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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 8경 제8경 세심청류(萬頃八景 第八景 洗心淸流)세심정(洗心亭)
만경강변 고산천에 세심청류(洗心淸流)라고 부르는 만경 8경 洗心淸流(세심청류)는 흐르는 맑은 물에 마음을 씻는다는 뜻으로 이곳에 새심정이 있으며 세심정은 만경강의 발원지 밤샘에서 시작된 물이 대아저수지를 거쳐 내려오다가 대둔산 운주에서 시작하여 경천저수지를 거쳐 내려오는 물과 만나는 곳 고산 세심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진 정자로 만죽 서익선생이 세웠다고 고산지에 기록되여 있다 합니다
세심정주변에는 고산향교 고산초등학교 고산미소시장이 있으며 고산오일장으로 유명합니다
강변아래 고산천으로는 차량 진입을 막는 볼라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텐트와 텐트사이 2m 거리두기 스티커가 눈에 띠고 그럼 캠핑은 금지 이지만 피그닉은 허용 취사는 도시락으로 캠핑은 노숙으로 즐거운 캠핑 문화를 위해 쓰레기는 집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낙화유수(추담님 기타연주)-남인수(1942)
조명암 작사 문인영 개사 이봉룡 작편곡
-대사-
아 다방골 요릿집 장명등에 불이 들어오면 기생 아씨태운 인력거 파란 카바이드 불을 켜고 달렸지
최고급 해태표 담배 한 갑이 십 오전이었던가
종로길에 단 하나 있었던 다방 멕시코에 커피 아니 고희 한잔값이 십전이었지
종로2가 낙원 카페에서 1원짜리 팁을 받고 애교를 부리던 그 여급 이제는 노파가 됐으리라
명치정 비에 젖은 네온 불 아래에서 피웠던 담배연기 그 담배 연기처럼 옛날은 옛날은 가버렸는데 압록강 뗏목은 이천리를 흐른다지만 그건 일본으로 실려가고 대동 권번 기생아씨들은 거문고 내팽개치고 샤미센을 배운다고 했던가
뒷동산 풀섶에서 빨간 뱀딸기 찾아 헤매던 순이는 일본 대판 뒷골목에서 웃음 파는 여인이 되었다더라
시들고 망한 세상 젊음이 억울해서 내 청춘이 하 가엾어서 술잔을 들어도 기울여도 슬픔은 더욱 짙었지
봄이라도 봄 같지 않든 그 세상 그 시절도 흘러가는 물 위에 던져진 꽃인양 아득하다
1.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서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 많은 인생살이 꿈 같이 갔네
2.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봄 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꽃 다운 이 강산에 봄맞이 가세
3.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 청춘은 언제 또 피나
[옮긴 글]
南道 정자기행(3372)-완주 세심정(洗心亭)
뉴스일자: 2016년03월30일 08시10분
어디서 나는 저녁 종소리인가 / 바라보니 산빛만이 푸르네
잠은 한가할 때 잘 오고 / 마음은 고요할 때 밝다네
何處晚鍾聲 望中山色靑 睡從閒地足 心向靜時明
골짝을 흐르는 물 맑게만 들려 오고 / 시냇가 구름은 천태만상으로 변하네
그 모두가 일흥을 돋우어 / 입 다물고 앉아 속된 생각 씻어 보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 선조 7 ∼1656 효종 7)의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는다.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세심정(洗心亭),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최경창, 박순(朴淳), 정철(鄭澈) 등과 교류했던 조선 중기의 문인 만죽헌(萬竹軒) 서익(徐益 1542 중종 37∼1587 선조 20)의 소요처로 사인봉(舍人峰)에 있었다.
사인봉은 비봉산 한 줄기가 동쪽으로 고산 비봉(高山 飛鳳) 양면의 경계를 지나서 화산면(華山面) 서남단에 이르러서 다시 남쪽으로 꺾여서 아치(鵝峙)와 백현(栢峴)을 지나서 이 봉우리가 되었으며 높이는 121m이다. 이조중엽(李朝中葉)에 사인(舍人) 서익(徐益)이 이곳에 살았기에 사인봉이라 했다 한다.
봉우리의 남쪽에 고운암(古雲庵)이 있는데 1954년에 창건하였다. 당시 현(縣)의 성황사(城隍祠)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당산(堂山)이라 칭하였으며 지금은 그 터에 백운사(白雲寺)가 있다. 그 북쪽에 작은 재를 당현(堂峴)이라 칭하고 당현의 북쪽이 백현(栢峴)이 되는데 지금은 백현서원(栢峴書院)이 있다.
사인봉(舍人峰)은 읍(邑)의 주산(主山)이고 그 청룡(靑龍) 기슭에는 교궁(校宮)과 공부자영당(孔夫子影堂)이 있고 기슭의 동쪽에는 세심대(洗心臺)가 있는데 서익(徐益)이 일찍이 이곳에 정자(亭子)를 짓고 만죽정(萬竹亭)으로 편액(扁額) 했다.
