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야그 속편 10탄
('74 통계. 최종후)
친구에 대하여
윤화백께 '고'한대로...강릉에서...시월 이일... '기제사'를 필하고...다시...학교 연구실입니다...
토요일이라...조치원 서창캠퍼스는 적막강산입니다...연구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구월의 노래'...시월이건만...
병옥형이 부르던 노래...
재익형이 부르던 노래...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지는 소리 꽃잎이 피는 소리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이 지고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듯 당신 생각뿐 "
소생은 변변치 않아...친구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그 많지않은 친구중에...윤화백 만큼이나...
친한 친구...고향친구 심재상교수 얘기로...'야그 속편' 9탄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그러니까...시월 이일 '기제사'를 필하고...밤 열한시경...강문바닷가에서...심재상교수를 만난 것은
수년만의 일입니다...'사람생각'을 들고가서...심재상교수는 고향친구인데...윤종성(74 행정)동지와
심재상교수와 소생은 '경포중학교' 동기동창이지요...
요즈음은 그런게 있는지 몰라도...소생이 어릴적 강릉에서는 각각의 국민학교에 글짓기반이라고
하는 특별활동반이 있었는데...그중에서 좀 괜찮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을 학교별로 두셋씩 선발하여...
(그때 강릉에는 국민학교가 일곱개인가 있었는데...) 한달에 한번쯤 연합으로 모이게 하여
글짓기 지도를 하던 풍속이 있었는데...심교수는 '회산국민학교' 대표학생이고...소생은
'옥천국민학교' 대표학생인 셈이었지요...
그러한즉...한번은 이 학교에서...다음은 저 학교로...이렇게 학교를 순회하며 글짓기 지도를
받았지요... 방과후 피곤하신 몸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남으셔서...들풀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하나하나 글짓기 지도를 하시던 선생님이 생각납니다...당시 소생이 다니던 '옥천국교'의
글짓기반 선생님은 최규인선생님으로... 국민학교 시절 은사중에서 함자가 기억되는 몇안되는
선생님 중 한분이지요...그러하니...심교수는 그 시절 낯을 익혔다가 경포중학교에서 만나게 된 친구이지요...
심교수는 '회산 심씨'인데...'회산'이라고 하면...영동고속도로를 타고...강릉을 향하여...
대관령을 내려가서... 강릉을 향하다 강릉 초입에 들어서기 전...오른편에 쑤욱 들어앉은
고즈넉한 고을이지요... 심재상교수는 지금도...회산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그의 직장...관동대학교까지 그의 출근길...퇴근길은... 해송숲을 헤치며 '걸어가는' '산보' 30분 거리이지요...
그의 아내는...윤종성(74 행정) 동지의 고향인 묵호에서...'묵호중학교' 국어선생님입니다...
심재상교수는...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을 뿐더러...음악듣기에 있어서도 '김종삼' 시인 만큼이나
밝은 귀를 가졌지요...소생의 재학시절 '성음레코드'라고 하여 데카-그라마폰-필립스 제사의 클래식음반을
복제해 내던 음반회사에서 내던 음악 계간지가 있었는데...거기에 클래식에 관련된 그의 글이
여러번 실리곤 했지요...그는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잠실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방에는 사면으로 레코드판이 즐비했지요...
소생이...모교에서 박사과정 세학기를 마치고...1985년 봄, 대학 선생이 되기 1년 전...
그는 서울대 불문학과 학부-석사를 마치고 코리아헤럴드에서 내는 불어신문 '라 꾸리에"
(지금도 나오나??) 기자와 서울대 박사과정을 주경야독하다가...1984년 봄, 고향땅 강릉으로...
관동대학교 전임으로 가게 되었지요...
소생이 이 세상...대학캠퍼스를 다 보았을 리는 만무하고...대략 200여개 대학캠퍼스는 구경하였을 것인데...
'관동대학교' 캠퍼스의 아름다움이란...그 열손가락 안에 끼일 것이 분명합니다...
'관동대학교'에 가게 되는 분은...캠퍼스에 자로 솟은... '해송'...'솔'떼를 보세요...
