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후 수도회들의 다양성
5.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후 수도회들의 다양성
1) 200주년 이전 진출․설립 남자수도회들의 활동
① 성당 선교 활동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회는 설립 200주년(이하 200주년으로 약칭)을 기념하였고, 103위 한국 성인을 탄생시켰다. 당시 신자 수는 180만 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발전은 한국인 신자들의 노력, 파리 외방 전교회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선교․수도회들의 복음 전파 노력과 다방면에 걸친 사목 활동의 결과였다.
기존의 선교․수도회들이 200주년 이후 전개한 활동을 선교, 교육, 피정, 사회복지, 의료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선교회들은 각기 담당하고 있는 사목 관할구역에서 선교사들이 차츰 한국인들에게 관할권을 넘기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선교사 본연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골롬반회의 경우 1980년대 초에는 61개 성당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국인에게 이관하고 1992년에는 27개 성당으로 사목 영역을 감소시켰다. 대신 알코올 상습 예방, 단 도박 친목 활동, 영성 생활 연구소를 통한 신앙생활 상담, 노동 사목, 정신 지체인 교육 시설, 농촌 현장을 통한 선교 사업 등에 참여하였다. 또한 한국인 회원을 양성하여 다른 선교지에 파견하였다. 그 동안 한국 지부에서 활동한 숫자는 약 250명이다. 한국 순교 복자회는 1981년 9월 순교성지 새남터성당의 사목을 담당하기 시작하여 1987년 9월 새남터 순교성당을 건립하였다.
수도회들을 보면 베네딕도회는 1984년 왜관대리구의 금릉군과 김천시의 성당을 대구대교구에 이관하였고, 1986년 3월 왜관대리구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1986년 1월 한국 천주교회 ‘통신 교리부’를 통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리아회는 1986년 1월 인천 산곡동성당을 위탁받았고, 메리놀회는 1988년 2월 서울 고속 터미널 사목을 시작하였으며, 1991년 12월 서울 가락동시장 사목을 시작하였다. 글라렛 선교회는 1985년 2월 인천교구 석남동성당 소속 4개 공소를 위탁받아 활동을 시작하였고, 1987년 2월 석남동성당 관할 서곳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자 선교성당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당 사목은 글라렛 선교회의 고유 활동이 아니므로 1997년 2월 교구에 넘겨주고 공소 3개를 선교성당으로 신설하여(오류동성당) 교구와 5년 계약으로 사목을 담당하였다. 1998년 인천교구 도화동성당 관할 연평도공소를 선교성당으로 승격시켜 3년 계약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96년 1월 대구 범어성당을 교구에 인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회는 1997년 1월 제주교구장 초청으로 제주교구 표선성당 사목을 시작하였다.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1년 3월 19일 수원교구 설립 수도회로 인준 받았다. 그리고 1995년 6월 수원교구 송전성당, 1995년 9월 수원교구 갈전리 성당과 월피동성당, 1996년 수원교구 석수동성당, 1997년 2월 수원교구 고등동성당, 1997년 5월 인천교구 일신동성당, 1998년 1월 수원교구 인덕원 성당, 1999년 1월 수원교구 포일성당 등 수원교구와 인천교구의 성당을 맡아 사목에 주력하였다.
② 외방 선교
200주년 이후 개척된 새로운 사목 영역은 외방 선교와 북한 선교 준비였다. 외방 선교 중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선교는 다음과 같이 추진되었다. 1984년 사랑의 선교회가 대만에, 1986년 동 선교회가 마카오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1990년 3월 한국 외방 선교회가 대만에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95년 살레시오회가 중국 연길을 한국관구의 선교지로 정하여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1996년 12월 한국 외방 선교회가 홍콩에 첫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97년 10월 중국에 첫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1998년 9월 연길에 공업기술고등학교 설립하여 9월에 개교하고 청소년들에게 기술교육을 통한 복음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메리놀회는 1990년 7월 필리핀외방선교회와 통일 후 이북에서 협력 활동을 하기로 하였다.
