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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 Special
부산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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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산악운동의 산 증인 김재도 선생
“등산의 다양한 분야에 눈을 떴으면 좋겠어!”
글 사진|이승태 기자
부산의 산악계 활동은 최근 그야말로 ‘뜨겁다’. 걷기산행을 주로 하는 일반산악인의 열정은 말할 것도 없고 히말라야와 같은 고산을 오르는 전문산악인들의 활동 또한 나라 안에서 가장 핫(hot)하다. 단일팀으로는 세계 최초, 최단 기간에 8000미터급 14개봉 완등의 대기록을 세운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가 좋은 예다. 이렇듯 거침없는 부산 산악운동의 출발점은 어디였을까? 그 발원지를 찾아 올라가면 이 사람, 김재도(71세) 선생을 만나게 된다. 여가선용이라고는 꿈도 못 꾸던 4·19혁명 직후인 1961년, 부산대학교 상대산악부를 만들고 초대부장을 지냈던 그다.
“아버지께서 일본 <산과 계곡>사와 <암과 설>사에서 나온 책을 사서 삼촌들과 함께 번역해 주시곤 했지. 그러면 나는 그것으로 원판에 쓰고 등사해서 등산지식교본을 만들어 애들이랑 공부하곤 했지. 그 때는 그랬지. 아주 신났었어. 허허~”
졸업 후인 1968년엔 박진, 성산씨 등과 부산학생산악연맹을 창립하고 최두고씨가 대산련 회장으로 있을 때인 1969년에는 부산경남산악연맹을 창립했다. 그 후 부산학생산악연맹 부회장과 부산산악연맹 전무이사·부회장으로 두 연맹의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뒤에서 묵묵히 도왔다. 1981년에는 부산등산학교를 만들고 초대학감을 지내며 부산 산악활동의 큰 축을 감당했던 원로산악인 김재도 선생. 1978년에는 금정대상을 수상했으며, 대한산악연맹은 지난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산악연맹을 빛낸 50인’에 그를 선정, 그 노고에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지금도 부산대 OB산악회와 60대산회에 적을 두고 열심히 산을 오르고 있는 선생에게 후배들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여쭸다.
“전국등산대회 같은 데서 기록경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심포지엄도 하고 사진전도 열고, 시화전도 하면 얼마나 좋아. 좀 더 생각을 넓혀서 다변화된 등산문화로 발전시켜 갔으면 좋겠어.”
부산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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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365일> 저자 최화수“지리산에 관한 소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글 사진|이승태 기자
지리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보물처럼 여겨지는 책이 몇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국제신문> 문화부장과 논설고문을 지낸 최화수(67세)의 <지리산365일(도서출판 다나)>이다. 지리산에 대한 산행 안내서격인 이 책은 지리산 넓은 품에 기대 살아 온 민초들의 삶과 애환을 다루고 있다. 지리산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교과서에 다름 아닌 <지리산365일>은 전부 네 권으로, 1990년 5월 10일 초판 되었는데 지금은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 되었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지리산에 대해서 여수·순천사건 이후 빨치산이 토벌될 때까지를 다룬 어두운 면이 많이 부각되었고, 이태의 남부군 이야기 등 살벌한 인식이 강했죠. 영화 ‘피아골’에서도 그런 부분이 강하게 담겼고. 그런데 80년대부터 부산지역에서도 안내산행이 많아지면서 지리산이 대중적인 산행지가 되었습니다. 때마침 나도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국제신문>에서 <부산일보>로 가게 됐어요. 거기서 레저를 맡았는데, 그래 현장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안내산행팀 따라 지리산엘 가게 됐죠. 그게 시작입니다.”
그런데 가보니 비극적 현장이라 여기던 지리산이 너무 좋았다. 자연 뿐만 아니라 그곳에 기대 사는 사람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척 순박하고 맑은 품성에 넉넉한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지리산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알리고파 지리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88년에 <국제신문>이 복간하게 되고 이듬해 2월부터 다시 신문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때 문화부장으로 있으면서 독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매일 지리산 이야기를 쓴 게 <지리산365일>이다. 1990년대 말부터 지리산 붐이 일면서 지리산을 오르는 수많은 산꾼들이 <지리산365일>을 탐독했다. 가히 경전과도 같았다. 그런데 정작 최화수씨는 손사레를 친다. “그 때 사실 좀 급하게 쓴 감이 많아요. 좀 더 뒤지고 주민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눴더라면 더 많은 지리산을 만났을 텐데, 돌이켜보면 아쉽고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지리산을 오르내린다. 지리산에 관련된 소설을 필생의 업으로 생각하며 자신이 보고 만난 지리산을 총 정리하는 책도 준비하고 있다.