소생이 객기가 동하여...2002년 12월에 펴낸 '사람생각'의 '곁글'을 소생의 고3시절 하숙방 동기...
손혁재 박사(현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가 써 주었듯이...1982년 5월에 펴낸 첫시집
'그대의 바다에'에...'곁글 Ⅱ'를 써준 친구가 심재상 교수입니다...이러합니다...
곁글 Ⅱ - 沈 在 祥 -
그때 우리는 어렸었고, 행복했다고 생각되는 어린 시절의 한 귀퉁이씩을 함께 나누며 컸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 내가 굳이 「행복했다」고 쓰는 것은 그때에도
우린 민망스러울 정도로 세상물정 모르는 촌놈들이었다는 것과, 그런 우리가 태평무사하게 (?)
지낼 수 있을 만큼 주위의 풍경들(강릉)이 온화했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씩은 부끄러워하며 모두들 현기증 나는 사춘기의 문턱을 곁눈질하고 있을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난 듯, 그 풍경 속에 우릴 남겨둔 채, 겁도 없이 훌쩍 떠나버림으로써 촌놈의 삶을
마감했다 --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서울의 사뭇 전투적인 초현실적 구도 속에서 삶과의 지루한, 승산이 거의 없는
싸움에 넌더리가 나 있을 때였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내 시퍼런 청춘도 그다지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창조적인 것은 지금의 너에겐 불가능하거나 불합리한 것이야, 그것은 잔인한 말이었다.
한껏 버티다 숨쉬기가 어려워지면 이따금 바다로 달아났었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에서 재회했을 때
나는 그 옛날 그가 떠나온 것이 하나의 음모였음을 알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마냥 쌓이던 눈, 초여름이 올 때까지 집요하게 바다로 가던 바람, 얕은 담들을 끼고
돌아가는 좁은 골목의 어둠, 뭐 그런 것들을 그는 그때 가슴속에 챙겨가지고 왔던 것이다.
어두운 몇 해를 지나오는 동안 내가 무슨 부적처럼 사 모은 시집보다도 더 많은 시집들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난 알게 되었다. '통계학을 전공하는 녀석이 붓글씨로 밤을 새운다'고
그의 어머니가 가끔 걱정하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마 그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잘 살 권리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기나보다. 풍화되어가는 삶에
거듭 물대기. 그의 젖은 삶이 이윽고 내 가슴도 적시리라.
그의 소박함은 우리의 狂氣일까? 이 문집에 실릴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거리'라는 말을 생각했었다.
한 인간과 그의 현실 사이의 거리, 그것이 언어라고 믿는 나는 그 거리의 엄청남 때문에
(혹은 全無함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다소 당황하였다.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그의 특이한
視角때문이고 漢詩들을 읽으면서 그가 획득한 -내가 아직 잘 모르는- 여유있는 공간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시간이 존재를 갉아먹는 괴물로 나타나지 않는 것도 내부의 경계를 無化시키는 쪽으로
향하는 그의 태도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것은 딜레탕트가 지닐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일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상상력 속에서 이미지들을 아름답게 꾸민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美學의 정체인 것 같다.
바로 그 때문에 맹물이라는 형식으로라도 친구의 사랑에 동참하고 싶어서, 쑥스러움을 감추고
감히 이 글을 보태는 것이리라. 친구여 너의 소박함이 동시에 나의 것이기를. 축복.
'사람생각'에는 '재상이'라는 졸시가 있습니다...근 20년 전에 쓴 거지요...
이러합니다...
칠년만에 재상이를 찾아 갔었네
잠실 자그마한 아파트에
누이와 아우와
누에같이 살고 있었네
한사코 서둘지 않는
음악과 시도 있었네
'文學과 時間現象學'
한스·마이어홉을
번역한 책을 받았네
고향으로 가자고 말하고 싶었네
파도 곁으로 가자고
(졸시. '재상이' - '사람생각' 45쪽)
프린스턴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어느 날...인터넷으로 접한 신문기사입니다...
