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전제방 두칸에서 결혼한 저희 부부는 저의 시간강사료로는 생활이 어려움을 안 집사람(성영자 목사)이 결혼 1년이 채 않되어 생활일선에 나섰습니다. 결혼전 농립부장관비서실에 근무했기에 당시 새마을운동에 빈민촌 주민들이 아침 일찍 일터 출근에 시계는 필수적임에
착안하여 벽시계공장을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으니 부평(십정동) 나환자촌 폐 닭장을 공장으로 임차했는데 이는 저 임차료도 이유도 있지만 노동집약적 시게공장서 아무도 써주지
않는 그곳 주민 자녀들을 쉽게 고용이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시계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남이 쓰던 시설을 싼 가격에 인수하여 시제품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맞지않는 불량품였습니다. 수 많은 부품중 하나만 오차가 있어도 시계기능을 못하는데 불량원인을 조사하니 공원들은 각자 책임전가만 합니다. 이에 집사람이 자신이 직접 배우고 파악하겠다며 첫 아들(선학) 잉태한 몸으로 공장에서 공원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배웠습니다. 우선
부품의 형을 만드는 금형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일신하여 시제품을 만드는데 3개월만에 성공했습니다. 시제퓸에 성공하자 예상한 대로 빈민촌의 벽시계 수요가 폭발하는 상황에서 바로 양산체제가 되면서 서울에는 빈민촌
상대의 활부판매 사무소를 개설하여 40여명이 판매원을 두었고 지방에는 대리점을 두었으며, 중동에는 마침 대량수출의 길이 열려 정부로부터는 수출지원금을 받음으로써 3년여만에
부평에 1,600여평 규모의 공장을 신축했습니다.
갑사기 부평 공장을 포함 150여명의 사원이 고용되니 이의 관리를
위해서는 서울로 부평으로 지방의 대리점까지 불철주야 뛰어야 했습니다. 이 시기는 두 애들의 출산기였는데
이런 중에도 무사 출산케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릴 뿐입니다.
그 후 2-3년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로 젊어서 고생한 흔적은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제가 먼 훗날 은퇴하면 한강 보이는 경치 있는 야산에 텃밭 가꾸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생각에서 압구정 야산 배나무밭 600여평을 삿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한남대교가 놓여지고 3호선 전철역이 생기면서 그 땅이 대지가 되어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두 애들에게는 부모노롯 못한 뉘우침이 컷습니다. 큰 아들
4세때 머리만 크고 하체는 약해서 앉으면 넘지곤해서 병원 진찰결과 벡혈병의심 판성을 받었고, 또 딸 2세때 집사람이 늦게 집에 오니 피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것을 성 목사가 끌어앉고 같이 우는 것을 제가 퇴근
후 보고는 저도 울었습니다. 돌봄이가 집 비운 새 딸 성아가 마루에서 떨어저서 피투성이가 된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결심했습니다. 사업을 접고 애들 키우고 교육에 전념하자고… 그리고 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부평공장을 정리하여 압구정 대지에
건물을 짓고 다음해 바로 제가 교환교수 길에 오르면서 전가족 함께 미국으로 갓습니다. 어려서 부모사랑
모르고 자라면서 갓길로 빠지지않은 것만을 고마워 저희 내외는 지금도 그들에 설사 서운한 일이 있어도 우리 탓이라 자성하고, 성 목사는 그래서 하나님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합니다.
저의 결혼때는 결혼후 여자가 직장 갖는 일이나 외부활동은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저의 친한 친구 중에도 저를 충고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평 나환자촌을 방문하여
그들과 악수한것을 각 신문이 대서특필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저도 목사가 그곳 주민들과 친숙해져야
한다며 치료는 되었다지만 흔적이 뚜렸한 그들과 음식을 같이 하는 것을 볼때는
마음에 걸렸습니다. 더구나 두 애들 잉태중에는 그러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성 목사의 이런 행위가 그들에게는 고마웟던지 한번은 공장에 큰 불이 나서 전소위기였는데 그들이 각기
지기집에서 물을 퍼날라 초기 진회되어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성 목사의 이런 성격은 후일 교회에서 열린예배에
쓰임을 받게하셨고 신풍교회 문제해결에 일익을 감당케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저도 가끔 기도차 열린예배실
들어가면 150여명이 빽빽히 모였기에 특히 여름에는 자연 체취를 느끼는데 성목사는 그런 냄새 자체를
모른다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우리 시대에 태어난 사람의 삶의 괴적이 대부분 파란만장하고 드라마같은 희노애락이 수반된다고 하지만 윤 총장 부부의 삶은 너무나 우여곡절이 많았고 극적인 반전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 어려운 시험으로 연단시켜 정금같은 능력의 부부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은혜는 차면 넘치게 되고 아래로 흘려보내는 것이 참믿음의 길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모습의 삶도 열심히 보여줘 오늘 날과 같은 여러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윤총장의 인생 스토리 글을 보면 주인공이 단연 성목사님이신 것 같은데 언젠가 우리 경춘회의 부부 모임이 있을 때 오늘 날의 부를 이루는데 전적으로 앞에서 활동한 사람은 윤 총장이지 자기는 그저 돕기만 했다는 겸손의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공덕동 패거리들의 큰 장점은 송 재덕 땡벌이나 윤 총장이나 장가 하나는 기똥차게 잘 갔다는 것이지요.