이후 붕괴되자 후손들이 유허비(遺墟碑)를 세웠고 비문(碑文)은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이 찬(撰)하였다. 그 후 완주군에서 만경강 생태 환경 개선 사업을 시행하면서 2005년 6월에 고산향교 충효관 동쪽에 다시 중건하였다
규장각 소장 고산현지도고산읍지(1871년 이후, 想白古), 규장각 소장湖南邑誌(1899년, 奎)에 수록된 전라도 고산현 지도)高山縣地圖)에 나와 있어 이 시기에 세심정이 자리해 있었다고 확인되고 있다. 이때 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산읍지(高山邑誌)에는 '在縣東一里望北臺在縣南一里已頽'라고 적고 있고, 완주군사(完州郡史)에는 지금의 고산면 읍내리 자포(紫浦)골 동북쪽에 그 터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부사과(副司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회인현(懷仁縣) 현감을 지냈던 죽유(竹牖) 구영(具瑩 1584 선조 17- 1663 현종 4)이 이곳에 들려 시를 남겼다.
세심정(洗心亭)에서 그 자리의 시를 차운하다 洗心亭 次席上韻
인간의 칠불감(七不堪)를 제거하고 撥去人間七不堪
수북(水北)과 산남(山南)을 다니며 시를 읊조리네 行吟水北與山南
진솔함을 진세에 제공하려 하고 肯將眞率供塵世
희황(羲皇)이 초가 암자에 드는 것을 만류하고자 하네 欲挽羲皇入草庵
걸어 나간 세심정 위의 달 步出洗心亭上月
평안하게 임한 안수령 머리의 남기 平臨安秀嶺頭嵐
젊었을 적 종적이 지금도 있으니 少年蹤跡今猶在
백수로 각자 실컷 즐기기에 마땅하네 白首端宜各盡酣
고산현은 지금의 전북 완주군 고산면, 동상면, 경천면, 운주면, 화산면, 비봉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있었다.
서익의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ㆍ만죽헌(萬竹軒)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병조·이조좌랑, 교리,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서천군수·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의주에서는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으며, 돌아와서는 12책(策)을 올리기도 하였다.
1569년(선조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1585년 의주 목사(義州牧使) 때 탄핵받은 이이(李珥)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만죽헌집(萬竹軒集)》이 있고, 시조 2수가 전해진다.
산에 가득한 비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데 골짜기에 가득한 맑은 구름은 조수처럼 불어나네.
배꽃 한 그루는 처마 바깥에 늘어지고 버드나무 몇 줄기가 우리 앞까지 뻗었네.
漫山雨意未全消 滿壑晴雲漲似潮 一樹梨花簷外朶 數行楊柳檻前梢
손이 대백(大白)을 채우자 비녀장 던지기를 그치고 그대는 탐천(貪泉)을 따르며 바가지가 비도록 웃네.
한 평생 남국에서 출처를 함께 하는데 힘을 합하여 흐린 강물에 아교를 쏟으리.
客浮大白窮投轄 君酌貪泉笑盡瓢 南國百年同出處 濁河齊力瀉阿膠
박상이 경연에서 진강하도록 뽑히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당시 여산군수인 송흠이 전별연을 마련하자 회포를 풀며 읊고 있다.
우리는 평생 몸에 똥을 담고 산다. 그 똥이 생명의 자양분이었던 것을 더럽다고 비우면 죽고만다. 순리적 삶을 터득할 수 있는 정자는 사라지고 있다. 다 지워 버리다면.....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짓고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라고 시를 지어 걸었다.
그러자 심수경이 어느 친구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굉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어 다믐과 같은 시를 지어 주며 주인에게 전하라고 했다.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정자는 단순한 목건물이 아닌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최상의 고급문화를 펼쳤던 곳이다. 그 문화를 버린다면.....
조선 후기의 학자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 1585 선조 18~1664 현종 5)가 정자에서 세심정(洗心)하며 읊은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밝으면 천신 어두우면 귀신 / 明則皇天暗鬼神
여기서 부끄럽지 않은 것은 자신을 참되게 하는 것 / 於斯不愧是誠身
새 중에는 앵무새도 말을 할 수 있으니 / 鳥中鸚鵡能言語
말 잘하는 것으로 좋은 사람이라 하지 말라 / 莫把能言許可人/澗松集 第2卷
문화.오인교
이 뉴스클리핑은 http://www.hankukmail.com/newshome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만죽 서익의 세심정은 정자 밑으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는다하여 세심정이라 불린다
강 언덕위 대아저수지에서 흐르는 만경강 고산천이 보이는 위치여서 정자 주변의 풍경이 아름답고 울장한 나무와 흐르는 강물이 어우러져 정자를 멋스럽게 풍경을 만들어 준다
대나무로 둘러져진 세심정 정자는 서익(徐益)선생이 고산의 산수에 매료되어 만 그루의 대나무를 심고 호를 만죽(萬竹)이라 부르고 세심정을 세웠다 한다
이강은 호남평야의 젖줄이며 이 강물은 지역사람들의 삶의 원천이다
세심정에 올라 동쪽멀리 운장산에서 떠오르는 일출과 보름달 떠오르는 만월이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고산팔경중 하나로도 불리워진다 한다
세심정 아래 만경강 줄기에는 세심보가 설치되어 물길을 제방 바짵쪽으로 흐르게 연결된 수로를 따라 일부는 고산읍내를 통과하도록 되어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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