심교수가 보들레르를 껴잡고 은거한지 20여년만에 신문에 등장한 거지요...(2003-06-19, 매일경제)
다시 읽는 '파리의 우울'
악마주의적 시와 마약복용, 자살기도 등의 굴곡진 시작 활동과 생애로'저주받은시인'으로 불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년) 전집이 오는 9월 1권 '악의 꽃'(심재상 옮김) 출간을
시작으로 차례로 선보인다.
시집 '악의 꽃'으로 유명한 보들레르는 프랑스 현대문학의 기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베를렌과 랭보, 말라르메 등 프랑스 상징파 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애드거 앨러 포를 번역 문단에 소개하기도 했다. 특유의 악마성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수법도
로트레아몽을 비롯한 현대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도서출판 열화당은 1권 '악의 꽃', 2권 '파리의 우울', 3권 '내면일기', 4권 '인공낙원',
5권 '문학평론', 6권 '미술평론', 7권 '보들레르 서간집' 순으로 미술비평가이기도 한
보들레르의 예술적 생애 전모를 보여주는 전집출간을 준비중이다.
보들레르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든 '악의 꽃'은 초판본 6편이 윤리성 논란으로 삭제된 바 있다.
문화평론가 이상용 씨의 글에 따르면 보들레르자신은 이 시집을 "이 혹독한 책 속에, 내 온 심혼을,
내 온 애정을, 내 온 종교를, 내 온 증오를 집어넣었소"라고 절규했다.
시에 못지않게 보들레르의 문예적 감수성이 발휘된 장르는 미술비평.
세 차례의 살롱평과 만국박람회평 등 전시회평을 통해 자신의 예술비평이론과 상상력 이론을 펼쳐
당대 최고의 미술평론가로 평가받았다.
6권 '미술평론'에는 '외젠 들라크르와의 작품과 생애' 등이 실린다.
3권 '내면일기'에서는 보들레르의 미학ㆍ형이상학적 사유를 드러내 주는 120여 편의 단문이 들어간다.
18세에 처녀시집을 낸 보들레르는 이후 방탕한 생활로 부친의 유산을탕진하고 마약복용, 자살기도 등을
겪었고 말년에 폐인이 돼 파리 자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그는 얼마전...'풀꽃세상'에 '골목길'이란 아름다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이 하도 아름답기에 여기 옮겨 봅니다...
골목길 / 심재상(시인·강릉 경실련 집행위원장)
물론 처음엔 설레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눈을 만들고, 그 눈이 발을 만들고,
그 발이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길이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떠나고 싶은 우리의 마음,
다가가고 싶은 우리의 눈, 이르고 싶은 우리의 발이 스스로 길을 만들며 걷고, 종종걸음치고,
내달렸을 것이다. 길은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물론 처음엔 오솔길이 있었을 것이다. 들판을 가로질러 작은 언덕을 끼고 돌다 비스듬히
갈짓자 걸음을 치며 구릉을 넘어가는, 가늘고 여리고 부드러운 길. 마음이 마음을 부르고
마을이 마을에 응답하여 만들어낸 길.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걷는 길.
떨어져 쌓이는 갈잎으로도 덮이고 한데 모여 흐르는 빗물에도 끊어지고 흩날리며
내려앉는 함박눈에도 쉽게 지워지는 길. 사라지는 양 다시 나타나고 끊어질 듯 새롭게 이어지는 길...
아서라, 언제부터일까, 딱딱한 대로(大路), 일사천리의 드넓은 신작로(新作路)가 그 끝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끝에서 도시가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도시적 삶과 더불어 근대인/현대인도 태어났을 것이다.
그렇게, 훗날 서양 최초의 현대시인이라 불리게 될 보들레르는 19세기 중엽 어수선하고
시끌벅적한 도시 빠리의 산문적인 삶의 도도한 물결에 절망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게 되었을 것이다.
전원적 서정을 깡그리 벗어버린 세계, 오랫동안 포근하게 우리를 감싸주던 삶의 온갖 신비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헐벗은 세계, 꿈으로 가는 길이 몽땅 끊어져버린 듯한 이 막무가내의 세계 앞에서
필경 그는 ‘저주받은 자’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들레르의 승리는 시적 감수성의 승리이고, 보들레르의 위대함은 인류학적 상상력의 위대함이다.