놀으라고 멍석 깔아주면 체면 때문에 못노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 충청인은 더욱 그러한데, 한 회장이 정말 우리 37회 사랑방 만들어 주고 또 나에게는 분에 넘치게 독방까지 주었는데 생각하니 잊을뻔할 만큼 내 방을 오래 비워두었어요. 근데 최근에 한 회장이 왜 방을 오래 비원두느냐 해서 그때부터 관심을 갖게 됫는데 한 회장에게는 공사간 빗을 많이 진 사람입니다. 우리 딸은 한회장이 우상의 대상이랍니다. 그 세대에 어떻게 그런 재능이 있으시냐며 요즘 젊은이들을 초월한답니다. 아빠가 어떻게 그런분들과 노느냐 해요. 사실 나는 37동문회장할 때부터 동창회에 관심 갖었지 그전에는 동창들 모르게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한 회장은 항상 관심 갖고 공사 행사때마다 찾아준 것 잊지않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 걸어온 역정의 책을 내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기에 후일 자손들에게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썻는데 한 회장이 구적방까지 찾아와 장황한 글 읽어주고 격려해 주니 감사 또 감사합니다.
한 회장이 부부간 서로 공을 돌린다 했는데 사실 나는 결혼과 더불어 국영기업이나 은행 취업을 한다는 조건 안닌 조건으로 결혼했습니다. 당시 몇 않되는 공인회계사 시험을 대학 3학년때 고대에서는 유일하게 합격했기에 대학에서 지도교수가 대학원 진학을 권하지 않았다면 내가 생활전선에 나가려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결혼 후 이 사실을 안 집사람이 경제문제는 자기가 해결하겟으니 당신은 교수님 권고대로 학계로 나가라고 강력히 권고한 것이 집사람입니다.
수요예배 설교말씀 중 사올의 되어짐이 우연인지 하나님의 섭리인지를 생각할 때 적어도 믿는 사람은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저 자신을 돌아 보았습니다. 11세까지 서당에서 글 읽던 저를 초등학교 3학년으로 처음 학교문을 밟게 하신 것. 6.25전란 중에도 저를 홀홀 단신 대전으로 불러내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신것. 조그마한 경제여건을 허락하시어 온가족이 미국에 가게 하신 것. 거기서 저는 믿음을 다시 찾고 온 가족을 믿음으로 인도해 주신 것. 그리고 거기서 자녀들의 해외유학을 가능케 하신 것. 이것이 후일 저의 치명적인 병을 고처 주시는데 역할을 하게 하신일 등 련의 과정이 어찌 우연만이겠는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말은 부부간이라도 겸연쩍어 속마음을 전하지 못하는데 문자는 그렇지 않기에 남기고 싶은 말 중 나의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글로 남깁니다. 아내가 결혼 얼마 후 집안살림은 지가가 책임질터니 당신은 학업에만 전념하라 하고 생활일선에 뛰어든 후 그는 평생 나의 월급이 얼마인지도, 묻지도 않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회생활에서 불편힘 없이 하게해주려는 배려에서임을 알기에 더욱 고마운 마음을 갖습니다.
내가 대학 사무처장 때 교직원급여 결제하면서 보면 입금통장이 여교수들은 예외 없이 자기 통장인데 남자교수 중에는 자기 통장의 입금이 거의 없음을 보고도 미안했니다. 한번은 나와 친한 교수의 부인이 집사람과 같은 이화여고 동기생이기에 같이 야외 나들이 햇는데. 친구 부인이 최근 월급이 많이 올랏단 이야기 하니, 친구 교수는 월급 오르면 여자들만 좋다고 농담했고, 집사람은 월급 오른 자체를 모르니 그들 부부가 의하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집사람 사업 중 회계와 자금관리는 내가 담당했기에 한번은 발행한 어음 결제자금이 많이이 부족하여 전전긍긍하던 차에 내가 그간 모은 월급과 부수입 그리고 학교 상조조회에서 빌린 돈을 합하여 해결하니 집사람이 그렇게 좋아했던 일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