중국 선교와 더불어 한국의 남자 선교․수도회들이 진출한 지역은 아프리카와 미국이었다. 살레시오회는 1980년부터 아프리카 케냐와 수단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89년 9월 한국 외방 선교회가 파푸아뉴기니에 한국성인 103위 성당을 건립하였다. 1991년 4월 성 바오로 수도회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99년 10월 마리아회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1994년 11월 미국 뉴욕 교포 사목, 12월 하와이 교포 사목. 1996년 미국 오클라호마 한인성당 교포 사목 등을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가 담당하였고, 1999년 6월 복자회가 미국 시카고 한국 순교자들의 모후성당 교포 사목을, 1999년 7월 꼰벤뚜알회가 미국 LA 마리아 레지나 성당의 한인 공동체 사목에 관하여 미국 관할주교와 계약을 체결,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③ 사회 복지 활동
200주년 이후 남자 선교․수도회들이 전개한 사회복지활동을 매우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빈민을 위한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이 펼쳐졌다. 베네딕도회는 1985년 2월 “구미 노동사목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92년 7월 경북 칠곡군 왜관에 “분도 노인마을 양로원”을 건립하였다. 한국 순교 복자회는 1988년 3월 서울 정릉분원에서 출소자를 위한 교정 사목을 시작하였고, 1993년 3월 경기도 양주에 정신지체아들의 공동체인 “인지의 집”을 인수 관리하였다.(1995년 인지의 집을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만남의 장으로 명칭을 “나루터”로 개칭) 작은 형제회도 1988년 7월 “청량리 빈민식당 프란치스꼬의 집”을 시작하였고, 1992년 4월 진주 하대동에 “노인요양원”, 1998년 6월 장성에 “노인요양원”을 각각 건립하였다.
예수회는 1998년 9월 “새 샘터 치유공동체”를 만들어 약물 의존자의 치료를 돕고, 1993년 10월 이냐시오의 집을 개설하여 빈민을 위한 사회사목을 전개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86년 8월부터 인천에 “요셉의 집(양로원)”을 운영하였다. 요한 수도회는 1990년 11월 광주에 ‘알코올 상담 치료센터’를 마련하였고, 1991년 1월 서울 “늘 푸른 나무”를 위탁 운영하였다. 사랑의 선교회는 1985년 9월 대전에 분원을 마련하여 극빈자 가정을 돕는 한편 1998년 본원을 서울 신영동으로 이전하고 본원이 있던 삼선동에 행려자들을 위한 목욕 시설과 쉼터를 마련, 운영하였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도 1990년 4월 영주 다미안 의원 내에 양로원을 마련하였다.
④ 피정의 집 운영
200주년 이후 각 수도회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목 분야 중 하나가 피정의 집을 통한 복음전파이다. 이 시기에는 거의 모든 수도회가 피정의 집을 건립하고, 신자들의 피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200주년 이후 한국 교회가 당면한 냉담자의 급증, 영세증가율의 감소, 신자들의 영적인 성장 소망에 기인한 것이었다. 1984년 10월 꼰벤뚜알회는 부산 성 프란치스꼬의 집을 건립하였고, 마리아회는 인천 샤미나드 피정의 집과 공동체를 개설하였다. 기존의 교육관이나 피정의 집이 대부분 서울 지역에 편중되어 있어 지방의 신자들이 이용하기 힘들었는데, 마리아회가 인천 지역에 대규모의 피정센터를 마련함으로써 지방 교구의 영성 성장을 돕는 조처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한국 순교 복자회는 농장지역의 도시화와 본원 신축으로 수련소가 이동함에 인천 만수동분원을 피정의 집으로 전환하여 1987년 9월 “성 안드레아 피정의 집”을 개원하였으며, 1995년 6월 서울의 제1신학원을 복자사랑 피정의 집으로 변경 개원하였다.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수도회는 1989년 8월 대전교구 공주 수리치골에 “사제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고, 베네딕도회는 1993년 11월 부산 명상의 집을 증축하였다. 글라렛 선교회는 1996년 10월 광주 남평 글라렛 교육관을 일반 피정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였다. 가르멜 남자수도회는 1990년 5월 마산에 기도의 집(개인 피정의 집)을 준공하였고,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7년 9월 “미리내 묵상의 집(피정센터)”을 설립하였다.
