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에 대화(對話)는 있는가? - (이장로의 이야기房106) 기성세대가 지나온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대화나 의논이라는 절차가 무시된감이 없지 않다. 어른이 말씀하시면 얼른 예라고 대답해야지 라는 재촉을 들으며 자라났다.행여 눈을 바로 뜨고 의견을 개진하면 예(禮)를 벗어남과 동시에 바른아이가 되는데 장애가 되고 나아가 이웃의 좋은 평판에 금이 갈까 노심초사하던 어머님의 안절부절하던 얼굴이 지금껏 선하다. 어른 말씀이 갖는 호불호나 정부(正否)에 관계없이 일단 밝고 참한 얼굴은 물론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윗사람말에 동의를 해야 제대로 된 놈 취급이 되었다. 듣는 태도역시 반드시 눈을 마주쳐야 하고 허튼 몸동작을 피해야 함도 그 시대의 문화였다. 토를 달거나 야무진 응수를 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대답질이 되었다. 꼭 모든것이 다 나쁜 유산만은 아니지만 민주적인 상호인격 존중이나 상대의 지혜를 공유하여 공생진보 하는데 있어서 분명 장애요소는 되었다. 그때는 상명하복(上命下伏)이 선(善)이고 위계에 의한 일방통행이 아무렇지도 않게 상식이 되었다. 동양사회중에서도 한국이 유독 심했다. 유교가 창시된 중국보다 더 성리학에 집착한 조선시대에 고착된 불편한 현실이다. 대화는 영어로 Dialogue 인데 적정한 길이와 분량의 문장을 말로 주고 받는 것을 정의한다 . 요즘 아이들에게 우리가 거쳐 온 문화대로 말문을 막고 쌍방교통이 아닌 훈계조의 지시와 듣기만을 겁박 한다면 결과는 상상에 맡기겠다. 대화의 방법에는 말과 글이 있고 좀더 깊이 나아가면 음악과 그림도 방법중의 하나이며 문화예술행위도 소통의 또다른 길이다. 불편한 자녀나 친구이웃과 말없이 전시회나 영화를 같이 관람하면 0 공감의 종점에서 화해가 되는것이 좋은 예다.함께 시공(時空)을 공유하며 신뢰와 정직한 속내가 교감되면 사랑이라는 관계가 회복된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항변하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대접하는 짜장면 한그릇속에서도 신뢰는 다시 곧추서는 걸 우리는 안다. 할말을 않해도 펄펄끓는 속을 꾹 누르고 마주보며 주차(酒茶)를 주고 받고 나서 깊어진 우정도 대화의 한 방법으로 효과가 있슴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결국 서로의 마음에 담긴 정직과 신뢰를 확인하는 다양한 방법이 관계회복을 향한 다른이름의 대화이니 침착하게 애써 볼 가치가 있겠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데스는 Honest is the best policy 라고 설파했다. 정직이 가장 좋은 정책이라는 뜻으로 상하좌우의 인간관계를 좋게 하는 명약은 정직한 상대존중의 심저라는것이다. 미국에 단 한그루밖에 없던 정원에 심기운 벚찌나무를 베어버린 아들이 고백한 정직한 대화에 아버지 죠지워싱턴은 용서와 만족을 대화로 표현하며 금이 갈뻔한 부자관계를 풀었던 일화가 주는 의미는 크다. 유교의 시조(始祖)인 공자 조차도 46살이나 어린 제자 증자와 인격적 대화를 나눈 내용이 한비자에 남아 전해온다. 결국 증자는 훗날 스승의 사상을 일목요연 하게 제대로 정리하여 유교의 대들보가 되었다. 대화는 중요하다.오해가 이해로 바뀌고 멈추어 버린 상황이 호전된다. 발전의 단초가 되는 대화는 혼자살기 힘들고 스스로는 찾기 어려운 난제에 해답을 준다. 이민 1세치고 나는 맥도날드 사먹을 정도의 영어 구사나 영자신문을 거반 읽을줄 안다.더불어 호주사회도 웬간한것은 꽤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니 자연스럽게 사고방식도 서구식일것으로 자부한 나머지 이곳에서 태어난 두아들과 대화나 이해도가 겹칠 것으로 생각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아들녀석들에게 내가 퍽 이나 민주적이고 개방되어서 대화가 잘되지 않은지 애비의 자랑을 은근슬쩍 늘어 놓았는데 대답은 황망했다. 