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은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광해군 때인 17세기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실했던 도적 홍길동의 서사를 빌려 적서차별 철폐와 탐관오리 비판, 이상사회 구현이라는 주제의식을 드러냈다. 작품의 모델이 된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 실존인물로 서출의 신분으로 집단 의적 활동을 하다 의금부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일설에는 사형이 아니라 오키나와 서남부로 진출하여 의적활동을 벌여 ‘홍가와라’라는 민중영웅으로 추앙됐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허균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전적을 토대로 자신의 현실개혁 의지와 가치관을 담은 소설을 창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홍길동전 에 형상화된 현실은 적서차별의 사회제도와 부패한 관료사회로 요약할 수 있다. 능력이 있어도 제도적 모순으로 인해 사회진출을 봉쇄당한 계층의 편에서, 또 탐관오리들에게 착취당하는 가난한 백성들의 편에서 길동이라는 영웅적 인물을 설정하고 그를 통하여 사회적 모순과 미리에 항거하는 서사가 전개된다. 이런 면에서 홍길동은 민중영웅적 인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소설은 강한 사회비판 의지를 담은 사회서설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홍길동이라는 영웅적 인물의 일대기를 큰 줄기로 삼고 있어 고전서사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경판본 고소설 「홍길동전」과 박태원의 「홍길동전」을 비교, 분석함과 작가 허균과 박태원에 대해 알아보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재인 『고전소설강독』에 실린 경판본 24장본 「홍길동전」과 박태원의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시대적 배경 서사구조의 차이점과 허균과 박태원이 전하려고 했던 주제에 대하여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Ⅱ. 작가 소개
1. 허균(許筠, 1569~1618)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문인. 본관은 양천(暘川).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우고,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29세 때인 1597년(선조30)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했다. 탄핵받아 관직 삭탈을 여러 번 당했으나 뛰어난 문식과 위세 있는 집안의 부호로 복권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 광주목사로 재직 시,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내며 무리를 형성했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9) 좌참찬이 된 후 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광해군의 측근으로 정계 중심에서 활동하다 1618년(광해군10) 8월 남대문 격문사건에서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㣹旻)이 격문을 붙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에 허균은 역적모의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동료들과 함께 재판을 없이 능지처참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자찬문집 『성소부부고(惺所부瓿藁)』 가 있다 또한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 에는 그의 사회변혁사상이 반영되었다.
그 외에 시평론집 『학산초담(鶴算樵談)』, 시선집 『국조시산(國朝時刪)』, 『허문세고(許門世藁)』 가 전한다.
2. 박태원
구보 박태원(朴泰遠)은 1910년 1월 6일, 경성부 다옥정 7번지에서 아버지 박용환과 어머니 남양 홍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박태원의 집안은 서울 중인 출신으로 조부 이전부터 청계천변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찍이 유복하게 자랐다,박태원은 어린 시절 큰할아버지 박규병으로부터 천자문과 통감 등 한문수업을 받았고, 『춘향전』,『심청전』,『소대성전』 등을 탐독하는 등 고소설을 섭력하였다. 또한 옛 이야기 듣기와 말하기를 좋아하여, 후에 『삼국지』, 『수호지』 등 중국 고전을 번역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1918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22년에는 경성제일공립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15세에 『동명』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모에 작문 「달마지」 가 당선되었다. 이 무렵부터 문학 서클을 만들어 창작 활동에 몰두하여 겨우 17세였던 1926년에『선조문단』에 시「누님」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때부터 고리키(M. Gor’kii), 투르게네프(I.Turgenev), 톨스토이(L. Tolstoy), 셰익스피어(W. Shakespare), 위고(V. Hugo), 모파상(G. de Maupassamt) 등 서양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건강 등 여러 가지 문제로 1927년 경성제일고보를 휴학하고, 양의사인 숙부 박용남과 여학교 교사인 고모 박용일의 주선으로 춘원 이광수와 백화 양건식에게 문학수업을 따로 받았다. 1928년에 다시 경성제일고보에 복학, 졸업한 후에는 동경으로 건너가 호세이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해 중퇴하고 귀국,영화·미술·음악 등 서양 예술 전반과 신심리주의 문학에 경도되었다.
