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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진기록들
아홉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한 한국사의 천재 이율곡 |
한국의 역사상 현인의 경지에 근접한 인물을 꼽으라면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율곡 이이 선생을 |
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는 않을것이다. |
잘 알려진바와 같이 율곡 선생은 9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 한 인물이다. |
우리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며 또한 예언자적 능력도 뛰어나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고 |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며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분야에 식견이 탁월한 정치가요,사상가이며 |
교육자였으며, 철학자였다. |
그의 가문은 또 유명한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둔 뿌리깊은 천재가문의 집안이었으며 |
한국판 제갈공명, 한국정신사의 큰 산맥, 성리학의 대가,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
그러나 천재는 단명이라고 했던가 그는 타고난 건강이 좋지 않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
보통 4-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도 천재라고 극찬을 한다. |
그런데 한사람이 7개국를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바로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낸 |
범옹 신숙주가 주인공이다. |
정치적인 얘기는 접어두고 학자적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였으며 한국최초의 |
일본관련책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는등 어문학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
그는 특히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으며 |
인도어, 아라비아어, 까지도 터득했다고 한다. |
명문가답게, 일제하 독립투쟁의 주역들인 단재 신채호, 신규식 선생 등이 그의 후손들이다. |
조선왕조 실록에 3000번이상 등장하는 송시열 |
송시열 그는 선조임금부터 숙종 임금때까지의 문신 학자이다. |
본관은 은진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그의 전성기는 효종때이며 효종임금의 오른팔이 되어 |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으며 정계의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
넓었고 방대한 저술도 남겼다. |
그러나 우암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가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경우가 많았는데 |
이점이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그는 성리학으로 철저히 무장된 학자였으며 흙탕물같은 정치판에는 끼어들지 말아야했다. |
그는 83세로 제주도 유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오던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때까지 |
당쟁과 파벌의 투쟁을 벌인 전형적인 외골수 선비였다. |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사람은 오직 송시열 뿐이며 또 전국 42개 서원에 |
배향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수 있다. |
왕의 얼굴한번 보지도 않고 정승에 오른 윤 증 |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당쟁의 한축이었으며 재야의 막후실력자 소론의 영수 였다. |
윤증은 왕의 얼굴한번 보지 않고 우의정 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역사상 단한명밖에 없는 |
인물이었다. 그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가 받았던 관직을 보면 36세때 내시교관부터 |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찬성, 좌찬성, 83세때 판돈녕부사까지 계속 관작이 |
승진되면서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
어쨌든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채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
한번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왕의 얼굴도 보지 않으며 정승이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
천재 가문에 또하나의 천재(이율곡의 아우) 이우 |
"왕대밭에 왕대난다" |
조선왕조 천재가문인 이율곡, 신사임당 가문이 배출한 또하나의 천재 가 있다. |
바로 이율곡의 동생 이우. 그는 조선조 통털어 시,서,화,금[詩,書,畵,琴]에 타고난 재능을 |
발휘하여 4절로 불려지는 유일한 인물이다. |
천불여이물[天不與二物]이라하여 하늘은 인간에게 두가지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
대개 용모가 뛰어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어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행동이 뛰어나면 |
지성이 모자라고,...이렇듯 여러재능을 겸비하기란 천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
그는 그림은 물론 시와 글 가야금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고 특히 어머니의 화풍을 따라 |
초충[草蟲], 사군자 등을 잘 그렸으며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벌레인줄알고 와서 |