부산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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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시민 등산 아카데미 대표강사 김철우
“두 번 생명 건지자, 삶의 산 보이더라”
글|임성묵 기자 사진|주민욱 기자
“등산은 아무나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등산입니다.” 부산 시민 등산 아카데미 김철우(69세) 교장의 지론. 1971년 부산 석봉산악회를 창립한 그의 산행경력은 40년. 그동안 깨친 이치가 어디 한둘이었으랴 만은 그의 삶과 산이 성숙해진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 때는 1992년.
“부산일보 부국장으로 일하던 당시 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부터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94년 김철우씨는 부산시산악연맹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산악인을 위한 봉사에 나섰다. 산악마라톤대회를 통해 금정제를 활성화했으며, 예산지원을 받아내는 등 산악문화의 저변을 넓히는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2002년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재발했다.
“처음에는 항암치료도 거부했습니다. 수술 후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완치될 수 있다는 의사의 설득에 다시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간의 반 이상을 도려내며 사선의 경계에 그것도 두 번이나 선 그. 2차 수술 후에도 그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암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웠던 산이었다. 그래 그는 산을 알리는 전도사를 자처했다.
“2003년부터 무료로 시민 등산 강좌를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19기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등산의 사회학, 걷기, 독도법, 산 사진, 암벽등반 등 거의 등산 전 분야를 아우르는 폭과 깊이를 가진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교육기간만 거의 3달입니다.”
등산을 통해 삶의 역경을 이겨낸 그, 등산은 아무나 언제든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없기에 바르게 배워야 한다는 것. 그가 몸소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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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 대장 홍보성
“조심스럽습니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글 사진|임성묵 기자
지자체 최초 8000미터급 14개 고봉 완등을 이끈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홍보성 전 대장.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4월 말 열린 대한산악연맹 5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산악연맹을 빛낸 50인’으로 선정되었다. 홍 대장은 2006년 5월 에베레스트(8848m) 등정을 시작으로 2011년 9월 초오유(8201m) 등정에 이르기까지 5년 4개월간 원정대를 진두지휘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니 시원섭섭했습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부산시 그리고 선ㆍ후배님들을 찾아뵙고 감사인사 드리기 바빴습니다. 이제 좀 제 시간이 생긴 것 같습니다.” 5년 넘게 히말라야를 들고나며 그가 공부하고, 보고, 들은 소중한 기록들은 이미 보고서로 남겼다. 격랑을 넘어 온화한 삶을 맞이한 그에게 다시 떠날 계획을 물었다. 생을 살며 히말라야에 발을 들인 산악인치고 고산준봉들의 마력에서 쉽게 벗어난 이를 본 적이 없기 때문.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아직 후원사를 물색하고 있는 단계지만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
홍 대장이 구상하고 있는 계획은 히말라야 도보 횡단. 그레이트 히말라야의 최동단 남체바르와에서 탐사를 시작,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바트를 지나 치트랄까지 행군하는 것. 쉽게 이야기하자면 대 히말라야를 백두대간 종주처럼 맥을 이어 종주하겠다는 것.
이는 자기한계 극복이라는 일차원적 탐사에서 탈피, 각 지역의 문화, 사회, 역사 등을 탐구하는 문화인류학적 탐사라는 점. 18세기 격랑과 같았던 세계 탐험사를 알지도 못했던 우리가 이제는 역으로 세계 탐험사에 뚜렷한 발걸음을 남길지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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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산행대장 최찬락
내가 만든 산행 가이드맵으로
모든 사람 행복하게 하고파
글|윤성중 기자 사진|주민욱 기자
부산일보에 ‘산&산’ 코너가 있다. 매주 한번 전국의 산행지 중 한 곳을 소개한다.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이 꼭지에서 최찬락 산행대장이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산행은 23년 전 부산 국제신문사에 입사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입사 직후 1990년, 대한산악연맹 부산등산학교를 10기로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산을 탔습니다.”