박태원은 1926년 시로 데뷔한 후 3~4년 동안 이미 27편의 시와 수필, 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였으나,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0년 『신생』』10월호에 단편소설 「수염」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33년에는 조용만의 추천으로 이상, 이태준,정지용,김기림,조용만,이효석과 함께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였다. 박태원은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여 「적멸」(1930)과 『반년간』(1933)을 연재할 때는 직접 삽화까지 그려넣었다. 이 시기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으며, 이어서 「낙조」(1933), 「옆집 색시」(1933), 「피로」(1933), 「딱한 사람들」(1934), 「방랑자 주인」(1936) 등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들을 통해, 이데올로기보다는 문장 그 자체의 예술성을 중시하고, 새로운 소설적 기법을 시도하는 한편, 인물의 내면 의식 묘사를 중시하는 등 강한 실험 정신을 보여 주어, 이상과 함께 193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작가로 꼽히게 되었다.
구보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 말기부터 중국 고전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구보는 과오를 범했는데, 친일소설과 통속소설을 동시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절필하지 못하고 자신과 가까웠던 총독부 관리들의 종용에 의해 친일문학을 발표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작가 자신은 문학에 대한 열정도 식었고, ‘도무지 쓸 것이 없는’ 상황에서 『여인성장』과 같은 통속소설을 쓰게 되었고, ‘한갓 생활의 방편’을 위해 『수호전』등을 번역했다고 변명했다. 그런데 구보는 왜 하필 중국 고전을 번역하면서 『삼국지』나 『서유기』가 아닌 『수호전』을 선택했을까? 많은 구보문학 연구자들이 밝힌 것처럼, 여기에는 작가 나름대로의 어떤 심오한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생활 방편의 일환이었다 하더라도 약간의 작가의식이 개입된 정황이 있다. 그것에는 해방이후 1980년대까지 남한에서건 북한에서건 꾸준하게 장편 역사소설을 써나가는데 있어서 작가 나름대로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하는 민중사관적 집필의 틀을 잡아나가기 위한 창작 방법론적인 모색으로 볼 여지가 들어있다. 중국의 『수호지』는 1120년이라는 송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양산박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부패한 지주들의 억압을 이기지 못하여 민중이 봉기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200여 명에 이르는 영웅이 양산박으로 집결하기까지의 무용담과 영웅담을 토대로 삼고 있다. 「수호지」에서 구보 박태원은 고구를 비롯한 조정대신들의 무능과 부패상을 보았고 그들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핍박에 맞서 양산의 영웅들이 들고 일어난 현상에 주목하는 한편 난세에 민중적 영웅의 출현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보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수호전』을 번역하였고, 해방 이후「한양성」(1945) ·「약탈자」(1946) · 「비령자」(1946) · 「춘보」(1946) · 「귀의 비극」(1948)의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홍길동전』(1947)과 『이충무공행록』(1948)의 단행본을 발간했다. 또 1949년에는 서울신문에 『임진왜란』(1.4~12.14)을 발표했다.
