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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産文藝作品과 無産文藝批評-동무 懷月에게」(金其鎭)
(1)
조선(朝鮮)의 푸로레타리아 문예운동(文藝運動)은 지난 1926년으로써 그 시험기(試驗期)를 완전(完全)히 맛추엇다고 본다. 지금이야말로 조선(朝鮮)의 푸로레타리아 문예운동(文藝運動)은 본무대(本舞臺)에 들어섯다. 동시(同時)에 우리들의 압해 노히어 잇는 또는 우리들이 차저내지 아니하면 아니될 푸로레타리아 문예상(文藝上)의 온갖 문제(問題)는 우리들로 하야곰 그 해결(解決)과 아울러 발전(發展)을 독촉(督促)함이 급(急)하다. 이 시기(時期)에 처(處)하야 동지회월(同志懷月)이 신년벽두(新年劈頭)에 김기진군(金其鎭君)에게 여(與)함이라 부기(附記)한 「투쟁기(鬪爭期)에 재(在)한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의 태도(態度」의 일문(一文)은 경청(傾聽)할만한 것이 잇섯고 비록 나 일개인(一個人)으로서 불복(不服)할 점(點)은 허다(許多)하엿스나 그러나 그것이 생성기(生成期)에 잇는 신흥(新興) 푸로레타리아문예(文藝)에 유익(有益)을 끼치엇슴은 적지 안흔 것이엇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푸로레타리아 문예본질론(文藝本質論)과 밋 푸로레타리아 문예비평(文藝批評)의 본질론(本質論)만도 우리들의 전부(全部)가 ‘졸업(卒業)’하지 못하고 잇는 것이 사실(事實)이다.
그럼으로 본질론적(本質論的) 논의(論議)는 우리들 사이의 급무중(急務中)의 급무(急務)가 아니면 안된다. 조선지광(朝鮮之光) 1월호(一月號)에 발표(發表)된 회월(懷月)의 논문(論文)이 나의 비평가적(批評家的) 태도(態度)-나는 이곳에서 겸손(謙遜)하지 안켓다-에 대(對)하야 비난(非難)한 것이고 공격(攻擊)한 것이고 경고(警告)한 것인 만큼 나는 회월(懷月)에게 대답(對答)할 의무(義務)를 갓는다. 그러나 나는 회월(懷月)과 나와의 사이에 주장상(主張上) 스스로 각이(各異)한 근본적(根本的) 차이(差異)를 발견(發見)하엿슬 뿐이요. 또는 회월(懷月)이 나엑 향(向)하야 발(發)한 공격(攻擊)과 경고(警告)가 회월자신(懷月自身)으로서의 나에게 갓는 똑가튼 입각지상(入脚地上)의 불만(不滿)의 고소(告訴)이엇든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회월(懷月)에게 향(向)하야 발(發)할 비난(非難)과 공격(攻擊)이 본래(本來)부터 논쟁(論爭)으로서 긴장(緊張)되지 못할 것임을 깨다럿다. 논쟁(論爭)은 두 개의 달른 입각지(入脚地)에서 출발(出發)될 때 그 태도(態度)가 긴장(緊張)을 보이는 까닭이다. 나는 투쟁기(鬪爭期)에 재(在)한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의 태도(態度)가 지시적(指示的), 투쟁적(鬪爭的)이 아니면 안되겟다는 동지(同志)의 말을 시인(是認)하고서 이 문(文)을 출발(出發)시킨다.
(2)
첫재로 우리들 사이에 문제(問題)될 것은-그리고 회월(懷月)과 나와의 사이에 이미 시비(是非)되어 잇는 것은- 일개(一個)의 개념(槪念)의 추상적(抽象的) 설명(說明)만으로 시종(始終)되고 마는 것이 소설(小說)로써 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問題)이다. 내가 조선지광(朝鮮之光) 작년(昨年) 12월 호(號)에서 말한 ‘소설(小說)이란 한 개의 건축(建築)이다’라는 말을 마음대로 아모러케 해석(解釋)하야가지고 출발(出發)한 점(點)에 관(關)한 회월(懷月)의 논조(論調)는 자못 ‘히스테리칼’하야 충분(充分)히 요령(要領)잇는 말 한마듸를 이곳에 인용(引用)하기 위(爲)하야 보건대 ‘푸로레타리아의 소설(小說)은 독립(獨立)된 건축물(建築物)이 아니니까 소설(小說)의 요건(要件)에 가초지 안하도 조타. 그것을 가촌다는 것이 시기상조(時期尙早)의 공론(空論)이다. 그런데 그러케 하기를 노력(努力)하는 사람이 잇다면 이미 그 사람은 푸로 작가(作家)가 아니고 푸로 생활묘사가(生活描寫家)다’ 하는 것이다. 이러케 요령(要領)을 따와도 두려웁건때 독자(讀者)는 일개(一個)의 개념(槪念)의 추상적(抽象的)설명(說明)만으로 시종(始終)한 것은 소설(小說)이 아니다. 웨그러냐하면 소설(小說)이란 한 개의 건축(建築)인 까닭이 아니냐-라는 문제(問題)에 대(對)한 명확(明確)한 해답(解答)으로는 파악(把握)하기 곤란(困難)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要)컨대 ‘푸로레타리아의 문학(文學)은 어떠하든지 조타. xx의 xx만을 하는 것이면 족(足)하다.」’ 하는 것이 그 논문(論文) 전체(全體)를 통(通)해서 볼 수 잇는 논조(論調)의 골자(骨子)이라고 미드면 족(足)하다.