한편 1990년대 중반에는 피정의 집과 더불어 영성연구원들을 개원하여 보다 깊이 있는 영적 성장을 희구하였다. 예수회는 1993년 7월 서강대 내에 “이냐시오 영성연구소”를 설립한데 이어 1996년 9월 전북 완주에 “예수회 영성사목연수원”을 설립하였다. 1992년 10월 28일 전주교구장의 허락을 받아 전주교구에 정식으로 진출, 수류성당 인근에 자리 잡고 피정 지도 등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피정 지도 뿐 아니라 한국 교회 영성 흐름의 동향 등 영성 관계 자료 수집 및 연구와 교육을 위한 연수원으로 자리 잡게 됨에 교통이 편리한 곳을 물색, 전주교구에서 무상 임대해 준 대지에 1996년 9월 3일 “영성사목연수원”을 건축, 개원하였다. 영성사목연수원은 영성 자료 수집과 연구 등의 사도직을 수행하고, 성직자들을 위한 영성 수련과 개인 피정 등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예수 고난회는 1997년 5월 춘천교구 양양에 “고독의 집”을 축복하였다.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피정과 영적 쇄신에 주력하였던 고난회는 새로운 피정 문화를 개척하고 고난회의 영성을(고난의 기억, 기도, 참회, 고독, 청빈의 정신) 더욱 쇄신 발전시키기 위해 1999년 4월 16일 강원도 양양에 “오상 영성원”개인 피정의 집, 수련소, 영성 연구소의 목적으로 설립, (五傷靈性院)을 개관하였다.
⑤ 청소년 사목과 매스컴 활용
200주년 이후에는 청소년 사목에 많은 수도회들이 관심을 기울였다. 살레시오회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소규모 복지시설인 ‘나눔의 집’을 서울 양천구 신길동에서 1985년 시작한 이래 서울, 광주, 대전, 춘천에서 20여 개의 소공동체 운영, 청소년 사회복지에 기여하였다. 또한 1994년 9월 매스컴을 통한 청소년 교육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돈 보스꼬 정보문화센터를 서울 신길동에 세우고, 출판․영상․컴퓨터 등 첨단 분야에서 청소년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일선 사목자들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청소년 이해를 넓혀주는 ‘청소년 사목전문학교’를 1996년 9월 개교하였다.
마리아회는 1993년 11월 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의 참된 인간성 형성을 목적으로 망원동의 마리아 가족 회관 내에 ‘가톨릭 교육 문화원’을 개원하였다. 학생들의 종합적 사고능력을 길러주는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부모와 교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및 정보를 제공하며, 청소년 상담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1986년 6월 서울 “마리스타 교육관”을 개관하였고, 1987년 3월 서울 망원동의 요한 보스꼬 기술교육원에, 1998년 청주교구 양업고등학교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사명의 근본 요소는 가장 버림받은 이들,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통한 하느님 말씀의 직접적인 선포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의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청소년 교육에 우선 역점을 두면서 사도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7년 3월 1일부터 서울 관악구에 예수 그리스도의 집을 운영하며 사회복지 관련 사도직. 가정 형편 어려운 아이들의 자립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소년에 대한 관심 고조와 더불어 인쇄 매체 및 매스컴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었다. 마리아회는 1984년 ‘계성출판사’를 설립,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1993년 작은 예수회에 운영권 이양). 성 바오로 수도회는 1990년 4월 서울 저동, 1990년 8월 경남 울산, 1990년 8월 마산, 1991년 4월 강원도 강릉, 1991년 6월 수원, 1991년 12월 충북 청주, 1992년 7월 서울 영등포, 1993년 4월 부산에 서원을 각각 개원, 도서 보급에 힘을 쏟는 한편 복음의 전당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시대의 조류를 파악하여 필요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1991년 11월 월간 어린이 만화잡지 ‘내 친구들’을 창간하여 어린이 대상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고, 1996년 4월 성 바오로 북클럽 제도를 시작하여 통신 판매, 1996년 6월 30일 성 바오로 선교 네트를 설립하여 컴퓨터 통신과 인터넷 통한 복음 전파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한국 순교 복자회는 1990년 9월 수원교구 이천 분원에 “성 안드레아 신경정신과병원”을,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6년 1월 대구에 “성삼의원”을 개원하여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베네딕도회는 1984년 서울 장충동분원에 “종교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1999년 4월 월간『들숨날숨』을 창간하였다. 예수회는 1991년 5월 서울 공덕동에 “한몸 공동체(사회사목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1996년 5월 충북 괴산에 “누룩공동체(농촌 사목)”, 1999년 2월 서울 마포에 “아루뻬 공동체(빈민 사목)”를 설립하였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1993년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의 초청으로 전주교구에 진출, 일상생활을 통한 관상과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경배, 복음적 가난의 실천, 육체노동과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조건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생활을 하고자 하였다.
