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주 2 / 1월 10일
그런 얘기 들어봤지요.
헐레 벌떡 달려온 장수가 우물가에 있는 여인에게 물을 청하자
그 여인이 바가지에 물을 떠서 주면서 버들잎을 하나 띄워 주웠다.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중국에도 이런 전설이 있던데,
일단은 우리나라 버전으로는 그 주인공이 왕건의 이야기로 유명하지요.
왜 물에 버들잎을 띄웠을까요?
“내 마음 당신곁으로...” 였겠지요.
후삼국시대 궁예의 부하로 활약하던 왕건이 이 곳 영산강에서 후백제 견훤과 대항하던 때
나주에서 여인네를 만난 이야기.
그 이야기가 바로 나주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주 시청에서 큰도로변으로 내려오면 완사천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어요.
우물도 있고, 커다란 안내판에 전설 유래도 있으며,
말을 타고 있는 왕건과 물을 건네는 여인네가 동상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실 후삼국때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무주 - 전라도 광주에서 기틀을 마련해서 세를 규합하고
나중에 완산주 - 전주에서 공식 나라를 출범하거든요.
나주 또한 후백제 세력권인데, 완사천 이야기에서 보듯 왕건과 연합합니다.
서해안을 따라 개성쪽의 해양세력과 역시 무안 나주 해양세력이 동맹을 맺었던 듯 합니다.
그래서 나주는 이후로도 친고려적인 색채를 띄게 됩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각 지방에서 힘있는 세력들과 연합할 필요가 있었겠지요.
부인이 29명이었다고하며 아들이 25명이었다고 합니다.
안밝혀진 숫자까지 합하면 가족만 100명이 넘었을것입니다.
샘물이 인연이 되어 그 여인은 고려의 첫째 임금의 왕비가 되고,
나주 출신 오씨 왕비가 낳은 아들이 고려 2대 임금 혜종입니다.
그래서 나주를 어향 - 임금의 고향이라고도 불립니다.
고려의 임금들도 나주가 갖고 있는 상징을 잘 알고 있었구요.
고려 현종때 거란이 침입해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을 오는데 충청도 전라도 전주를 넘어 이 곳 나주에 진을 칩니다.
나주를 믿었던 것이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 어쩜 나주의 힘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신라는 피흘리지 않고 합병을 했으나, 후백제와는 수차례 전쟁을 했거든요.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인 전주의 위쪽으로 고려와 경쟁을 하던 때에
그 남쪽인 나주를 고려쪽으로 끌어 들였기에 후백제를 멸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왕건과 견훤과의 싸움 현장이 나주에가면 자미산성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거기가 너른 벌판인데 얕은 언덕산이 하나 있어요.
자미산성.
그리고 그곳이 행정구역상 반남면입니다.
반남.
제가 나주에서 더 내려와 반남을 끌고 온 것은 반남에 박물관이 있기 때문인데요.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전국에 종합박물관이 13개가 있습니다.
13번째 개관한 박물관이 2013년 11월인데 바로 나주에 있는 국립나주박물관입니다.
사실 국립종합박물관은 중앙 서울을 제외하곤, 청주, 전주, 광주, 춘천 등 도청소재지이거나,
경주, 부여 공주 같은 고도에 생기게 되는데, 나주에 박물관이 있다?
좀 의아하거든요.
그 전에 우리나라 이름부터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인데 대한민국 전에는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전이 대한제국입니다.
대한제국은 조선을 이은 나라인데 조선제국이 아니고 대한제국이라고 했어요.
기울어가는 조선이여 다시 한번 옛영광을 재현해 보자 라며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짓거든요.
대는 크다라는 말이고 가운데 있는 ‘한’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건데
그 ‘한’이라는 기록이 중국역사서에 보입니다.
우리가 역사기록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게 삼국사기 삼국유사로 13세기 되어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의 이야기는 중국 역사서나 일본 역사서로 우리나라 역사를 알게 되거든요.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지의 위나라 이야기중 동이족 이야기를 기록한 부분에
삼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한 - 마한 진한 변한의 이야기.
“마한은 서쪽에 54국, 진한은 동쪽에 12국, 변한은 남쪽에 12국이 있는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다” .
마한 사람들을 두고는 “농사와 양잠을 할 줄 알고 씩씩하고 용감하다.
해마다 5·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자리를 베풀고 집단으로 가무를 즐긴다. 춤출 때는 수십명이 줄줄이 서서 땅을 밟으며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오랜된 “한”의 역사. 유구한 전통을 잇겠다 해서 대한제국이 되고,
그 대한제국이 황제의 나라에서 민의 나라인 대한민국이 되는 것입니다.
기원전후에 있었다고 하는 삼한.
진한은 신라가 되고, 변한은 가야로 이어지는데 가장 강성했다는 마한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한은 369년 근초고왕때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나옵니다. 기록에는요.
그런데 이 시기가 좀 문제가 있어요.
영산강 유역에는 마한이 남긴 고분군이 480여개나 분포합니다.
고분은 묻힌 사람의 정치적인 세력과 그 후계자의 정치 사회적인 위세를 나타내는 것이거든요.
백제가 4세기에 마한을 병합했다고 하는데, 나주 반남면 ‘덕산리 3호 고분’ 같은 경우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되었는데, 지름이 40m입니다.
백제의 무령왕릉보다 18m가 더 크지요. 마한이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한테 병합됐다면,
과연 백제 왕보다 큰 고분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또한 신촌리 9호분 같은 경우 만들려면 5천여명의 인원이 동원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정도의 인원이라면 백제와는 또다른 세력으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한강유역에서 성장한 백제에게 주도권을 뺐겼으나,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유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였을 것이다라고 추측됩니다.
만약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6세기 중엽까지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였고,
그 이후에 백제에 완전 병합되었다고 한다면, 나주 이지역은 700년 동안은 마한이었고,
150년 동안만 백제 역사였다는 것이 됩니다.
반남일대의 고분은 크기도 크기이지만, 묘의 양식이 다른 지역과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대형 옹관이 있거든요.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삼는 것은 흙, 돌, 벽돌, 나무 등 여러 재료들이 있습니다.
뼈를 항아리에 넣는 것은 여타지역에서 나타나는 인류의 보편적인 생각인데,
여기 영산강유역 나주 반남의 고분은 대형 옹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옹관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두 개의 옹관을 이어서 붙이기도 했지요.
더불어.
복암리 고분이라고 불리는 고분에는 층층이 옹관이 묻혀 있어 아파트형 고분이라고도 불립니다.
400여년간 조성된 41개의 묘가 있어요.
반남고분과 마한.
대한민국의 국명의 시초가 되었던 삼한의 마한의 중심지는 바로 여기 반남이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국립박물관이 바로 이곳 반남에 들어서게 됩니다.
나주 박물관 주소가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고분로 747번지예요.
고분로이지요.
고분이라 그러면 경주나 백제 유적에만 있을 줄 알았는데, 꽤 큰 고분들이 이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나주 박물관의 건물모양이 항아리 모양입니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생긴 박물관이라 다른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몇 있어요.
박물관 안에서 손으로 만지작 거릴 수 있는 체험실도 있고,
유물을 보관한 창고인 수장고가 투명유리로 되어 있어 우리가 직접 수장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주 박물관.
한번 찾아가 볼 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