‘개념(槪念)의 추상적(抽象的) 설명(說明)만으로 시종(始終)한 것은 소설(小說)이 아니다.’라 하얏슴에 대(對)하야 이상(以上)의 요령(要領)에 의(依)하야 회월(懷月)의 주장(主張)을 망발(妄發)되지 안케 번역(飜譯)하면 즉시(直時) 이와 가튼 말이 된다. 즉(卽) ‘개념(槪念)의 추상적(抽象的) 설명(說明)은 선전학(宣傳學)이다. 선전문학(宣傳文學)을 문학(文學)으로서 부인(否認)한다면 너는 푸로레타리아 문예가(文藝家)가 아니다.’-(내가 이 일문(一文)을 쓰면서 가장 곤란(困難)을 늦기는 것은 나의 11월 창작평문(創作評文)에서 회월(懷月)이 인용(引用)하야 가며 공격(攻擊)한 문구(文句)가 회월(懷月)에게 가서 정당(正堂)하게 이해(理解)하기 못되얏슬 뿐더러 「투쟁기(鬪爭期)에 재(在)한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의 태도(態度)」일문(一文)이 처음에 내가 바더 읽어보든 때에는 주의(注意)하지 아니하얏든 까닭인지는 몰르나 의외(意外)로 나에 대(對)한 공격(攻擊)이 순서적(順序的)으로 되지 못하고 논리상(論理上) 조화(調和)가 결핍(缺乏)된 점(點)이 만하서 요령(要領)을 엇기에 곤란(困難)한 점(點)이다. 이상(以上)에 적기(摘記)한 요령적(要領的) 인용(引用)에 과오(過誤)가 업다면 다행(多幸)이다.)-
그러나 선전문학(宣傳文學)은 결(決)코 단순(單純)히 어떤 개념(槪念)의 추상적(抽象的) 설명(說明)에 시종(始終)하는 것으로 되지 못하는 것임을 어찌하랴! ‘문학(文學)은 조직(組織)되고 고안(考案)되고 통일(統一)되어 아당(我黨)의 모든 일 가운데의 한 부분(部分)이 되어야 한다.’
(3)
一. 무산계급문학(無産階級文學)은 무산계급(無産階級)을 주제(主題)로 함은 자연(自然)이려니와 무산계급(無産階級)의 xx과 그 xxx 지시(指示)하는 것이라야 한다.
二. 무산계급문학작풉(無産階級作品)은 독립(獨立)된 건축(建築)을 맨들려는 것이 아니다. 무산계급(無産階級)의 전문화(全文化)가 한 건축물(建築物)이라면 무산계급(無産階級)의 예술(藝術)은 그 구성물(構成物)의 한아이니 석가래도 될 수 잇스며 기둥도 될 수 잇다.
三. 묘사(描寫)의 공과(功果)는 가공(加工)의 미(美)를 줌에 잇다.
四. 무산계급(無産階級)의 문예(文藝)는 묘사(描寫)로써 가치(價値)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作品)에 나타난 xxx정열(情熱)로써 그 작품(作品)은 ‘힘’을 엇는 것이다. ‘힘’을 설명(說明)함에는 묘사(描寫)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亦是) 힘으로써 설명(說明)하는 것임을 군(君)도 잘 알 것이다.
五. 무산계급문예비평가(無産階級文藝批評家)는 작품(作品)을 주석(註釋)하는 것이 아니고 책(責)하고 지시(指示)하는 것이나 ‘나타난 예술작품(藝術作品)을 일개(一個)의 사회현상(社會現象)으로써 나타난 예술가(藝術家)를 일개(一個)의 사회적(社會的) 존재(存在)로서 그 현상(現象), 그 존재(存在)의 사회적(社會的) 의의(意義)를 결정(決定)하는 비평(批評’ 즉(卽) 문화사적(文化史的) 비평(批評)이라야 한다.
六. 무산계급문예비평가(無産階級文藝批評家)는 군중(群衆)과 한가지로 벽(壁)을 OO기에 O력해야 한다.
「투쟁기(鬪爭期)에 재(在)한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의 태도(態度)」의 일문(一文)에서 극(極)히 중요(重要)한 골자(骨子)를 추리면 틀림업시 이상(以上)에 열거(列擧)한 6개조(六個條)의 요령서(要領書)가 된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이에 대(對)하야서 직접(直接)말하는 것을 긋치고 이러한 문제(問題) 즉(卽) 나의 이 일문(一文)의 표제(表題)가 명시(明示)하는 바 무산문예작품(無産階級作品)과 무산문예비평(無産階級批評)에 대(對)하야 주견(主見)을 술(述)하리라.