박태원의 초기문학은 모더니즘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 작품은 1930년대 무직 인텔리의 내면세계를 심리적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다르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 세계는 ‘새로운’을 자처하는 대부분의 문예사조가 그러하듯, 문학청년의 미성숙뿐만 아니라, “모방이식적 중도유산적 증상”을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중국 역사소설을 번역했던 것은 친일문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글쓰기를 계속하는 하나의 방책이었다고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도피책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박태원도 결국 『아세아의 여명』같은 친일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제 말기 박태원은 창작 역사소설을 시험하고 있었고, 중국 역사소설 번역도 그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일제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마지막으로 연재된 소설이 박태원의 『원구(元寇)』(1945.5.18~8.14)이다. 이 소설은 고려사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자료로 삼아 무신정권기 고려와 일본과 원나라, 삼국의 인물을 등장시킨 역사소설이다. 아마도 일본의 원의 군대를 물리친 사건을 그리려 했을 것으로 짐작 되지만 70여회 연재되다가 해방으로 중단되었기에 본격적인 친일문학으로 나아가기 전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다가 끝났다. 나아가 해방이 되어 탄압이나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도 박태원은 1930년대의 경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역사소설의 창작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일제말기의 중국 소설 번역을 다만 현실도피의 방책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그가 번역을 통해 역사소설 창작을 연습해 보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해방 후에는 ‘조선학가동맹’에 가담하였고, 6·25전쟁 중 서울에 온 이태준 등을 따라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의 일원으로 월북해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월북 시조 시인인 조운과 함께『조선창극집』을 출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6년에는 정인택의 미망인 권영희와 재혼하였으나,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하고, 한때 작품 활동이 금지되었다. 1960년 25세 되던 해에 작가로 복권되어 창작 활동을 재개하여 1963년에는 이른바 ‘혁명의 대창작 그루빠(group)’의 통제 아래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1963~1964)를 집필했다. 그러나 1965년 망막염으로 실명하게 되었고, 원고지 모양의 특수 틀을 이용하여 창작을 지속하다가 1976년에는 뇌출혈로 전신 불수와 언어 장애의 불운까지 겹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작품 창작의 열의는 계속되어, 동학 혁명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전 3부(1977~1986)를 구술하고, 이를 아내인 권영희가 받아 적어 거의 10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86년 7월 10일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서 78세로 사망했고, 1998년 애국열사로 승인되어 평양 신미리 열사능으로 이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연산(燕山)은 왕위에 오른지 십년이 거의 될 때까지 자기를 낳어 준 정말 어머니가 누구인줄 몰랐다. 그는, 부왕 성조(父王成)祖)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를 자기의 친어머니로만 믿었다.
정작 생모 윤씨(生母 尹氏)가 비명(非命)으로 돌아 간 것을 그는,전연 모르고 지내 온 것이다.
행운류수! 가는 구름, 흐르는 물......, 광활한 이 천지에 설마하니, 내 한몸 부칠 곳이 없으랴? 그렇다! 나는 집을 나가자!......
마음을 굳게 먹고 집을 나선 길동이었으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다고는 하여도, 가엾은 어머니에게만은 또한 하직을 아니 고할 수 없다.
단지 아들 하나 낳아서, 그 아들에게 저의 왼 생애를 의지하고 지내는 어머니에게 그것은 너무나 뜻밖이오,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였다.
처음에 그는 울며불며 길동이를 붓잡고, 결코 놓려고 안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결심은 뜻밖에도 굳세였다.
도저히 그의 뜻을 돌릴 수 없다고 깨달았을 때, 어머니는, (이도, 모다 내 타고 나은 팔짜려니......) 애닮게 단념하고 「그럼 길동아。네, 꼭, 이 어미에게만은 소식을 전하여 다고。」몇 번씩 다짐을 받고
「어데를 가든, 부디 몸 성하거라。」
경판 24장본 「홍길동전」은 조선조 세종의 시대를 배경으로 명문거족인 홍판서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 청룡이 홍판서에게 달라드는 태몽을 꾸고 부인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나 거부당하고 상심하고 있는 차에 마실 차를 들고 들어온 시비 춘섬과 정을 통하고 길동을 낳은 것으로 그리고 있다.
훌륭한 인물이 되기 위하여 학문과 무예를 익히면서도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함과 천대와 구박을 받아야 했다 가족들에 음모로 길동을 죽이려 한다. 결국은 길동은 모친의 충고로 그 위에서 벗어난다. 호부호형을 허락을 만류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에 비해 박태원의 「홍길동전」은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화개동대궐』이라 부르는 홍판서댁 문전으로...... 모두가 옳지 않은 생각을 품은 자들뿐이다....... 이 아귀들을 상대로, 홍판서대감은,...... 청지기들을 내세워 장사를 한다.고 매관매직으로 부를 쌓는 홍판서 임사홍, 유자광처럼 간악한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길동이 17세 되던 해에 시호정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무령군 유자광의 아들로부터 천첩소생이라고 빈정거리를 받고 풀이 죽어 돌아와 (나는 ,, 하필 고르듸 골라서, 이러한 집안에, 이러한 신세로 태어났단 말인가?......) 몇 번을 생각하여도,살아서 아무 보람이 없는 저의 몸이었다. 도무지가 살 재미라고는 없는 세상이었다. 힘없이 감고 눈운 길동이의 두 눈에, 맺혀던 눈물이, 마침내,소리 없이. 그의 뺨을 흘러 내렸을 때, 그는, 문득,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벌떡! 그 자리에가 일어나 앉었다.
