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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만 민간인 학살의 실태와 성격
1. 머리말
사람은 나이가 들면 성숙하고, 그러면 지혜를 갖는다. 그 지혜 중 하나는 자신이 과거로부터 온, 특히 유년기로부터 형성된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우리 인격의 틀이 7세까지 거의 갖추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을 유년기에서 추적하여 치유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 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왜곡은 이 경우에 딱 맞는다. 박정희, 전두환 등 군부에 의해 민주주의가 유린되었지만, 그 근원은 역시 이승만 정권, 더 거슬러 올라가서 미군정이 지배하던 8.15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모두 형성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가장 결정적으로 민주주의를 왜곡한 사건은 바로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다. 1945년 8.15부터 한국전쟁 끝나서 까지, 무려 110만 명이 불법적으로 학살된다. 그것도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대한민국의 군인, 경찰, 우익단체 단원이 비무장, 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어떤 사법 절차 없이 ‘죽여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그 가족을 연좌제로 묶어 공민권을 철저히 제한하다가 노무현 정권에 와서야 이를 풀어주었다. 바로 이 사건이야말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최대, 최악의 상처이며 이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발전에 근본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근 국가기관인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활동으로 민간인학살의 진상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그러나 더 넓은 범위에서, 더 자세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이 사태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해석이 긴요하다. 110만 여명이 학살된 반인권적 사건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합의해내지 못한다면 그 국가와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그러나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과거사 규명에 소극적인 수준을 넘어 기존의 진실규명 작업조차 방해하고 있다. 심지어는 ‘건국절’을 들먹여 광복절의 정통성조차 훼손하고자 하고 있다. 사실상 사문화한 국가보안법을 훨씬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과 인적, 제도적 청산이 부진한 이유를 이명박 정권과 국가보안법 체제 탓으로만 돌리는 자세 또한 옳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잘못된 해석에 도전하여 고치겠다는 의지의 결핍이다. 즉 억압에 길들여진 우리 자신이 문제다.
2. 학살의 실태
이미 전쟁 이전에 대규모로 민간인을 학살했다. 10월항쟁, 4.3항쟁, 여순항쟁 진압과정 그리고 지리산 중심의 산간 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10만 정도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그 이남 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을 예비 검속하여 15-20만 명을 학살한다. 국가보안법위반 등으로 구속되어 있던 형무소의 정치범 5만 이상을 학살한다. 대구형무소 재소자 2-3천명과 일시 수용된 국민보도연맹원 5-6천 명 등 8천여 명이 가창골, 경산코발트 등 대구 인근 지역에서 학살된다. 대전, 부산형무소 역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1950년 9.28수복 과정에서 부역자 10만 이상을 학살했다. 제2전선인 소백과 노령 일대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교전과 관계없는 민간인 10만 명 정도를 학살했다. 인종 자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미군 폭격에 의한 학살도 1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물론 적대 지역이 아닌 우리 지역에 대한 미군 폭격이었다.
1960년 4.19 때 결성된 ‘피학살자전국유족회’는 전국에 걸쳐 피학살자 유족의 접수를 받거나 직접 조사를 한 결과 110만 명의 민간인이 불법 학살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 자료는 5.16쿠데타 세력이 사무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모두 사라졌다. 그 자료를 기억하는 당시 유족회 활동가 이복녕 선생의 증언으로는 경남이 33만 명, 경북이 31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3. 학살의 성격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은 '어떤 국민‘을 ’국민이 아닌 존재‘로 파악한 데서 비롯되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국민들을 적대세력으로 규정하고 ’적대성‘이 가시화 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잠재적 상태’라고 간주하여 적대세력으로 취급했다. 이후 이러한 태도는 군사정권에 그대로 답습되어 민주세력을 ‘잠재적’ 친북세력으로 여겨 불법적 탄압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 불법 학살 >
학살은 모두 재판 없이 이루어졌다. 비무장이며 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적에 동조할 잠재적 우려’라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학살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당시에 존재하는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는 분명히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제헌 헌법 제9조에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금, 수색, 심문, 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이들 학살자들은 법관 영장 제시 의무, 변호인 조력의 권리, 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헌법에 명시된 국민 기본권을 완전히 짓밟았다.
< 정치 학살 >
피학살자들은 정치적 반대자와 그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해방 후 국가 건설 방식과 경로에 대한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신탁통치와 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찬성하고 유엔에 의한 남한 단독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 반대자일 뿐 적대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대한민국 헌정 질서 안에서 언제든지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국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빨갱이라는 범주에 가두어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원천 배제했다. 이 과정에서 110만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것이다.