(4)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의 발생(發生)은 푸로레타리아 계급발생(階級發生)이 ‘필연(必然)’인 것이나 마찬가지로 ‘필연(必然)’이다. 그러면 푸로레타리아 문예(文藝)는 어대서부터 탄생(誕生)되엇느냐 하면 ‘과학(科學)의 소유자(所有者)는 푸로레타리아가 아니로 뿌르조아 지식계급(智識階級)의 범주(範疇)에 속(屬)하는 자(者)이며 그리고 사실상(事實上) 이 범주(範疇)에 속(屬)한 약간(若干)의 개인(個人)의 두뇌(頭腦)에서 현대(現代)의 xxxx는 탄생(誕生)된 것’과 가티 푸로레타리아 문예(文藝)도 풍부(豊富)한 역사(歷史)를 가진 뿌르조아 문학(文學)의 발달(發達)의 결과(結果) 속에서 태생(胎生)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족음 더 부연(敷衍)하야 말하겟다. -맑스의 철학설(哲學說), 경제학설(經濟學說), 사회학설(社會學說), 정치학설(政治學說)이 그것들이 헤-겔, 피이엘빠하, 따-윈, 오-웬, 푸-리에, 헤-라크라토스 등(等) 더 올나가면 희랍철학(希臘哲學)에서 까지도 그 연원(淵源)을 차질 수 잇슬 만콤 그만콤 뿌르조아 이데올로기 내(內에)서 생장(生長)되고 그리고 완성(完成)된 것이다. 무산계급(無産階級)의 경전(經典)은 이와가티 ‘인류지식(人類智識)의 집대성(集大成)으로 된 것이다.’ 그리하야 ‘사회주의(社會主義) 교리(敎理)는 소위(所謂) 계급(階級)의 대표자(代表者), 지식계급(知識階級)에 의(依)하야서 취급(取扱)된 철학(哲學), 역사(歷史) 경제(經濟)의 이론(理論)으로부터 생장(生長)한 것이요, 근세(近世)의 과학적(科學的) 사회주의(社會主義)의 건설자(建設者)인 맑스와 엥겔쓰도 역시(亦是) 그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에서 말한다면 뿌르조아적 인텔리겐챠에 속(屬)하얏다.’ 이와 마찬가지로 푸로레타리아 문예(文藝)는 난숙(爛熟)한 뿌르조아 문예(文藝) 그 자체(自體) 내에서 필연(必然)으로 발생(發生)된 것이나 자본주의(資本主義) 경제조직(經濟組織)이, 생산(生産)과 지배관계(支配關係)가 당초(當初)부터 사회주의(社會主義)의 경제조적(經濟組織)을 유치(誘致)하는 종자(種子)를 그 자체(自體) 내에 수태(受胎)하야가지고 잇섯드라는 것과 동일(同一)한 현상(現狀)이라는 것을 부인(否認)할 사람이 누구이냐. 자본주의(資本主義)의 난숙(爛熟)이 사회주의(社會主義)의 발생(發生)을 촉진(促進)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뿌르조아 문학(文學)의 난숙(爛熟)이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의 발생(發生)을 촉진(促進)한 것이 싸울 수 업는 사실(事實)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야 트로츠키가 아모리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 내지(乃至) 문화(文化)의 성립성(成立性)을 부정(否定)한다 할지라도 소위(所謂) ‘인류전사(人類前史)의 최후계급(最後階級’이 일, 이십년간으로 종결(終結)을 고(告)하지 아니할 것인 이상(以上)에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그 독자(獨自)의 영역(領域)을 가진 다른 온갖 프로레타리아 문화체계(文化體系)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 전(全) 계열(系列) 중 일계열(一系列)로써 성립(成立)할 수 잇는 물건이다. 만약(萬若)에 존재(存在)라는 것은 업고 모든 것이 ‘생성(生成)의 과정(過程’에 더 지나지 안는다는 엄격(嚴格)한 동적견지(動的見地) 외에는 용어(用語)까지도 허락(許諾)지 안는다 하면 나는 ‘성립(成立)’을 ‘생성(生成)’으로 개서(改書)하야도 조타. 하여간(何如間) 대치적(對峙的)으로 사용(使用)되는 우리들의 문자(文字)는 어떠하얏든지간에 나는 이곳에서 이 말만 하면 족(足)하다. 요(要)컨대 푸로레타리아 문예(文藝)의 발생적(發生的) 본질(本質)은 일반사회민중(一般社會民衆)의 생활현실(生活現實)이 결정(決定)한 것임은 물론(勿論)이려니와 그것이 풍부(豊富)한 역사(歷史)를 가진 뿌르조아 문학(文學)-그것은 근(近) 5세기(世紀) 동안에 거의 완성(完成)된 것이다- 이 체내(體內)에서 생성(生成)된 것인 만콤 그것은 결(決)코 ‘무(無)’에서붜 추출(抽出)된 혹(或)은 창조(創造)된 ‘유치(幼稚)한 인간(人間)의 상상(想像)의 창조(創造)’는 아닌 것이라고. 그리고 이와가티 되어서 발생(發生)한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결(決)코 유치(幼稚)한, 스스로 비하(卑下)할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어대까지든지 문학(文學)이다. 웨 그러냐고 또다시 뭇는다면 뿌르조아의 경제학(經濟學)을 그 이데올로기의 전선(戰線)에서 완전(完全)히 패배(敗北)식힌 푸로레타리아의 경제학(經濟學)이 어대까지든지 경제학(經濟學)인 것이나 마찬가지로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 그것도 문학(文學) 상(上)에 잇서서 뿌르조아 이데올로기를 완전(完全)히 패배(敗北)식힐 푸로레타리아의 ‘문학(文學)’이 아니고서는 견대지 못하는 까닭이다.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에 취(取)하야 가장 긴요(緊要)한 조건(條件)은 내용(內容)과 형식(形式)의 온전한 조화(調和)이다. 그리고 형식(形式)과 내용(內容)과의 조화(調和)를 어대서 구(求)할 수 잇느냐 하면 그 표현(表現), 기교(技巧), 형식(形式)은 각(各) 시대(時代)의 우수(優秀)한 것으로부터 그것을 배우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과거시대(過去時代)의 그것들이 반듯이 조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해부(解剖)하고 분석(分析)함은 그것이 구문학파괴(舊文學破壞)의 원동력(原動力)이 되는 수도 잇다’는 까닭이다.