한탄과 원망을 하다 굳은 결심을 하고 집을 떠나 경북 선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그리고 있다.
2. 서사구조의 차이점
경판본은 영웅의 일대기를 기본 구조로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 홍길동의 출생과정 성장기, 한탄 가출을 통해 활빈당 당수로서의 활동기를 맞게 되면 율도국의 왕으로 이어진다. 즉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전기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 서사구조는 가출 동기인 서얼 차별 첼폐와 지배층으로부터 억압받는 일반 백성들인 민중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해주는 구휼활동이 주를 이룬다.
이해 비해 박태원의 「홍길동전」 봄을 시간적 배경으로 17세 주인공 홍길동이 도대체 나라는 놈은 웨 이세상에는 아온겐구?...(아니 그보다두 장차 나는 어떻게 해야만 좋단 말이냐?...)” 라고 회의를 품고 한숨을 쉬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주로 길동이 20세에 이르기까지 활빈당의 당수로서 탐관오리의 부정한 재물을 털어 빈민구제에 앞장서는 이야기를 담았다.
3.주제 분석
경판 24장본 「홍길동전」은 적서차별 철폐 부패한 관료 사회를 응징하는 주인공의 활약으로 그려졌다. 탐관오리의 집들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주인공 행동 지배층의 공분만 살 뿐 적서차별 철폐와는 거리가 있다. 서자로서 한 맺힌 아픔을 나타내지만 한 집단의 당수로서 적서 차별을 철폐를 요구하지는 않고 있다.
이해 비해 박태원의 『홍길동전』은 탐관오리의 부정 축재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부 경판본과 비슷한 부분은 있지만 서사구조와 주제는 구별될 정도로 다르다.
음전이와 조생원이라는 허구적 인물의 등장함으로써 한층 더 호기심 상상력으로 흥미롭게 끌어 내는 주제의 폭이 넓다. 연산군의 무도한 횡포, 음전이를 잃고 분개하던 주인공, 활빈당의 행수가 되어 지배 계층과 대립하게 된다.
“광화문 앞, 넓으나 낣은 거리―, 양옄에 길이 미어지게 늘어 선 군중들 틈에 젊은 농군이 하나 끼어 서서, 마악, 자기 앞을 지나는 새 인군의 행력을 가장 감개무량하게 우러러 보며, 이렇게 입안 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맨상투 바람의 젊은 농군―, 복색은 다르나 얼굴이 눈에 익다 하여 자세히 보니 그는 곧, 다른 사람이 아니라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가 틀리지 않았다... 그 뒤로 길동이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다. 활빈당도 다시 두 번 세상을 소란하게는 안하였다.”
Ⅳ 결론
경판 24장본 「홍길동전」과 뱍태원의 『홍길동전』은 등장인물과 시대적 배경, 서사구조 주제적 측면에서 볼 때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대적 배경을 달리 함으로써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허균과 박태원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허구적인 인물 음전이와 조생을 등장으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서구적인 면에서도 다름을 알 수 있었다,경판 24장본에서는 「홍길동전」에서는 홍길동이라는 영웅의 활약이 돋보이고, 뱍태원의 『홍길동전』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발생한 반란 사건이 전개되었다.
이 과제를 보는 순간 정말로 막막하기만 했었다 그래서 몇 번을 읽고 읽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다. 또한 익숙지 않은 경판본을 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여러 권의 책속에서 참고 자료를 찾아서 수집하다보니 조금씩 정리가 되었고 나름대로 얻은 지식도 있는 것 같아 보람도 있다. 국어국문학과 공부 쉽지 않음을 느끼면서 편입한 것을 후회도 했지만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마무리를 하고 보니 뿌듯하고 열심히 해볼 만한 공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