통성입니다. 어찌 그럴 것입니까?”, “너희들의 어제의 진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또한 그 주장은 소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교라고 생각된다.”, “천주는 우리들의 아버지이며 천지만물의 창조자이다.
그런데 천주는 중국에서 상제(上帝)와 같은 것이며, 인간은 천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다. 국왕에 대한 헌신, 부모에 대한 효행은 모두 천주가 명하는 바다. 사람들은 내가 모친 사후 조문객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 애도의 뜻을 표하고 또한 이를 받아들임은 인간으로서 의무인 것이다.
사람의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이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때 실제로 조의를 표한 몇사람이 있으니 이를 확인해 달라. 내가 모친을 매장하지 않았다는 소문은 5월에 돌아가신 모친을 8월에 가서야 매장의식을 올렸기에 생겨난 일이다”〉
◇ 순교와 기적
조정은 두 사람을 배교시키고자 근신(近臣)을 옥에 보내 설득하고 신주를 모시면 고통을 면해줄 것이라고 협박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들은 국왕의 인자함과 관대함을 충분히 이해하여 군부의 은혜가 하해와 같음을 느끼면서도 유일무이의 진리로 믿는 종교를 버리는 일과 신에 대한 부덕행위인 신주를 모시는 일은 단연코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1791년 11월8일, 두 사람에게 사형명령이 떨어지고 이와 같은 죄인을 낳은 진산군은 한때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이들은 11월13일 형이 집행되었다.
◇ 다음은 구베아 (Gouvea) 주교의 서한에 실린 사형집행 전말이다.
〈두 용사는 감옥으로부터 구경 좋아하는 군중과 교도들이 보는 가운데 형장으로 옮겨졌다. 상연은 거듭된 고문으로 죽은 사람과 같아 간신히 예수와 마리아의 성명(聖名)을 불렀을 뿐이다. 지충은 형장을 향함이 마치 천국의 대향연에 초대받는 것 같이 환희의 얼굴로 나아가서 교도와 군중들이 경탄치 않을 수 없을 만치 위엄으로써 예수의 성명을 고창하였다. 형장에 도착하자 집행관은 왕명에 의하여 배교하는 것을 맹세하고 조상의 신주를 규정대로 모시고 의례를 행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한 불응함을 알게 되자 사형집행장을 낭독토록 수형자에게 명하였다.
윤지충은 집행장을 들고 기쁨에 떨면서 소리도 낭랑하게 읽었다. 읽고나자 그는 둥근 참수대에 목을 펴고 예수ㆍ마리아를 거듭 부르면서 태연자약하게 집행인에게 그들의 임무를 다하도록 일렀다. 집행인은 윤지충의 목을 끊고 이어 반사반생의 상태이면서도 예수ㆍ마리아를 읊조리던 권상연을 처형했다.
때는 1791년 12월 8일(양력) 오후 3시였다. 지충은 33세, 상연은 41세였다. 국왕은 사형을 재가했음을 후회하고 그들이 차차 뜻을 굽힐 때도 있으리라는 일루의 희망을 안고 급사(急使)를 파견하여 유죄(流罪)토록 하였으나 때늦어 사자가 도착한 것은 형이 집행된 후였다.〉
구베어 주교는 두 사람의 사후에 일어난 이적을 자신의 서한에 기록하였다.(연구자들 중에는 신도들이 주교에게 두 사람의 피가 물들은 수건을 보냈을 때 허실을 섞어 전한 것을 주교가 다시 윤색을 가했을 것이라 한다)
<두 순교자의 사체는 천주교도에게 보여주기 위해 감시인을 두고 매장치 않고 9일간이나 방치해 두었다. 9일째 매장허가를 받자 이교도들과 장례에 참석하고자 찾아온 지인들은 두 사람의 시체가 조금도 부패하지 않고 홍색을 띠었고 경직치 않음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 참수대나 사죄(死罪)ㆍ입찰(立札) 등에 아직도 선혈이 흐르고 지금 곧 살해됨과 같이 생생함을 보고 그들의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혹한의 12월이면 액체나 유동체는 모두 기물(器物) 속에 있어서도 동결하는 것이니 이런 현상은 전혀 뜻밖의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경탄한 이교도들은 재판이 공정치 못함을 욕하여 두 교도들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러한 일을 자세히 보고 그 신기함에 감동한 사람 가운데는 당장에서 천주교에 개종한자도 있을 정도였다. 교도들이 경탄한 나머지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두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새삼 신덕을 찬미하고 기도를 드렸다.>(후략)
초기 조선교회 신자들로부터 존경받은 5명의 순교자들
한국 천주교회사 관련 가장 훌륭한 저술로 평가받고 있는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1874년 간행)를 보면 1801년 신유박해 이전 초기교회 신자들에게 특별히 존경받아온 5명의 인물이 눈에 띈다.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1759∼1791)와 권상연 (야고보,
1751∼1791), 윤유일(바오로,1760∼1795), 최인길 (마티아,1765∼1795),
지황 (사바, 1767∼1795) 이다. 이들이 어떤 이유로 초기교회 신자들에게 존경받아 왔는지 또 그들 생애에서 닮은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서적을 통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 들임으써 출범한 한국 천주교회는 태생적으로 두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서적을 통해서만 천주교를 이해하고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에 따른 교리이해 부족이라는 '보유론적 한계'와 또 하나는 성직자가 없어 보편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교계론적 한계'였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받고 귀국한 이승훈(베드로)이 서울 수표교 인근 이벽(세자 요한)의 집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한국 천주교회는 이후 10년이 안돼 이 두가지 태생적 한계를 모두 극복했다.