(5)
이상(以上)에서 나는 푸로레타리아 문예(文藝)에 대(對)하야서 개곽적(客觀的)- 卽 사회학적(社會學的) 발생론적(發生論的) 견해(見解)의 일단(一端)을 술(述)하얏다. 나는 족음 더 전기(前記)와 가튼 견해(見解)에 서서 푸로레타리아 문예(文藝)를 논(論)하고서 푸로레타리아 문예작품(文藝作品)의 내용표현(內容表現)과 무산문예비평(無産文藝批評)의 방법론(方法論)에 언급(言及)하려 한다.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뿌르조아 문학(文學)의 체내(體內)에서 탄생(誕生)하얏다. 물론(勿論) 이 말에는 틀림이 업다. 그러면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뿌르조아 문학(文學)과 가티 완비(完臂)한 것일가. 전항(前項)에서 내가 한 말은 전군(前君)에게 이와가튼 의문(疑問)을 주엇슬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疑問)은 본래(本來)부터 갓지 안하도 조타. 웨그러냐하면 프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뿌르조아 문학(文學) 그 자체(自體) 내에서 탄생(誕生)되엇스나 그러나 아직 충분(充分)히 발육(發育)할 시기(時期)에 도착(到着)하지 못한 까닭으로 그것이 정리(整理)되고 통일(統一)되지 못하얏슬 것이 명백(明白)하니까-. 뿌르조아 문학(文學)이 뿌르조아 계급(階級)의 발달(發達)에 따라서 변천(變遷)하야 온 것이나 마찬가지로 푸로레타리아 문학(文學)도 푸로레타리아 계급발달(階級發達)에 동반(同伴)하야 여러 가지로 변천(變遷)한 것은 사실(事實)이니까. 다만 여긔에서 변(變)하지 아니할 결정적(決定的) 조건(條件)은 항상(恒常) 처음이나 나종이나 뿌르조아 문학(文學)을 파괴(破壞)하는 어대까지든지 온전한 푸로레타리아의 문학(文學)일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다른 푸로레타리아 과학(科學)과 한 모양으로.
모씨(某氏)에 의(依)하면 구라파(歐羅巴)에 잇서서 뿌르조아 문학(文學)이 밟어온 과정(過程)은 대별(大別)하야
一. 대뿌르조아의 상공시대(商工時代) (1500년대의 이태리(伊太利))
二. 소뿌르조아의 무정부시대(無政府時代) (1800년대의 불란서(佛蘭西))
三. 대뿌르조아의 제국주의적(帝國主義的) 독재시대(獨裁時代) (1900년대로부터 금일(今日))
이와 가티 5세기(世紀)동안을 전래(傳來)하야 오다가 19세기(世紀) 말엽(末葉)에 이르러 서 난숙(爛熟)을 보이엇다. 그리고 푸로레타리아의 예술(藝術)도 이와 근사(近似)히 좌기3 기(左記三期)를 그 과정(過程)으로 밟으리라고 한다.
一. 공상시대(空想時代) (무조직(無組織)의 시기(時期))
二. 프티 ․ 뿌르조아 시대(時代) (자기중심(自己中心)의 푸로레타리아적(的) 도취(陶醉). 말하자면 xx적(的) 유치(幼稚)한 명정시대(酩酊時代)
三. 현실시대(現實時代) (사회주의(社會主義)의 시대(時代))
나는 대체(大體)의 구분(區分)에 있어서 이것에 찬성(贊成)하는 바이다. 그리고 조선(朝鮮)의 푸로레타리아 문예운동(文藝運動)은 그 공상시대(空想時代)는 약(約) 삼개년(三個年)동안 계속(繼續)하야온 시험기(試驗基)의 초기(初期)에서 이믜 지나갓다고 본다. 거년(去年)으로부터 오늘날까지는 여상(如上)의 구분(區分)에 의(依)한다면 프티 ․ 뿌르조아 시대(時代)에서 배회(徘徊)하고 잇다고 본다. 물론(勿論) 이것은 푸로레타리아문예(文藝) 뿐만이 아니라 일반예술(一般藝術)에 잇서 자연(自然)히 밟게 되는 과정(過程)이라고 봄이 가(可)할 뿐이요 반듯이 이러한 과정(過程)을 밟지 안코서는 안된다는 기계론(機械論)은 아니다.
푸로레타리아의 문학(文學)은 『무산계급(無産階級)의 생활(生活)을 주제(主題)로 함은 물론(勿論)이려니와 무산계급(無産階級)의 xx과 xxxx지시(指示)하는 것이래야』함은 물론(勿論)이다. 그것은 푸로레타리아의 심의(心意)의 자연(自然)의 발로(發露)인 까닭이다. 고뇌(苦惱)하고, 사색(思索)하고, 돌진(突進)하는 푸로레타리아의 심의(心意)의 온전한 투영(投影)인 까닭이다. 그럼으로 여긔에서는 특별(特別)히 『선전(宣傳)을 위(爲)한 문학(文學)』이라는 일종(一種)의 기계론(機械論)은 성립(成立)될 수 업다.