쪼았다는 일화가 있다. |
그의 아들 경절도 書,畵,琴에 뛰어난 삼절이었으며 신사임당의 삼절과 자신의 사절을 합치면 |
십절이 탄생되어 불세출의 기록을 역사속에 남겼다. |
신사임당 家의 천재적 재능은 오늘날에도 살아숨쉬며 역사속의 거울이 되고 있다. |
조선왕조 최초의 과거시험 합격자 이숙번 |
조선시대 최초로 치러진 과거시험은 1393년[태조2년] 3월에 실시된 식년문과 시험으로 |
33인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여기에 태종 이방원의 핵심측근인 이숙번이 들어있다. |
약관의 나이로 무과가 아닌 문과로 급제하였으나 다른 무신보다 더 장수기질이 농후하여 |
이방원과 같이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강한 리더쉽으로 이방원 정권이 들어선 |
이후 핵심인물로 승승장구 하다가 이후 오만방자함으로 발전하여 토사구팽의 원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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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인물구성을 삼국지와 비교해보면 이방원 이[유비현덕], |
하륜 이[제갈공명], 조영무 가[장비], 이숙번 은[관우,조자룡], 등과 비유될수 있을 것이다. |
그는 43세로 안성부원군에 봉해질 때까지가 전성기였다면 그후 68세로 죽을 때까지는 고난의 |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로 거만방자하게 행동하다가 결국 탄핵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게 되며 |
45세때엔 경남 함양으로 유배생활을 하게된다. |
조선초기 문무를 겸비하고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그의 재능이 권력의 풍선위에서 춤을추다가 |
최후에는 불행한 여생을 맞게 된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
권력이란 사람의 정신상태를 이상하게 만드는 마약이 아닌가 싶다. |
무과출신으로 유일하게 대사헌을 지낸 이계동 |
조선시대는 철저히 문신 중심의 사회였다. |
그래서 무과 출신자가 문과출신 자리에 오르게 되면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
이런 조선시대 에 무과출신으로 유일하게 대사헌에 임명되었던 이계동 스스로도 어울리지 |
않는다고 사양하였으나 그의 능력을 인정한 성종은 그를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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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1세때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그후 승승장구하여 41세에 무과출신 최초로 대사헌에 |
되었다. 이계동은 중국어와 여진어에 능통했으며 당시 문무를 겸비했다는 칭송을 많이받았다. |
조선시대가 가장 필요로하는 실력을 고루갖춘 문무겸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
태종 이방원의 장자방 하 륜 |
태종 이방원보다 20년 연상인 하륜은 당시의 이방원을 더욱 빛나게 한 명참모였다. |
이성계의 정도전, 수양대군의 한명회 와 같이 명참모로서 당대를 주름잡았던 지혜주머니였다. |
그는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음양, 의술, 경서, 지리에도 능통할 정도로 빼어난 두뇌와 |
무예실력을 두루갖춘 신하였다. |
6회나 정승에 오르고 두 번이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조선왕조 창업을 빛나게 한 정치가, 탁월한 |
외교가, 등 수많은 직함과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
그는 처음 이방원을 보고서 그의 영특한 모습에 이끌려 그때부터 방원[태종]에게 온몸과 |
마음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하지만 하륜은 지나치게 축재하여 탐욕스럽다는 탄핵을 받는 옥의 티를 남겼다. |
과거급제 60년만에 판서가 된 윤 경 |
인간은 불평등 한 것일까? 앞장의 정태화 같은 인물은 판서란 직책은 모두거치며 정승도 여러차례 |
거쳤는데, 누구는 급제 60년만에 겨우 판서에 올랐으니 말이다. |
관료들의 경노당 최고령 기록을 갖고 있는 윤경은 30세에 급제하여 90세가 되는 60년만에 |
공조판서가 되는 불가사이하고 유일무이한 진기록을 갖고있다. |
90이 될 때까지 인내하고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버텨낸 그의 집념과 불굴의 의지는 인간승리의 |
전형을 보여준 예라 하겠다. |
마음이 너그럽고 욕심이 없는 것이 장수의 비결일까? 윤경은 98세까지 살다 간 장수인물이며 |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
최연소 이조참의 19세의 민영익 |
이조는 조선시대 6판서중 서열이 우선순위이며 병조를 제외한 모든 문무관리들의 인사권을 |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의정도 이조의 눈치를 볼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
이조에는 이조정랑과 이조좌랑이 있었다. 이조전랑 자리는 한마디로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으며 |
관료치고 누구나 탐네는 그런 자리였다. |
이러한 인사권의 중심인 이조참의에 19세의 애송이가 임명되었으니 그가바로 민영익 이었다. |
1878년 19세의 나이로 이조참의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한 민비의 친족세력인 민영익은 조선왕조 |
최연소 이조참의로 기록되었다. |
고모인 민비의 후광으로 남들은 10년이상 걸리는 자리를 19세의 나이로 단숨에 꿰어차고 실세의 |
자리에 앉았던 주인공이었다. |
정랑과 좌랑도 거치지 않고 바로 조정의 인사권을 거머쥐었으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
명성왕후 민비의 친정 조카였던 그는 민비의 후광으로 요직을 두루거치면서 한성판윤과 |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김옥균과는 정적의 관계였다. |
72년을 벼슬살이 한 청백리 정승 정원용 |
조선왕조 500년동안 가장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었던 인물은 정원용 이였다. |
무려 72년간이나 다섯임금을 보필하며 관직생활을 했던 것이다. |