이 태생적 한계를 극복시킨 주인공들이 바로 윤지충과 권상연, 윤유일, 최인길, 지황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가톨릭교회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철폐함으로써 '보유론적 한계'를 극복했고,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은 주문모 신부를 영입함으로써 '교계론적 한계'를 극복했다.
△ 윤지충과 권상연
전라도 진산의 유명 양반집안 출신인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간으로, 윤지충은 고종사촌인 정약용(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됐고,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입교한 후 권상연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그를 입교시켰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0년 북경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금지령을 내리자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윤지충은 이듬해 여름 어머니(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예절로 장례를 치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까지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이 소식을 들은 둘은 자수해 고문과 배교의 강압 속에서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한 후, 1791년 12월8일 함께 전주 남문 밖에 형장에서 '군문효수'(죄인의 목을 베 군문 앞에 매다는 것)형을 받고 순교했다. 윤지충은 32세였고, 권상연은 40세였다. 윤지충은 권상연보다 먼저 칼을 받아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가 됐다.
△윤유일(尹有一 : 본관 파평윤씨)· 최인길· 지황
경기도 여주 양반출신인 윤유일과 중인 집안으로 한양의 역관 출신인 최인길, 한양 궁중악사 집안의 지황은 한국 땅에 성직자 영입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윤유일은 1789년 성직자 영입을 위한 최초의 밀사로 선발돼 북경에서 구베아 주교를 만났다. 이후 그는 지황과 최인길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최인길은 1784년 이벽(세자 요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1790년 윤유일이 북경교회를 방문하고 귀국한 후부터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했다. 성직자 은신처 마련 임무를 맡은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1794년 12월24일 입국한 후 한양 자기 집에서 모셨다.
그러다 배교자의 밀고로 이 사실이 발각되자 주 신부를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이 신부로 위장해 체포됐다. 지황은 1791년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한 후 1793년 윤유일·박요한과 함께 북경에 다녀온 후 1794년 12월 의주 국경에서 주 신부의 입국을 도왔고 한양 최인길의 집까지 안내했다.
그러나 최인길이 체포되면서 윤유일과 지황도 포졸들에게 잡혔고, 조정은 주 신부 입국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1795년 6월28일 밤 이들 셋을 은밀하게 타살시킨 후 시신들을 강물에 버렸다. 윤유일이 35세, 최인길이 30세, 지황이 28세였다.
△ 우선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윤유일·최인길·지황, 이 다섯 순교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 순교자들로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을 비롯해 이후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됐다.
교회용어로 '우선 순교자'들인 이들에 대한 초기 한국교회의 공경은 남달랐다. 샤를르 달레는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모범은 조선의 초대 천주교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유명해졌고, 특히 바오로는 오늘까지도 신자들 사이에 큰 존경을 받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주문모 신부도 "윤지충은 주교와 같은 존경을 받았다"고 신문과정에서 진술했고(「징의」참조), 윤유일은 1797년 구베아 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교우들은 수건을 여러장 가져다가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흘리신 피를 그 수건에 적셨습니다. 그런데 사경을 헤매던 몇몇 교우들이 순교자들의 피가 적셔진 그 수건 조각을 만지자마자 금방 병이 나은 게 아니겠습니까.…이런 기적은 흔들리는 교우들의 신앙을 다잡아 주었고, 비신자들에 대한 복음 전파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구베아 주교은 자신의 1797년 서한에서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에 대해 "조선 교회 안에서는 세 순교자들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뛰어난 복음 전파자들이었고, 하느님 영광을 위해 진정으로 노력한 신자들이었습니다. 온갖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선교사를 자기네 나라로 모셔가서 숨겨준 것도 이들었습니다"라고 칭송했다.
△ 호교론자
이들 다섯 순교자들은 관리들뿐 아니라 당대 저명한 유학자들과 천주교 교리에 대해 논하며 진리를 밝힌 초기 호교론자로 공경을 받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신주와 같은 나뭇조각을 공경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무익한 일이며, 이를 금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어기기보다는 차라리 형벌과 죽음을 택하겠다"며 순교를 자청했다.
윤유일 최인길·지황도 "저 십자형틀에 묶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가 대신 죄를 지고 가셨으니, 어찌 자식된
자로서 저 큰 부모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교리의 가르침을 어기면서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분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천만번 죽을 각오가 돼있습니다" 하며 고문을 달게 받았다.
△ 순교를 갈망한 용덕(勇德)
이들 다섯 우선 순교자들의 용덕은 신유박해 순교자들에게도 큰 감화를 주었다는 기록이 달레 교회사 여기저기에 나온다.
「정조실록」(권33, 15년 11월7일자)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 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최인길·지황의 순교 소식을 듣고 쓴 편지(1797년)에서 "그들이 이토록 영광스럽게 순교의 은총을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동안 겪어야만 하였던 위험에 대한 보상일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하느님의 종 124위'의 우리말 약전 저술에 실무를 맡아온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박사는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모범이 된 우선 순교자 5위에 대한 현양과 연구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이라면서 "다섯 우선 순교자들의 용기와 고난, 그리고 최후에 보여준 순교 용덕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삶의 모범으로 다가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