웨그러냐하면 온잣 문학적(文學的) 소산(所産)은 객관적(客觀的) 견지(見地)에서 이것을 해부(解剖)할 때에는 모도다 그 하나일지라도 선전적(宣傳的) 아닌 것이 업는 까닭이다. 내가 지금 찬란(燦爛)한 저녁놀의 황홀(恍惚)한 그림자 알에 서서 화원(花園) 속에 오고가는 나뷔의 날에의 미묘(微妙)한 동작(動作)을 바라보며 지나간 날의 충동적(衝動的)인 사랑하는 사람의 살의 향(香)내를 추억(追憶)하고 무한(無限)한 환상(幻想)의 날애를 펴가지고 사랑의 속살거림의 초현실적(超現實的) 왕국(王國)으로 마음을 달린다고 가정(假定)하자. 그리고 내가 만약(萬若) 시인(詩人)이라고 하고서 내가 이 몽환적(夢幻的)인 정서(情緖)를 시(時)의 형식(形式)에 의(依)하야서 표현(表現)하얏다고 하자. 그것은 물론(勿論) 나 일개인(一個人)이 늦긴 정서(情緖)의 거짓 업는 온전한 심의(心意)의 투영(投影) 그 물건에서 더 지나지 안는다. 그러나 이리햐야서 지어진 시(時)는 동시(同時)에 다른 아모것도 아니고 다만 내가 늣긴 몽환적(夢幻的) 정서(情緖)의 전염(傳染)을 행(行)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時)는 훌륭히 초현실적(超現實的) 탐미적(耽美的) 향락주의(享樂主義)의 선전(宣傳)의 소역(所役)을 행(行)하고야 말앗다. 이와 똑가티 내가 일개(一個)의 푸로레타리아 작가(作家)이라고 도한 가정(假定)하자. 그리고 내가 xx한 고주(雇主)에 반항(反抗)하야 동맹파업(同盟罷業)을 한 노동자군(勞動者群)의 전위(前衛)의 일인(一人)이라고 가정(假定)하자. 나는 고주(雇主)의 부정(不正)과 파업노동자(罷業勞動者)의 가정(家庭)의 참담(慘憺)한 생활고(生活苦)와, 무산계급(無産階級)의 단결(團結)의 힘의 위대(偉大)함과, 또 바리시티 정신(情神)의 견고(堅固)한 것을 감득(感得)하고 감격(感激)하엿다고 가정(假定)하자. 나는 이러한 정서(情緖)를 놀애한다. 시(時)의 형식(形式)에 의(依)하야서 표현(表現)한다. 그러면 이와가티 되어서 지어진 시(時)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가? 그것은 훌륭히 계급(階級) xx을 xx하고 xx을 구가(謳歌)하고 선전(宣傳)한 것에 지나지 안는다. 물론(勿論) 이것은 온전한 자기심의(自己心意)의 거짓업는 투영(投影)인 동시(同時)에 이것은 이러한 정서(情緖) 혹(或)은 정신(精神)의 선전(宣傳)의 도구(道具)에 지나는 것이 업다. 똑가튼 의미(意味)에서 재래(在來)의 뿌르조아문학사(文學史)에 나타난 온갓 유파(流波)-예(例)를 들면 탐미파(耽美派), 향락주의(享樂主義), 낭만주의(浪漫主義), 인도주의(人道主義), 자연주의(自然主義) 혹(惑)은 따따 등(等)은 모도다 자기(自己)의 정서(情緖)의 전염(傳染), 자기(自己)의 인생관(人生觀)의 선전(宣傳)을 하야 온 것에 불과(不過)하다. 이에 일으러서 나는 특별(特別)히 「선전(宣傳)을 위(爲)한 소설(小說)」이라든가 「선전(宣傳)을 위(爲)한 시(時)라든가」그 외(外)의 무엇이라든가 하는 일종(一種)의 문학상(文學上) 기계론(機械論)은 성립(成立)할 수 업는 것으로 알고 거절(拒絶)한다. 따라서 무산문예(無産文藝)에 대(對)한 견해(見解)에 잇서서도 나는 이것을 고집(固執)한다. 개념(槪念)의 추상적(抽象的) 설명(說明)만으로 시종(始終)하는 것은 소설(小說)이 아니다. 뿌르조아문학(文學)에서도 그러하엿슴과 가티 푸로레타리아문학(文學)에 잇서서도 그러하다.
문학상(文學上)에 잇서서 목적론적(目的論的) 견해(見解)는 그 출발점(出發點)을 심리학상(心理學上)에 둔다. 그리고 이것을 연장(延長)하면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의 결론(結論)에 도달(到達)한다. 만약(萬若)에 푸로레타리아문학관(文學觀)이 심리학적(心理學的) 목적론적(目的論的) 견해(見解)만으로 성립(成立)한다면 그것은 푸로레타리아문학지상주의(文學至上主義)에 떠러지고 말 것이다. 웨그러냐하면 이와가튼 견해(見解)는 작가(作家)의 제작시(制作時)의 심리현상(心理現象)을 부연(敷衍)하야 가지고 그것으로써 전반문예(全般文藝)의 목적론(目的論)을 짓는 까닭이다. 소위(所謂) 온전한 푸로레타리아의 심의(心意)의 투영(投影)만이 푸로레타리아 문학전반(文學全般)의 목적론(目的論)이 되는 까닭이다.
객관적(客觀的), 사회학적(社會學的) 견해(見解)에 의(依)하야 온갓 문학적(文學的) 소산(所産)은 어떠한 정서(情緖) 내지(乃至)의 선전(宣傳)의 형식(形式)이다. 그러면 무산문예비평(無産文藝批評)은 어떠한 방법(方法)에 의(依)하야서 하는 것이 필요(必要)할 것이냐? 잠깐동안 나는 비평(批評)에 대(對)하야 이약이하지 안흐면 안되겠다.
(6)
내가 이상(以上)에서 등한(等閑)히 하고 취급(取扱)하지 아니한 문제(問題)가 무엇이냐. 그러면 나는 한개의 중대(重大)한 사실(事實)을 간과(看過)하엿다. 다른것이 아니다. 금일(今日)의 푸로레타리아 문예운동(文藝運動)의 「투쟁기(鬪爭基)」에 잇다는 것이다.
