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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해전 영국 해군 사관학교는 한산대첩 살라미스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르해전을 세계4대하전으로꼽고있다.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47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 승자총통 현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살라미스(Salamis) 해전(BC 480) 살라미스 해전의 배경 BC 492년부터 479년까지 4차에 걸쳐 페르시아 전쟁이 단속적으로 지속되었다.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을 마라톤 전투에서 격퇴한 아테네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는 다시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전비 조달을 위해 이집트에 중과세를 하는 바람에 기원전 486년 반란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던 도중에 다리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Xerxes)가 왕위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하여 기원전 480년 제3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헤로도투스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페르시아군은 병력 264명이었지만, 실제는 약 35만명과 함선 1207척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밀티아데스(Miltiades)가 실각하고, 테미스토텔레스(Themistocles, B.C. 527?-460?)와 아리스토티데스(Aristotides)가 집정관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티데스는 지상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기원전 482년에 추방되어 해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480년 봄에 200여척의 함선을 건조하였고, 약 4만명의 수병을 양성하였다. 2. 제3차 페르시아전쟁의 전개 기원전 480년 봄 페르시아군이 헬레스폰트해협을 건너 침공해 들어왔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Leonidas)가 지휘하는 7000-8000명의 중갑보병과 경장비병으로 구성된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아테네의 해군은 스파르타의 유리비아데스(Euribiades)를 함대 사령관으로 하는 해군은 총 330여척(이 중 아테네 함대가 180척, 스파르타 함대가 10척)으로 구성되어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맞았다. 크세르크세스는 폭풍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도착이 늦어진 데다가 대병력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그리스군이 항복할 것으로 기대하여 4일 동안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고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5일 째 되는 날 공격을 감행하여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군을 전멸시켰다. 테르모필레전투에서 페르시아군도 2만명이 사망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 반도의 동해안을 돌아 남하하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함선 400척을 상실한 뒤 이틀 뒤에 아프에테에 도착하였다. 그리스측의 함대사령관인 유리비아데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일째인 8월 30일 페르시아 함대와 그리스 함대간에 아르테미지움(Artemisium) 해전이 벌어졌지만,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 도중 테르모필레 패전 소식이 그리스 함대에 전해지자, 그리스 함대는 유보에아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에우포리스가 페르시아의 수중으로 넘어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살라미스로 퇴각하였다. 3. 살라미스 해전 그리스 해군의 철수는 아테네군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헤로도투스는 “부녀자를 아티카에서 피신시키고 그 뒤에 취할 조치에 대한 여유를 갖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코린트와 살라미스에서 제2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8월 초에 아르테미지움 해로 출전하기 전에 아테네 시민에게 모두 철수 명령을 내렸고, 모든 함대를 살라미스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페르시아군은 손쉽게 아테네를 점령하였고, 페르시아 함대로 9월 4일 아테네의 외항에 도착하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지움 해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를 복구하느라 약 3주간 전투를 전개하지 않았다. 이 동안에 그리스 함대에서도 응전 방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만약 해전에서 패배했을 경우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하여 코린트 지방으로 후퇴할 것인지의 여부가 가장 큰 논란거리였는데, 전체적으로는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에서 철수한다면 적의 진격을 쉽게 내줄 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과 영토를 포기하게 되며, 열세한 병력으로 좁은 해역에서 우세한 적의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두고 4회 걸쳐 회의가 계속되었는데, 4차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테미스토클레스는 첩자를 페르시아 진영으로 보내어 거짓 정보를 흘렸다. 첩자가 흘린 정보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해전이 발생하면 그리스 내부에 친 페르시아파와 반 페르시아파간에 내분이 발생할 것’이었다고 적고 있고, 3대 비극시인 중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Aischylos)는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하면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적었다. 어쨌든 이 정보는 페르시아군을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려는 목적에 따라 흘린 것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이 첩자의 말을 믿고 야간에 기동을 시작하여 새벽녘에 살라미스 협수로로 진입하였다. 이 시간에 그리스 군은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페르시아 함대가 협수로로 진입하고 있다고 급보가 날아 왔다. 회의는 즉각 중단되었고, 살라미스에서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80년 9월 28일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선두에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함대를, 중앙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점령지 함대를, 그리고 왼쪽에는 이오니아와 갈리아의 함대를 배치하였는데, 모두 750척이었다. 이에 대응한 그리스 함대는 380척으로 3열로 늘어 세우되 왼쪽에 아테네와 코린트 함대를 배치하였다. 페르시아 함대의 전술은 대함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 함대를 유인하여 넓은 해역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측에 가담한 페니키아 함대는 살라미스 협수로의 입구인 Saronic 만에 배치되었다. 이때 그리스 함선 몇 척이 페르시아 함대 정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 함대가 그리스 함선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는데, 너무 깊숙히 추격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와 Aegina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북쪽에서는 페니키아의 이오니아 함대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충돌하였다. 이렇게 되자 길이 7km, 너비 2km 밖에 안되는 살라미스 협수로에 양측의 함대 700-800 척이 뒤엉키게 되었다. 결국 혼란에 빠진 페르시아 함대는 기동이 어렵게 되어 200척이 침몰되고, 4만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반해 그리스 함대는 46척의 함선을 상실하였다. 페르시아의 잔여 함대는 아테네의 팔레움 항으로 돌아간 뒤 다음 날 아침 사르데스 항으로 출발하였다. 해전 다음날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함대가 헬레스폰트 해협 쪽으로 퇴각하고 있으며, 페르시아 육군도 후퇴 중이라는 보고를 접했다. 그리스 군에서는 이들을 추격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결국 페르시아군 추격전을 중지하고 에게해의 여러 섬을 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그리스 군은 그리스 반도와 에게해,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진입하여 델로스 동맹에 가입시켜 이후 아테네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한편 살라미스 해전 직후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육군이 기원전 479년 6월 보에오티아로 진격하자 아테네는 시민을 살라미스로 철수시켰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페르시아 육군에 맞서서 플라타에아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퇴각하였다. 4. 살라미스 해전의 교훈 1) 살라미스 협수로는 협소하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의 기동성을 제한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 측이 지리적인 이점을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2) 첩보전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 첩자로 시킨노스라는 자를 파견했는데, 이 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들을 가르쳤던 자였다. 이 첩자의 밀서를 보고 크세르크세스는 공격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3) 반페르시아노선을 표방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이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82년 육군주의를 표방하던 아리스테데스를 추방한 뒤 시의적절하게 함대를 건조하였다. 4) 기동성이 떨어지는 좁은 해역에서 효과적인 충각전술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5)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유능한 지휘관을 선출하고 따를 줄 아는 아테네 시민의 현명함을 들 수 있다. 마라톤 전투 이후 종전 분위기가 팽배하던 당시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규모 전투가 시작될 것으로 예견하고 함대를 건조하였다. 아테네 시민들도 정치 지도자들간에 이견이 발생했고, 당시의 육군 중심이던 분위기와는 달리 해군을 중시하던 테미스토클레스를 지도자로 선출할 수 있는 현명한 정치감각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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