20세에 문과 급제하여 관찰사,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66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
정조 임금부터 고종 즉위때까지 5조 임금을 섬겼으며 헌종이 승하하자 농사꾼이던 강화도령 |
이원범[철종]을 왕으로 옹립하기도 했다. 정원용은 관직 생활 72년동안 하루같이 근면하여 |
조정이나 민생문제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그의 일상생활도 지극히 검소하여 청렴결백한 |
생활을 한 명재상이었다. |
조선초기에 황히정승이 있다면 후기에는 정원용이 있었다. 두사람은 명재상에다 청백리의 표상과 |
모범을 보인 닮은꼴이었다. |
또한 두사람 모두 오랜 관직 생활을 했고 나이도 황히 90세, 정원용 91세로서 세인들은 |
조선시대에 두사람이야말로 가장 복많은 정승으로 불렸던 것이다. |
83세에 과거급제한 인간승리 박문규 |
조선왕조 최고령 과거급제자 박문규. |
83세의 나이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최고령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박문규는 최고령 |
급제라는 새로운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떠난 인간승리의 표본이었다. |
도대체 학문의 끝은 어디이며 인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
나이에 자기도전에 성공하여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으니 실로 놀라운일이 아닐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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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조선조에 있어서 과거란 무엇이길래 80이 넘은 나이에도 과거시험에 집착하는가? |
그답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
조선시대는 문신중심의 사회이고 문관에게 가문의 영광과 명예가 주어지며 부의 축적은 물론 |
부인의 축첩 등 수많은 특전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
또한 과거시험은 양반들의 유일한 출세길이었으며 가문의 흥망성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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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83세의 박문규는 과거시험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약 50여년을 시험에 매달렸으니 |
아마도 수십번은 보았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1887년에 급제하여 고종의 특명으로 병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지상과제의 한을 |
풀어서인지 그이듬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76세에 처음 장가들고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 |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
첫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
장본인은 홍유손.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기인중의 한명이다. |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 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 |
고 하였다. |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후 김시습, 남효온, 등과 어울리면서 |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
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있다. |
81세에 득남하고 8도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심수경 |
조선중기 우의정을 역임한 심수경 그는 75세와 81세에 득남을 했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
81세에 득남한 경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
심수경은 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도승지를거처 8도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유일한 사람이다. |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의 관찰사를 차례로 모두 |
역임한 것이다. |
그의 조부가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심정인데 당시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파 선비들을 일망타진한 |
역사적 과오에 대하여 한평생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다간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
심수경은 이율곡의 후임으로 병조판서를 지내고 우의정이 되었으며 청백리에 뽑히는 영예도 |
안았다. |
그의 성품은 효성이 지극하고 무예에 능하며 대의로 일생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그는 실제로 7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로 전쟁에 참가하였고, 개성에서는 |
선정을 베풀어 송도지방 최초로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적 교훈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으며 조부의 허물을 지우려고 최선을 |
다했고, 후세 사람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
농사꾼에서 왕[철종]이된 강화도령 이원범 |
조선 25대왕 철종, 33세로 단명한 그는 강화도령 이원범 이었다. |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가 이원범이었는데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