투쟁기(鬪爭基)의 푸로레타리아문학(文學)에는 두개의 임무(任務)가 잇다. 한개는 재래(在來)의 문학(文學)을 넘어 털이는 것이다. 한개는 푸로레트 ․ 컬트의 소임(所任)을 실행(實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재래(在來)의 문학(文學)을 넘어털인다. 이것은 중대(重大)한 임무(任務)가 아니면 아니다. 그러나 재래(在來)의 문학(文學)을 넘어털이기만 하면 고만인가? 『자본주의(資本主義)를 넘어털인다고 백(白)이나, 청(靑)이나, 황(黃)이나, 흑(黑)이나 아모것이든지 상관(相關)업다고는 할 수 없다.』여긔에서 비롯오 푸로레트 ․ 컬트 문제(問題)가 생긴다. 따라서 제작(制作)의 내용(內容)은 주문(注文)되는 것이다. 물론(勿論) 이것은 투쟁기(鬪爭基)라는 특수(特殊)한 사정(事情)이 잇슴으로 인(因)하야 발생(發生)하는 것이다.
그러면 문예비평(文藝批評)은 어떠하게 될 것인가. 나는 결론(結論)을 먼저 말핮. 가로대 문예비평(文藝批評)은 재래(在來)로 발달(發達)되어 온 문학전문적(文學專門的) 비평(批評)의 결과(結果)를 취입(取入)한 맑스주의비평(主義批評)이어야만 한다고. 예술적(藝術的) 작품(作品)의 구성요소(構成要素)를 분해(分解)하며, 그 결합(結合)을 조사(調査)하며, 조화(調和)의 유무(有無)를 지적(指摘)하며, 내용(內容)과 기교(技巧)의 관계(關係)를 분석(分析), 주석(註釋)하는 비평(批評)은 문학사적(文學史的) 비평(批評)이고 예술적(藝術的) 작품(作品)을 일개(一個)의 사회현상(社會現象)으로써 나타난 예술가(藝術家)를 일개(一個)의 사회적(社會的) 존재(存在)로써 그 현상(現象) 그 존재(存在)의 사회적(社會的) 의의(意義)를 결정(決定)하는 비평(批評)은 문화사적(文化史的) 비평(批評)이라고 한 청야씨(淸野氏)의 분류(分類)는 타당(妥當)하다. 소위(所謂) 내재적(內在的) 비평(批評)이라 함은 문학전문가적(文學專門家的) 비평(批評)이요, 소위(所謂) 외재적(外在的) 비평(批評)이라 함은 문화사적(文化史的) 비평(批評)이다. 그리햐야 나는 나의 결론(結論)을 말하면 우리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소위(所謂) 내재적(內在的) 비평(批評)을 취입(吹入)한 외재적(外在的) 비평(批評)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외재적(外在的) 비평(批評)은 본래(本來)부터 무산문예비평가(無産文藝批評家)의 근본적(根本的) 요건(要件)이다. 외재적(外在的) 비평(批評)은 작품(作品)에 나타나 작가(作家)의 정신(情神) 내지(乃至) 사상(思想)이 현실사회(現實社會)와 어떠한 연결관계(連結關係)에 잇스며, 나타난 작품(作品)과 작가(作家)가 어떠한 소속계급(所屬階級)의 역할(役割)을 하얏는가? 함을 추구(追求)하고 지적(指摘)함으로써 사회적(社會的)으로 평가(平價)를 나림을 능사(能事)로 한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전문적(專門的) 표현수법(表現手法)의 평가(平價)도 필요(必要)한 것의 하나이다. 이것은 나의 지론(持論)인 동시(同時)에 러시아의 무산문예비평가(無産文藝批評家) 중(中)에도 극구창도(極口唱導)하는 바인 것임을 우연(偶然)히 나는 발견(發見)하엿다. 『노국문학(露國文學)을 연구(硏究)함에 잇서서 나는 맑스주의자(主義者)의 견해(見解)와 형식파(形式派)의 달성(達成)한 결과(結果)를 종합(綜合)하야가지고 고찰(考察)하는 것이 필요(必要)하다고 한다. 웨그러냐하면 우리들은 소속계급(所屬階級)과 연락(連絡)을 유지(維持)하는 예술가(藝術家)의 사상(思想)뿐만이 아니라 실제(實際)의 현상(現象)을 예술작품(藝術作品)으로 변형(變形)하는 수법(手法)에도 통달(通達)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까닭이다. 형식파(形式派)는 수법(手法)의 해부(解剖)를 알고서 문사(文士)의 목적(目的)을 한각(閑却)하고 맑스주의평론가(主義評論家)는 목적(目的)에 주의(注意)하나 그러나 수법(手法)을 돌아다 보지 않는다. 형식파(形式派)는 문학적(文學的) 현상발전(現象發展)의 법칙(法則)을 기술(記述)하고 입증(立證)하고 맑스주의자(主義者)는 이것을 발견(發見)하고 설명(說明)한다.』-러시아 예술가협회간부(藝術家協會幹部)의 일인(一人)이요, 예술과학대학원(藝術科學大學院)의 일원(一員)으로 사회학부혁명예술반(社會學部革命藝術班)의 일을 하는 류-오프 ․ 로까쳅스키는 문학비평(文學批評)에 대(對)한 의견(意見)을 이러케 진술(陳述)하였다. 러시아의 푸로레타리아문학(文學)도 유년기(幼年期)에 잇슴은 자타(自他)가 공인(共認)하는 사실(事實)이다. 우리들은 이 사람의 이 말은 참고(參考)할 필요(必要)가 있다. 내재적(內在的) 비평(批評)을 취입(取入)한 외재적(外在的) 비평(批評)은 「내재(內在)」도 아니고 「외재(外在)」도 아니다. 이것은 둘이 아니고 온전한 하나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맑스주의적(主義的) 문예비평(文藝批評)의 의법(法)이다.