수도회 내적으로는 1983년 11월 사랑의 선교 수사회가 극동관구 소속에서 한국 관구로 승격하였고, 1985년 2월 예수회가 독립지구로 승격하였으며, 1987년 12월 10일 작은 형제회가 한국 진출 50주년을 맞아 로마 총본부로부터 정식 관구로 인가받았다. 1988년 2월 27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회가 시카고관구로부터 독립하여 ‘한국 순교자들의 준관구’로 승격하였고, 1988년 9월 15일 최초의 한국인 관구장이 임명되었다. 1989년 9월 마리스타 교육수사회가 지구로 승격하였고, 1992년 7월 18일 성 바오로 수도회가 총원 직할에서 준관구로 승격하였다. 1994년 5월 마리아회가 한국 지구로 승격하였고, 1999년 1월 31일 살레시오회가 관구로 승격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99년 수원교구장으로부터 수원교구 내 수도회 분원 설립과 사도직에 관한 허가 공문을 받았고, 요한 수도회는 1972년 한국지부 수련소를 설치하고, 1983년 수도원 춘천공동체를 마련하였으며, 1986년 한국인 첫 종신 허원자를 배출하였다. 글라렛 선교회는 1992년 7월 3일 한국인 첫 사제를 배출하였고, 가르멜 남자 수도회는 1989년 10월 1일 마산수련원을 마련하였고, 1996년 9월 서울 명륜동에 학생 수도원, 1998년 서울 세검정 공동체, 1999년 3월 광주 공동체를 개원하였다. 1989년 9월 21일 로마본부 직속의 지부로 승격되었다. 한국 외방 선교회는 1986년 1월 첫 종신 서원식을 하였고, 1987년 2월 초대 총장으로 조원규 신부가 선임되었으며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0년 2월 20일 제1회 종신 서원식을 거행하였다.
2) 200주년 이후 진출․설립 수도회
① 200주년 이후 수도회들의 활발한 진출
200주년 이후에는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수도회들이 한국 교회 내에서 설립되고, 수많은 다양한 수도회들이 진출하였으며, 선교회들도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진출한 수도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4년 8월 25일 신언회(말씀의 선교 수도회)가 수원교구장으로 초청으로 진출하였다. (1875년 창설) 하느님 말씀 선포가 신언회의 사명인데, 말씀을 전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성당 사목, 학교, 교육, 병원, 출판 인쇄, 피정 지도, 매스컴, 농어민 및 소수 부족, 특수 사목, 가난한 이들의 생활 개선, 사회 정의와 평화 운동 등 다양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다. 1986년 9월 철산동성당에서 첫 성당 사목을 시작한 이래, 1987년 7월 소화동 성당 주임(~1993년 2월), 1988년 2월~9월 과천성당 보좌, 1988년 9월~1991년 12월 단대동성당 보좌, 1988년 3월~1990년 9월 서부성당 주임, 1992년 1월~1994년 목감동성당 주임, 1997년 3월부터 분당 마태오성당 주말 보좌, 1998년 4월 안양 중앙동성당 보좌, 영통성당 주말 보좌, 1999년 6월 분당 요한 성당 보좌, 1999년 6월 광북동 성당 주말 보좌, 1999년 9월 안산 대학동 성당 주말 보좌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1991년 4월부터 노동자 사목을 시작하여 1994년 12월부터 베트남 노동자 사목, 1996년 12월 폴란드 노동자 사목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97년 6월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갈릴래아”, 1999년 2월 어린이들의 쉼터 “마르첼리노의 집”을 시작하였다. 신언회는 성당 사목과 한국인 및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사회복지 사목을 전개하였다.