헌종과 원범 두사람 뿐이었다. |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영의정 정원용의 건의와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
농사꾼으로 살고 있는 이원범을 데려와 조선 25대왕 철종으로 앉혔다. |
이원범은 형 화평군의 옥사로 가족과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살다보니 자연히 학문과는 |
거리가 먼 농사꾼이 되어 있었다. |
당시 19세였으며 이런환경의 원범이 갑자기 환경이 변하여 왕이되고보니 정치는 안동김씨인 |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되고 1851년에는 안동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며 |
이때부터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었으며 문란한 정치로 탐관오리가 |
횡행하며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
철종은 1863년 재위 14년만에 33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
그는 모두 8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자식들도 유난히 단명하여 아들과 딸 모두가 일찍 죽고 말았다. |
이렇듯 철종은 처절하리만치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갔다. |
가장 잔악하게 죽음을 당한 내시 김처선 |
김처선은 조선조 초기 내시로 세종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하였다. |
그는 내시이면서도 임금에게 직언을 잘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연산군으로부터 미움을 많이 |
받았으며 결국 연산군에 의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
한번은 연산군이 처용놀이를 하며 음란하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 |
"전하, 늙은놈이 여섯임금을 섬겼고 경서를 대강 통했지만 고금을통해 상감처럼 하신분은 |
없었습니다" 하니 |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활을 쏘아 갈비대를 맞추자 |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겠습니까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을 하실수없는것이 |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
연산군이 화살하나를 더 쏘아 맞히고 다리를 잘라 버렸으며, 또 그의 혀를 잘라 버리고 배를갈라 |
창자를 꺼내어 시체를 호랑이 먹이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정과 백성에게 명하여 |
[처선] 두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
내시 김처선은 그무시무시한 연산군의 폭정에도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진정한 |
용기의 소유자였으며 비록 가장 처참하게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남아있다. |
조선 제일의 명재상 황희정승 |
조선왕조에서 단 한명의 대표적인 관료를 꼽으라면 단연 황희정승이 꼽히는 전설적인 |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에 급제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는데 조정과 |
동료들의 계속적인 입조 요청으로 과감히 과거의 집착을 버리고 현실을 수용해 이성계정권에 |
합류하게 된다. |
그는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20여년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
조선초기의 역사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
또한 황희정승은 오늘날까지도 청념의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맹사성과 함께 |
청백리의 대표주자로 인식되어 있다. |
하지만 햇볓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법, 그의 벼슬길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
60여년의 관직 생활중 두 번이나 좌천되고, 세 번의 파직, 서인으로 강등되기를 한번, |
귀양살이 4년, 등 우여곡절의 벼슬생활이 연속 되었다. |
그러나 그는 종도 다같은 임금의 백성이라며 모든백성에게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허락했던 |
진정한 인간주의자 황희정승 이었다. |
조선왕조 최연소 급제자[만14세] 이건창 |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1866년[고종30년] 강화도 |
별시문과에서 6명중 5등으로 뽑힌 만14세의 이건창[전주이씨]이다. |
이건창은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강화출생이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만큼 재주가 뛰어나 |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조정에서도 너무일찍 급제하였다하여 4년뒤인 만18세가 되어서야 |
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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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때는 충청감사 |
조병식의 비리를 낱낱이 들쳐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
그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략]을 저술하는 등 |
조선말기의 대문장가로 손색이 없었다. |
전무후무한 형제6조판서 정태화 정치화 |
가문에 판서하나 나면 온동네가 시끌벅적할 만큼 판서되기가 쉽지 않은 조선조 문벌사회. |
한사람이 6조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그것도 모자라 형제가 모두 6조판서를 지낸다는 것이 오직 |
가문과 개인의 영광이라고만 할수 있을까. |
바로 동래정씨가 배출한 두정승 정태화, 정치화 형제로서 이들 형제는 6조판서를 모두 지냈고 |
형은 영의정, 동생은 좌의정 까지 지냈다. |