너무나 한국적이고 꽉 막혔다고 딱짤라 말하는데 민망하고 섭섭했다. 한국적인게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지.... 다그치고 항변하려다 꾹 참고 있는데 아내가 애들 역성을 들어 화가 두배나 치밀었던 기억이 씁씁하다. 얼마나 많이 참아주고 할말 참아가며 기다려준 공도 없이 보수꼴통 일방통해의 무법자로 치부된 듯하여 서러웠지만 그 뒤로 말조심하고 가려서 달래느라 진땀이 난다. 사랑과 신뢰를 녀석들에게 전하고 감사함으로 보답받고 싶어 요즘 열심히 노력중이다. 아들들에게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인정받고 싶고 그래야 사는 맛과 보람에 마음이 따뜻해 질것만 같아 조바심이 난다. 내가 받은 교육.예절과 몸에 익힌 문화를 오늘의 상식에 맞게 구도변경하고 업그레이드 할 구석도 솔찬히 많은것을 인정한다. 술타령은 아니지만 처음만난 사람과 친해질려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주법(酒法)을 수작(酬酌)이라하고 접미사 질을 붙여 나쁜 의미로 수작질이라 쓰기도 한다. 건배를 외치며 마주앉아 마시는 것을 대작(對酌)이라 한다. 혼자 따르는 자작은 대화없는 혼잣말을 이르는 독백이니 좋지않아 보인다. 상대를 배려하여 술을 잘 따르는 조심성을 짐작(㪸酌)이라하고 실수하지 않고 마실양(量)을 정하는것을 작정(酌定)한다고 하는걸 보면 상대가 있어 함께 도모하고자 하는 좋은 관계를 위해 새겨볼만한 단어의 유래다. 술 한잔에도 배려와 존중이 있슴을 배운다.요즘은 대화부재의 시대다. 모든것이 간소화 되고 긴 말은 거두절미(去頭截尾)되어 신조어가 세대간 단절언어로 보편화되었다. 사회구성망이라는 소셜네트웍 SNS에 무지하면 신.구세대간 대화가 불가능하다. 길을 걸어도 버스에 타도 틈만나면 전화기를 붙들고 산다.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중에도 눈은 스마트폰 화면에 정지된다. 심지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도 한손에 들린 기계에 몰입하니 상호컨택과 시선의 마주침은 없다. 난 회의중에 대화중에 전화기를 탐닉하는 사람을 혐오한다. 귀담아 들어도 알아듣고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판국에 가당치 않은 무례를 넘어 무시당하는 기분에 불쾌하다. 그런데 이조차도 지적을 하거나 나무라면 요즘시대에 역행하는 고집불통으로 눈흘김을 당하니 2.30년 뒤엔 가족이 밥상을 마주하고 부부가 장시간 깊은 대화나 나누게 될까 곱씹어 봐도 솔직히 장담키 어렵다. 20년전에 오늘을 예측 못했듯이 닥쳐올 미래는 무슨일이 일어날지 알턱이 없는 이유다. 운영하는 작은회사에 대여섯명의 젊은 직원들을 매일 픽업해 주는 15분동안 나름 유익하고 재미있는 대화를 시도 하기도 하고 열심히 탐독한 글을 전해주려다 번번히 실패한다. 룸미러로 훔쳐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전화기에 빠져 눈과 귀를 한순간도 빌려주지 않는다. 단절이고 절망이다. 문명의 이기가 불러온 인간성 상실의 참사다. 대화는 없고 계약만 있으며 거래에만 제한된 관계지만 전혀 불편함을 모르는 신세대다.가까이 갈 방법을 궁리하지만 지금껏 찾은건 회식(會食)뿐이다. 그나마 내가 베푸는 호의에 대한 알량한 몇분의 응대뿐이지만. 이시대에 벌써 두꺼운 성경책 대신 스마트폰안의 말씀구절을 들고 예배하는 성도들도 꽤있고보니 미래에는 아마도 뇌에 장착된 칩에 담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지 그 누가 알겠는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관계의 요상한 모양새의 흐름이 대화부재가 불보듯 뻔한 내일에는 어찌될까 상상하고 점쳐 보지만 쓸데없는 걱정일것만 같다. 말해 무엇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