1985년에는 예수 성심 전교수 도회와 아우구스띠노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2월 17일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1854년 12월 8일 설립)가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의 도움으로 부산교구장으로 초청을 받아 진출하였고, 9월 아우구스띠노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는 1985년 7월 서울 종로구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1986년 부산교구에서 괴정성당 보좌로 성당 사목을 시작하였으며, 1989년 2월 부산교구에서 해양사목, 1991년 2월 인천교구에서 해양사목을 시작하였다. 아우구스띠노 수도회는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가 로마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총장에게 진출을 요청함으로써 영국 및 호주관구 소속 4명의 신부들이 인천교구에 진출하였다. 인천 전동 수도원에서는 신자․청소년의 영적 지도, 피정, 재속회 회원 지도, 교육을 하고, 서울 성수동 수도원에서는 수도회 양성 공동체,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강사와 영적 지도를 한다.
1986년에는 7월 16일 카푸친 작은 형제회가 서울대교구장 초청으로 서울교구에 진출하였다. (1528년 설립) 또한 1987년 11월 7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1319년 설립) 1988년 8월 부산 베네딕도수녀원 경내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한국 진출의 특징은 모원인 몬떼 올리베또 대수도원에서 양성된 한국인들이 주축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1992년 11월 6일 부산교구 관할구역 내 ‘순교자의 여왕’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설립 인준과 마산교구 관할 내 “복자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고성수도원” 설립을 인준 받았다. 1991년 11월 경남 고성에 수도원 건립 기공식을 하였고, 1993년부터 이곳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농산과 축산, 피정 지도를 주요 활동으로 한다.
1987년 12월 13일 한국 시토회가 서울대교구 설립 관상 수도회로 창립되었다. 1988년에는 1월 20일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1901년 1월 창설)가 인천교구에 진출하였다. 1986년과 1987년 꼰솔라따 수도회 총장과 참사회에서는 아시아 진출을 위해 한국, 일본, 필리핀을 방문하였고, 그 결과 당시 세계 성체대회 개최 등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한국 진출을 결정하였다. 인천교구의 도움으로 진출하여 1992년 3월 인천 만석동 빈민 사목 공동체를 시작하였다.(1999년 4월 철수) 이어 1999년 4월 부천시 소사에 종교간 대화의 집(위로의 샘터)을 마련하였다.
1990년에는 5월 1일 팔로티 수도회가 진출하였고(1835년 4월 4일 설립), 5월 12일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가 진출하였다.(1816년 1월 25일 설립)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허락으로 한국에 진출, 1992년 4월 신흥동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5월 25일에는 도미니코 수도회(1216년 구즈만의 성 도미니코에 의해 창설)가 진출하였다. 1971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인중(베드로) 신부가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서원하였다. 1982년 도미니코 수도회 아시아 총회에서 한국 진출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성 로사리오관구가 관심을 표명하였다. 1984년 로마 본부에서 책임자가 파견되어 한국에 3개월 머무르면서 여러 곳을 순방하였고, 1987년 아시아 총회에서 성 로사리오관구에 한국 선교 위임을 결정하였다. 1988년 성 로사리오관구 책임자들이 한국을 순방, 서울대교구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스페인신부 1명이 파견되었다. 구체적인 사도직 활동은 서울대교구 소속 성당에서의 미사 집전, 강론 등 담당, 배론의 도미니코 관상수녀회의 영성 지도, 기타 수녀회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양성, 교회 내 소공동체들의 조직과 활성화, 비그리스도교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이다. 1994년 8월 서울에 성도미니꼬수도원을 설립하였고, 1997년 9월 서울 수련원을 개원하였으며, 1998년 3월 7일 첫 수련을 시작하였다.