< 더러운 학살 >
학살이 불법이었던 만큼 그 과정에서 당연히 불법과 반인륜적 행위가 추가된다. 무엇보다 가장 추악한 것은 직접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거나 혹은 가족이었던 여성들에게 가해진 성 학대 행위이다. 차마 그 내용을 발설할 수도 기록할 수도 없다. 필자는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하여 공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가, 발설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을 고쳤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전쟁에서의 성 학대는 전쟁 자체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일상적 시기의 성 학대가 전쟁이라는 특수 공간에서 극단화 된 것이다. 그러니 평소 우리들은 음담패설, 성 희롱, 성 추행, 성 학대, 성매매를 ‘하지 말며’ ‘꿈도 꾸지 말자’ 곳곳에 독버섯처럼 존재하는 룸싸롱, 퇴폐이발소 등을 근절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성을 항상 존중해야 한다.
학살 과정에서의 재산 약취는 너무나 일반적으로 자행된 범죄 행위이다. 경북 성주군의 경우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이 아예 마을 청장년을 차례로 잡아가서 돈을 요구하고 그 재산이 다 떨어지면 학살하는 계획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경찰에 재산을 바치고 목숨을 구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심지어는 마을 동장이 동민을 신고하겠다고 협박해서 재산을 약취하는 경우도 많았다.
4. 가해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청일전쟁 이래 50년간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은 조선과 만주국을 통치하기 위해 조선인 출신 공무원, 군인, 경찰을 양성한다. 여기에 친일 지주 등을 포함하여 20만 명의 친일파가 형성된다. 이들은 교육을 받고 조직사회에서 훈련된 일제의 주구들이었다. 이들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일본제국이 항복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전긍긍 했다. 그러나 대반전이 일어난다. 점령군 미국이 이들을 정치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다.
미국이 추구한 2차 대전 종료 이후 동북아시아 지배전략은 일본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고, 한반도에서는 친일세력을 토대로 하는 친미, 친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계획을 잔인하게 관철시켜 갔다. 이 시기 미군정 정치의 일차적 목표는 자주적 국가 건설 활동을 분쇄하고 그 주도자와 지지자를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여운형의 인민공화국과 건국준비위원회를 무력으로 분쇄하고 그 자리에 다시 친일파를 끌어와 친미 세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米(쌀 미)국을 美(아름다울 미)국으로 부르며 충성을 바친다.
한편 46-48년 남북 분단이 현실화 되어 가던 시점에서 북한의 정치주도세력에 의해 핍박받던 친일파를 비롯한 ‘정치쓰레기’들을 대거 포함한 정치 유민들이 월남한다. 가족까지 무려 500만에 이른다. 대표적 정치깡패인 서북청년단의 구성원들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월남한 정치 유민들은 거대한 ‘반북세력’이면서 비정상적인 ‘반공세력’이 되어 대한민국 우익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즉 38선 이남에는 상대적으로 우익 쓰레기들이 넘쳐나게 된다.
38선 이남의 친일파들과 월남한 친일파, 정치쓰레기들이 미군정의 지시를 받아 이승만을 정점으로 친일 지주-친일경찰, 군인, 관료 출신-정치깡패 연합을 이루게 되며 이들이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가 된다.
이 중 군대의 경우를 보면, 대한민국 역대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들이 주로 친일 출신 경력자들이며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독립 운동가는 거의 배제되어 소수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역대 육군참모총장, 합창의장
즉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때 친일 군인으로써 일본에 충성하였거나 직접 독립군을 체포, 처형한 경력을 지닌 반민족세력이다. 최근 kbs에서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묘사하여 방영한 백선엽은 1943년 만주국 소위로 임관, 간도특설대에 소속하여 동북항일연군 등 독립군 체포, 와해 전문 부대원 출신이다.
5.피해자는 누구인가?
피학살자들은 미군정-친일세력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들이다. 이들 중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주로 지주 집안 출신으로서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들이었으며 식민지 시대를 극복하고자 자신의 안락을 버리고 애국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식민지 청년이었던 이들은 일본 유학 과정에서 그 당시 일본의 대학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사회주의를 채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귀국하여 중고등학생들을 조직하여 민족운동의 활동가를 대거 양성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계속적으로 이들 학생들의 조직이 경찰에 의해 적발되어 탄압받는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조선 독립의 수단으로 이해했다. 즉 목적은 민족독립이며 사회주의는 그 방편이라 여겼다. 물론 여기에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소비에트연방에 동조하여 ‘국제질서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전략적 고려도 한 몫 했다.
