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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게임=서형욱] '필리핀'이라는 단어에서 '축구'가 연상되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축구보다는 (얼마전 '세기의 매치(?)'를 펼친) 권투선수 매니 파퀴아오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어쩌면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농구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을 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만큼 필리핀과 축구는 우리에게 꽤 낯선 조합이란 얘기다.
사실, 이게 뭐 이상할 것은 없다. 필리핀은 FIFA랭킹 124위의 축구 약소국이자, 같은 아시아임에도 우리와는 별로 만난 적이 없이 없어서다. 이렇다할만한 스타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지도 않으니 우리에게 필리핀은 축구와 연계될 일이 별로 없는 국가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닌 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리핀 축구는 조금씩 솟아오르는 중이다. 필리핀은 (이제 고작 2경기를 치렀을 뿐이지만) 2018년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에서 2연승으로 조 선두를 달리는 중이며, 124위는 그들이 이제껏 기록한 가장 높은 FIFA 랭킹이다. 이쯤되면 그들의 축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때마침, 지난 주말 K리그 클래식에 필리핀 국가대표 선수가 등장했다. 대전 시티즌이 필리핀 현역 국가대표 수비수인 알바로 실바를 영입한 것이다. 아시아 쿼터 등의 이유로 여러 국적의 아시아 선수들이 K리그에 입성한 전례는 있지만, 필리핀 선수의 등장은 처음있는 일이다. 이래저래 필리핀 대표팀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다국적군' 필리핀 국가대표팀의 시작은 FM!
조금 더 살펴보니 남다른 구석이 있다. 대전에 입단한 필리핀 국가대표 수비수 알바로 실바는 사실상 스페인 사람이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축구를 시작해 20대 중반까지 스페인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말라가 유스팀을 거쳐 1군에 데뷔했고, 헤레스, 카디스 등에서 뛰었다. 올해로 서른 두 살인 실바가 필리핀 국가대표가 된 것은 지난해다. 외할머니가 필리핀 사람인 실바는, 가족력 덕분에 필리핀 2중국적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필리핀 축구협회의 부름을 받았다. 대전 입장에서는 - 과거 FC서울이 스페인 출신의 일본 국적 선수 에스쿠데로를 데리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 스페인 선수를 아시아 쿼터로 영입하는 효과를 누리는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필리핀 국가대표팀에 알바로 실바 같은 케이스가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역 필리핀 국가대표 선수들의 국적과 출신지를 살피면 굉장히 다양한 국적이 튀어 나온다. 본토인 필리핀과 알바로 실바의 스페인은 물론이고 영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덴마크, 아랍에미리트, 일본, 미국, 네덜란드 등 굉장히 다양한 출신의 선수들이 '필리핀' 국기 아래 뭉쳐 축구팀을 만들었다. 이쯤되면 축구계의 UN, 다국적 군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이 이처럼 다국적 대표팀으로 재탄생한 시발점은 이채롭게도 축구게임 FM(Football Manager)이다. 국내에도 적잖은 마니아 층을 보유하고 있는 이 축구 매니지먼트 게임은, 특유의 뛰어난 자체 스카우팅 시스템을 통해 20세기 후반부터 우수한 축구 선수의 등장을 예견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초창기, 조 콜(잉글랜드)나 하비에르 사비올라(아르헨티나)처럼 아직 글로벌하게 주목받지 못하던 어린 선수들의 잠재력을 높게 설정해 '예언' 신드롬을 일으켰던 FM은, 아직 잉글랜드 3부리그(피터스보로)에 있던 사이먼 데이비스나 매튜 에더링턴 같은 무명 선수들의 잠재 능력을 높이 평가해 향후 이들이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하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게임이 필리핀 국가대표팀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단순하다. FM을 즐기던 필리핀의 어린 축구팬이, 이 게임을 즐기던 중 첼시 유스팀 소속 선수 두 명이 '필리핀'으로 이중국적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흥분한 이 팬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필리핀 축구협회도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이 둘은 2005년 필리핀 축구협회의 공식 제안을 받아 필리핀 국가대표를 선택하게 된다. 현재 필리핀 국가대표 주장인 필 영허즈번드 형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성씨가 '젊은 남편'인 이 형제의 이름은 본명이다!) 당시 (실제로) 첼시 유스팀에 속해 있던 이 두 런던 근교 태생 소년들은 영국 국적의 아버지(필립 영허즈번드)와 필리핀 출신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영국-필리핀 이중국적을 갖고 있었다.