얼굴없는 ‘대중’이라는 낯선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맹목적인 삶의 물결이여!
그러나 그는 오로지 ‘속도’에만 취해 있는 도시의 비인간적인 공간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대신,
한사코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그 깊이라곤 없는---없어보이는---
도시가 감추고 있는 ‘깊이의 공간’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그가 찾아낸 특권적인 공간, 그것은 대도시의 큰길과 커다란 건물들 뒤에 감추어져 있는 길모퉁이와
작은 골목들이었다. 결국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도시의 산보자’가 되었다.
시인 보들레르의 몫은 ‘유한 속의 무한(l’Infini dans le fini)’이라는 회심의 방식을 통해
그 공간들을 ‘주름잡아’ 하나의 ‘미궁’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다.
그의 시집 『악의 꽃』은 19세기 후반의 빠리라는 ‘메마른 도시’, 그 사막 한가운데서
그가 찾아내고 길어올린 새로운 신비의 샘물이다. 누가 말했던가?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도시 한복판에서 보들레르가 발견한 ‘깊이의 공간’ 혹은 ‘공간의 깊이’는, 도시의 큰길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골목길들, 큰 건물들 뒤쪽에 감추어져 있는 골목들의 깊이이다.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천천히 맴도는 물방울처럼, 휘감아도는 강의 안쪽기슭에
조금씩 쌓이는 결고운 모래처럼, 도시의 빠른 물살에서 한발짝 벗어난 소로(小路)에서,
길모퉁이에서, 한적한 공원에서 그는 진정한 인간의 얼굴들과, 그들의 삶과 다시 상봉한다
---서정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대로들, 큰길들은 일사천리로 내달리는 길,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큰길의 유일한 주인은 속도이고, 대로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은 속도의 이데올로기이다.
큰길 위의 차들이 한결같이 맹렬하게 내달리려 하고, 큰길가의 풍경들이
언제나 휘황한 미래의 표정을 선취(先取)하려 기를 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현대의 도시는 내적 깊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역사와 과거를 증오한다. 큰길에서 멈추어서는 자,
뒤돌아보는 자, 되돌아서는 자는 그 누구도 소금기둥으로 화하는 무서운 징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도시의 깊이, 도시의 내면은 큰길들이 끝나는 곳에, 골목이라는 나직한 형식으로 존재한다.
큰길과는 달리 골목에 ‘어귀’가 있고 ‘안’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귀에서 골목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도시의 내면 속으로, 퇴적되어 쌓인 시간의 깊이 속으로,
현재화한 과거의 향기 어린 살결 속으로 조금씩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안에서 그 도시의 소박한 아니마, 그 도시의 그윽한 무의식과 만날 지도 모른다.
그 길모퉁이에서 우리가 되찾게 되는 것들은 무엇일까? 언제나 한가로운 길모퉁이 찻집,
쌀가게 앞에 서 있는 낡은 짐자전거, 온종일 문가에 나앉아 안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건네다 보는 담배가게 할아버지, ‘소변금지’라고 쓰여있는 담벼락, ‘주차금지’라고 쓰여있는길바닥,
드문드문 서 있는 외등……. 골목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익명의 존재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존을 되찾는다. 우리는 느긋하게 거닐고, 기웃거리고, 지나가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올 리 없는 옛 애인을 기다리고, 공연히 설레이고, 밑도끝도 없이 흐뭇해하고, 느꺼워 한다.
행복의 감각, 살다운 감각의 행복을 되찾는다. 그 어디쯤, 고즈넉히 쪼그리고 앉아,
그 골목안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맑고 투명한 실개천의 흐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진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골목길이 ‘이면도로’와 ‘소방도로’로 전락해버린 이 딱한 시대 한복판에서도,
시인의 철없는 마음은, 이제는 영영 불가능해져버린 사랑을 되돌아보는 안타까운 순간마다
그 길모퉁이 그 ‘골목’으로, 황홀하게, 캄캄하게, 막무가내로, 자꾸만 되돌아가는 것일 게다.
불가능해진 행복을 껴안는 슬픈 기쁨조차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중에서
(풀꽃세상)
어때요...글...참 아름답지요...심재상교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최상준' 입니다...