사실 그는 1992년 부산 국제신문 산악회를 조직하면서 2007년까지 산행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개인사업 때문에 퇴사 후 일에 쫓겨 산행을 잠시 쉬었다가 2010년 말부터 부산일보로 화려하게 컴백, 최근엔 ‘부산근교를 달리는 자전거’라는 코너까지 맡아 그야말로 미친 듯이 밖으로 나돌고 있다.
“새로운 길과 알려지지 않은 산을 끊임없이 찾아 답사까지 다녀와야 하는 일이 가장 부담스럽고 힘듭니다.”
매주 머리를 맞대고 대상지를 찾아 코스를 그리는 일도 피곤했지만 이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지도제작’이다. 현재 부산일보에 실리는 산행지도는 모두 최 대장이 일일이 손보고 있다. 등산용 GPS를 늘 가지고 다니며 갈림길, 샘터 등 산행 중 만나는 온갖 특이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꼼꼼하게 체크한다. 자신이 만든 지도를 보고 산에 가는 독자들을 생각하면 절대 대충 지나칠 수 없다는 일념이다. 최찬락 대장은 이처럼 산을 소개하는 일이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그만큼 보람도 느낀다며 이것이 지금까지 산행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한민국 산행 가이드맵을 만들어 모든 국민들이 이를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원대하면서도 소박한 꿈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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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경남의 산 필자 박미림
언더그라운드 시인을 보듬어준 부산의 산
글 사진|윤성중 기자
<사람과 산>과 박미림씨가 만난 것은 2003년. 제9회 한국산악문학상 시 부문에 박씨의 시가 당선되면서 부터다. 이후 그녀는 본지 ‘경남의 산’ 필자로 나서 7년간 부산, 경남 지역을 종횡무진 누볐다. 그동안 책에 소개한 산이 70개가 넘으니, 뒤에 ‘산꾼’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아깝지 않겠다. 그런 그녀에게 부산은 어떤 곳일까?
“인생 절반을 부산에서 보냈어요. 젊었을 때 이곳에 와 고생 많이 했죠. 싫은 기억이 많아 부산을 버리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제 인생 반이 없어지는 것이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부산은 저에게 애증의 공간이에요.”
박미림씨의 고향은 지리산 세석평전 바로 아래. 이후 청년기를 진주에서 보냈으며 성인이 된 후 부산으로 옮겨왔다. 박씨는 그런 자신의 인생궤적을 ‘낙남정맥’에 비유했다. 지리산에서 출발해 부산 쪽으로 뻗어있는 그 능선이 현재 자신이 부산에 정착하기 위해 오르락내리락 고군분투하는 것과 같아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의 부산 정착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렇게 힘들게 적응하는 와중에 위로가 되었던 것은 부산의 낮은 산들이었다. 산에 가면 즐겁고 편했으며 그제야 가슴 속 응어리를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연찮게 <사람과 산>을 만나 그 치유과정을 책 속에 털어 놓기도 했다.
30대 후반, 지리산 종주 후 뒤늦게 글쓰기에 눈뜬 박미림씨는 지금까지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아직 등단절차를 정식으로 밟지 못했다며 스스로 ‘시인’이라 칭하기를 거부했다. 그녀의 꿈은 생명력이 긴 작가. 누가 읽어도 가슴을 울리는 시 한편 남기고 싶다며 부산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부산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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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개척산행 길잡이 국제신문 산행팀
내년 20주년 맞는 국제신문 ‘근교산 시리즈’
글|장보영 기자 사진|정종원 기자
전국 일간지를 통틀어 산행기사로 전면을 할애하는 신문이 딱 두 개인데, 바로 ‘국제신문’과 ‘부산일보’다. 그중 국제신문의 산행코너 ‘근교산 시리즈’는 올해로 19년째 연재하는 최장수 코너다. 단행본으로 따로 묶어 출간한 것이 총 8권이다. 그런 까닭에 ‘국제신문’은 곧 ‘근교산 시리즈’다. 전국의 산꾼 치고 국제신문이 만든 지도를 단 한 번 참고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93년 1월 ‘가볼 만한 근교산’으로 시작한 코너를 1996년 ‘다시 찾는 근교산’으로 진행하다가 2003년 ‘근교산&그너머’라는 이름으로 발행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최근 777회 산행기사가 지면에 올랐지만 기사에 횟수를 매기기 시작한 것이 ‘다시 찾는 근교산’ 때부터니, 이전에 번호 없이 다녀온 87회의 산행까지 더하면 정확히는 864회다. 산신들도 울고 갈 만큼 곡진하다. 그 결과 2006년에 일간지로서는 이례적으로 대한산악연맹 공로상을 받았다. 수십 년에 걸친 전국 산행루트 개척과 보도는 수상 사유로 충분했다.