2003/04 시즌과 2004/05 시즌, 두 시즌 연속 첼시 유스팀 최다득점자였던 필 영허즈번드(1987년생)는 결국 첼시에서 성인팀 데뷔전을 치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형인 제임스 영허즈번드와 함께 필리핀 국가대표를 택한 필은 '어머니의 나라' 필리핀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영국 유명 클럽 유스 출신에 수려한 용모가지 갖춘 - 게다가 이름까지 '어린 남편'인 - 영허즈번드 형제는, U23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한 2005 SEA 게임(동남아 국가들 간의 종합대회)에서 개최국임에도 예선 통과에 실패한 대표팀에서 맹활약하며 스타덤에 오른다. (둘은 조별리그에서 팀이 뽑아낸 6골 가운데 4골을 합작했다.) 만년 하위권을 전전하던 필리핀 축구에 그야말로 새 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전세계를 뒤져라!' - 필리핀 축구대표팀의 새로운 전략
'어린 남편' 형제로 재미를 본 필리핀 축구계는, 이후 세계 곳곳에 숨겨진(?) 필리핀 혈통의 축구 재능들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외로 제법 많은 선수들이 필리핀 혈통으로 밝혀지며 필리핀 축구계는 한껏 달아오른다. 사실, 필리핀은 빼어난 기량을 갖춘 축구 스타를 배출한 적이 있는, 전통(?)있는 민족이다. 가장 대표적인 스타는 뭐니뭐니해도 파울리뉴 알칸타라일 것이다. 1896년 필리핀에서 태어난 파울리뉴 알칸타라는 유럽 클럽에 진출한 첫 아시아 선수였다. 스페인 군인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알칸타라는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건너간 뒤 스무 살 때 필리핀으로 돌아올 때까지 FC바르셀로나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열 여섯 살 때 바르셀로나 선수로 데뷔해 스무 살 때 이미 50골을 넘게 터뜨린 공격수였던 그는 필리핀에서 2년간 체류하게 필리핀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뒤 1918년 다시 바르셀로나로 건너가 이 클럽에서 1927년에 은퇴했다. FC바르셀로나는 클럽에서 200골을 터뜨린 그에게 은퇴 기념 경기를 열어줬는데, 그 상대는 스페인 국가대표팀이었다(알칸타라는 카탈로니아 대표팀과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A매치 경기를 뛰었다. 그 시절엔 그게 가능했다). 이후 알칸타라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아무튼, 필리핀 혈통을 가진 축구 스타들의 존재가 낯선 것은 아니다. 한때 국내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잘못 알려져 '김실바'라는 별명을 얻은 다비드 실바(스페인/맨체스터시티)는 모계가 필리핀 혈통인 것으로 확인됐고, 풀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로 유럽 무대를 휘젓고 있는 다비드 알라바(오스트리아/바이에른뮌헨)는 필리핀 출신 어머니와 나이지리아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물론 이런 재능들이 혈통을 이유로 필리핀 국가대표를 쉽게 택할 리는 없다. 이민의 역사가 긴 탓에 여러 나라에서 축구를 시작한 필리핀 혈통 후손의 수는 많지만, 실력이 뛰어난 선수는 해당 국가의 대표선수가 되는 꿈을 버리기 쉽지 않고, 실력이 부족한 선수는 데려오기가 마땅치 않은 고민이 쉽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낯선 환경, 낯선 언어 등의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니, '어린 남편 신드롬'을 이어가려는 필리핀 축구협회의 노력은 탄탄대로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축구협회는 소기의 성과를 냈다. 태생지에서 국가대표가 되려는 꿈을 접었거나,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선수들을 여럿 영입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역 필리핀 국가대표팀의 다국적 선수 몇몇을 소개하면 대략 이렇다.
- 닐 에더리지 : 1990년생, 골키퍼, 191cm, 모계 필리핀. 2008년 필리핀 국대 데뷔.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 출신. 첼시와 풀럼 유스팀을 거쳐 잉글랜드 하위리그에서 서브 골키퍼로 활약. 현재 잉글랜드 3부리그(리그1) 월스올에서 뛰다 방출(FA).
- 롭 기어 : 1981년생. 센터백. 178cm, 모계 필리핀. 2009년 필리핀 국대 데뷔. 잉글랜드 (당시) 1부리그 소속이던 윔블던에서 프로 데뷔. 이후 잉글랜드 하위 리그 활약. 현재 잉글랜드 아마추어리그 아스톳 유나이티드 소속.
- 슈테판 팔라 : 1989년생. 레프트백, 173cm, 모계 필리핀. 2015년 5월 필리핀 국대 데뷔. 오스트리아 청소년 대표 출신. 오스트리아 명문 라피드 빈 유스팀을 거쳐 성인팀 데뷔. 현재 오스트리아 2부리그 볼프스베르거 소속.
- 사토 다이스케 : 1994년생. 레프트백, 모계 필리핀. 일본 J리그 우라와레즈 유스팀 및 센다이 대학교 출신. 현재 필리핀 리그 글로벌FC 소속.
- 루크 우드랜드 : 1995년생. 중앙미드필더, 184cm, 모계 필리핀, 2015년 5월 필리핀 국대 데뷔.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 출신. 볼턴 원더러스 유스팀 출신으로 최근 볼턴에서 방출(FA).