상준이는 소생과도 '막역지우'이지요...그는 소생과 '옥천국민학교' '경포중학교' 동기동창이지요...
그는 강릉고등학교를 거쳐...K대학교를 댕겼는데...3학년때 제적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강릉고'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K대학교에서도 총학생회장을 지내면서 유신반대데모를 이끌다가...
제적을 당한 거지요...어릴적부터 아는 것도 많았고...말을 잘했고...말하기를 좋아 했지요...
제적을 당한 후...그 스산한 시절...내설악에서...치악산에서 숨어지내다가...
이후, 종로서적에서 잠시 일하다가...이 땅을 버리고...미국으로 갔습니다...
그가 이 땅을 버리기 얼마전이지요...철딱서니 없던 소생은...
첫 시집 '그대의 바다에'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지요...지금 생각하니...
그야말로 철딱서니 없는 짓이었습니다...'최상준'은 소생의 첫 시집...
'그대의 바다에'에 '곁글 Ⅰ'을 남겨주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곁글 Ⅰ - 崔 相 準 -
옛벗이 붓을 들어 그의 이제까지의 萬端情緖의 일말이라도 풀어낸다니 버선발로 내려서고 싶다.
코흘리며 학교 다니던 때가 追憶이라면 지금의 文筆을 대함은 억누를길 없는
그 추억에서 부터의 感動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마 그때, 돈으로 5원인가를 내고 줄을 쭉 서서 영화구경을 갔었고 그것이 그렇게 신나고
재미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제아무리 돈이 들더라도 지난날이 모두 박혀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다.
그 소원의 한 귀퉁이를 이 친구가 허물고 나오며 하는 말, 『가당찮은 짓 하는군』
맞다, 가당찮기에 박수를 아끼고 싶지 않는 것이다. 그 필름에 비는 많이 오지만 字幕은 뚜렷하구나.
『그대의 바다에』―
그동안 이 나라에서 제일 큰 도시에서 사느라 사람 구실도 해야겠고
그래서 찔룩거리며 큰 학교도 다니고, 그림도 안나오는 두꺼운 책도 보고,
막상 알고나면 아무 것도 아닌 얘기도 고개를 모로 세워 해보았건만 붓속에 몰아치는 一字一劃만 못하구나.
그의 氣宇에 담긴 표주박으로 그 맛을 다 알순 없으되 그 물맛 어디 비하며 그 쇄락한 心氣를 어찌 뇌까리겠는가.
아무튼 우뚝 선 氣慨가 만권서와 狂草를 다 덮어 누르고, 끝도없는 蓮蜂같은 아름다움만이 의연히
바다와 짝하기를 간절히 빈다.
...그리고...세월이 흐르고...1990년...상준이가 집안사정으로 이 땅에 잠시 건너왔을 때...서울이라며...
대전으로 소생에게...전화를 한 적이 있지요...내일 떠나야 한다며...전화를 끊고...쓰게된 것이 졸시 '상준이'입니다...
참
꿈도 많았는데
허허롭게 벌써 서른 여섯살이네
스물 여섯에 미국에 간 상준이가
서른 여섯에 전화를 걸었네
세월은 깊어지고
우리 꿈도 깊어지네
다시 다녀오마
이제 오면 마흔 여섯이 될게 아닌가
로켓이 뜨고 비행기가 떠
세상이 점점 가까와 진다지만
우리네 마음은 점점 멀어지네
꿈도 멀어지네
(졸시. '상준이' - '사람생각' 46쪽)
이후...상준이는 마흔 여섯이 되어도 오지 않았습니다...상준이나...소생이나...이제...마흔 아홉이 되었습니다...
풍문에 의하면...상준이는 10년전 쯤...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신학교를 거쳐...지금...필라델피아에서 목사노릇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생이 연구년으로 시간을 보내던 프린스턴에서 필라델피아는 자동차로 한시간 남짓한 거리이지만...
차마...상준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필라델피아가 넓기도 해서이지만...그보다는 그간 별연락도 않던 소생이...