관운은 타고난 것일까?. 이러한 관직운과 가문의 배경, 개인의 피나는 노력등이 두루 구비되어 |
야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두루 구비하고 관운을 타고난 인물이 있으니 그가바로 |
영의정을 6번이나 지낸 정태화 와 그의 동생 치화였다. |
이들의 가문에는 5대조 정광필[영의정], 증조부 정유길[좌의정], 조부 정창연[좌의정], |
종조부 정지연[우의정], 정태화[영의정], 동생 정치화[좌의정], 아들 정재승[우의정]등 온통 |
집안에 정승들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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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태화는 6조참의, 참판, 판서를 모두 역임함으로서 조선왕조 500년동안 이를 모두 역임한 |
사람은 단1명 정태화 뿐이다 |
동생 치화도 도승지, 6조판서, 대사헌을 모두 거치고 우의정과 좌의정 까지 올랐으며 |
이들은 또 온화한 성품으로서 처세술도 좋아 대과없이 벼슬을 마침으로서 그들은 조선 500년 |
역사상 천부적인 관운을 타고난 관료로 기록되고 있다. |
섹스심벌 어우동은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
조선조 최대의 섹스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
어우동은 성종때의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도 책마다 다른데 , |
[용재총화]에는 어우동, [실록]에는 어을우동, 이라고 되어있다. |
어우동의 시댁은 세종대왕의 바로 위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어우동은 물불을 |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시 그 자리에서 본능적인 행동을 하였고, 특히 근친상간도 |
마다하지 않았다. |
그는 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몸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기를 강요하였다. |
한국의 3공화국때 정인숙 LIST처럼 그는 어우동 LIST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관리들이 많았으며 나중에는 도승지 김계창의 |
줄기찬 탄핵으로 의금부의 문초끝에 삶의 여정을 끝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기록 |
1] 32년간 세자로 있었던 임금은 순종 |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 임금은 2세때에 세자로 책봉되어 32년간을 세자신분으로 지냈다. |
2] 죽어서 왕이 된 인물은 |
조선조에는 죽은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 다섯명인데 |
* 덕종은 세조[수양대군]의 아들로서 세조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
인수대비의 남편이며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성종, 명숙공주 등 3명을 두었다. |
* 원종은 선조의 5남으로 1627년에 왕으로 추존됨. 인조 등 4남을 둠. |
* 진종은 영조의 아들로 사도세자와 4촌. 6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으로 추존. |
* 장조는 유명한 사도세자로서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 |
부인은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 |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음. 1899년 장조로 추존됨. |
* 익종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 |
4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19세때[순조27년]대리청정으로 참정하였으나 4년만에 죽고 |
뒤에 익종으로 추존됨. |
3]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은? |
세종대왕이 18명으로 가장많고, 다음이 성종 16명, 2대정종이 15명 순이다 |
딸은 태종[이방원]이 17명이며, 성종이 12명, 중종과 선조가 11명 이었다. |
4] 왕비를 가장많이 배출한 가문은? |
*청주한씨가 1위[태조비:신의왕후],[덕종비:소혜왕후],[예종비:장순왕후],[성종비:공혜왕후] |
[예종비:안순왕후], [인조비:인열왕후]로 가장많고 |
* 파평윤씨와 여흥민씨가 4명, 청송심씨와 안동김씨가 3명이다. |
5] 왕비중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비는? |
*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8남2녀를 낳았다. |
성종의 제9비 숙의홍씨도 7남3녀로 공동1위이다. |
6] 가장 짧은기간 재위한 임금은 |
12대 인종이며 재임기간 9개월이었다. |
7]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은 |
21대 영조로서 51년 7개월로서 반세기동안 왕좌를 지켰다. |
8] 가장 단명한 임금은 : [단종애사의 주인공 6대 단종으로서 17세에 사약을받고 죽음] |
9] 가장 장수한 임금은 : [21대 영조로서 83세까지 장수했다] |
10]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임금은 |
3대 태종과 9대 성종으로서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세종대왕은 6명이었다. |
각종 최장기 기록들 |
1] 가장 오랫동안 벼슬에 있었던 인물은 ? |
조선말엽의 정원용 으로서 20세에 급제하여 마지막 영의정을 지낼 때까지 72년간을 관직에 |
있었으며 그는 지극히 검소하여 청백리에 올라있기도 하다. |
2] 호조판서를 최장기간 지냈던 인물은? |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인 정홍순으로 무려 11년간을 호조판서로 재임한 유일무이한 인물. |
그는 재정문제에 대한 당대 제일인자의 명성을 날렸다. |
3] 벼슬의 꽃인 홍문관 대제학을 최장기간 역임한 인물은? |
당대의 대문장가 서거정[달성서씨]로 23년간을 재임했다. |
4] 가장 여러대의 임금을 보좌한 사람은? |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7대의 임금을 보좌한 김세민[경주김씨]으로 |
70년동안 봉직하면서 7대의 임금을 보좌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
5] 조선시대 역사 인물중 가장 장수한 인물은? |