매주 금요일 국제신문 문화면에 기사가 실리고 홈페이지에는 그보다 몇 시간 앞선 목요일 자정에 업데이트 된다. 이흥곤 기자와 이승렬 기자에 이어 현재 코너를 담당하는 이진규 기자 모두 고정 산객독자를 확보한 마운틴 저널리스트다. 이창우 산악대장이 이들 곁에 나무처럼 서서 동행한 세월은 족히 15년. 이 대장과 국제신문 사이에는 부산 산 사람 최남준 대장이 다리처럼 놓여 있다. 최 대장이 이 대장에게 바통을 넘겨준 것이다. 코오롱스포츠 남포점 홍선화 대표는 국제신문 산행팀의 오랜 팬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지면은 물론 인터넷을 통해 GPS 산행트랙과 고도표 파일, 동영상 등의 서비스를 공유하던 근교산 시리즈는 올해 5월 3일부터 국내 대표 명산 700여 곳의 산행정보를 담은 ‘근교산 앱’ 서비스를 실시한다. 세월이 갈수록 산행팀 사단의 내공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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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과 풍류의 산악인 남기탁
그의 삶을 닮고 싶다
글|백진국 기자 사진|정종원 기자
남기탁, 그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친화력으로 전국의 산악인들과 교류하며 폭 넓은 산악활동을 전개해 왔다.
1969년 곰바위(도봉산뒤암벽) 산악회 회원으로 클라이밍에 입문한 이후 늘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어 왔던 그는 86년 허영호 대장의 동계에베레스트 등반에 대원으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89년 김인식, 이훈태 씨 등과 한국최초로 엘부르즈를 등정했고 이듬해 킬리만자로 등정, 92년 아콩카쿠아 등반, 2001년 박영석 대장과 K2, 2005년 엄홍길 대장의 얄룽캉 원정대 등에 의료대원으로 참여하며 한국 히말라야 등반의 역사적 현장들을 체험해 왔다.
그의 이런 경험들은 히말라야를 꿈꾸는 부산의 젊은 산악인들을 가슴 뛰게 했고 그들에게 값진 간접경험으로 축척되었다.
K2를 다녀온 2002년에는 백두대간을 종주했고, 이때 맺은 인연으로 허영만 화백, 정택주씨 등과 ‘침낭과 막걸리’ 라는 비박 산악회를 만들어 매달, 전국을 다니며 1박2일 비박산행을 해오고 있다. 또 모 아웃도어 업체에서 주관하는 전국 100대 명산 산행(이 행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에 2005년 1월부터 7년 4개월간 단 두 번을 배고 참여하여 86개의 산을 올랐다.
그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산을 찾아가는 과정이 재미있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행복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암벽과 빙벽등반에 도전하고 히말라야의 고산을 오르며 산에 대한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제는 트레킹위주의 산행을 즐기지만 산은 평생을 한 친구이지요. 요즘 젊은 산악인들을 보면 열정과 기술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한 시절 반짝하는 산악인이 아니라 평생을 산을 오르며 인격과 건강과 친구를 얻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사회생활도 열심히 했으면 합니다.”
부산의 많은 산악인들이 그의 삶과 산을 닮고 싶어 한다. 건강한 모범인 남기탁 씨, 그를 가까이 볼 수 있는 부산 산악인들, 참! 운이 좋다.
첫댓글 멋집니다~부산의 산악인이여 웅비하라
자랑스럽습니다.
진정한 산꾼이고 부산 산악인으로 지정된것을 츄카~합니다.
최찬락대장 개인의영광..부공인의 자랑...진심으로축카....또추카....
자랑스러운 후배네~~~~~추카추카
자랑스러운 동기이자 자랑스러운 부공인입니다.축하한다.찬락아~~~
최 찬락 산행대장 정말 부공인의 자랑이네요~~~축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