45년 해방이 되자 이들은 자주국가 건설 운동의 중심이 되어 민족 구성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여기에 이들을 따르는 농촌과 도시의 청년들이 대거 합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여운형) 등 건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활동하던 애국자들과 해방 후 이들을 따르는 청년들이 결합하여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민족민주 정치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해방 당시 경남 밀양의 경우를 보면, 밀양 군민들의 흠모의 대상은 약산 김원봉 선생이었다. 민간에서는 약산이 아버지 제사를 위해 만주에서 고향으로 왔다가 일경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자 땡비(야생 벌의 일종)가 되어 날아서 빠져나갔으며, 축지법을 써서 천리 길도 하루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대표적 민족주의자 약산에 대한 민중의 흠모의 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밀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구성되는데, 위원장은 당시 병석에 계신 김병환 선생이었다. 선생은 3.1만세시위 때 체포되었고 1920년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에 관련되어 징역 3년을 선고 받은 애국자이었다. 부위원장은 안병희 선생이었는데, 이분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활동하신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 이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 일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 하셨다. 즉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 등 이념과 사상에 관계없이 독립운동 경력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를 밀양 군민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밀양뿐 아니라 전국 모든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해방에 들뜬 민중과 그 지도자들의 운명을 결딴낸 것은 미군정이었다. 친일파 20만 명과 손잡고 친미, 친일 국가를 만들고자 한 미국은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 운동을 분쇄하고 친일 잔재 권력을 복권시켰다. 다시 왜놈 시대의 순사가 경찰로 돌아왔다. 왜정 때는 순사보조였는데 지금은 정식 경찰로 발령 났다. 징용, 징병, 정신대 보내는데 앞장섰던 읍사무소의 일제 강점기 공무원 역시 해방된 나라의 정식 공무원으로 원상 복귀 했다.
친일파 경찰과 공무원, 친일 지주와 이에 고용된 깡패들은 미군정의 지시 아래 건국준비위원회 등 해방 직후 자주적 민족민주운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백색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 우리 민족의 최고 지도자들조차 이들에 의해 희생된다. 신탁통치 논쟁, 남한 단독정부 수립 등 정치적 사안에서 첨예한 갈등이 일어나면서 친일파들에 대한 미군정의 신임은 더욱 확고해졌고 민족민주세력과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갈등은 내전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한국전쟁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의 민족사적 비극으로 연결되고야 만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의해 민족민주세력의 지도자들과 지지자 110만 명이
불법적으로 정치학살당한 것이다.
6.미국! 다른 선택은 없었던가?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라는 말은 옳지 않다. 가정할 수 있어야 다른 전개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행위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역사 행위에 대한 평가란 현재, 미래의 행동 지침, 내용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역사 행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1776년 미국독립은 그 자체로서 인류적 사건이지만 그 선언문의 내용 역시 인류의 진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제2장에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정부의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나오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은 자기 정부의 권력을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해방 후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이 정신에 입각해 있었는가? 38선 이남의 ‘인민’의 요구를 수렴하여 국가 건설에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는가? ‘인민’의 요구에 정반대인 친일파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과연 미국독립정신과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
역사를 가정해보자. 만약 미군이 어쩔 수 없이 38선 이남에 분단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하더라도 친일파를 배제한 상태에서, 애국적 보수민족세력을 주축으로 온건한 진보세력을 결합하여 권력의 중심을 형성하고 이 주위에 다양한 세력을 망라하는 친미 애국진보권력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이 국가 운영 경험이 없는 군인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면 차라리 우리 민족 내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자주 권력을 도와주고 이들을 친미적인 세력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까? 그랬다면 민간인학살도 한국전쟁도 친일파의 권력 장악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7.맺음말
우리는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잘 알고 있다. 독일이 매우 치열하게 그 학살의 죄악을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것은 이 땅에서 일어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이다.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 그리고 미군에 의해 11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을 들어도 모른 척 한다. 반공이 종교적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던 박정희 군사 정부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며 국가보안법 등 제도화된 억압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 시점에서도 계속 침묵하는 것은 학살을 방조하는 행위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권력의 주인인 국민 110만 명이 헌법 절차 없이 살해되었다. 이는 헌법정신과 민주주의를 정면 위배한 것이다. 이 후유증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써 남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청산해야 될 국가적, 국민적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그 체제를 옹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조차 존재하는 현실에서 진상규명과 정치적 해석 작업을 수행 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노무현 정권에서 진실과화해위원회 활동으로 민간인 학살의 전형이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해결의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대두 되어 있다는 점이 큰 다행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진실규명 작업조차 봉쇄했다.
현재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 내에서 진실규명과 과거청산 작업을 요구하는 사회 운동적 노력이다. 개혁적 국가가 산하 기구를 통해 진실규명 작업을 하더라도 시민사회의 요구와 압박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지속성을 갖기 어렵다. 더구나 국가기구의 사업 성격은 여야 타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명백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깊이 있는 과거청산, 지속적 사업진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절대화 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 때문에 사회운동의 소재로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비민주적 억압 장치가 아주 강력하게 설치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다 국민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문학과 예술인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필자는 문학과 예술이 물꼬를 터준 공간에서 이를 규명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이 싹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