이것에서부터 다시 나는 회월(懷月)에게 직접(直接) 말할 것을 따로히 추리어 가지고 이미 장수(章數)도 만하젓스니 간단(簡單)하게 말하리라.
(7)
내가 꾸미어 노흔 군(君)의 논문(論文)의 요령서제일(要領書第一)을 나는 시인(是認) 지지(支持)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푸로레타리아의 작품(作品)은 독립(獨立)된 건축(建築)을 맨들려는 것이 아니다-운운(云云)에 이르러서는 나는 군(君)의 말을 시인(是認)하지 안는다. 푸로레타리아문학(文學)은 물론(勿論) 전(全) 푸로레타리아 문화계열중(文化系列中)의 하나이다. 군(君)은 「소설(小說)은 건축(建築)이다」라고 한 내 말을 부정(否定)하기 위(爲)하야 본의(本意)아닌 논리(論理)의 비약(飛躍)을 시험(試驗)하얏는지 몰은다. 그러나 푸로레타리문학(文學)은 전(全) 「푸로레타리아문화건축(文化建築)을 구성(構成)하는 과학적(科學的) 영역(領域)을 유지(維持)한 일개(一個)의 건축(建築)이다」. 군(君)은 「묘사(描寫)의 공과(功果)는 가공(加工)의 미(美)를 줌에 잇다」하얏다. 대개(大槪) 군(君)은 묘사(描寫)를 어떠한 것으로 알고서 말하얏는가. 조라의 소위사실적묘사(所謂寫實的描寫)가튼 것만이 묘사(描寫)인 줄로 알고 한 말이 틀림업다. 묘사(描寫)의 정의(定義)는 작자(作者)가 자기방(自己方) 기도(企圖)를 사물(事物)의 연락(連絡)과 사건(事件)과 사건(事件)의 관계(關係)와 정서(情緖)와 행동(行動)의 연락(連絡)을 통(通)해서 표현(表現)하고자 하는 일수단(一手段)이다. 묘사(描寫)의 생명(生命)을 가공(加工)의 미(美)에 둔 것은 뿌르조아들의 해석(解釋)이다. 「푸로레타리아의 문예(文藝)는 묘사(描寫)로써 가치(價値)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운운(云云)」한 것도 확실(確實)히 망발(妄發)이다. 「힘을 설명(說明)함에도 묘사(描寫)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한다」하니 「힘」은 어떠한 수법(手法)으로 표현(表現)되는가? 「힘」업는 묘사(描寫)는 허물벗은 매암이 껍질가튼 것이다! 더 길게 말하지 안켓다. 또 그리고 기둥도 업시 석가래도 업시 붉은 집웅만 닙히어 노흔 건축(建築)이 잇는가? 라고 한 나의 말을 미꼬아서 유리며, 커-텐이며, 쿳숀이며, 빼드며․․․․․․라고 주서친 것은 쓸데업시 미소(微笑)만 자어내는 것이 되고 말앗다. 이는 이 점(點)에서 다시 군(君)의 작품(作品) 「철야(徹夜)」와 「지옥순례(地獄巡禮)」에 언급(言及)함이 업슬 수 업다. 결론(結論)만을 말하리라.
투쟁기(鬪爭基)에 처(處)한 푸로레타리아의 문예작품(文藝作品)은 무엇보다도 xx적(的) 실증적(實證的)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실증적(實證的)인 것만콤 힘이 잇는 까닭이다. 실증적(實證的)이 나닌 공허(空虛)함이여? 그런데 불행(不幸)히 군(君)의 작품(作品)은 개념(槪念)의 추상적(抽象的) 설명(說明)으로 시종(始終)되엇지 실증적(實證的)이 못되며, 조직적(組織的)이 못되엇다. 그럼으로 서두(書頭)에서 나는 「이 소설(小說)은 가장 논리적(論理的)으로 된 것 갓다」라는 말을 하얏다. 이 말은 반어(反語)다. 군(君)은 군(君)의 「지옥순례(地獄巡禮)」에서 기갈(飢渴)에 대(對)한 실감(實感)의 고조(高調)가 업섯다는 내가 발(發)한 비난(非難)을 「․ ․ ․ ․ ․ ․ 하게 된 원인(原因)을 묘사(描寫)하라는 것은 노동자(勞動者)의 생활(生活)을 참시(參試)하자는 것이지 노동자(勞動者)의 생활(生活)의 전개(展開)는 아니다」라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말로 일축(一蹴)하얏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닑으면서 실소(失笑)하얏슬 뿐이다. 칠성이 아버지 진달이의 배곱허 하는 모양을 보다가 만주장사의 「만주노 호야호야」ㅅ 소리가 나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독자(讀者)도 곳 자기(自己) 배가 곱흔 듯이 그 만주장사를 때려 넘어털이고 만주를 빼서먹고 십흔 생각이 이러날만큼 되어야 이것이 살어서 펄펄 뒤는 작품(作品)이 된다. 이런것이 군(君)이 말하는 「힘」이다.