- 케빈 인그레소 : 1993년생. 미드필더. 178cm. 부계 필리핀. 2015년 6월 필리핀 국대 데뷔. 독일 함부르크 태생으로 손흥민과 같은 시기에 함부르크 유스팀에서 훈련. 함부르크 리저브팀에서 여러 경기를 뛰었으나 현재는 독일 4부리그 드로흐터센 소속.
- 데니스 빌라누에바 : 1992년생. 미드필더. 양친 모두 필리핀. 2015년 6월 필리핀 국대 데뷔. 이탈리아 라치오 유스팀 출신. 현재 필리핀 리그 글로벌FC 소속.
- 슈테판 슈뢰크 : 1986년생. 미드필더. 170cm, 모계 필리핀. 2011년 필리핀 국대 데뷔. 독일 태생으로 그로이터 퓌르트 유스팀을 거쳐 성인팀 데뷔한 뒤 호펜하임,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분데스리가 1부리그 20경기 넘게 출전. 현재 분데스리가 2부 그로이터 퓌르트 소속.
- 제리 루세나 : 1980년생. 수비수. 179cm, 부계 필리핀. 2011년 필리핀 국대 데뷔. 덴마크 태생으로 덴마크 청대 출신. 덴마크 1부리그 에스비예르크 소속.
- 필 영허즈번드 : 1987년생, 공격수. 180cm, 첼시 유스팀 출신. 2006년 필리핀 국대 데뷔.
- 제임스 영허즈번드 : 1986년생, 미드필더. 185cm, 첼시 유스팀 출신. 2006년 필리핀 국대 데뷔.
- 하비에르 파티뇨 : 1988년생, 공격수. 183cm, 모계 필리핀. 2013년 필리핀 국대 데뷔.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태생. 스페인 여러 팀에서 활약한 뒤 2013년 태국 부리람 입단(2014년 태국 프리미어리그 득점 2위), 올 시즌 중국 허난 입단.
- 롤란드 뮬러 : 1988년생, 골키퍼, 180cm, 2011년 필리핀 국대 데뷔. 독일 쾰른 태생. 쾰른 유스 거쳐 리저브팀 활약하다 뒤스부르크에서 성인팀 데뷔. 현재 스위스 1부리그 세르베트FC 주전 골키퍼.
- 알바로 실바 : 1984년생. 센터백, 187cm, 2014년 필리핀 국대 데뷔. 스페인 태생. 말라가 유스 거쳐 성인팀 데뷔. 카디즈, 헤레즈 거쳐 중동에서 뛰다 최근 대전시티즌 입단.
- 폴 멀더스 : 1981년생. 공격수. 182cm, 2011년 필리핀 국대 데뷔. 네덜란드 암스테드람 태생. 아약스 유스 거쳐 할렘에서 성인팀 데뷔. 1부리그 덴하그, 캄뷔르 등 거쳐 현재 필리핀 1부리그 세레스 소속.
필리핀 축구대표팀의 '프로젝트100', 꿈은 이뤄질까
필리핀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여전히 변변찮다. 하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중이다. 2009년 필리핀 축구대표팀 단장을 맡게 된 사업가 댄 팔라미는 사재를 털어 대표팀의 '프로젝트 100'이라는 미션을 설정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FIFA랭킹 100위권 진입을 목표로 하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팔라미는 정부의 소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국적 필리핀 축구대표팀의 확장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 결과, 필리핀은 동남아시아 축구제전인 2010년 스즈키컵에서 '디펜딩 챔피언' 베트남을 꺾고 사상 처음으로 4강 토너먼트에 진입하는 작은 이변을 일궈냈고 2011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AFC챌린지컵(아시안컵의 마이너 대회) 본선 진출과 월드컵 지역예선 첫 승이라는 묵직한 성과를 내기에 이른다. 2014년에는 AFC챌린지컵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으나 2015년 아시안컵 본선 진출권을 놓고 팔레스타인에게 패해 아쉽게 아시안컵 본선 진출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필리핀 축구대표팀의 성장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18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둘리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독일 출신으로, 카이저슬라우턴과 바이엘 레버쿠젠, 샬케 등 분데스리가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는 90년대 미국 대표팀 부동의 중앙 수비수였다. 본인 스스로 '메트로폴리탄'적인 삶을 산 둘리 감독에게 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선수들로 구성된 필리핀 대표팀은 공감과 이해가 쉬운 팀일지 모른다. 2014년에 필리핀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일단 필리핀의 FIFA랭킹을 124위까지 끌어올리며 '프로젝트 100'의 달성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2018년 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 H조에서 필리핀은 바레인(108위)과 예멘(170위)을 연달아 잡으며 2전 전승으로 북한(157위)과 함께 조 공동 선두권을 구축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북한과의 승부가 아직 남아있으니 섣부른 예상은 어렵지만, 조 2위 안에 든다면 아시안컵 본선 출전권은 물론 월드컵 예선 3라운드 진출의 기회까지 얻게 된다. '다국적' 군단인 필리핀 축구대표팀의 전진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그들의 소박하지만 당찬 꿈이 이뤄질 것인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