연구년이라고 편히 지내고 있으면서...상준이를 찾아 보려니...스스로 좀 뻔뻔스럽다...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안내력도 잘 아는 소생인지라...그가 이국땅에서 무슨 고생을 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상준이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얼마전...시국데모의 여파로 산중에 숨어지내는 와중에 알게 되었던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들을 얻게 되었지요...이름을 '崔潭'이라고 지었다며...못 潭자 외자 이름을...내게 내밀었지요...
그때 小生은 '明心寶鑑'에 나오는 '雁去而潭 不留影'(기러기는 못을 지나되...그림자를 남기지 아니한다...)
얘기를 하며...둘째 아이를 얻게되면 '그림자 影'을 써서 '崔影'이라고 하라고 그랬지요...
지금도 小生 스스로 궁금한 것은 그가 둘째를 얻었는지...얻었다면 그 이름이 과연 '崔影' 인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지요...
재상이나...상준이나...소생이 1, 2학년이던 74년-75년...최루탄 가스를 헤쳐가면서...안암동으로 날 찾아오기도 했는데...
그들과 가정집에서 막걸리를 나누어 먹던 때가 불과 2,3년 전 일만 같습니다...하마...28, 29년이 흐른 일인데 말입니다...
(사족)
90년대 학번 후배들의 '시대 이해'에 도움이 될까하여...소생이 이 창에 올렸던...그 시절 얘기를 다시금 올려봅니다...
그때, 풍경...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발효된 '10월 유신'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시해(弑害)될 때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내가 2학년이 되던 1975년, 학기 시작과 함께 '유신헌법 철폐'를 주된 이슈로 전개된 반독재투쟁은 연이은 학내외 시위로
가열되었다. 그해 4월 8일, 긴급조치 7호가 선포되어 그 날로부터 41일간 休校를 당해야만 했다.
긴급조치 7호는 군부정권이 고려대학교 일개 대학을 상대로 선포한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당시 김상엽총장이 퇴진하는 등
내외의 거센 풍랑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했다.
사월, 校庭의 개나리 진달래는 망울을 맺어 가면서 5월 祝祭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校庭엔 총검을 든 군인이 진주하였고, 우린 학교 밖으로 내몰려야 했다.
총각집, 가정집, 떠꺼머리집, 취원다방, 고려다방, 콩나물집, 경복여인숙, 골목집은 그때 서화회의 주거래처였다.
사뭇 전투적인 초현실적 구도의 세상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삶과의 지리한, 승산이 거의 없는 싸움'에 지친
우리들의 안식처였다......
그즈음 군에서 휴가 나온 길섭형을 처음 보았다. 유일한 69학번 화실 동지라고 용권형이 찾고 싶다는
길섭형의 복학생 시절의 인상은 이러하다. 어스름 저녁이면 어김없이 취기 오른 얼굴로, 노란집을 찾아오곤 하셨다.
거의 거른 날이 없는 듯 하다. 지금 생각하니 길섭형은 모든 면에 인정이 많던 분이었다.
술에 취하면 눈물도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당시 용권형은 우리들 중 가장 클래식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술도 절도있게 자셨고,
그림은 불투명 수채화, 노래는 불꺼진 창, 어메이징 그레이스...
이러한 형들 근처의 노란집 풍경은 이러했다. 천실이는 말없이 무채색 핑거페인팅을 즐기면서
가끔씩 한쪽 눈을 질끔 감고 캔바스를 쏘아 보면서 인상을 쓰거나 실실 웃었다.
그때 쯤이면 명호가 무영이 하고 떠꺼머리집에서 술이 취해서 노란집을 찾았다.
명호의 예의, 특이한 비음으로 그의 불후의 노래, 땐서의 순정을 흥얼거리면서...
그도 아니면, 무영이 노래, 마포종점...
그럴라치면...길섭형도 용권형도 화구를 접고 우리를 끌고 막걸리집으로 향했다.
바깥에는 삭풍이 가끔씩 불어댔다. 노란집을 나와서 호상 근처를 지날라치면 누군가 '고독'을 부르기 시작했다.
고독이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아련한 별빛따라 님을 보냈소~
슬픔이 강물처럼 여울져 가는 못잊을 세월 속에 님을 보냈소~~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가곤 했다.
2003.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