그러나 나는 단언(斷言)한다. 절망(絶望)의 폭발(爆發)이 골자(骨子)로 된 소설(小說) 도는 복수(復讎)가 곳 투쟁(鬪爭)으로 된 소설(小說) 등(等)은 진정(眞正)한 푸로레타리아의 문학(文學)은 아니라고. 그럼으로 만주장사를 죽이고 감옥(監獄)으로 가는 것을 이제 백보(百步)를 양보(讓步)하야 군(君)의 고의(故意)가 아니라고 한다 하드래도 나는 군(君)의 이 작(作)에서 xxxx적(的) 정신(精神), 집단적(集團的) 정신(精神)의 발양(發揚)을 보지 못한다. 이 의미(意味)에 잇서서 「지옥순례(地獄巡禮)」는 완전(完全)히 실패(失敗)한 것이다.
그리고 「철야(徹夜)」잇서서 내가 비난(非難)한 요점(要點)은 한 개(箇)의 개념(槪念)에 관(關)한 추상적(抽象的) 설명(說明)으로 시종(始終)하얏다는 것인대 군(君)은 건축토대전체(建築土臺全體)를 부정(否定)하얏다고 노(怒)햇다. 그러나 계급의식(階級意識)의 xx은 계급의식(階級意識)의 개념(槪念)에 관(關)한 추상적(抽象的) 설명(說明)만으로 되지 못한다. 구체적(具體的) 설명(說明)이라느니보다 실증적(實證的) 표현(表現)이 업고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나의 비평(批評)의 태도(態度)에 관(關)하야 두어 마듸 석명(釋名)하겟다. 나의 비평가적(批評家的) 태도(態度)가 무산계급문예비평가(無産階級文藝批評家)로서 선명(鮮明)치 못한 점(點)이 크다하면 그것은 진실(眞實)로 내가 평소(平素)에 기대(期待)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군(君)이 인용(引用)한 나의 십일월창작평서두(十一月創作平書頭)의 일절(一節) 즉(卽) 「나는 문예가(文藝家)의 친절(親切)한 진정(眞正)한 의미(意味)에서의 주석자(註釋者)되기는 노력(努力)해 왓스며 ․․․․․․운운(云云)」의 일절(一節)이 나로하야곰 이와가튼 불행(不幸)한 결과(結果)를 보게한 것이리라고 밋는다. 그러다 정직(正直)하게 말하야서 나는 나 혼자 병인(丙寅) 일년(一年)동안 월평(月評)의 붓을 들어 온 까닭으로 다소(多少) 비평가연(批評家然)한다는 비난(非難)이 잇슬가 두려워하야 겸손(謙遜)하는 뜻으로 「주석(註釋)」이라는 말을 썻섯다. 그리고서 「진정(眞正)한 의미(意味)에서의」라는 말을 그 우에 보태엇다. 이 일언(一言)이 나에게 화(禍)를 가져왓다면 이것은 나에게 잇서서 중대(重大)한 문제(問題)가 아니다. 웨그러냐하면 나는 바로 그 전절(前節)에서 「내가 이 비평(批評)의 붓을 드는 목적(目的)은 우리가 가진 문예가(文藝家)의 개인적(個人的) 창작(創作)에서 그 일반적(一般的) 가치(價値)를 발견(發見)함에 잇고 따라서 작가(作家)가 제시(提示)하고자 한 인생(人生)의 의의(意義)에 대(對)하야 또는 사회적(社會的) 문제(問題)에 대(對)하야 이것을 「주석(註釋)」하며 또는 작(作)에 나타나는 작가(作家)의 정신(精神), 창작(創作)에 대(對)하야 취(取)한 작가(作家)로서 용의(用意)를 해부비평(解剖批評)하야써 그것을 사회적(社會的)으로 평가(評價)함에 잇다」하고 나의 비평가적(批評家的) 태도(態度)의 전폭(全幅)을 요약(要約)하야서 성명(聲明)한 바이 잇스니까. 「주석(註釋)하며 해부비평(解剖批評)하야써 사회적(社會的)으로 평가(評價)」한다는 것은 맑스주의자(主義者) 비평(批評)이니 이것은 나의 본래(本來)의 태도(態度)이다. 그리하야서 나는 건축(建築)으로 되지 안핫다고 군(君)의 작품(作品)의 바탕을 부정(否定)하지 안핫다. 그 증거(證據)는 「이것을 선전문학(宣傳文學)으로 썻다. 그러나 선전문학(宣傳文學)도 문학상요건(文學上要件)을 구비(俱備)해야만 하겟다.」라는 말에서 그 토대(土臺)만을 인정(認定)하얏다. 다만 군(君)에게 향(向)하야 가장 필요(必要)한 말이 수법(手法)에 관(關)한 말이기에 오로지 수법(手法)에 관(關)한 말만 한 것이다. 그러타고 내가 창작평(創作評)을 하야 온 이래(以來) 금일(今日)까지 표현수법(表現手法)만이 되엇다고 혹(或)은 군(君)의 소위(所謂)「구조상모순(構造上矛盾)이 업다고 곳 그 건물(建物)을」 칭송(稱頌)하야 본 경험(經驗)은 업다. 만약(萬若)이 점(點)에 관(關)하야서 일일(一一)히 예시(例示)하라 하면 예시(例示)하겟다. 그래서 군(君) 일개인(一個人)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동지(同志)의 대부분(大部分)이 나의 비평가적(批評家的) 태도(態度)에서 소위(所謂) 「프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되지 전(前)에 「계급의식운운(階級意識云云)」에 호감(好感)」을 가져야 할 만콤 불선명(不鮮明)한 점(點)이 잇는 것이 사실(事實)이라면, 공인(共認)하는 사실(事實)이라면 맛당히 나는 동지(同志)들 압혜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謝罪)하고 압날을 맹서(盟誓)하겟다.
(『朝鮮文壇』 제19호, 192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