1991년 3월 15일 한국 구속주회(1732년 창설)가 서울대교구의 인가로 진출하였다. 가장 한국적인 공동체 생활을 만든다는 목적으로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고자 노력하였다. 성당에서의 신자 재교육과 영성 지도,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영성 지도와 피정 지도, 기타 다양한 선교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동참하고자 한다. 선교. 특히 영원한 도움의 성모 신심 전파를 위해 노력한다. 1998년 8월 1일 처음으로 2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이외에도 1991년 12월 25일 성모 승천 수도회(1845년 설립)가 광주대교구에 진출하였고, 1992년 9월 7일 필리핀 외방 선교회(1965년 1월 설립)가 진출하였으며, 1996년 4월 13일 원죄 없으신 잉태의 아들 수도회(1857년 설립)가 진출하였다. 또한 1997년 2월 14일 부산교구장 이갑수 주교의 초청으로 사도 성 요한 수도회(1975년 12월 8일 설립)가 부산교구에 진출, 초장성당에서 사목을 시작하였다. 1987년 10월 6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윤기선(마리아 요셉)이 사도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하여 1994년 사제 수품을 받고, 수도회는 한국 진출을 위해 각 교구와 협의하던 중 부산교구장 초청으로 진출, 초장 성당에서 사목하며 수도회 터전을 다지고자 노력하였다. 작은 형제 전교회도 이 때 진출하였다.
② 200주년 이후 한국 천주교회 설립 수도회
200주년 이후 한국 교회 내에서 설립된 수도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6년 12월 27일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가 설립되었다. 1980년 9월 청주교구 사제총회에서 꽃동네 설립이 가결되었다. 1987년 12월 28일 청주교구장이 정식 수도회로 설립하고자 전국 교구장주교들에게 강복 요청 서한을 발송하였는데, 1988년 1월 1일 14개 교구 중 13개 교구 주교들로부터 창설 동의가 있었다. 1983년 9월 부랑인 시설을 준공하였고, 1985년 10월 정신병 요양원, 1986년 10월 결핵요양원, 1987년 10월 노인 요양원, 1988년 10월 알코올중독자 요양원과 인곡자애병원, 1990년 심신장애인 요양원, 1992년 9월 가평 꽃동네 부랑인 시설, 1993년 10월 가평 꽃동네 정신요양원과 노인요양원, 1994년 성 빈첸시오 천사의 집, 1995년 10월 가평 꽃동네 심신장애인 요양원과 노체리 안드리 자애병원, 1996년 10월 사랑의 연수원 교육관을 각각 건립하였다. 그리고 1999년 3월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에 이어 1987년 9월 12일에는 한국 시토회(트라피스트)가 설립되었다. 공동 기도와 개인 기도를 조화 있게 하고 노동하면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추구하는 관상수도회로 피정의 집을 운영한다. 1991년 10월 28일 성 황석두 루카 전교 수도회가 설립되었고, 1992년 12월 8일 작은 예수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1986년 8월 15일 오순절 평화의 수도회가 경남 밀양에서 설립되었다. 사회복지 법인 오순절 평화의 마을을 운영하고, 산하 여주 천사들의 집과 평화의 재활원(1999년 6월부터) 등을 운영한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후 1998년까지 14년간 진출, 설립된 남자 수도회는 20개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교황청 설립 수도회가 13개, 교구 설립 수도회가 5개, 그리고 선교회가 2개이다. 이 시기 남자 선교․수도회의 특징은 그 활동 범위가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활동 범위가 다양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 내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도회 고유의 영성 내지 활동 범위를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이르면 거의 모든 수도회가 수도회 고유의 색깔을 퇴색시키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각 수도회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수도회가 자리 잡고 활동하고 있는 지역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다. 수도회마다 고유의 영성을 밝히고,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듯이 각자의 카리스마를 견고하게 하는 모습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
첫댓글 세밀하게 기록을 잘 해 주신 신부님! 훌륭하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