여중추부사 권황[안동]과 죽림칠현의 한사람인 홍유손으로 모두 99세까지 살았다. |
6] 가장 귀양살이를 오래한 사람은 누구일까? |
다산 정약용으로 28세때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종교문제로 19년간 강진에 유배됨. |
7] 예조판서에 최장기간 봉직한 사람은? |
범옹 신숙주로 무려 15년간 예조판서에 재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
그는 뛰어난 어문학자로서 7개국어에 능통했으며 외교문서는 거의 신숙주의 손을 거쳤다. |
8]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가장 오래 재임한 인물은? |
유명한 재상 황희정승으로 지속적으로 18년간을 재임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
그는 조선 제일의 청백리 관료이자 가장 대표적인 신하이다. |
조선왕조 최다수의 기록들 |
1] 영의정을 가장 여러번 지낸 인물은? |
최석정[전주최씨]으로 서 56세에 영의정이 된후 8번을 지냈다. 그는 소론의 영수이었다. |
2] 이조판서를 가장 많이 역임한 사람은? |
42세에 이조판서가 된 박종덕[반남박씨]으로서 무려 18번이나 이조판서에 올랐다. |
관료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관직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어야 하는만큼 그는 |
공평한 인사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
3] 당시 수도의 총책임자인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최다 역임한 인물은? |
이가우[연안이씨]로서 34세에 급제한후 열번을 한성판윤에 올랐다. |
4] 판서[장관]직을 통털어 가장 많이 지낸 인물은? |
박종래로서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5조판서를 돌아가며 총 15회 지냈다. |
5] 사법기관의 장이었던 사헌부 수장을 최다 지냈던 인물은? |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된 권상하[안동권씨]이며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
6] 책을 가장 많이 저술한 인물은 누구일까? |
지봉유설의 저자 이민구[전주이씨] 24세에 장원급제한 사람으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
저술을 좋아해서 무려 40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
7] 선비의 표상이자 관리들의 자존심인 호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은? |
유명한 추사체의 창시자 김정희. 그는 약 200개의 호를 지어썼다. 완당,추사,노과,등등... |
8] 임금에게 벼슬을 그만두겠다고하는 사직상소를 가장많이 올린 사람은? |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는 37번이나 사직상소[사직서]를 올려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
조선왕조 최연소 기록들 |
1] 조선시대 통털어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
15세의 이건창으로 1866년[고종3] 강화도 별시문과에 합격했다.[김종서는 16세에 합격] |
2] 최연소 장원급제자는 ? |
17세의 박호[밀양박씨]는 1584년[선조17]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임진왜란때 전사] |
3] 무과출신 급제자중 최연소 인물은? |
17세의 남이[의령남씨]1457년[세조3] 무과에 장원급제.[유자광의 모함으로 주살됨] |
4] 최연소로 세자에 책봉된 인물은? |
영조의아들 사도세자는 2세에 세자책봉 되었으나 그만 뒤주속에 갖혀죽는 비운의 주인공이 |
되었다. 사도세자는 10세에 결혼하여 최연소 결혼기록도 가지고 있다. |
5] 최연소로 영의정이 된 인물은? |
세종대왕의 손자인 이준[임영대군의아들]으로서 28세때 영의정에 특서됨. |
6] 병조판서를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은? |
권람의 사위인 남이가 27세에 병조판서가 됨. |
7]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을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은? |
만인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벼슬의꽃 홍문관 대제학에 한음 이덕형이 31세에 올랐다. |
조선왕조 최초의 기록들 |
1]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최초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은? |
평북 의주 출신인 이성하로서 고종11년에 영국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최초의 |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
2]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은 누구인가? |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
신자가 되었다. |
3] 조선조 최초로 정승이 된 사람은? |
조선개국 일등공신 배극렴이다. 그는 이성계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개국후 처음으로 |
좌정승[문하 좌시중]이 되었다. |
4] 조선왕조 도읍지 한성의 최초 한성판윤[서울시장]이 된 사람은? |
성석린이 1395년에 초대 한성판윤부사로 임명되는 기록의 보유자가 됐다. |
5] 과거급제를 하지 않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은? |
황희정승의 아들 황수신이다. 그는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
6] 조선시대 최초로 일본에 대하여 상세하게 저술된 책은? |
신숙주가 일본방문을 한후 저술한 [해동제국기]이다. 일본내막을 상세하게 적은 책으로 |
최초의 일본안내서가 되었다. |
7] 족보는 고려시대에 이미 등장했으나, 현존하는 족보는 조선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는데.. |
세종5년에 간행된 문화유씨의 영락보라고 하는데 불행이도 전하지 않으며 |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세보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